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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 Nietzsche(1844-1900)/비극의 탄생

비극의 탄생 -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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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이제 우리는 소크라테스가 키클롭스의 눈처럼 큰 눈으로 비극을 바라보는 모습을 생각해 보자. 그 눈에는 한 번도 예술적 감동의 불꽃이 불타오른 적이 없었다. 그리고 그 눈이 왜 디오니소스적인 심연 속을 기쁜 마음으로 들여다볼 수 없었는지를 생각해 보자. 플라톤이 말한다. '숭고하고 높이 찬양받는' 비극예술에서 그 눈은 본래 무엇을 보아야만 했던가? 그것은 원인 없는 결과, 결과 없는 원인과 같이 비합리적인 것을 보았다. 더구나 비극예술은 모든 것이 너무나 다채롭고 다양하여 사려 깊은 기질에는 반감을 불러 일으키고, 민감하고 쉽게 매혹되는 영혼에는 위험한 도화선이 된다. 우리는 그가 이해할 수 있었던 유일한 문학 장르가 무엇인지를 알고 있다. 그것은 이솝 우화이다. 그는 이솝우화를 정직하고 선량한 겔레르트가 꿀벌과 암탉의 우화에서 시가를 찬미할 때 지었던 것과 같은 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받아들였다.

 

"시가가 무슨 소용이 있는지는 나를 보면 알리라.

그다지 지성을 갖지 못한 사람에게

비유를 통해서 진리를 말해 주는 것."

 

그런데 비극예술이 "별로 지성적이지 못한 사람들,' 즉 철학자가 아닌 사람들에게 호소한다는 점을 도외시한더라도, 비극예술은 소크라테스에게는 한 번도 '진리를 말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이것이 비극을 멀리해야 할 두 가지 이유였다. 플라톤처럼 소크라테스도 비극은 단지 기분 좋은 것만 표현하고 유익한 것은 표현하지 않은 대중에 아부하는 예술로 간주했다. 따라서 그는 제자들에게 이러한 비철학적 유혹에 대해서 절제심과 함께 엄격하게 거리를 둘 것을 요구했다. 그 결과는 성공적이어서 당시 비극시인이었던 청년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의 제자가 되기 위해 가장 먼저 자신의 시작품들을 불태워버렸을 정도였다. 그러나 어찌할 수 없는 어떤 재능이 소크라테스적인 원리에 저항하는 경우에도, 이 원리의 힘은 여전히 강력해서 저 거대한 성격의 힘과 연합하여 시가 자체를 그때까지는 알려지지 않았던 새로운 자리로 내몰아 버릴 수 있었다.

 

이러한 사실에 대한 한 예가 바로 방금 언급한 플라톤이다. 비극과 예술 일반을 단죄한다는 점에서는 자기 스승의 소박한 냉소주의에 절대로 뒤지지 않았던 그는 자신의 극히 깊은 예술가적 성향 때문에 하나의 예술형식을 만들어 내지 않을 수 없었다. 이 형식은 그가 추방한 기존의 에술형식들과 내적으로 닮아 있었다. 플라톤이 이전의 예술에 대해서 가했던 주된 비난은 그것이 어떤 가상의 모방이라는 것, 따라서 경험적인 세계보다 더 열등한 낮은 영역에 속한다는 것이었지만, 이러한 비난은 무엇보다 이 새로운 예술작품에 가해져서는 안 되었다. 그래서 우리는 플라톤이 현실을 초월하여 저 사이비 현실의 근저에 놓여 있는 이데아를 표현하려고 노력하는 것을 보게 된다. 이와 함께 사상가 플라톤은 시인으로서의 그에게 고향이었던 곳, 즉 소포클레스와 과거의 예술 전체가 플라톤의 저 비난에 엄숙히 항의하는 근거지였던 곳에 우회로를 통해서 도달하게 된 것이다. 비극이 이전의 모든 예술장르들을 자신 안에 흡수했다고 한다면, 약간 다른 의미에서지만 우리는 플라톤의 대화편에 대해서도 동일하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플라톤의 대화편은 기존의 모든 형식과 문제를 혼합함으로써 형성되었기 때문에 이야기, 서정시, 연극 사이에서, 산문과 운문 사이에서 부유하고 있으며 통일된 언어형식이라는 이전의 엄격한 법칙을 깨뜨리고 있다. 이러한 방향에서 더 나간 사람들이 견유학파의 작가들이었다. 그들은 극히 다양한 문체로 운문과 산문 형식 사이를 오가면서, 그들이 실제의 삶에서 구현하곤 했던 '광란의 소크라테스'라는 문학적 형상을 만들어 내었다. 플라톤의 대화편은 난파당한 이전의 시가가 자신의 모든 자식들을 이끌고 올라타 목숨을 구한 조그만 조각배와도 같았다. 좁은 선창 속에 내몰려 소크라테스라는 한 명의 사공에게 걱정스럽게 복종하면서 그들은 이제 새로운 세계로 들어가게 되었다. 이 새로운 세계는 이러한 행렬의 환상적인 모습을 보는 데 결코 싫증을 내지 않았다. 사실 플라톤은 후세 전체를 위해서 새로운 예술형식의 모범을 제공했다. 즉 그는 소설의 모범을 제공한 것이다. 소설은 무한히 높여진 이솝우화라고 할 수 있다. 이것에서 시가는 수백 년동안 변증론적 철학이 신학에 대해서 가졌던 지위와 유사한 지위를 변증론적 철학에 대해서 갖고 있다. 즉 시녀로서의 지위를 갖는 것이다. 이것이 시가에 주어진 새로운 지위였다. 마신적인 소크라테스의 압력 아래 플라톤은 시가를 그러한 지위로 내몬 것이다.

