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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와 음악 슐포르타 김나지움에 들어간 12살 니체는 친구들과 문학작품을 읽고 발표하는 게르마니아란 동아리를 만들었다. 10살 때 모테트(성악곡)을 작곡할 정도로 음악에 진심이었던 이 소년은 모임이 해체될 즈음에는 막 바그너의 예술에 눈을 뜨고 있었다. 주머니돈을 털어 모은 빈약한 돈으로 음악잡지를 정기구독했고 모임의 마지막 회비마저  의 피아노 발췌본을 사는 데 사용했다. 집안은 완고했으나 작곡을 하며 피아노 연주를 즐겼던 아버지 덕에 음악만큼은 자유롭게 들을 수 있었다. 하지만 니체는 음악의 길로 가지 않고 문헌학 교수, 철학자가 되었다. 니체가 광기에 사로 잡혀 있던 11년간의 가상 일기를 토대로 꾸민 이자벨 프레트르의 에는 평생 음악에 대한 집념과 사랑, 회한이 절절히 묘사하고 있다.  "1890년 6월 1일..
행복 - 스펜서 존슨 / 2006 는 US 내과의사, 작가인 스펜서 존슨(Patrick Spencer Johnson 19381124 – 20170703)이 1985년 발표한 것으로 전문번역가 안진환이 번역했다.  책을 읽고 지극히 개인적인 정리를 해본다면, 행복이란 나 자신의 행복이다. 자신이 행복하다고 느끼지 않을 때 1분간 생각해보는 것이다. 지금 어떻게 해야 가장 자신이 행복하고 좋을 지를. 그리고 그것을 실천하는 것이다. 소소한 것들일수록 빨리 실천할 수 있다. 자신만의 행복을 추구했다고 해서 죄책감을 가질 필요는 없다. 다른 가족, 친구들의 행복이 충족되고 난 후에 나의 행복을 맛봐야 한다고 생각할 필요도 없다. 물론 가장 가까운 사람, 가령 부부사이에 둘의 행복이 부딪칠 때가 있다. 그래도 서로는 먼저 자신의 행복을 위해 노력..
최치원의 삶 최치원(崔致遠, 857 ~ 908)은 신라시대 경상북도 경주 출생으로 12세에 당나라로 떠난 조기유학생이다. 874년 과거에 급제해 당나라 관리가 되었고 879년 황소의 난이 일어났을 때 종사관으로 토황소격문을 지어 문장가로서 대륙에 이름을 크게 떨쳤다. 885년 신라에 들어와 관리가 되었고 894년 시무 10조를 진성여왕에게 올려 국정쇄신을 요구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당시 신라는 골품제를 유지하고 있어 새로운 물결을 받아들이기 힘든 나라였고 이미 국가의 기운이 꺾인 나라였다.  최치원은 외직을 자청해 지방 태수로 나갔으나 골품제로 인해 결국 더 이상 높이 올라가지 못해 관료의 길을 포기하고 가야산으로 가족들을 데리고 들어가 은둔하기 시작했다. 같은 유학파인 최언위는 고려를, 최승우는 후백제를, 최..
원효의 사상 원효(元曉, 설서당, 설신당, 617-686)는 648년 황룡사에서 승려가 되었다. 의상과 당나라 유학을 도모했으나 첫 번째는 고구려 순찰대에 붙잡혀 돌아왔고 두 번째는 경기도 남양 당항성의 한 무덤에서 잠을 자다 해골에 괸 물을 마시고 깨우침을 얻은 뒤 다시 돌아왔다. 이 사건으로 '모든 것은 오직 마음이 지어낸다'는 일체유심조( 一切唯心造)의 깨달음을 얻었다.  경주로 돌아와 분황사를 거점으로 민중불교라 할 수 있는 통불교를 주창했다. 원효의 철학은 화쟁사상이라 부른다. 이는 편견에 사로잡힌 싸움을 지양하고 서로를 이해하고 융합하는 것으로 모순과 대립을 넘어 통합을 지향한다. 하나는 둘이고, 둘은 하나다. 하나의 동일성과 둘의 차별성을 모두 아우르는 원효의 사상이 화쟁의 철학이다. 이 철학은 통일신라..
