슐포르타 김나지움에 들어간 12살 니체는 친구들과 문학작품을 읽고 발표하는 게르마니아란 동아리를 만들었다. 10살 때 모테트(성악곡)을 작곡할 정도로 음악에 진심이었던 이 소년은 모임이 해체될 즈음에는 막 바그너의 예술에 눈을 뜨고 있었다. 주머니돈을 털어 모은 빈약한 돈으로 음악잡지를 정기구독했고 모임의 마지막 회비마저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피아노 발췌본을 사는 데 사용했다. 집안은 완고했으나 작곡을 하며 피아노 연주를 즐겼던 아버지 덕에 음악만큼은 자유롭게 들을 수 있었다. 하지만 니체는 음악의 길로 가지 않고 문헌학 교수, 철학자가 되었다. 니체가 광기에 사로 잡혀 있던 11년간의 가상 일기를 토대로 꾸민 이자벨 프레트르의 <소설 니체>에는 평생 음악에 대한 집념과 사랑, 회한이 절절히 묘사하고 있다.
"1890년 6월 1일 하이든의 피아노를 위한 신포니아 12개를 지금 막 연주했다. 혼자서 두 연주자의 몫을 다했다. 꼬박 다섯 시간 동안 피아노 앞을 떠나지 않았지. 나는 항상 음악적 재능이 뛰어났었지. 왜 바그너가 이 사실을 알아채지 못했을까. 질투심을 느껴서? 언젠가 브람스를 연주했더니 나를 마구 몰아세운 적도 있다. 음악이 없는 인생은 잘못된 인생이라고 쓴 적이 있다. 음악은 내 천직임이 틀림없는데, 왜 나는 그것을 포기했을까... 작곡가, 피아니스트, 평론가... 그래, 몇 년 동안이나 음악평론가가 되고 싶어했지... 그런데 왜 그걸 포기했을까..." 그럼에도 니체는 여전히 아마추어 작곡가이기도 했다. "나의 만프레드 명상을 몇 차례고 반복 연주함. 증오로 탄생시킨 작품. 슈만의 만프레드라는 졸작을 향해 던진 내 도전장. 1872년에 작곡했던가. 나는 내 안에 자리한 이 창조성이 미치도록 좋다. 내 편지를 기억하는가. 친애하는 가스트(본명이 하인리히 괴체리츠였던 니체의 음악 친구). 몇 년이나 지난 후에 <오로라>를 출간하면서 이 책의 뒤편으로 만프레드 명상이 들리는 것 같다고 쓴 일을…”
음악에 관심을 끄지 않고 있던 그가 바젤 대학 교수 시절 바그너를 만났을 때 그에게서 그리스 정신의 구현을 직감해 내고 <음악정신으로부터의 비극의 탄생>을 쓰기에 이른다. 하지만 바이로이트 축제 극장이 지어진 후 바그너의 음악적·사상적 방향이 독단에 가까워지자 1873년 무렵부터 둘 사이에는 미묘한 갈등이 시작되었고, 3년 후 마음속으로 결별을 선언한다. 독특한 자서전으로 기억될 <이 사람을 보라>를 보면, 바그너 증오 이후 음악 취향이 상당히 달라졌음을 알 수 있다. 말년에는 <카르멘>을 작곡한 비제를 추켜세웠다.
음악을 의지 자체로 보는 것, 가사보다 음악을 우선시하는 것에서 니체는 쇼펜하우어의 미학을 따른다. 니체는 <비극의 탄생> 이전에 쓴 <음악과 언어에 관하여>에서 음악에 대한 입장을 대부분을 밝힌다. 예술에는 디오니소스적인 것과 아폴로적인 것이 있다. 디오니소스적인 것은 음악과 같이 직접적으로 작용해 도취적이고 형태가 없는 원초의지의 성격을 가진다. 반면 아폴로적인 것은 절도와 조화의 성격을 갖고 창의력을 제어하여 예술의 발전을 관장한다. 여기에는 윤리적 관련성과 자기인식이 포함된다. 이 두 원칙은 양면성을 뜻하지만 이 둘이 합하여 예술작품의 근본을 설명할 수 있다. 상처받기 쉬운 감성과 오만한 자존심으로 뭉쳐친 광기어린 디오니소스를 주창한 니체에게 음악은 모든 예술의 원동력이자 구원의 상징이었던 것처럼 보인다.
음악의 느낌에 접근하기 위해 장면적 줄거리를 상상하거나, 그 표현을 위해 언어와 감정의 사용이 가능하나, 이것은 높은 수준의 감상에는 미치지 못한다. 따라서 기악음악을 단지 성악형식의 그림자로 보려고 게르비누스는 높은 수준이라 볼 수 없다. 이를 넘어서야 아폴로적인 것이 도취적 자기 파괴로부터 벗어나, 디오니소스적인 것을 가리고 참된 것으로 나타난다. 이런 승화 과정을 통해 더 내면으로 파고들 수 있다. 이런 허구, 즉 아폴로적 속임수는 청중을 디오니소스적 과도함으로부터 자유롭게 한다. 디오니소스적인 것은 아폴로적 승화력이 허락하는 만큼만 의식되어야 한다. 이 두 힘은 엄격하게 상호 교환적 비율로 발전한다. 그리고 끝에 다다르면 아폴로는 디오니소스적으로, 디오니소스는 아폴로적으로 다가선다.