 

여기서에 철학적 사상이 무성하게 자라서 예술을 뒤덮어버리며 예술로 하여금 변증론이라는 줄기에 매달리도록 강요한다. 아폴론적 경향은 논리적 도식주의 안에 들어앉아 버렸다. 우리는 에우리피데스에게서 이와 유사한 아폴론적 경향의 도식화를 볼 수 있었고, 또한 디오니소스적 경향이 자연주의적으로 묘사된 격정으로 변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플라톤의 연극에서 변증론적인 주인공인 소크라테스는 그와 성질이 흡사한 에우리피데스의 주인공을 생각나게 한다. 에우리피데스의 주인공은 이유와 반대이유를 내세워 자신의 행동을 변호해야 하는데, 이 때문에 우리의 비극적 연민을 상실할 위험이 많다. 왜냐하면 변증론의 본질 속에는 하나의 결론이 나올 때마다 환호를 올리면서 축하하고 차가운 명석성과 차가운 의식 속에서만 숨을 쉴 수 있는 저 낙천주의적 요소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누구나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낙천주의적 요소는 일단 비극 속에 침투해 들어가면 비극의 디오니소스적 영역을 점차 잠식하면서 그것을 필연적으로 자멸로 몰아넣을 수밖에 없다. 이러한 자멸이란 시민극으로의 투신 자살인 것이다. "덕은 지식이다. 죄는 오직 무지에서 비롯된다. 유덕한 자는 행복한 자이다."라는 소크라테스의 명제들의 귀결만을 떠올려 보자. 낙천주의의 이 세 가지 근본형식이 비극의 죽음을 가져왔다. 이제 유덕한 주인공은 변증가여야 하고, 덕과 지식, 신앙과 도덕 사이에는 필연적이고 명백한 연결이 존재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제 초월적인 정의라는 아이스킬로스의 해결책은 상투적인 기계 장치의 신을 사용하는 '시적 정의'라는 평면적이면서도 뻔뻔스러운 원리로 전락해 버렸기 때문이다.

 

