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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 Nietzsche(1844-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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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극의 탄생 - 니체, 폐허 위에서 예술을 논하다 니체, 폐허 위에서 예술을 논하다 "진리는 추악하다.우리는 진리로 말미암아 멸망하지 않도록 예술을 가지고 있다." -니체 우리가 경험하는 세계는 늘 변화한다.철학자들은 이렇게 변화하는 현상을 고정시키기 위해 이데아, 원상, 실체, 물(物) 자체 등의 개념으로 튼튼한 집을 지었다.그러던 어느 날 니체(F.W.Nietzsche 1844~1900)가 망치를 들고 나타나 튼튼하게 보였던 집을 마구 부수기 시작한다.현상의 배후에 있으리라고 기대한 원상으로서의 플라톤의 이데아가 무너지는 순간이었다.진리의 척도로 작용하던 '본질'의 자리가 사라졌으므로 그동안 진리로 간주해 왔던 것은 더 이상 진리라 말할 수 없게 된다.따라서 절대적인 하나의 관점은 존재하지 않으며 그때그때마다 해석된 다양한 관점들이 있을 뿐이다. 니..
바그너의 경우 서문 나는 약간 마음이 가벼워진다. 내가 이 글에서 바그너를 깎아내리고 비제를 찬양하는 것은 단순한 악의에서가 아니다. 나는 많은 농담 속에 절대 농담일 수 없는 한 가지 문제를 집어넣었다. 바그너에게 등을 돌린다는 것은 내겐 하나의 운명이었다. 어떤 것을 나중에 다시 좋아하게 된다는 것은 하나의 승리이다. 아마 어떤 사람도 나보다 더 위험하게 바그너적인 것에 밀착해 있지는 않았고, 누구도 그것에 대해 더 강하게 저항하지 않았으며 아무도 그것으로부터 벗어나는 데에서 더 큰 만족을 느끼지는 못했을 것이다. 이것은 몹시 오랫 동안의 이야기였다! 이것에 대해 이름을 붙이기를 원하는가? 만일 내가 도덕주의자Moralist였다면 여기에 무슨 이름을 붙였을지 아는가? 아마 '극기'였을 것이다. 그러나 철학자는 도덕주의자..
이 사람을 보라 『이 사람을 보라』는 니체 자신의 삶의 여정과 사유역사를 표출해 낼 철학적 자서전으로 기획되었다. 이 책이 “내가 누구인지를 밝혀두는 것이 반드시 필요한 것 같다.”로 시작해서 “나를 이해했는가? 디오니소스 대 십자가에 못 박힌 자.”로 끝맺는 것만으로도 그 의도는 충분히 확인 가능하다. 그런데 니체의 집필 의도는 과연 성공적이었을까? “내가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을 나는 곧 인쇄될 『이 사람을 보라』에서 완전히 정리했다.”는 편지를 보면(1888년 12월 27일) 니체 자신은 만족한 듯이 보인다. 철학자 니체와 니체의 철학에 어느 정도 지식이 있다면, 니체의 이 고백이 허언이 아니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다. 그는 철학자 개인의 삶과 철학 내용을 분리시킬 수 없다고 생각하며, 그 생각을 직접 실..
