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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 Nietzsche(1844-1900)/비극의 탄생

비극의 탄생 -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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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비극은 그것과 자매관계에 있는 보다 오래된 예술 장르와는 다른 방식으로 몰락했다. 그것은 풀 수 없는 갈등의 결과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그것은 비극적으로 죽은 것이다. 반면에 다른 모든 예술들은 고령의 나이에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답고 평온하게 숨을 거두었다. 훌륭한 자손을 남기고 고요하게 세상을 하직하는 것이 행복한 자연상태에 어울리는 것이라면, 저 보다 오래된 예술 장르들의 종말은 그러한 행복한 자연상태를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그것들은 서서히 사라져 갔다. 그리고 죽어가는 자들의 눈앞에는 이미 그들보다 더 아름다운 자손들이 서 있으며 기운찬 모습으로 초조한 듯 머리를 쳐들고 있었다. 이에 반해 그리스 비극이 죽었을 때는 엄청난 공허가 생겼고, 이러한 공허는 도처에서 통절하게 느껴졌다. 옛날 티베리우스시대에 그리스 뱃사람들이 절해의 고도에서 "위대한 판(목양신)은 죽었다"라고 처절하게 외치는 소리를 들은 것처럼, 이제 "비극은 죽었다. 시 자체도 비극과 함께 사라졌다! 너희들 보잘것 없고 말라빠진 아류들은 저승으로 사라져라! 거기에서 너희들은 옛 거장들의 빵부스러기라도 한번 배불리 먹는 것이 나을 것이다!"라는 소리가 고통에 가득찬 곡성처럼 그리스 세계 전역에 울려 퍼졌다.

 

그러나 이윽고 새로운 예술 장르가 꽃피어 아티카 비극을 자신의 선구자이자 스승으로서 숭배하게 되었다. 여기서 우리는 놀랍게도 다음과 같은 사실을 인식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새로운 예술 장르는 분명히 자기 어머니의 모습을 닮았지만, 그 모습이란 어머니가 오랫동안 죽음과 투쟁하는 단말마의 고통 속에서 보여주었던 그 모습에 지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말이다. 비극의 이러한 단말마의 고통과 싸웠던 자가 에우리피데스였다. 저 새로운 예술 장르는 '신아티카 희극'으로서 알려져 있다. 비극의 너무나도 비참한 횡사의 기념비로서 이 희극에는 비극의 타락한 형태가 명맥을 유재하고 있었다.

 