니체는 바그너와 달리 절대음악의 편에 서 있었다. 베토벤의 9번 교향곡 제4악장에 대해 "절대음악의 한계를 넘어선 것에 대한 장엄한 고백이고 이 음악과 함께 표제적 그림과 개념을 나타낼 수 있어 '의식적 정신'을 드러나게 하는 새로운 예술의 문을 열었다"고 표현한 바그너의 말을 엄청난 미적 미신이라고 비난했다. 아무리 언어와 음악이 똑같은 가치를 가졌다해도 성악곡이나 오케스트라에서 언어나 감정표현을 통해 음악적 체험에 이르려고 해서는 안 된다. 베토벤의 9번은 쉴러의 시와 전혀 맞지 않는다. 이를 언어의 음악화로만 이해하면 시의 고상함과 순진한 민속적 멜로디가 서로 방해한다고 밖에 볼 수 없다. 이 곡에서는 음악화된 가사에 음악의 힘이 있는 것이 아니라 가사가 말하고자 하는 생각과 노래 선율이 가진 고상함에 있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생각과 음악이지 시가 아니다. 오페라에서 가사를 이해하고자 하는 것은 미적인 사람이 취할 태도가 아니다. 그러면 디오니소스적 힘이 사라진다. 디오니소스와 아폴로가 균형을 이루어야 바른 음악 체험으로 이끈다.
개인적으로 우울증에 걸린 사람이 글을 통해 자기치유의 과정을 밟는다는 것에 아주 심하게 동의한다. 어떤 고통이 내 안으로 들어오면 나는 그것을 어떻게 해서든지 밖으로 내뱉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시가 될 수도 있고 일기가 될 수도 있으며 어린애 같은 심정으로 인터넷의 카페나 블로그에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는 글을 써서 누군가 나를 알아주거나 위로해 주었으면 하는 바람을 드러낼 수도 있다. 그런데 이런 극심한 고통 속에서는 완벽한 기승전결로 만들어 내는 글은 도무지 쓰기가 힘들다는 것이다. 많은 시간을 들여 사유를 해야 하고 글에 대한 일종의 시나리오(물론 다른 글도 조금씩은 다 있겠지만)를 만들어야 하는 논문 같은 글은 이런 상황에서보다는 정신이 맑고 평온할 때 쓰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얼마간은 그런 글을 쓸 수 있어도 오래가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장시간 쉬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논문을 아주 잘 쓰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이것을 니체가 아폴로와 니오니소스의 차이를 본 방식으로 음악의 예를 들어 살펴보면 고통에 빠진 사람 중 아폴로쪽에 속하는 사람은 경쾌한 음악을 들으며 기분을 전환해 자신의 고통을 관조하려는 사람이고 디오니소스 쪽에 속하는 사람은 오히려 더 슬픈 음악을 들으면서 그 슬픔 자체 안에서 자신의 감정을 녹여 씻기게 하는 사람인 것이다.
니체는 인간이 허무주의를 극복하는 방식으로 아폴로의 예술과 니오니소스의 예술이 있다고 보았고 이 둘의 결합으로 인해 비극이 탄생되었다고 본다. 그리고 이 두 대립과 화합의 충동이 예술의 역사를 형성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니체는 아폴로적인 예술은 문학예술과 조형예술로 보았고 디오니소스적인 예술을 음악예술과 무용예술로 보았다. 그러므로 내가 위에서 논문과 시로 나누어 예를 든 것이 정확하게 들어맞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시가 음악에 가깝다고 강변하고 싶다. 고대에는 시가 곧 음악이었으므로. 글자와 음악이 분리된 것은 역사 속에서 공간을 점유할 수 있는 글자와 그렇지 못하고 시간만을 점유하는 음악이 갖는 차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내게 아폴로와 디오니소스 이 두 양식을 내 멋대로 해석할 수 있는 여지가 주어진다면, 아폴로의 예술은 자신의 삶과는 무관하게 떨어져서 오로지 다른 세계로의 집중(현실의 고통을 잊기 위해 신을 찾는 것처럼)을 통해 구현한 잘 정제된 예술이고 디오니소스의 예술은 삶과 완전하게 밀착되어 오직 자신이 처한 상황에 몰두하여 빚어낸 투박하고 강인하며 본성을 그대로 드러낸 예술이라고 해석하겠다. 그러므로 논문의 형식으로 짜진 논리적 완결성을 갖춰 별다른 해석의 여지가 따로 또 존재하지 않는 문장은 아폴론의 위치에, 온갖 메타포가 난무해 읽는 모든 사람에게 각각 다른 영감을 떠올리게 할 수도 있는 시와 같은 예술은 디오니소스의 위치에 놓겠다.
눈에비친햇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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