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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 Nietzsche(1844-1900)/비극의 탄생

비극의 탄생과 바그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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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그너와의 만남

 

니체가 리하르트 바그너와 처음으로 개인적으로 알게 된 것은 1868년 가을 라이프치히에서였다. 그 전부터 니체는 바그너를 숭배해 왔다. 마침 바그너와 개인적으로 만나게 되었을 때(라이프치히 대학의 동양학자 브로크하우스의 부인과 알게 되어, 그 집에서 바그너를 처음 만났을 때)의 기쁨을 다음과 같이 로데에게 써 보냈다.

 

식사 전후에 바그너는 마이스터징거의 중요한 부분을 모두 연주해 주면서, 온갖 소리를 흉내 내고 더구나 멋대로 떠들기도 하였다. 어떻든 매우 쾌활하고 불과도 같은 사람이어서, 말을 빠르게 하면서도 재기가 넘쳐, 이러한 매우 사적인 모임마저도 아주 유쾌하게 만들었다. 그동안 나는 좀 긴 시간 그와 쇼펜하우어에 관해 대화를 나눌 수가 있었다. 아아, 그대는 이해해주리라, 내가 얼마나 즐거워했던가를. 바그너는 표현할 수 없을 만큼 굉장한 열의로 쇼펜하우어에 관해서 말했는데, 그가 쇼펜하우어에게 무엇을 얻고 있는지, 쇼펜하우어는 얼마나 음악의 본질을 이해한 유일한 철학자인지 말하는 것을 나는 들었다.

 

오늘날 교수들이 바그너 자신에 대해서 어떠한 태도를 가지고 있는가를 묻고선, 프라그에서 개최된 철학자 대회를 비웃으며 철학적 하인배들이라고 말했다. 지금 집필중인 자신의 전기의 일부를 읽어 주었는데, 그의 라이프치히 유학 당시의 생활은 무엇이나 유쾌한 이야깃거리로 가득 차 있었으며 지금 생각해 보아도 웃음이 터질 것만 같다. 문장은 유난히 뛰어났고 거기에 재기가 넘쳐 있었다.”

 

니체가 몇 해 동안 숭배해온 바그너가 이토록 쇼펜하우어를 지지해준 것은 니체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즐거운 것이었다. 독일의 후기 낭만주의에서 쌍벽을 이루고 있는 바그너와 쇼펜하우어, 이들을 향한 니체의 숭앙은 그야말로 경외에 가까운 것이었다. 당시 바그너는 니체보다 31세 연상이었다. 바그너에게 심취해 있었던 니체는 바젤 교수로 취임한 후, 1869년 바그너를 만나기 위해 마침 스위스에 와 있었던 그를 트립센으로 방문했다.

 

트립센에서 바그너는, 리스트의 딸이며 그의 친구인 지휘자 한스 폰 뵐로우의 처인 코지마 폰 뵐로우와 함께 세상의 인습을 무시한 채로 살고 있었다. 바그너는 첫 아내가 사망한 후인 1866년에 그가 자주 그랬던 것처럼 재정적, 정치적, 사교적인 곤란에서 도망쳐 모습을 숨기기 위해, 뮌헨에서 스위스로 이주해 살고 있었다. 이때 코지마는 남편과 별거하고 있다가 바그너를 따라나선 것이었다. 그들은 뵐로우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두 아이와 바그너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또 한 명의 아이와 함께 생활하고 있었다.

 

바그너와 코지마는 젊은 교수인 니체를 맘에 들어 했다. 그리 오래지 않아 니체는 바그너 집안의 일원처럼 친근하게 되었고 언제 방문해도 환영을 받았다. 니체는 자주 트립센을 방문하였으며 거기서 그는 존경하는 음악의 천재와 가까이 지낼 수 있었다.

 

처음 니체는 다만 바그너의 작품만을 찬탄했다. 그런데 가까이 지내게 되자 바그너의 인품에까지 심취하게 되었다. 그러나 바그너는 니체가 찬양하는 것만큼 훌륭한 인품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어쩌면 니체는 그와의 우정에 그만 눈이 어두워졌는지도 모른다. 오히려 세상에서 말하는 바그너는 고압적인 성격, 이기주의, 낭비벽, 즉흥벽 등을 가진 사람이었다.