이 소크라테스적-낙천주의적 무대세계에 대해서 이제 합창단과 비극의 음악적-디오니소스적 토대 전체는 어떤 모습으로 나타났을까? 그것은 우연적인 것으로 그리고 비극의 기원에 대한, 없어도 좋을 추억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우리가 보았던 것처럼 합창단은 비극과 비극적인 것 일반의 원인으로 간주될 때에만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소포클레스에서 이미 합창단에 대해 당혹감이 보이고 있다. 이것이 일찍이 소포클레스에서 비극의 디오니소스적인 기반이 무너지기 시작했다는 것을 시사하는 중요한 징표이다. 그는 더 이상 합창단에게 연극효과의 중요한 부분을 위임하려 들지 않았으며, 합창단의 영역을 합창단이 거의 배우들과 동등한 자리에 나타나게 하는 정도로 제한시켜 버렸다. 이는 마치 합창단이 합창석에서 무대 위로 올려진 것처럼 보였다. 비록 아리스토텔레스가 합창단에 대한 이러한 견해에 찬동했을지라도 이와 함께 비극의 본질은 완전히 파괴되었다. 합창단의 이러한 위치 이동은 소포클레스가 매번 자신의 연극을 상연하면서 추천하고 있고, 더 나아가 전승에 따르면 글을 통해서까지 추천하고 있지만, 이러한 위치 이동이야말로 합창단이 파괴되기 시작하는 첫걸음이다. 그 뒤를 이어 에우리피데스, 아가톤과 신화극에서 합창단의 파멸은 급속도로 진행된다. 낙천주의적 변증론은 삼단논법의 채찍을 휘둘러 비극에서 음악을 추방한다. 즉, 그것은 디오니소스적 상태의 유일한 표현이자 형상화이자 음악의 가시적 상징화이며 디오니소스적 도취를 표현하는 꿈의 세계로서 해석될 수 있는 비극의 본질을 파괴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소크라테스 이전에 반디오니소스적 경향이 이미 작용하고 있었다고 가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이 경향은 소크라테스 속에서 전례없이 크게 표현되었을 뿐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소크라테스와 같은 현상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라는 물음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플라톤의 대화편을 보면알 수 있는 것처럼 우리는 소크라테스라는 현상을 단지 해체하는 부정적인 힘으로 파악할 수는 없다. 그리고 소크라테스적 충동이 가장 직접적으로 디오니소스적 비극의 해체를 초래했다는 것은 분명하지만, 소크라테스의 심오한 인생체험을 고려할 때 우리는 이렇게 묻지 않을 수 없다. 도대체 소크라테스와 예술 사이에는 필연적으로 단지 대립관계만이 성립하는가, 그리고 '예술적 소크라테스'의 탄생이라는 것은 그 자체가 모순된 것인가라고.

 

저 압제적 논리가 소크라테스는 가끔 예술에 대해 생각하면서 자신에게 어떤 것이 결여되어 있다는 느낌, 공백감, 반쯤의 자책감, 어쩌면 어떤 의무를 게을리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라는 느낌을 갖곤 했다. 그가 옥중에서 친구들에게 말한 것처럼 그에게는 종종 똑같은 꿈이 찾아와서 '소크라테스여, 음악을 하라!라고 언제나 똑같은 말을 되풀이했다고 한다. 소크라테스는 최후의 날이 가까워질 때까지 자신의 철학적 사색이 최고의 뮤즈 예술이라고 자신했으며, 신이 저 '비속하고 대중적인 음악'을 생각하고 있으리라고는 믿지 않았다. 마침내 감옥에서 그는 양심의 짐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자신이 경멸했던 음악을 하는 것에 동의했다. 그가 아폴론에게 바치는 노래를 짓고 이솝 우화 두서너 개를 운문으로 바꾼 것도 이런 심정에서 였다. 그가 이렇게 습작을 하도록 한 것은 다이모니온의 경고하는 목소리와 유사한 것이었다. 그것은 그가 야만족의 왕처럼 고귀한 신상을 이해하지 못하고 이러한 몰이해를 통해서 신에게 죄를 지을 위험에 처해 있다는 사실에 관한 아폴론적 통찰이었다. 소크라테스가 꾼 꿈 속에서의 저 말은 논리적인 천성의 한계에 대한 아폴론적 통찰이었다. 소크라테스가 군 꿈 속에서의 저 말은 논리적인 천성의 한계에 대한 의혹을 나타내는 유일한 징표이다. 아마도 - 따라서 그는 자문하지 않을 수 없었다 - 나에게 이해될 수 없는 것이라고 불합리한 것은 아니지 않을까? 어쩌면 논리가를 추방해 버린 지혜의 왕국이 있지 않을까? 예술은 학문에 없어서는 안 되는 상관물이자 보완물이 아닌가?

 

 

눈에비친햇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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