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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약용(1762-1836)/정약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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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 정약용의 성기호설 다산 정약용의 성기호설 장승희 평설위원 / 독서평설 정약용(1662-1836)은 조선 시대의 학자로 실학을 집대성한 위대한 인물로 평가된다. 조선 후기에 그때까지 전해 오던 성리학이 현실적인 문제에 부딪히면서, 실학이 나타나게 되고 정약용은 합리적이고 독창적인 생각으로 이 실학을 집대성하였다. ..
형구(形軀)의 기호와 영지(靈知)의 기호 다산(茶山) 정약용은 인간의 본성을 자연의 경향성으로서 인간의 고유한 욕구에서 읽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그는 성을 형구(形軀)의 기호와 영지(靈知)의 기호에서 나오는 두 개의 경향이 있음을 전제하고 있으며, 그 중의 도덕적 선의 경향을 띤 말이 후자인 것이다. 즉 사람의 본성은 선을 즐기는 경향성(기호)이라고 한다. '영지'와 '형구'의 성향은 인간의 마음속에서 서로 대립되는 양상으로 나타나 그것의 결과에 의해서 인간 행위의 방향이 구체적으로 결정된다. 그는 성기호설에서 두 가지 기호 즉 형구의 기호와 영지의 기호의 두 가지 상태가 있음을 주장한다. 영지의 기호는 '선을 좋아하고 욕을 부끄러워'(樂善而恥汚)하는 사람의 본심인 동시에 '무형한 영명의 체'(靈明無形之體)로서의 성이다. 맹자의 표현으로..
다산의 목민정신과 그 교육방안 I. 머릿글 교육의 가치를 수단적이나 외재적으로 보는 것도 필요하지만 결코 충분하지는 않다. Bernstein(1978: 198)이 Habermas의 '해방적 인식관심'을 검토하는데서 확인이 되듯이, 우리가 추구하는 문화와 기술의 함축된 의미가 무엇보다도 자유로운 의사소통과 소외되지 않은 노동이라는 해방을 위한 조건을 마련하는 데 있다고 볼 때, 자유롭고 평등한 사회를 지향하는 교육이야말로 그 자체로서 중요성을 가진다는 것이다. 이런 견지에서 교육은 내재적 가치를 갖는다. 다산(茶山)1> 또한 이러한 교육의 내재적 가치를 확신하고 있다. 정치·경제·행정·형법 등의 존재이유가 다름 아닌 교육에 있음을 다음과 같이 밝힌 그의 진술은 이 확신을 뒷받침해 준다. "백성을 다스리는 직분은 국민을 교육하는 일일 따..
다산이 성리학을 비판한 까닭 정약용은 주희가 완성한 성리학을 비판하면서 공자와 맹자가 말하였던 실천 중심의 유학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려고 하였습니다. 이 같은 정약용의 입장은 인간에 대한 이해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정약용은 인간의 본성을 선천적인 도덕성으로 이해하고 형이상학적으로 설명한 성리학자들과 달리, 마음이 인간 생명의 실체이며, 마음의 속성인 성은 선을 좋아하고 악을 싫어하는 기호(嗜好)에 따라 실천에 의해 후천적으로 얻어지는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다산은 그 증거로 도둑도 깨끗한 사람이라고 하면 좋아하며, 착한 일을 하고 나면 스스로 만족스러워 하지만 나쁜 짓을 하고 나면 부끄러워한다는 예를 들었습니다. 이처럼 사람이 선을 좋아하는 것은 사슴이 들을 좋아하고 꿩이 산을 좋아하며 벼가 물을 좋아하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
茶山 工夫論에 있어서 '德性'의 문제 다산 공부론에 있어 덕성의 문제 1. 서론 다산 철학은 성리학에 대한 전면적인 검토와 강한 비판으로부터 출발한다. 이기론적 해석체계에 대한 그의 매서운 비판은 당대의 모순상황에 대한 정확한 인식에 기초하고 있다는 점에서 역사적 정당성을 획득하고 있다. 그가 제기한 다양한 형태의 탈성리학적 담론은 이제 실학의 근대성을 알려 주는 주요한 징표로 인식되고 있다. 그의 성리학에 대한 주체적인 해석과 세계에 대한 전면적인 재해석은 주자학의 중세적 질서감각을 상당 부분 넘어선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다산의 경학과 경세학에서 조선적 형태의 근대성을 탐구하는 작업은 이제 한국학의 한 상식으로 자리하게 되었다. 그러나 다산에게 과도하게 집중된 밝은 조명은 상대적으로 성리학의 세계를 온통 중세적 어둠의 세계로 기록하게 한..
정약용 일생 정약용 일생 음력 1762년(임오) 6월 16일(丁未) 巳時 출생 음력 1836년 2월 22일 진시 서거 1762년(영조 38, 1세) 6월 16일 사시(巳時) 광주군 초부면 마현리(지금의 양주군 와부면 능내리)에서 4남 1녀 가운데 4남으로 출생했다. 본관은 압해(押海)로, 압해는 나주의 속현이므로 나주 정씨라고도 한다. 관명(冠名)은 약용(若鏞), 자는 미용(美鏞)ㆍ송보(頌甫), 호는 사암(俟菴)ㆍ다산(茶山)이다. 다산은 사도세자의 변고로 시파에 가담하였다가 벼슬을 잃은 부친 정재원(丁載遠)이 귀향할 때 출생하였기 때문에 자를 귀농(歸農)이라고도 했다. 1763년(영조 39, 2세) 완두창(豌豆瘡)을 앓았다. 1765년(영조 41, 4세) 천자문을 배우기 시작했다. 1767년(영조 43, 6세) 부친..
다산 정약용 다산 정약용 1762(영조 38)-1836(헌종2).조선후기의 문신, 실학자, 소자는 귀농(歸農), 자는 미용(美庸), 호는 사암, 탁옹, 태수, 자하도인, 철마산인, 다산, 당호는 여유(與猶), 경기도 광주(지금의 양주군 조안면 능내리 소내 마재)출신. 아버지는 진주목사 재원이며, 어머니는 해남윤씨로 두서의 손녀이다. 4남 2녀 중 4남으로, 1836년 2월 22일 향리에서 죽었다. 13세 때 풍천홍씨를 취하여 6남 3녀를 두었으나 4남2녀는 요절하고 학연 학유와 서랑 윤참모가 있을 뿐이다. 그의 일생은 대체로 3기로 나눌 수 있는데, 제1기는 벼슬살이하는 던 득의의 시절이요, 제2기는 귀양살이 하던 환난시절이요, 제3기는 향리로 돌아와 유유자적하던 시절이다. 제1기는 22세 때 경의진사가 되어 줄곧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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