 

니체가 바그너에 심취했던 또 다른 이유는 반독일적인 요소를 들 수 있다. 니체는 폴란드 귀족으로 자라면서 주변의 독일인들과는 다르다는 일종의 선민의식을 갖고 살았다. 그러면서 독일에 대한 비판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훨덜린의 시 중 독일의 야만성을 공격한 것을 옹호하기도 했다. 후에 그는 독일에 대한 사랑 때문이었다고 고백했다.

 

그대들은 독일 정신이 어디에 그 기원을 두었는지 잘 알 것이다. 그것은 아주 탁한 내장에서 오는 것이다. 독일 정신이란 하나의 소화불량이다. 그것은 아무것도 소화시키지 못한다. 나는 프랑스 문화밖에 믿지 않는다. 그렇다! 바그너는 혁명가다! 그는 독일 사람에게서 벗어났다. 예술가에게는 파리밖에 고향이 없다. 바그너의 예술이 전제로 하고 있는 다섯 개의 예술 감각에서 섬세한 것, 뉘앙스를 느끼는 손가락, 심리적, 병적 성실 같은 것은 파리에서만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형식 문제에 대한 정열, 무대장치에 관한 진지함은 다른 데서는 도저히 볼 수가 없다. 그것은 파리다운 진지함이다. 파리 예술가의 영혼 속에 뛰노는 무서운 야심이란, 독일에서는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다. 독일 사람은 호인이다. 바그너는 결코 호인이 아니다. 나는 그를 모든 독일적 미덕에 대한 반대물로, 그리고 피에 젖은 항의로 느끼고 존경하였다.”

 

반독일적인 바그너의 취향을 더욱 돋보이게 만든 인물이 코지마였다. 니체는 코지마에게 보통 이상의 호감을 갖고 있었는데, 호감의 시초는 코지마의 파리적인 것에서부터였다. 그녀는 파리 출신이었다.

 

내가 독일에서 찾아낸 높은 문화의 몇몇 실례까지도 모두 프랑스 혈통을 받은 것이다. 그 중에서도 코지마 부인은 내가 지금까지 듣던 중 가장 뛰어난 취미 문제를 말했다. 나는 파스칼을 읽은 것이 아니라 사랑하고 있다. 처음에는 육체적으로, 다음은 심리적으로 차츰 죽어간 가장 교훈적인 기독교의 희생으로서, 그리고 비인간적인 잔인성의 가장 몸서리쳐지는 형식의 논리로서.”

 

바그너와 코지마에 대한 열광적인 우정의 관계는 1876년까지 지속됐다. 다만 니체가 독불전쟁의 간호병으로 종군했던 1870년 세 달간을 제외하고. 바그너의 존재는 니체에게 삶의 즐거움이고 희망이며 예술 그 자체였다. 18708월부터 10월까지 니체는 독불전쟁의 지원 간호병으로 종군했다. 바젤 대학에 초청됨으로써 니체는 이미 스위스인이 되었기에 스위스 정부는 니체가 적극적으로 종군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나 군 복무도 질병 때문에 오래하지 못했다. 부상병 후송 호위병이었던 니체는 이질과 인후성 디프테리아에 걸려 바젤로 돌아왔다. 그는 이후 전쟁을 회의적으로 바라보았고 독일의 헤게모니에 대한 믿음도 상실했다. 그 후 니체는 다시 강의를 시작했고 연구에 복귀했다.

 

니체는 대학교수가 재직 중 바랄 수 있는 모든 것을 20대 중반에 거의 다 성취해버렸다. 존경받는 젊은 학자였으며 그의 의견과 판단은 다른 사람들에게 진지하게 받아들여졌다. 약간은 제자를 두었으며 그 제자들에겐 좋은 스승이었다. 보수도 좋았고 훌륭히 독립적인 생활을 영위할 수 있었다. 좋은 벗도 몇 명 사귀게 되었는데, 그 중 한 사람은 바젤 대학 교회사 교수인 프란츠 오버베크였다. 오버베크는 니체의 정신병 초기 때 그를 병원으로 옮긴 사람이다.

