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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 Nietzsche(1844-1900)/비극의 탄생

비극의 탄생 -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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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이상의 상술된 역사적 예에서 우리가 밝히려고 한 것은 비극이 음악정신으로부터만 탄생될 수 있는 것처럼 음악정신이 소멸될 때 비극도 몰락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이 갖는 기이한 성격을 완화하고 다른 한편으로 이러한 인식의 근원을 제시하기 위해서 우리는 이제 자유로운 눈으로 우리 시대의 유사한 현상들을 관찰해야만 한다. 이를 위해서 우리는 내가 방금 말한 것처럼 현 세계의 최고의 영역들에서 벌어지고 있는 싸움, 즉 만족할 줄 모르는 낙천주의적 인식과 비극적 예술에 대한 욕구 사이에서 벌어지고 있는 싸움의 한가운데로 들어가야만 한다. 이 경우 나는 어느 시대든지 예술 특히 비극예술에 대해서 대항하는 모든 적대적 충동들을 무시하고 싶다. 이러한 충동들은 현대에도 의기양양하게 확산되고 있어서, 무대예술 중에서 예컨대 익살극과 발레만이 누구에게나 좋은 향기를 풍긴다고는 할 수 없는 꽃을 피우면서 번성하고 있다. 나는 다만 비극적 세계관의 가장 존귀한 적대세력에 대해서만 말하고자 할 뿐이다. 이 경우 내가 가장 존귀한 적대세력으로 의미하고 있는 것은 그 조상 소크라테스를 필두로 하면서 낙천주의를 자신의 가장 깊은 본질로 갖는 학문을 의미한다. 내게는 비극의 재탄생 - 독일 정신을 위해서 이외에 다른 복된 희망이 존재할 것인가! - 을 보증하는 것처럼 보이는 세력들도 곧 거명될 것이다.

 

저 싸움의 한복판에 뛰어들기 전에 이제까지 획득한 인식의 갑옷을 입기로 하자. 여러 예술을 모든 예술작품의 필연적인 생명의 원천으로 간주되는 유일한 원리로부터 이끌어내려고 노력하는 모든 사람들과는 정반대로, 나는 그리스인들의 두 예술 신 디오니소스와 아폴론에 시선을 두고 이 두 신에게서 가장 깊은 본질과 최고의 목표에 있어서 서로 다른 두 예술세계의 대표자들을 본다. 아폴론은 개별화의 원리를 찬란하게 변용하는 정령으로서 내 앞에 서 있다. 가상에 의한 구제가 진정으로 달성되기 위해서는 아폴론에 의지할 수 밖에 없다. 이에 반해 디오니소스의 신비적인 환호성에 의해서 개별화의 속박은 분쇄되고 존재의 어머니들에게 이르는 길, 사물의 가장 깊은 핵심에 이르는 길이 열리게 된다. 