이러한 연관을 고려해 볼 때 새로운 희극의 작가들이 비극작가 에우리피데스에 대해서 느꼈던 열렬한 애착도 납득할 수 있다. 따라서 에우리피데스가 저승에서 아직도 제 정신을 유지하고 있다는 확신만 선다면 그를 만나기 위해서 지금 당장 목매달아 죽어도 좋겠다던 필레몬의 소망도 그다지 이상할 것이 없다. 그러나 에우리피데스가 메난드로스 및 필레몬과 어떤 점을 공통으로 가지고 있었는지, 에우리피데스의 어떤 점이 그 두 사람에게 에우리피데스가 그렇게 모범이 될 정도로 자극을 주었는지를 장황함을 피하여 극히 간략하게 말하자면, 관객이 에우리피데스에 의해서 무대로 올라오게 되었다고 말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에우리피데스 이전의 비극작가들이 주인공들을 어떠한 소재로부터 형성했으며, 현실의 충실한 가면을 무대에 올려 놓는다는 의도가 그들과는 얼마나 거리가 먼 것이었는가를 이해하는 사람은 에우리피데스가 전혀 다른 경향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에 의하여 일상적인 인간이 관객석으로부터 무대 위로 올라오게 된 것이다. 전에는 단지 위대하고 대담한 특징만을 표현했던 거울이 이제는 자연의 실패한 선까지도 착실하게 재현하는 꼼꼼한 충실성을 보여주게 되었다. 고대 예술의 전형적인 그리스인인 오디세우스가 이제 새로운 시인들의 손에 의하여 그래쿨루스(Graeculus)의 모습으로 전락하게 되었고, 이 인물은 이후 선량하고 눈치 빠른 노예로서 무대의 중심에 서게 된다. 에우리피데스가 아리스토파네스의 『개구리』에서 자신의 공적으로 내세우고 있는 것, 즉 자신이 조제한 약으로 비극을 그 과대한 비만증에서 구했다는 것을 우리는 무엇보다도 그의 주인공들에게서 엿볼 수 있다. 요컨대 이제 관객들은 에우리피데스의 무대 위에서 자신들의 분신을 보게 되었으며, 그 분신이 그렇게도 말을 잘 할 줄 아는 것을 보고 기뻐했다. 그러나 이러한 기쁨이 전부가 아니었다. 사람들은 에우리피데스에게서 말하는 것을 배웠고, 에우리피데스는 아이스킬로스와의 경연에서 그러한 사실에 대해서 자랑하고 있다. 민중은 이제 자기 덕분에 교활하기 그지없는 소피스트적인 논법으로 교묘하게 관찰하고 토론하고 추론하는 법을 배우게 되었다는 것이다. 공중언어의 일대 변혁에 의해서 에우리피데스는 새로운 희극을 가능하게 하였다. 왜냐하면 에우리피데스 이후부터 일상사를 무대 위에서 표현하는 방법과 격언법은 누구나 아는 것이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그때까지 언어의 성격을 규정한 것은 비극에서는 반신이었고 희극에서는 술 취한 사티로스 혹은 반인이었다. 이제 에우리피데스 자신이 모든 정치적 희망을 걸었던 서민적 범용성이 발언권을 얻게 되었다. 그래서 아리스토파네스 작품 속에 나오는 에우리피데스는 자신이 모든 사람들이 쉽게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일반적이고 누구나 잘 알고 있는 일상적인 삶과 충동을 표현했다고 자찬하고 있다. 이제 모든 대중이 철학을 하고 전에 없었던 영리함으로 토지와 재산을 관리하며 소송을 하게 되었다면, 이것은 자신의 공적이며 자신이 민중 속에 심어 놓은 지혜의 성과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제 새로운 희극은 이렇게 준비되고 계몽된 대중 앞에 등장할 수 있었고, 에우리피데스는 어떤 의미에서 새로운 희극 합창단의 교사가 된 것이다. 물론 이번에는 관객이라는 합창단이 연습을 해야 하는 것이 달랐을 뿐이다. 이 합창단이 에우리피데스식의 음조로 노래 부르는 연습을 마치자마자 저 장기놀이와 유사한 연극, 즉 약삭빠르고 교활한 것이 계속 승리하는 새로운 희극이 탄생한 것이다. 그러나 합창교사 에우리피데스의 인기는 그칠 줄 몰랐다. 아니 비극작가가 비극과 마찬가지로 죽었다는 사실을 사람들이 몰랐다면 그에게서 더 많은 것을 배우기 위해서 사람들은 죽음도 불사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인은 자신의 불멸성에 대한 믿음을 비극과 함께 포기해 버렸으며, 이상적 과거에 대한 믿음뿐 아니라 이상적 미래에 대한 믿음도 포기해 버렸다. "늙으면 경박하고 변덕스럽다"라는 묘비명 속의 말은 노년기의 그리스 세계에 대해서도 타당하다. 