 

니체의 생활은 안정되었고 유유히 연구를 계속할 수 있었다. 그는 일련의 저작도 시작했는데 이 저작이 결국은 시민적, 학문적, 사회적인 인습에 대한 극단적인 대립에 이끌리도록 했다. 니체를 고독한 예외자로 만든 것은 결코 환경이나 어떤 강제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 그 스스로가 이러한 길을 선택했다. 당시의 학문과 사회에 대한 반역은 전적으로 니체의 성향에서 기인한 것이다.

 

 

 

 

 

비극의 탄생, 사망, 재생

 

니체의 첫 책 비극의 탄생1869년 가을부터 18712월까지 집필되었다. 이 책이 처음 출판되었을 때의 제목은 음악정신으로부터의 비극의 탄생이었다. 이 원고를 당시 주변에서는 켄타울이라고 불렀다. 니체가 로데에게 보낸 편지 속에서 켄타울이라는 말을 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학문과 예술과 철학이 매우 밀접하게 결합되어 자라난 결실이었다. 니체는 이 책을, 언젠가 책을 출판해 주겠다고 말한 출판업자에게 편지와 함께 보냈다.

 

보내드리는 원고가 뜻에 맞을지 모르겠지만 인쇄하면 90페이지 정도 될 것입니다. 제목은 음악과 비극이라고 붙일 예정입니다. 보시는 바와 같이 그리스의 비극을 해명하려고 시도한 책입니다. 현대의 기이한 수수께끼인 리하르트 바그너를 그리스 비극과의 관계에서 설명하려고 한 것입니다. 나는 이 저술이 오직 미학에 관한 책으로 다루어지길 희망합니다.”

 

이 글은 이 출판사에서 미루고 있다 뒤늦게 출판하려 했으나 니체가 도로 거두어 불발되었다. 그러나 1871년 말 바그너의 책을 출판했던 후리체라는 출판업자에 의해 세상에 나오게 되었다.

 

이 책은 바그너의 음악을 그리스 비극과의 관계에서 설명하려고 한 것이다. 니체는 당시에만 해도 바그너를 숭배하고 있었고 바그너의 음악이야말로 니체가 바라는 예술적인 모범 답안 이였다. 이 책의 서문에는 니체가 바그너에게 바치는 헌사가 쓰여 있다.

 

나의 무척 존경하는 벗이여, 나는 지금 당신이 이 책을 받는 순간을 마음속에 그려보고 있습니다. 우리들의 심미적 사회의 독특한 성격 때문에, 이 책 속에다 종합시킨 것과 같은 사상이 어쩌면 불러일으킬지도 모를 모든 의혹과 오해를 당신생각으로 멀리 쫓기 위함입니다. 또한 훌륭하고 감격적인 한때의 화석으로서, 이 책 자체가 어느 페이지에나 그 표적을 남기고 있는 저 관조적 무상의 환희를 지금도 역시 지니고서야 머리말을 쓸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 책은 1886년에 새로운 판이 나왔는데 그때 니체는 자기비판의 한 시도라는 서문을 붙이고 제목도 비극의 탄생, 혹은 그리스 정신과 페시미즘이라고 바꾸었다. 1886년 당시 니체와 바그너의 관계가 청산된 지 한참이 지난 후였다. 원제목에서 음악이라는 말을 빼버린 것은, 아마도 바그너의 이미지를 지워버리고 싶은 충동에서가 아니었던가 싶다. 바그너에게 열렬히 도취되었던 니체가 15년이 지난 후에 새로운 서문을 덧붙이면서 자기변명과 아울러 독보적인 입장을 스스로 과시했던 셈이다.

