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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 Nietzsche(1844-1900)/비극의 탄생

비극의 탄생 -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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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과 같은 것은 하나의 영원한 현상이다. 탐욕스런 의지는 항상 사물 위에 펼쳐진 환상의 힘을 빌려 의지의 피조물들을 삶에다 굳게 얽어매고 그것들로 하여금 계속해서 살아가도록 강제하는 수단을 발견하게 된다. 소크라테스적 인식의 기쁨에 매혹된 사람, 즉 인식을 통해서 생존의 영원한 상처를 치유할 수 있다는 망상에 매혹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또한 어떤 사람은 눈앞에 아른거리는 유혹적인 예술미의 베일에 혹한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현상의 소용돌이 배후에서 파괴될 수 없는 영원한 생명이 계속 흐르고 있다는 형이상학적 위로에 혹한다. 이외에도 의지가 매 순간 마련해 주는 보다 저속하고 강력한 환상들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겠다. 방금 말한 환상의 세 단계는 보다 고귀한 천성을 지닌 사람들에게만 해당된다. 그들은 일반적으로 생존의 부담과 중압을 유별나게도 불쾌하게 느끼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불쾌감을 잊기 위해서 특별한 자극제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다. 우리가 문화라고 부르는 것은 이러한 자극제들로 구성되어 있다. 이것들의 혼합비율에 따라서 우리는 소크라테스적인 문화 혹은 예술적인 문화 혹은 비극적인 문화를 갖게 된다. 또한 역사적인 실례들을 드는 것이 허용된다면 알렉산드리아적 문화 혹은 그리스적 문화 혹은 불교적 문화가 존재한다. 

 

우리의 근대 세계 전체는 알렉산드리아적 문화의 그물 속에 사로잡혀 있어서 최고의 인식능력을 갖추고 학문을 위해서 일하는 이론적인 인간을 이상으로 여긴다. 이 이론적 인간의 원형과 시조가 소크라테스이다. 우리의 모든 교육수단은 근본적으로 모두 이 이상을 목표로 하고 있다. 이론적 인간의 이외의 모든 인간 유형은 그 자체가 목표가 되지는 않고 단지 존재가 허락된 것에 지나지 않으며, 이론적 인간이라는 이상의 곁에 겨우 자리라도 잡기 위해서 악전고투해야만 한다. 근대 세계에서는 오랜 시간에 걸쳐서 교양인은 학식 있는 자와 동일시되었다. 이는 실로 경악할 만한 일이다. 우리의 시 예술 자체가 학적인 흉내로부터 발전되어 나와야 했다. 우리들의 시 형식이 모국어가 아니라 본래는 학적인 언어를 가지고 예술적인 실험을 하는 것으로부터 생겨났다는 사실을 우리는 지금도 운율의 주요 효과에서 알 수 있다. 그 자체로서는 이해하기 쉬운 근대적인 문화인인 파우스트는 진정한 그리스인에게는 얼마나 불가해한 자로 보일 것인가. 파우스트는 동서고금의 학문을 다 섭렵하면서도 만족하지 못한채 지나친 지식욕 때문에 마술과 악마에게 자신을 판 것이다. 근대인이 저 소크라테스적 지식욕의 한계를 예감하기 시작하고 황량하고 드넓은 지식의 바다에서 해안을 그리워한다는 사실을 알기 위해서라면 파우스트를 소크라테스 옆에 앉혀 놓고 비교하기만 하면 된다. 괴테가 한때 에커만에게 나폴레옹에 대해서 "이보게, 정말 행동의 생산성이라는 것도 있다네"라고 말했을 때, 그는 우아하고 소박하게, 이론적이지 않은 인간이란 근대인에게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경이로운 존재이기 때문에 이렇게 낯선 존재형식을 이해 가능하고 허용될 수 있는 존재로 보기 위해서는 괴테 자신 정도의 지혜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상기시킨 것이었다.

