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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치원(857-900)

최치원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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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치원(崔致遠, 857 ~ 908)은 신라시대 경상북도 경주 출생으로 12세에 당나라로 떠난 조기유학생이다. 874년 과거에 급제해 당나라 관리가 되었고 879년 황소의 난이 일어났을 때 종사관으로 토황소격문을 지어 문장가로서 대륙에 이름을 크게 떨쳤다. 885년 신라에 들어와 관리가 되었고 894년 시무 10조를 진성여왕에게 올려 국정쇄신을 요구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당시 신라는 골품제를 유지하고 있어 새로운 물결을 받아들이기 힘든 나라였고 이미 국가의 기운이 꺾인 나라였다. 

 

최치원은 외직을 자청해 지방 태수로 나갔으나 골품제로 인해 결국 더 이상 높이 올라가지 못해 관료의 길을 포기하고 가야산으로 가족들을 데리고 들어가 은둔하기 시작했다. 같은 유학파인 최언위는 고려를, 최승우는 후백제를, 최치원은 신라를 택했으나 그 어느 곳도 선택하지 않은 셈이다. 그리고 결국 그곳에서 생을 마쳤다. 

 

유교를 기반으로 불교와 전통사상을 통합하려 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저작으로는 중국에 있을 때 쓴 시문을 모은 <계원필경>, 당대에 활동했던 고승들의 공덕과 사찰의 건립에 대해 쓴 비문들을 모은 <사산비명> 등이 있고 교과서에 실린 시 추야우중(秋夜雨中)이 유명하다. 

 

사산비명

진감선사대공탑비(국보 47호) - 지리산 쌍계사

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국보 8호) - 만수산 성주사

지증대사적조탑비(보물 138호) - 희양산 봉암사

대숭복사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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