니체의 비제 예찬 두서없이 이런저런 상념들을 풀어놓은 이 글을 읽기 전에 관련 연보를 잠깐 확인해 두자: 1875년 비제, 초연 석달 뒤 사망 1878년 바그너와 니체의 최종적 단절 1881년 니체, 을 처음 봄. 닷새 뒤 두번째 봄 1883년 바그너 사망 1888년 니체, «바그너의 경우» 저술 1888년 니체가 편지 형식으로 쓴 «바그너의 경우»는 “나는 어제로 비제의 걸작을 스무 번째 들었습니다. 당신은 믿을 수 있겠습니까?”로 시작된다. 여기에서 말하는 비제의 걸작은 오페라 을 가리킨다. 오늘날에야 오디오에 시디를 집어넣기만 하면 들을 수 있는 것이 음악이니 오페라를 스무 번째 들었다는 게 별다른 이야기거리가 아니겠지만, 당시에 스무 번째 오페라를 들었다는 것은 곧 스무 번째 오페라극장을 드나들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니체의 데카당스론 니체의 데카당스론 1. 니체의 생애와 저서 니체는 레켄 출생이며 그는 쇼펜하우어의 의지의 철학을 계승하는 '생의 철학'의 기수(旗手)이며, S.A. 키에르케고르 함께 실존주의의 선구자로 지칭된다. 목사인 아버지를 5세 때 사별하고 어머니누이동생과 함께 할머니 집에서 자라났다. 14세 때 슐포르타 공립학교에서 엄격한 고전교육을 받고 1864년 20세 때 본 대학에 입학하여 F.리츨 밑에서 고전문헌학에 몰두하였다. 다음 해, 전임하는 스승 리츨을 따라 라이프치히대학으로 옮겼다. 이 대학에 있을 때 쇼펜하우어의 .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라는 책에서 깊은 감명과 영향을 받았고, 또 바그너를 알게 되어 그의 음악에 심취하였다. 1869년 리츨의 추천으로 스위스의 바젤 대학 고전문헌학의 교수가 되었다. 187..
니체와 데카당스 1. 하이데거와 함께 니체를 읽는다. 하이데거는 니체를 기존 형이상학의 파괴자인 동시에 오히려 그것의 완성자라고 평가하였다. 하이데거는 현실과 유리될 뻔한 형이상학을 구출한 영웅으로 니체를 평가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하이데거의 니체 해석은 많은 비판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엄밀한 철학이 아닌, 비논리적인 시 철학으로 몰려 사장될 뻔했던 니체를 형이상학의 완성자로 살려냈다는 점에서 여전히 참고할 만한 중요한 해석으로 평가받고 있다. 2. 데카당스란 무엇인지 안다. 데카당스(décadence)란, 불어로 ‘쇠락’, ‘쇠퇴’, ‘퇴폐’를 의미한다. 어원은 라틴어의 decadentia로, 이 단어는 원래 로마 제국 말기의 문화적인 쇠퇴와 향락성을 가리키는 부정적인 어휘로 사용되었다. 그리스, 로마..
바그너의 경우 벨라 타르의 영화 은 니체의 유명한 일화로 시작한다. 1889년 토리노. 니체는 마부의 채찍질에도 꿈쩍하지 않는 말에게 달려가 목에 팔을 감고 흐느낀다. “어머니 저는 바보였어요.” 그것은 그의 마지막 말이였고 이후 10년간 식물인간으로 침묵하다 세상을 떠난다. 그래서 알지만 ‘모르던’ 니체라는 인간이 ‘알고’ 싶어졌고, 그의 글이 읽고 싶어졌다. 그리고 그즈음 우연히 내 눈에 들어온 책이, 놀랍도록 우아하고 격조 높은 였다. “바그너가 도대체 인간이란 말입니까? 그는 오히려 질병이 아닐까요? 그는 음악을 병들게 했습니다.” 는 자신이 그토록 숭배했던 바그너를 “위험한 존재”로 규정하고 경멸할 수밖에 없게 된 한 철학자의 고백이다. 회복기에 든 환자가 세상에 보내온, 바그너라는 “질병”을 어떻게 극복했는..
비극의 탄생과 바그너 바그너와의 만남 니체가 리하르트 바그너와 처음으로 개인적으로 알게 된 것은 1868년 가을 라이프치히에서였다. 그 전부터 니체는 바그너를 숭배해 왔다. 마침 바그너와 개인적으로 만나게 되었을 때(라이프치히 대학의 동양학자 브로크하우스의 부인과 알게 되어, 그 집에서 바그너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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