 

이제 사람들은 소크라테스적 문화의 태 내에 숨겨져 있던 것을 감추어서는 안 된다! 아무것에도 제약받지 않는다고 망상하는 낙천주의! 이 낙천주의의 열매가 성숙한 때에도 그대들은 놀라서는 안 된다. 최하층의 민중에 이르기까지 이런 문화에 절어버린 사회가 높아지는 욕망의 물결에 점차 전율할 때에도, 보편적인 지식문화의 가능성에 대한 믿음이 점차적으로 알렉산드리아적 지상의 행복에 대한 위협적인 요구로, 에우리피데스의 기계장치의 신을 불러내는 것으로 변할 때에도 그대들은 놀라서는 안 된다! 사람들은 알렉산드리아적 문화가 지속적으로 존재하기 위해서는 노예계급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러나 이 문화는 낙천주의적 인생관 때문에 노예계급의 필요성을 부정한다. 이 때문에 '인간의 존엄'이라든가 '노동의 신성함'과 같은 아름다운 유혹적인 문구와 위로의 문구의 효과가 소진되었을 때 이 문화는 점차 무서운 파멸을 향해 치달리게 된다. 자신의 처지를 부당한 것으로 보는 것을 배우게 되고 자신을 위해서뿐 아니라 자손만대를 위해서 복수하려고 하는 야만적인 노예계급보다도 더 무서운 것은 없다. 그러한 위협적인 폭풍에 대항해서 어느 누가 우리의 창백하고 지쳐 버린 종교에 구원을 요청하려고 할 것인가? 현대의 종교 자체는 근본적으로 학자적 종교로 타락해 버렸으며, 따라서 모든 종교의 필수적인 전제인 신화는 이미 도처에서 반신불수가 되어 버렸다. 종교영역까지도 우리가 방금 우리 사회의 파멸의 싹으로 지칭했던 저 낙천주의적 정신이 지배하게 된 것이다. 

 

이론적 문화의 태 내에 깃들어 있던 재앙이 점차로 근대인을 불안하게 하기 시작했으며, 근대인은 이제까지의 경험 속에서 위험에서 벗어나기 위한 수단을 찾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근대인이 이러한 수단을 진심으로 믿고 있는 것도 아니다. 결국 근대인은 자신의 말로를 예감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는 동안 보편적 재능을 가진 위대한 인물들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깊은 사색을 통해서 인식 일반의 한계와 피계약성을 드러내고, 이와 함께 보편 타당성과 보편적 합목적성에 대한 학문의 요구를 결정적으로 부정하기 위해서 학문이라는 무기 자체를 사용할 줄 알고 있었다. 이러한 증명을 통해서 인과율에 입각하여 사물들의 가장 내적인 본질을 규명해 낼 수 있다는 저 생각이 처음으로 망상으로서 인식되었다. 칸트와 쇼펜하우어의 비범한 용기와 지혜는 가장 힘든 승리를 쟁취했다. 이러한 승리란 우리 문화의 기반인 저 낙천주의, 논리의 본질 속에 깃들어 있는 저 낙천주의에 대한 승리였다. 이 낙천주의는 칸트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아무런 의심도 없이 영원한 진리에 의거하여 모든 세계의 수수께끼를 인식하고 규명할 수 있는 것으로 믿고, 공간, 시간, 인과율을 최고의 보편 타당성을 지닌 무조건적인 법칙으로 간주했다. 이에 대해서 칸트는 공간, 시간, 인과율이 원래 마야의 작품인 단순한 현상들을 최고의 유일한 실재로 승격시켜서 그것으로 사물의 가장 내적인 진실된 본질을 대치시키고, 이를 통해서 이 본질에 대한 진정한 인식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데 기여할 뿐이라는 사실을 드러내었다. 즉 쇼펜하우어의 말에 따르면 공간, 시간, 인과율은 꿈꾸는 자를 더 깊이 잠들게 하는 데 기여할 뿐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인식과 함께 내가 감히 비극적 문화라고 부르는 하나의 문화가 시작되는 것이다. 이러한 문화의 가장 큰 특징은 학문 대신에 지혜가 최고의 목적으로 인정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지혜는 여러 학문들의 유혹적인 오도에 의해서 기만당하지 않고 확고한 시선으로 세계의 전체상을 응시하며, 이러한 전체상 속에서 영원한 고통을 보면서 그것을 동정적인 사랑의 감각에 의해서 자신의 고통으로 파악하려고 하는 지혜이다. 우리는 자라나고 있는 다음 세대가 이처럼 대담한 시선으로 괴물을 향해서 영웅적으로 돌진하는 것을 상상해 보자. 그리고 완전히 그리고 충실히 '결연하게 살기 위해서' 모든 낙천주의의 나약한 교설들에서 과감히 등을 돌리는 거룡 정벌자들의 당당한 용감성과 대담한 발걸음을 생각해 보자. 엄숙함과 공포를 견뎌낼 수 있도록 자신을 교육하면서, 이 문화의 비극적인 인간이 하나의 새로운 예술, 즉 형이상학적 위로의 예술인 비극을 자신에게 어울리는 헬레네로서 열망하면서 파우스트처럼 이렇게 외쳐야 한다는 것은 필연적인 일이 아닌가?