신자유주의의 명암 케인즈의 유효수요 이론은 2차 세계대전으로 엄청난 물자의 수요가 생기고 , 100% 완전 고용을 달성하며 전세계로 퍼져 나갔다. 하지만 베트남전쟁, 중동산유국들이 석유 판매를 거부한 오일쇼크 등이 발생하며 적자로 빠졌고 경제 침체가 시작되었다. 거기에 물가가 상승하면서 스태그플레이션이 나타났다. 케인즈는 소득 재분배를 권고했다. 하지만 US 정부는 채권 발행만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 세금을 확충하기에는 자본가 계급의 반발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무리한 채권 발행으로 전쟁을 대비했던 US는 전쟁의 패배와 함께 부채가 늘어났고 인플레이션의 급증을 야기했다. 밀턴 프리드먼(Milton Friedman)은 통화(화폐공급량)가 물가(인플레이션)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며 통화주의를 주창했다. 밀턴은 공황도..
케인즈와 수정자본주의 유럽은 세계1차대전으로 홍역을 치르고 있을 때 US는 군수품 수출을 판매하며 전쟁으로 인한 수혜를 톡톡히 받았다. 주가는 영원히 하락하지 않을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1929년 10월 24일 역사상 유례없는 주가의 대폭락이 시작되었다. 이 불황은 장기간 이어지며 공급이 수요를 창출한다는 세이의 법칙은 통하지 않았다. 약 8만 5천개의 기업이 사라지고 경제인구 4명 중 1명은 실업상태가 되었다. 고전경제학자들이 믿고 있던 자유시장경제의 보이지 않는 손이라는 자동 조절 장치는 그 기능이 있는지도 모를 정도가 되었다. 이 때 US에는 두명의 영웅이 등장한다. 한 명은 US 대통령 사상 전후무후한 4선에 당선된 루즈벨트 대통령이고 또 한 명은 UK 경제학자 케인즈다. 이 둘은 시장을 보이지 않는 손에 맡겨두는 ..
데리다의 대리 보충 데리다는 서구 사상이 그토록 중요시하는 현전, 기원 같은 것이 그리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다고 말한다. 현전의 목소리가 아니라 그 재현이나 흔적에 불과한 문자 같은 것이 우리에게 더욱 살아 숨쉬는 어떤 것일 수도 있다는 의미다. 이런 개념을 '대리 보충'과 '대리 보충에 의한 대리 보충'으로 설명한다. 가령 소크라테스는 문자를 경계했다. 소크라테스는 한순간 발생하고 사라지는 말을 글이 보존하고 시간의 한계성을 뛰어넘을 수 있지만 이 문자가 왕의 명령을 대신할 경우 쉽게 위조되고 신하들이 남용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되면 왕의 권력은 약화되고 왕권도 찬탈될 수 있다. 문자는 원래 말의 부재 시 말을 보존하고 대신하기 위한 '대리 보충'에 불과하지만 역으로 말을 위협하기 때문이다. 왕의 권력 자체가 ..
말과 문자 - 데리다 데리다(Jacques Derrida)는 서구 사상의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는 사상가들의 글을 재해석하며 철석같이 믿었던 순수한 기원에 대한 맹신을 분해한다. 그 중 하나가 문자가 음성보다 우월하다는 것이다. 상식적으로 문자를 가진 종족은 그렇지 않은 민족을 지배했다. 구텐베르크가 인쇄술을 발명하기 전에는 문자를 읽을 줄 아는 자들만이 권력과 결탁해 지배를 공고히 했다. 레비스트로스는 이런 문자가 우월하다는 지배 이데올로기의 착각을 배격해야 한다고 말했다. 데리다는 이에 대해 다른 견해를 밝힌다. 서구사상은 언제나 문자를 경시했다면서. 오히려 문자 이전의 것인 말의 우월성을 강조장해 왔다고 주장한다. 그리스 철학에는 이성을 의미하는 헤라클레이토스의 로고스가 있고 유대교 성경에는 천지창조에 말씀이 있었다고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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