 

이 책은 청춘의 우수와 용기에 넘치며 권위와 숭배의 대상에 굴복하는 것처럼 보일 때일지라도, 단연 독립적인 청춘서다. 요컨대 이 책은 어감이 나쁠지언정 처녀작이며 그 노숙한 문제의식에도 불구하고 청춘의 여러 결함, 특히 청춘 특유의 장황한 질풍노도가 따른다. 그 반면 이 책이 거두었던 성과에 관해서는 이미 증명이 끝난 책이라고 할 수 있다. 하여간, 그 시대의 가장 뛰어난 사람들에게 만족을 주었다.

 

이 책은 약간의 참작과 묵인 아래 다루어져야 할지도 모른다. 오늘날 나에게 얼마나 불쾌하게 여겨지는지. 15년 후의 지금 얼마나 서먹하게 내 앞에 있는지. 이것을 나는 결코 숨기려 하지 않겠다.”

 

비극의 탄생의 문헌학적 의도는 디오니소스 축제의 의식적인 코러스의 무용으로부터 그리스 비극의 전개를 펼치는데 있다. 두 가지 다른 삶의 형식이 융합되어 나타나는 형체가 비극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한 것이다. 아울러 고전적 그리스를 새롭게 해석하려는 의도가 내포되어 있으며 바그너의 작품을 정당화하고 선전하려는 의도도 있었다.

 

내용면에서 이 책은 비극의 탄생, 죽음 그리고 재생의 세 가지 테마로 이루어져 있다. 우선 아폴로적, 디오니소스적이라는 두 개의 대칭된 개념을 전제한다. 아폴로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태양신이다. 예언과 병, 음악을 다스리며 공상적으로 마음속에 그려내는 세계의 아름다운 가상, 즉 꿈을 지배한다. 존재의 개별적인 가상 위에 서 있으면서 조용하고 조화 있는 미의 황홀한 환상 속에서 고통을 망각하게 하며 정화하는 힘, 지혜에 넘치는 평정, 난폭한 격정 속에서의 자유, 아름다운 가상의 장중함을 갖고 있다.

 

이에 반해 디오니소스는 주신이다. 도취와 광기를 나타내며 문화를 창조하고 입법하며 관할한다. 존재의 밑바닥에 깔려 있는 의지, 그 자체라고 하겠다. 개별적인 것이 부서지고 가상의 것이 찢길 때 발생하는 괴로움을 이 근원적인 생명에 합일시킴으로써 환희로 전환시키는 것이라고 보았다.

 

예술의 발전은 아폴로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요소가 결합되어 이루어진다. 이 두 가지 요소가 가장 잘 융합되어 나타나는 형식이 그리스 비극이다. 디오니소스적 황홀이, 그리스 예술에서는 일정한 아폴로적 형식으로 매듭 지워져 그 덧없음에서 벗어나게 된다. 니체에게 그리스인들의 비극은 디오니소스의 코러스에서 발생하였던 것이다. 황홀한 코러스의 춤, 즉 음악 바로 그것이 비극적 신화의 근원인 것이다. 비극적, 신화적인 사건의 디오니소스적 체험이 아폴로적 형식으로 구체화된다. 그리고 비극은 탄생한다.

 

니체에게 비극의 본질은 디오니소스적인 것에 뿌리를 둔 형이상학적 개념인 동시에 실존적 개념이다. 비극은 바로 세계의 본질을 열어젖힐 수 있는 열쇠며 존재의 암호이고 상징이다.

 

그리스 비극의 융성이 절정에 달한 바로 그 순간에, 비극의 최대의 적이 생겼다. 바로 그리스 계몽철학의 비판적 정신이다. 그것은 합리적, 회의적이어서 비극적인 것의 전율과 비밀에 대한 감정을 기를 줄 몰랐다. 소크라테스적 아포리아와 거기서 나오는 학문적 설문, 즉 순수한 문제 분석의 정신, 바로 그것이 니체에게는 모든 문화의 적인 것이다.

 

여기서 니체는 비극의 재생을 외친다. 베토벤으로 표상되는 독일 음악 정신과 칸트, 쇼펜하우어로 표상되는 독일 철학 정신은 디오니소스적인 것의 계승이라고 보고 여기에 아폴로적인 것의 조화된 것을 바그너에게 기대하고 예감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바그너의 오페라를 그리스 비극의 부활이라고 보고, 나아가 근대 문화의 성격을 오페라 문화라고까지 말했던 것이다.