찰나, 기지, 경솔, 변덕은 그것(노년기의 그리스 세계)의 최고의 신이 되었다. 적어도 정신상태라는 면에서는 제5의 계급, 즉 노예가 지배하게 된 것이다. '그리스적 명랑성'에 대해서 여전히 말할 수 있다면, 이제 그것은 무거운 책임을 질 줄 모르고 위대한 것을 추구하지도 않으며 현재의 것보다도 과거의 것이나 미래의 것을 높이 평가하지 않는 노예의 명랑성이다. '그리스적 명랑기'의 이러한 가상이야말로 기독교 초기 400년 동안, 신에 대한 외경심에 차 있던 심원한 인물들을 격분시켰던 것이다. 진지함과 공포로부터의 이러한 여성적인 도피, 안이한 향락에 대한 이러한 비겁한 자기만족이 경멸할만한 것으로뿐 아니라 본래부터 반기독교적인 태도로 보였다. 그리고 수 백 년 동안 사람들 사이에 지속되어 온 고대 그리스관이 고대 그리스 세계를 거의 극복 불가능할 정도로 집요하게 저 분홍빛 명랑성이 지배했던 세계로 보았던 것도 그들의 영향 때문이었다. 그러한 고대 그리스관에 따르면 마치 비극의 탄생, 비밀제의, 피타고라스, 헤라클레이토스 등이 있었던 기원전 6세기가 전혀 존재하지 않았고, 그 위대한 시대의 예술작품들이 전혀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것들 모두는 그러한 노년기의 노예적인 생존 욕구나 명랑성을 근거로 해서는 설명될 수 없으며, 완전히 다른 세계관을 근거로 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앞에서 에우리피데스가 관객들을 무대 위로 끌어올려 관객들에게 연극을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을 처음으로 그리고 진정하게 부여했다고 주장했지만, 이러한 주장은 자칫 고대의 비극예술이 관객에 대한 불균형한 관계에서 벗어나지 못했다고 주장하는 것처럼 들릴 수 있다. 그리고 사람들은 예술작품과 관객 사이에 균형있는 관계를 수립하려고 했던 에우리피데스의 급진적 경향을 소포클레스를 넘어서는 하나의 진보로서 찬양하고 싶은 유혹에 사로잡힐지도 모른다. 그러나 '관객'이란 하나의 말에 불과하며 절대로 동질적인 집단도 아니고 그 자체로 고정된 양을 갖는 것도 아니다. 숫자에서만 힘을 갖는 하나의 힘에 에술가가 순응해야 할 의무는 존재하지 않는다. 예술가가 재능과 의도라는 면에서 자신이 관객들 중 어느 누구보다도 우월하다고 느낀다면, 그는 그보다 열등한 모든 사람들의 공통된 의견보다는 이들에 비해 최고의 재능을 가진 몇 명의 관객만을 염두에 둘 것이다. 사실은 그리스 예술가 중에서 일생에 걸쳐서 에우리피데스보다 큰 대담함과 자부심으로 관객을 다루었던 사람은 없었다. 그는 대중이 자신의 발 아래 꿇어 엎드릴 때조차도 그들을 의연히 무시하면서 자기 고유의 경향, 즉 그가 대중을 사로잡을 수 있었던 그 경향을 공공연하게 정면에서 공격했다. 이 천재가 관객이라는 악령들의 무리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경외심을 가지고 있었다면, 그는 생애의 중반에 이르기도 전에 실패의 타격으로 무너져 버렸을 것이다. 이러한 점을 고려할 때 우리는, 에우리피데스가 관객을 무대 위로 끌어올려서 진정한 판단능력을 갖추게 해주었다는 우리의 말이 단지 잠정적인 것에 지나지 않았으며, 우리는 그의 경향을 보다 깊이 이해하려고 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오히려 역으로 아이스킬로스와 소포클레스가 생시뿐 아니라 사후에도 민중의 전적인 사랑을 받았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따라서 에우리피데스의 이 선배들의 경우에는 예술작품과 관객 사이에 불균형이 존재했다고 말할 수 없다. 항상 창작욕에 사로잡혀 있었던 재능 많은 예술가인 에우리피데스를, 가장 위대한 시인이라는 칭송의 태양이 빛나고 민중의 사랑이라는 맑은 하늘이 펼쳐져 있는 길에서 폭력적으로 몰아내 버린 것은 무엇이었을까? 관객에 대한 어떤 기묘한 고려 때문에 그는 관객에게서 등을 돌리게 되었는가? 관객을 지나치게 존중한 나머지 관객을 경멸할 수 있었다는 것이 극에게는 어떻게 해서 가능했을까? 