아폴론적 예술로서의 조형예술과 디오니소스적 예술로서의 음악 사이에는 거대한 대립이 존재하는 바, 위대한 사상가들 중에서 오직 한 사람만이 이러한 대립을 분명하게 보았다. 그는 그리스 신화의 상징적 표현의 안내를 받지 않고도 음악에 모든 다른 예술과는 다르면서도 그것들보다 뛰어난 성격과 근원이 있음을 인정했던 것이다. 왜냐하면 음악은 모든 다른 예술처럼 현상에 대한 모사가 아니라 의지 자체의 직접적인 모사이며, 따라서 세계의 모든 물질적인 것에 대해서 형이상학적인 것, 모든 현상들에 대해서 물자체를 표현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모든 미학 가운데에서도 가장 중요한 인식이며, 미학을 보다 진지한 의미에서 해석한다면 이러한 인식에서 비로소 미학은 시작된다고 할 수 있다. 리하르트 바그너는 이 가장 중요한 인식에 자신의 도장을 찍어서 그것이 영원한 진리임을 강조하면서 그의 「베토벤론」에서 이렇게 확언하고 있다. 음악은 결코 아름다움의 범주에 따라서가 아니라 모든 조형예술과는 전혀 다른 미학원리에 따라서 측정되어야만 한다고. 비록 그릇된 미학이 오도되고 타락한 예술의 손 안에서 놀아나면서 조형세계에서만 타당한 아름다움의 개념에 의거하여, 음악에게 조형예술의 작품이 주는 것과 유사한 효과를, 즉 아름다운 형상들에 대한 쾌감의 유발을 요구할지라도 말이다. 나는 저 거대한 대립을 인식하게 된 후, 그리스 비극의 본질에 접근하고 이와 함께 그리스 정신의 가장 심원한 계시에 육박해 보려는 절실한 욕구를 느꼈다. 왜냐하면 이제야 비로소 나는 우리의 통속미학의 상투적인 이론을 넘어서 비극의 근본문제를 내 영혼 앞에 생생하게 제시할 수 있는 마법의 능력을 가졌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능력을 통해서 나에게는 그리스적인 것을 꿰뚫어보는 이상할 정도로 독특한 시선이 주어졌다. 그에 따라 내 눈에는, 그렇게도 뽐내고 있는 우리의 고전 그리스학이 오늘날까지도 주로 그림자놀이와 피상적인 것만을 즐길 줄 아는 것으로 나타난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으로 저 근본문제를 다루어보고자 한다. 그 자체로서 분리되어 있는 아폴론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이라는 저 예술적 힘들이 서로 나란히 활동하게 되면 어떠한 미적 효과가 나타날 것인가? 좀 더 간단하게 묻는다면 음악은 형상과 개념에 대해서 어떤 관계를 갖는가? 이러한 물음에 대해서는 쇼펜하우어가 가장 상세하게 자신의 견해를 표명하고 있다. 바그너는 바로 이와 관련하여 쇼펜하우어와 서술이 비길 데 없이 명확하고 투명하다고 찬양하고 있다. 나는 여기에서 그 전문을 소개할 것이다. 