 

위대한 패배

 

책을 읽은 바그너는 니체에게 화답을 보내왔다. “그대의 책 이상으로 아름다운 글을 보지 못했습니다.” 코지마, 로데, 한스 폰 뵐로우 등의 찬사가 이어졌다. 그러나 문헌학계에서는 침묵으로 일관했다. 문헌학계의 거목이 될 것으로 기대했던 젊은 학자의 저술은 공식석상에서 다뤄지지 않았다. 니체에게는 이 침묵이 무겁게 다가왔다. 겨우 오랜 침묵을 깨고 공식석상에서 처음으로 비극의 탄생을 다룬 사람은 친구 에르빈 로데였다. 킬대학의 교수였던 로데는 아르게마니아 신문의 일요일판 부록에 서평을 썼던 것이다. 침묵을 견딜 수 없었던 니체는 은사 리칠에게 편지를 써 보았지만 그는 답하지 않았다. 일기장에 비극의 탄생기지가 넘치는 주정뱅이의 비틀거림이라고 적어 두었을 뿐이다.

 

마침내 미래의 문헌학, 프리드리히 니체의 비극에 탄생에 대한 반박이라는 제목의 글이 나타났다. 이 글을 쓴 빌라모비츠는 니체의 철학적인 생각과 문헌학적인 학식을 공격했다. 친구인 바그너와 로데가 반론에 나섰지만 대다수의 문헌학자들은 빌라모비츠의 생각에 동조하는 느낌이었다. 그러자 니체의 문헌학자로서의 명성이 위태로워졌다. 다음 학기에 학생들이 수강신청을 꺼려했고 그리스로마 수사학을 두 명의 학생 앞에서 강의했다.

 

비극의 탄생에 대한 비판이 멈추지 않고 있을 때 니체는 학사원협회의 초청으로 1872우리나라 교육시설의 장래에 대하여라는 제목으로 다섯 차례 강연을 했다. 이 강연의 내용은 비극의 탄생에서 주장한 사상을 부분적으로 구체화한 것 이였다. 계몽사상이 현세기에 나타내는 모습, 과학과 그에 수반되는 연구의 전문화 등에 강력히 대항하는 입장을 밝히고 있다. 동시에 산업계의 전달 형식으로서의 저널리즘에도 대항했다.

 

문화 활동과 그 매개체에 대한 니체의 비판은 일반의 견해에 수 십 년이나 앞선 것이다. 또한 니체는 독일정신의 비전이라는 의견을 제시하기도 한다. 독일정신에 의해 병든 시대가 쾌유된다고 선언했다.

 

이 강연은 대성공이었다. 바젤의 시민들은 이 강연 내용에 매우 만족하였다. 그리고 니체는 잃었던 학자로서의 신뢰를 어느 정도 회복했다. 그리고 철학은 증명 가능한 학문이라기보다는 직관과 통찰, 충격을 중시하는 학문이고 개인의 체험과 주관, 능동적 자기실현이 이론적 규범보다 더 우위에 있다고 확신했다.

 

비극의 탄생은 소크라테스 및 그 학문 정신에 대항했다. 그러기 위해서 그리스 문화의 모범을 단지 아테네 비극에서뿐만 아니라 소크라테스 이전 사상들에게서도 구해야 했다. 니체는 플라톤 이전의 철학자들에 관한 강의를 많이 하면서 차츰 철학자가 되어갔다.

 

사상가들을 역사 및 정신사적으로 연구하면서 니체는 서서히 반시대적인 것에 착수했다. 1872년 바그너는 바이로이트에 극장을 세울 계획으로 이주하면서 니체와 헤어져야 했다.

 

지난 일요일 밤 트립센과 슬픈 작별을 했다네. 모든 것에 감동이 깃들어 있었다네. 하늘에도 구름에도, 내가 그 근처에서 보낸 3, 내가 스물 세 번이가 방문한 3, 그 세월은 나에게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만약 그 세월이 없었다면 나는 어떻게 되었을까. 그 트립센의 세계를 비극의 탄생이라는 책에 고스란히 담은 것을 다행으로 여기네

 

니체는 친구 게르도르프에게 이와 같이 편지를 보냈다. 하지만 니체와 바그너는 공간적인 거리감으로 인해 점점 멀어지게 되었고 코지마에 대한 그리움을 싹트게 했다.