 

"내가 이처럼 강한 그리움의 힘으로

오직 하나뿐인 여인을 소생시켜서는 안 되는가?"

 

그러나 소크라테스적인 문화는 두 가지 측면에서, 즉 하나는 점차 예감하기 시작한 자신의 고유한 귀결에 대해서 두려움을 느꼈고, 다른 하나는 소크라테스적 문화 자체가 자신의 토대의 영원한 타당성에 대해서 이미 이전처럼 소박한 믿음과 확신을 갖지 못하게 되었기 때문에 흔들리게 되었으며 그 무오류성의 왕홀을 떨리는 손으로 간신히 쥘 수 있었을 뿐이다. 그래서 소크라테스적 문화의 사유의 춤이 새로운 대상을 끌어안기 위해서 항상 새로운 것을 동경하면서 돌진하다가는 마치 메피스토펠레스가 고혹적인 라미아들에게 한 것처럼 갑자기 다시 그것을 밀쳐 내버리는 것은 실로 슬픈 연극이 아닐 수 없다. 이론적 인간은 자신의 귀결에 공포를 느끼고 불만스러워하면서도 더 이상 생존의 가공할 차디찬 강에 감히 자신을 맡기려고 하지 않고 강가에서 불안하게 우왕좌왕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근대 문화의 근원적 고뇌로서 사람들의 입에 오르고 있는 '파탄'의 징조이다. 이론적 인간은 이제는 더 이상 무엇이든 사물을 완전한 모습으로 붙잡으려고 하지 않는다. 사물에 깃든 잔인함에서 눈을 돌리지 않고 사물의 전모를 붙잡으려는 의지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낙천주의적 세계관에 의해서 그는 이 정도로 나약해진 것이다. 게다가 그는 학문의 원리 위에 세워진 문화가 비논리적이 되기 시작하면, 즉 자신의 귀결 앞에서 뒤로 도피하기 시작하면 그것은 몰락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느끼고 있다. 현재의 예술은 이러한 보편적인 위기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모든 위대한 생산적 시대와 천재들을 모방하면서 그들에 의존해도 아무런 쓸모가 없다. 근대인을 위로하기 위해서 그의 주위에 '세계 문학' 전체를 끌어모으고, 아담이 동물들에게 이름을 붙인 것처럼 모든 시대의 예술형식과 예술가 각각에 이름을 붙일 수 있도록 그를 그 가운데에 앉혀 보았자 소용없는 짓이다. 근대인은 말하자면 영원히 굶주린 자이고 환희도 힘도 없는 '비평가'이며, 결국은 도서관 사서이고 교정자이며, 책 먼지와 활자의 오식으로 눈이 멀게 될 알렉산드리아적 인간인 것이다. 

 

 

눈에비친햇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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