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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 Nietzsche(1844-1900)/바그너의 경우

바그너의 경우 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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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약간 마음이 가벼워진다. 내가 이 글에서 바그너를 깎아내리고 비제를 찬양하는 것은 단순한 악의에서가 아니다. 나는 많은 농담 속에 절대 농담일 수 없는 한 가지 문제를 집어넣었다. 바그너에게 등을 돌린다는 것은 내겐 하나의 운명이었다. 어떤 것을 나중에 다시 좋아하게 된다는 것은 하나의 승리이다. 아마 어떤 사람도 나보다 더 위험하게 바그너적인 것에 밀착해 있지는 않았고, 누구도 그것에 대해 더 강하게 저항하지 않았으며 아무도 그것으로부터 벗어나는 데에서 더 큰 만족을 느끼지는 못했을 것이다. 이것은 몹시 오랫 동안의 이야기였다! 이것에 대해 이름을 붙이기를 원하는가? 만일 내가 도덕주의자Moralist였다면 여기에 무슨 이름을 붙였을지 아는가? 아마 '극기'였을 것이다. 그러나 철학자는 도덕주의자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는 또한 미사여구도 좋아하질 않는다. ......

 

 한 철학자는 처음부터 끝까지 자기 자신에게 무엇을 원하는가? 자기 시대를 자기 속에서 극복하여 '시류를 초월하는 것'을 원한다. 그러면 그는 무엇에 대항하여 그렇게 격렬히 투쟁하는가? 그것은 바로 그를 그 시대의 아들이게끔 만드는 특징에 대항하는 것이다. 나는 바그너만큼이나 이 시대의 아들이고 스스로 '퇴폐주의자'라고 자칭하고 싶다. 그러나 나는 이것을 파악하고 이것에 저항한 점이 다르다. 나를 가장 몰두시킨 것은 진실로 '퇴폐주의'의 문제였다. 여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선과 악'이란 이 문제의 변종에 지나지 않는다. 사람들이 몰락의 징조에 눈을 뜨기 시작한다면, 그들은 곧 도덕에 대해서도 이해하게 된다. 사람들은 그 가장 성스러운 이름과 가치공식 하에 무엇이 숨어 있는가를 알게 된다는 말이다. '영락(零落)한' 삶, 몰락에의 의지, 거대한 권태 등등을. 도덕은 삶을 '부정한다......'

 

그러한 과제를 위하여 나는 자기 훈련을 필요로 했다. 바그너와 쇼펜하우어 그리고 모든 현대적 '인간성'을 포함하는 내게 있어서의 모든 질병들에 대항할 필요가 있었다. 이는 모든 시대적인 것, 시대에 적합한 모든 것들에 대한 깊은 경계와 냉담과 각성을 의미한다. 그리고 최고의 소원은 '짜라투스트라'의 눈을 갖는 것, 즉 인간에 관한 모든 사실을 몹시 먼 곳에서부터 개관하고 자기 '아래에' 굽어보는 눈을 갖는 것이었다. ......

 

그러한 목적을 위해서라면 어떤 희생이 아까울 것인가? 어떤 '극기'가! 어떤 '자기 부정'이! 나의 가장 큰 체험은 병의 '회복'이었다. 바그너는 나의 질병들의 하나일 뿐이었다. 내가 이 바그너라는 질명에 대하여 감사하고 싶지 않은 것은 아니다. 내가 이 글에서 바그너는 '위험한 존재'이다 라는 주장을 계속 견지해 나간다고 할 때, 나는 그에 비례해서, 바그너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구에게는 없어서는 안 될 존재인가 하는 점도 계속 주장하고자 하는 것이다. 바그너는 바로 철학자에게 필수불가결이다. 철학자 이외의 사람은 아마 바그너 없이도 지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철학자들은 마음대로 바그너 없이 지낼 수는 없다. 철학자는 자기 시대의 파렴치한이 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그는 자기 시대를 가장 잘 알아야 한다. 그러나 그가 현대 영혼의 미로에 대하여 바그너보다 정통한 안내자를 어디서 발견하겠으며, 바그너보다 더 달변인 영혼의 고지자를 어디서 발견하겠는가! 현대성은 바그너를 통해서 자기의 가장 '익숙한' 언어를 말하는 것이다. 현대성은 자기의 선도 자기의 악도 감추지 않는다. 그것은 자기의 모든 수치심을 잃어 버렸다. 그리고 역으로, 사람들이 자기와 바그너에게 있어서의 선과 악에 대하여 명료히 깨닫게 된다면, 그는 현대의 '가치'에 대한 계산을 거의 끝낸 셈이 된다. 나는 오늘날 어떤 음악가가 "나는 바그너를 싫어한다. 그러나 나는 다른 음악가들을 더이상 참아내지 못한다"라고 말할 때, 나는 이 말을 완전히 이해한다. 그러나 나는 또한 "바그너는 현대성을 개괄하고 있다. 그러니 딴 도리가 없다. 사람들은 우선 바그너 추종자가 되어야 한다"하고 말하는 철학자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김대경 譯, 청하, 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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