 

"이 모든 것에 의거하여 우리는 현상하는 세계와 음악을 동일한 사물의 서로 다른 표현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이 동일한 사물 자체가 서로 대응하는 이 둘을 매개하는 유일한 것이며, 저 대응관계를 통찰하기 위해서는 이 매개체를 인식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러한 대응관계에 따라서 음악이 세계의 표현으로서 간주될 경우 그것은 최고로 보편적인 언어이다. 음악은 심지어 개념의 보편성에 대해서, 개개의 사물에 대해서 개념의 보편성이 갖는 관계와 유사한 관계를 가질 정도이다. 그러나 음악의 보편성은 저 공허한 추상의 보편성은 아니고 전적으로 다른 종류의 것이며 철저하게 명료한 규정성과 결합되어 있다. 이 점에서 음악은 기하학적인 도형이나 숫자와 유사하다. 이것들은 모든 가능한 경험대상들의 보편적 형식이며 모든 것에 선험적으로 적용될 수 있지만 추상적이지 않고 직관될 수 있으며 철저하게 규정되어 있다. 의지의 모든 가능한 노력, 흥분, 표현, 즉 이성이 감정이라는 폭넓은 부정적인 개념 안에 포함시켜 버리는 인간 내면의 저 모든 상태들은 무한히 많은 멜로디로 표현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들은 항상 소재를 사용하지 않고 순수한 형식의 보편성 속에서 표현될 수 있으며, 현상에 따르지 않고 물자체에 따라서 표현될 수 있으며, 현상의 가장 내적인 영혼이 형체 없이 표현될 수 있는 것이다. 음악이 모든 사물들의 참된 본질에 대해서 갖는 이러한 내적인 관계로부터 다음과 같은 현상도 설명될 수 있다. 그것은 어떤 장면, 줄거리, 사건, 환경에서 그것들에 적합한 음악이 흐르면 음악은 우리에게 그것들의 가장 비밀스런 의미를 해명해주는 것처럼 보이며 그것들에 대한 가장 올바르면서도 가장 명료한 주석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이는 어떤 교향곡이 주는 인상에 완전히 몰입한 사람이 음악을 들으면서 마치 삶과 세계의 가능한 모든 사태들이 자신의 곁을 스쳐 지나가는 것을 보고 있는 것처럼 느끼는 것과 동일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정신이 들고 나면 그는 자기 눈앞에 떠다니던 사물들과 저 음악 사이에 어떠한 유사성도 발견해 낼 수 없다. 이는 이미 언급했던 것처럼 음악은 다른 예술들과는 달리 현상,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의지가 객관화된 것의 모사가 아니라 의지 자체의 직접적 모사이고, 세계의 모든 물질적인 것에 대해서 형이상학적인 것을 표현하며 모든 현상에 대해서 물자체를 표현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세계를 구체화된 음악, 구체화된 의지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사실로부터 음악이 왜 모든 형상, 즉 현실생활과 세계의 모든 정경을 보다 높은 의미를 가지고 나타나게 하는 지를 설명할 수 있다. 물론 선율이 주어진 현상의 내적 정신과 일치하면 할수록 현상들의 의미는 그만큼 더 높아진다. 사람들이 하나의 시를 노래로서 혹은 구체적 묘사를 무언극으로서 혹은 이 양자를 오페라로서 음악에 종속시킬 수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음악이라는 보편언어에 종속되어 있는 인간생활의 개개의 모습들이 철저한 필연성과 함께 음악에 결합되어 있거나 그것에 대응하는 것은 아니다. 인간생활의 개개의 모습들이 음악에 대해서 갖는 관계는, 하나의 임의적 실례가 하나의 보편적인 개념에 대해서 갖는 관계와 동일하다. 그것들은 음악이 단순한 보편적인 형식 속에서 표현하는 것을 구체적인 특정한 현실 속에서 표현한다. 왜냐하면 선율은 보편개념과 마찬가지로 어느 정도는 현실이 추상된 것이기 때문이다. 현실, 즉 개개의 사물들의 세계는 직관될 수 있는 것, 특수하고 개별적인 것, 개별적인 경우들을 보편적인 개념뿐 아니라 보편적인 선율에도 제공해 준다. 그러나 개념과 선율의 보편성은 어떤 점에서는 서로 대립된다. 개념은 무엇보다도 직관으로부터 추상된 형식일 뿐이며 말하자면 사물들에서 벗겨 낸 껍질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전적으로 추상체에 불과하다. 이에 반해 음악은 모든 형태화에 선행하는 가장 내밀한 핵심, 사물의 심장을 제공한다. 이러한 관계는 스콜라 철학의 언어로 잘 표현될 수 있다. 즉 개념들은 사물 이후의 보편이지만, 음악은 사물 이전의 보편이며, 현실은 사물 속의 보편이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어떤 작곡과 어떤 구체적인 묘사 사이에 하나의 관계가 성립될 수 있다는 것은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양자는 세계의 동일한 내적 본질의 상이한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는 데에 근거한다. 어떤 개별적인 경우에 그러한 관계가 실제로 존재한다면, 즉 음악가가 주어진 사건의 핵심을 이루고 있는 의지의 활동을 음악이라는 보편적인 언어로 표현할 줄 안다면 그 노래의 선율, 오페라의 음악은 풍부한 표현력을 갖게 될 것이다. 그러나 작곡가가 작곡과 구체적인 묘사 사이에 대응관계를 발견할 경우, 이러한 대응관계는 그의 이성이 의식하지 못한 채 세계의 본질에 대한 직접적인 인식으로부터 출현해야 하며 명확한 의도와 함께 개념에 의해서 매개된 모방이어서는 안 된다. 그렇지 않을 때 음악은 내적인 본질, 의지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현상만을 불충분하게 모방하게 된다. 이런 일은 원래 모방하는 모든 음악이 하고 있는 것이다." -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1 309p』

 

