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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비자(韓非子, 기281-기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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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비자의 법가 정리 일부 학자는 법가를 처음으로 체계화한 인물은 기원전 7세기 제나라의 정승 관중이라고 주장한다. 관중은 소금과 철에 과세를 매겨 제나라를 당시 가장 부유하고 강대한 나라로 만들었다. 또 기원전 536년 정나라의 영의정 자산은 형법을 처음으로 성문화한다. 그로인해 질서가 확립되고 나라의 범죄가 줄어들었다. 조나라의 신도는 법가에서 세력 또는 권능이 세상을 다스리는 데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된다는 교리의 창시자다. 한나라의 정승 신불해는 정치의 불가결한 한 요소로써 술의 개념을 제시한다. 술이란 통치자가 신하를 제어하여 자기 자신에 이롭게 하는 수단으로 삼는 정치술 또는 책략이다. 위나라의 상앙은 법의 엄격한 시행으로 법가에 일조했다. 그는 신상필벌의 신법을 제정하여 권력이 높든, 친척이든 누구도 용서하지 않았..
한비자의 사상 한비자는 법가면서도 도학자이기도 하다. 주로 무위의 교리를 제창했기 때문이다. "해와 달이 비치고 사계절이 돌아 구름이 퍼지고 바람이 불듯이 통치자는 지식으로 자기 마음을 가리지 않고 사리로 자신을 가리지 않는다. 그는 선정을 위해 법에 의존해 시비를 상과 벌로 다스리고 그 무게를 저울에 단다." 초기 중국 봉건 사회에서 귀족은 예로 다스리고 평민은 오직 벌로만 다스렸다. 공자는 후자를 폐지하고 예를 만인에게 적용하기를 주장했다. 한비자는 여기에 예 대신에 법을 넣어 평등하게 적용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귀족의 지위를 끌어내렸다. "현명한 군주가 다스리는 나라는 문서를 꾸미지 않고 백성을 위한 법전을 발포한다. 이런 나라는 선왕들의 방법을 따르지 않고 관리들로 하여금 백성의 주인이 되게 한다. 이 나라는 사..
한비자의 삶 한비자는 한나라의 왕족으로 이사와 더불어 순자의 문하생 출신이다. 한비자는 한나라가 직면한 위험을 깨닫고 왕을 만나 한나라는 더 이상 적의 공격을 눈앞에 두고 조직도 없는 약한 나라가 되어서는 안 되며, 실용주의를 토대로 국법을 개정할 것, 혈벌을 중히 여길 것 등을 간구하였다. 하지만 왕은 간언을 듣지도 않았고 한비자를 등용하지도 않았다. 사마천의 에는 한비자의 생각에 대해 "법대로 나라를 다스리지 않고 문무백관을 그대로 두는 왕에 크게 실망했다. 나라를 부유케 하는 방법은 선량하고 유능한 사람을 지도자로 삼는 데 있지만 왕은 방탕하고 무능한 사람에게 명예와 권세를 주었다. 나라가 평화로울 때는 왕이 학자들을 중히 여기나 국가적인 위기를 당하면 무사를 중히 여긴다. 그렇다보니 중한 사람은 등용되지 않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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