 

 

 

  거리감

 

반시대적 고찰4부에는 바이로이트에서의 리하르트 바그너라는 제목이 붙어 있다. 이것은 명백하게도 니체의 변화를 나타내주는 것이다. 바그너 예술에 대한 비판적인 경원, 바그너가 바이로이트로 떠난 후 두 사람 사이에 친밀한 접촉은 더 이상 계속되지 못했다.

 

1872년 늦가을 니체는 바그너와 코지마를 만났다. 그러나 두 사람 사이가 멀어진 결정적인 원인은 그 해 크리스마스 때 바그너의 초대를 니체가 거절한 데 있었다. 이 거절을 바그너는 매우 불쾌하게 여겼고 또한 그 뜻을 알렸다. 여린 감성의 니체도 뒤늦게나마 부활제 휴가를 이용하여 로데와 함께 바그너를 방문했지만 친밀한 관계가 복원되지는 않았다.

 

바그너와 나 사이의 최초의 결렬은 바이로이트 체류 중 그가 화를 참지 못한 데서 초래되었다. 나는 그리스 비극에 관해 이야기했지만 그의 마음속에 있는 것은 자신 앞에 무릎 꿇지 않는 세상에 대한 것 뿐 이였다.”

 

니체는 바그너와 자신이 가져간 원고 그리스인의 비극시대의 철학에 관해 토론할 수 있길 기대했다. 그러나 바그너는 바이로이트 극장의 심한 재정적 곤란과 대중의 관심 부족에 고심했으므로 고대 그리스 사상가들에게 관심을 기울일 여유가 없었다. 니체는 바그너의 태도에 실망했다. 니체에게 비친 바그너는 예술의 거장이 아니라 자신의 사업을 위해 싸우는 평범한 사람으로 보였던 것이다.

 

이후 니체는 바그너의 고심에 동의한다는 편지를 그에게 보내기도 했지만 친구에게 모든 중요한 점에서는 여전히 경의를 표하고 있지만, 대수롭지 않은 사소한 이차적인 점에서는 너무나 자주 개인적인 형태로 만나지 않도록 피하는 것이 나에게 좋을 것 같다라고 쓰고 있어 이미 마음이 멀어졌음을 느끼게 한다. 니체는 점차 바그너를 이전과 다르게 보게 되었으며 작품에 대해서도 비판적인 태도를 취했다.

 

바이로이트에서 리하르트 바그너는 그 고찰이 통일적, 일관적이지 못하고 모순되는 느낌을 준다. 이는 바그너에 대한 니체의 감정이 제대로 정리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나타낸다. , 이 무렵 니체는 바그너의 예술에 대해 비판적으로 멀어지는 상태에 있었으나 겉으로는 예전과 똑같이 그를 찬미했다. 니체의 의식은 두 가지 모순된 감정으로 찢겨 있었다. 이 논문 끝에는 허약한 변명이 쓰여 있지만, 바그너에 대한 비판적인 견해를 숨기지 못하고 있다. 쇼펜하우어에게 그랬던 것처럼 이 글은 니체가 바그너를 극복하는 한 방법이었다.

 

니체는 증정본과 편지를 바그너에게 보냈다.

 

선생님 이 글은 바이로이트에 바치는 나의 축하 연설입니다. 책을 어떻게 받아들이실지 알 수 없으나 전에 독일의 자유에 대해 말씀하신 그 신념에 의지할 뿐입니다.”

 

벗이여 그대가 쓴 책은 놀라운 것입니다. 어떻게 그렇게 정확하게 나를 파악했는지요. 곧 와서 실제로 나의 시연을 보고 그대의 인상을 확인해 주십시오.”

