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효(元曉, 설서당, 설신당, 617-686)는 648년 황룡사에서 승려가 되었다. 의상과 당나라 유학을 도모했으나 첫 번째는 고구려 순찰대에 붙잡혀 돌아왔고 두 번째는 경기도 남양 당항성의 한 무덤에서 잠을 자다 해골에 괸 물을 마시고 깨우침을 얻은 뒤 다시 돌아왔다. 이 사건으로 '모든 것은 오직 마음이 지어낸다'는 일체유심조( 一切唯心造)의 깨달음을 얻었다.
경주로 돌아와 분황사를 거점으로 민중불교라 할 수 있는 통불교를 주창했다. 원효의 철학은 화쟁사상이라 부른다. 이는 편견에 사로잡힌 싸움을 지양하고 서로를 이해하고 융합하는 것으로 모순과 대립을 넘어 통합을 지향한다. 하나는 둘이고, 둘은 하나다. 하나의 동일성과 둘의 차별성을 모두 아우르는 원효의 사상이 화쟁의 철학이다. 이 철학은 통일신라 시기에 있어서도 우리나라로서는 중요한 시대정신이었다.
어느날 왕이 인왕경 대회를 열어 고승대덕을 찾았다. 원효는 고향에서 추천을 받았으나 다른 승려들의 반대로 참석할 수 없었다. 이후 왕후가 병이 나 <금강삼매경>을 강론할 고승을 구했을 때 고승 대안이 원효를 추천했다. 원효는 강의를 위해 금강삼매경의 소(疏 - 경과 논에 대한 분석적 주석서) 5권을 지었으나 도둑맞았고 다시 3일간 요약본 3권을 지었다. 이를 통해 <금강삼매경론>이 나왔고 중국으로 수출해 큰 영향을 끼쳤다. <금강삼매경론>에서 수많은 대승불교의 경과 론을 참조해 <금강삼매경>을 해석하며 중도와 화쟁의 논리를 도출하고 정립한다. 그리고 일심( 一心)과 일심을 주장하는 화쟁의 논리방식이 있다.
원효는 요석공주와 사랑에 빠져 아들 설총을 낳았다. 그 후 파계하며 자신을 소성거사라 부르며 남루한 옷을 입고 저잣거리를 돌아다녔으며 일심, '모든 중생은 부처가 될 수 있다'는 평등을 전파했다.
눈에비친햇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