 

에우리피데스는 시인으로서는 자신이 물론 대중보다 우월하지만 관객 중의 두 사람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다고 느꼈다. 바로 이것이 방금 제시된 수수께끼의 해답이다. 그는 대중을 무대 위로 끌어올렸지만, 저 두 명의 관객만을 그의 모든 예술을 제대로 판단할 수 있는 심판관이자 거장으로서 존경했다. 그들의 지시와 경고에 따라 그는 그때까지 축제공연 때마다 보이지 않는 합창단으로서 관객석에 나타났던, 느낌과 열정과 체험의 세계 전체를 무대 위 주인공들의 영혼 속에 투입했다. 이렇게 해서 생기게 된 새로운 등장인물들을 위해서 새로운 말과 새로운 어조를 찾을 때에도 그는 이들의 요구에 따랐다. 그가 관중의 법정에 의해서 다시 한 번 단죄되는 것을 보았을 때에도 오직 이 두 사람의 목소리에서 자신의 창작에 대한 타당한 판결과 승리를 약속하는 격려의 말을 들었다.

 

이 두 관객 중의 한 사람은 에우리피데스 자신이다. 시인으로서가 아니라 사상가로서의 에우리피데스 말이다. 사상가로서의 에우리피데스에 대해서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레싱의 경우와 유사하게, 에우리피데스의 비범하면서도 풍부한 비판적 재능이 생산적인 예술충동을 낳지는 않았을지라도 지속적으로 자극했다고. 이러한 재능, 즉 자신의 명민한 비판적 사고를 총동원하여 에우리피데스는 극장에 앉아 마치 퇴색한 그림을 세심하게 관찰하는 것처럼 자신의 위대한 선배들의 걸작들에서 획 하나하나, 선 하나하나를 다시 인식하려고 했다. 그리고 이제 아이스킬로스 비극의 보다 깊은 비밀에 정통한 사람에게는 이상할 것이 없는 어떤 일이 그에게 일어났다. 그는 획 하나하나와 선 하나하나에서 헤아릴 수 없는 어떤 것, 즉 사람들의 눈을 현혹시키는 어떤 명확성, 동시에 배경의 수수께끼 같은 깊이, 아니 그보다도 배경의 무한성을 인식했다. 가장 명료한 형체도 항상 불확실하고 해명할 수 없는 것을 암시하는 것 같은 혜성의 꼬리 같은 것을 가지고 있었다. 동일한 어스름 빛이 연극의 구조와 합창단의 의미에도 서려 있었다. 그리고 (고대 비극에서 제시되고 있는) 윤리적 문제의 해결방식은 그에게 얼마나 의혹을 자아내었던가! 신화의 취급은 또 얼마나 이상했던가! 행복과 불행의 분배는 얼마나 불공평했던가! 고대 비극의 언어도 그에게는 많은 점에서 거슬리고 최소한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다. 특히 그는 사태가 단순한 것에 비해서는 너무 과장되게 묘사되어 있고, 등장인물들의 소박한 성격에 비해 볼 때 너무나 수사가 많고 기괴한 사건이 많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래서 그는 극장에 앉아 불안한 가운데 고민하면서 관객으로서 자기는 위대한 선배들을 아무래도 이해하지 못하겠다고 고백했다. 그러나 그에게는 지성이 모든 감상과 창작의 뿌리로 여겨졌기 때문에, 그는 자기 주위를 둘러보면서 아무도 자기처럼 생각하지 않는지, 자신처럼 저 헤아릴 수 없는 느낌을 솔직히 인정하지 않는지를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심지어 최고 수준의 사람들까지도 그에게 불신과 조소를 지었을 뿐이다. 그러나 아무도 그에게 왜 그의 의혹과 이의에 반해서 위대한 거장들이 옳은지를 설명하지 못했다. 이런 괴로운 상태에서 그는 다른 관객 하나를 발견했다. 이 관객은 비극을 이해하지 못했으며 따라서 비극을 중요시하지도 않았다. 이 관객과 연합함으로써 그는 고립에서 벗어나 아이스킬로스와 소포클레스의 예술작품들에 대한 엄청난 투쟁을 시작하는 용기를 가질 수 있었다. 반박논문을 통해서가 아니라, 자기의 비극관을 전통적 비극관에 대결시키는 극작가의 입장에서.

 

 

눈에비친햇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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