이와 같이 우리는 쇼펜하우어의 이론에 따라서 음악을 의지의 언어로서 직접적으로 이해하게 되고, 우리의 상상력은 우리가 볼 수는 없지만 생기 있게 움직이면서 우리에게 말을 걸어오는 저 영의 세계에 형태를 부여하고 유사한 실례 안에서 구체화하고 싶은 자극을 느끼게 된다. 다른 한편으로 형상과 개념은 진실로 그것에 일치하는 음악이 작용하게 되면 고양된 의미를 갖게 된다. 따라서 디오니소스적 예술은 아폴론적 예술에 보통 두 가지 작용을 한다. 첫째로 음악은 디오니소스적인 보편성을 비유의 형식으로 관조하게 하며, 둘째로 음악은 비유적인 형상이 최고의 의미를 가지고 나타나게 한다. 깊이 생각해 보면 그 자체로 이해될 수 있는 이러한 사실들로부터 음악의 능력은 신화, 즉 가장 유의미한 실례, 다름 아닌 비극적 신화를 낳는 데 있다는 사실이 밝혀진다. 음악은 디오니소스적 인식에 대해서 비유의 형식으로 이야기하는 신화를 낳는 것이다. 나는 서정시인이라는 현상을 고찰할 때, 음악은 서정시인 속에서 아폴론적 형상을 빌려서 자신의 본질을 알리려고 고투한다고 말했다. 이는 음악이 최고로 고양될 때는 필연적으로 최고의 형상화에 도달하려고 해야만 한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이렇게 생각하면 음악이 자신의 본래의 디오니소스적 지혜에 대한 상징적 표현을 발견할 줄 안다는 것도 가능한 것으로 생각해야만 한다. 이러한 표현을 비극에서 그리고 일반적으로 비극적인 것이라는 개념에서 찾지 않는다면 어디에서 찾아야 할 것인가?

 

비극적인 것은 보통 가상이라든가 아름다움이라든가 하는 유일한 범주에 따라서 이해되는 에술의 본질로부터는 결코 진정한 방식으로 도출될 수 없다. 개체의 파멸에서 우리가 느끼는 기쁨은 음악의 정신으로부터 비로소 이해된다. 왜냐하면 그러한 파멸의 하나하나의 예들에서 우리에게 분명하게 드러나는 것은 디오니소스적 예술이라는 영원한 현상뿐이기 때문이다. 디오니소스적 예술이야말로 말하자면 개별화의 원리 배후에 있는 저 전능의 의지를 표현하는 예술, 모든 현상의 피안에 존재하며 어떠한 파멸에도 굴하지 않는 영원한 생명을 표현하는 예술이다. 비극적인 것에 대해 우리가 형이상학적 기쁨을 느끼는 것은 본능적으로 무의식적인 디오니소스적 지혜가 형상의 언어로 번역되어 있기 때문이다. 의지의 최고의 현상인 비극의 주인공이 파멸되는 것을 보면서 우리는 쾌감을 느낀다. 왜냐하면 주인공은 단지 현상일 뿐이며 주인공이 파멸한다고 해서 의지의 영원한 생명이 손상되지는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믿는다." 비극은 이렇게 외친다. 그리고 음악은 이러한 생명의 직접적인 이념이다. 조형예술은 이것과는 전혀 다른 목표를 가지고 있다. 여기서 아폴론은 현상의 영원성을 밝게 찬미함으로써 개체의 고뇌를 극복한다. 여기서는 삶에 내재하는 고뇌에 대해서 아름다움이 승리를 거둔다. 고통은 어떤 의미에서 자연의 얼굴에서 말끔히 씻어진다. 동일한 자연이 디오니소스적 예술과 그것의 비극적 상징법에서는 자신의 왜곡되지 않은 참된 소리로 우리에게 이렇게 외친다. "그대들은 나처럼 존재하라! 현상의 끊임없는 변천 속에서 영원히 창조하고, 인간으로 하여금 생존하도록 영원히 강제하며, 현상의 이러한 변천에 영원히 만족하는 근원적인 어머니인 나를!"

 

눈에비친햇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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