 

이것은 바그너가 니체에게 보낸 마지막 편지다. 니체는 바그너의 초대에 즉시 응했다. 아마도 바그너는 책 속에 숨겨진 니체의 변화를 알아차리지 못했음이 분명하다. 하지만 바이로이트에서 니체는 크게 실망하고 말았다. 니벨룽겐의 반지를 본 그는 너무나 독일적이며, 내가 바라던 디오니소스적 마술의 음악이 아니었다라고 적었다. 이때부터 니체와 바그너는 눈에 띄게 멀어졌다. 훗날 니체는 니체 대 바그너에서 이 과정을 설명한다.

 

이미 1876년 여름 축제극이 있던 기간 중 나는 남몰래 바그너와 결별하였다. 나는 애매한 것을 견딜 수가 없었다. 바그너가 독일에 있게 되면서부터 그는 내가 경멸하는 것들에 한발 한발 다가서고 있었다. 반유태주의까지도. 사실 그때야말로 결별해야 할 가장 좋은 시기였던 것이다.”

 

두 사람이 마지막으로 만난 것은 1876년 가을 소렌토에서였다. 소렌토 체류 기간의 마지막 날 니체는 바그너와 산책을 하게 되었는데 바그너는 자신이 쓰고 있는 파르시팔에 대해 이야기 하면서 특별히 기독교적인 모티브를 살리기 위해 얼마나 진지하게 작업하고 있는지 설명했다. 니체는 충격을 받고 얼음 같은 침묵을 지키다 돌연 바그너에게 인사를 하고 그 자리를 도망쳐 나왔다. 그것이 둘의 마지막 만남 이였다.

 

18781월 바그너는 파르시팔을 완성하여 니체에게 보냈다. 바그너는 그때까지도 니체의 변화를 느끼지 못하고 있었으며 아무런 악의도 지니지 않았던 것 같다. 같은 해 5월 니체는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을 출판하여 바그너에게 증정했다. 이 책에는 바그너에 대한 니체의 적의가 노골적으로 드러나 있다.

 

결별은 하는 데는 확실히 그때가 가장 좋은 시기였다. 그러한 사실은 바로 그 자리에서 입증되었다. 가장 빛나는 승리자로 보였던 바그너가 사실은 절망적으로 부패한 낭만주의자여서, 반항 한 번 제대로 못하고 기독교의 십자가 아래 무릎 끓고 말았던 것이다. 이 무서운 광경을 보면서 가끔 아파할 독일인이 한 사람도 없단 말인가? 오직 나 혼자뿐이었단 말인가? 그것을 목격하고 난 뒤 나는 병이 들고 말았다. 우리 근대인들에게 흥분제로 남겨진 무차별한 정력, 노동, 희망, 청춘, 사랑에 대한 끝없는 환멸 때문에 지쳐 버렸던 것이다.”

 

이 책은 그의 두 벗, 바그너와 코지마에게도 상처와 충격을 주었다. 두 사람은 오래 침묵을 지켰다. 그러다 바그너는 바이로이트 블레터8월호에 대중과 인기라는 글로 니체에게 우회적인 반박을 했다. 바그너의 글답지 않게 유연하고 부드러웠다. 하지만 독일의 세기적인 우정은 완벽하게 파국을 맞았다.

 

 

 

 

 

코지마

 

니체는 코지마를 아리아드네라고 불렀다. 아리아드네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인물로 남편 테세우스에게 버림받고 디오니소스의, 아내가 되었다. 니체가 자주 자신을 디오니소스라고 불렀던 것에 비추어 그는 그녀를 사랑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니체가 코지마를 마지막으로 본 것은 1876년 바이로이트에서였다. 이때를 마지막으로 현실적인 접촉은 끝나지만 니체는 계속 코지마를 맘속에 두고 있던 듯하다. 1887년 시집 디오니소스 찬가에는 아리아드네를 찬미한 시편들이 보이고 발병 직후 투란에서 보낸 편지에는 아리아드네여, 내 그대를 사랑하노라. 디오니소스라고 끝맺고 있다.

 

진리는 미풍처럼 온다 / 장석주의 니체 읽기 부분 발췌 / 2005 / 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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