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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 Nietzsche(1844-1900)/비극의 탄생

비극의 탄생 -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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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다른 관객의 이름을 거론하기 전에 우리는 잠깐 멈춰서 아이스킬로스의 비극의 본질 속에 들어 있는 모순되고 헤아릴 수 없는 것에 대한 앞서 언급된 인상을 상기해 보자. 아이스킬로스의 비극의 합창단과 비극적 주인공에 대해서 우리가 가졌던 낯선 느낌을 생각해 보자. 우리는 이 두 가지를 우리의 습관이나 전통과 조화시킬 수 없다. 우리가 저 이중성 자체를 그리스 비극의 근원이자 본질로서, 즉 서로 얽혀 있는 두 예술충동인 아폴론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의 표현으로서 재발견하게 될 때 까지는 말이다. 

 

저 근원적이고 전능한 디오니소스적 요소를 비극으로부터 제거하고 비극을 순수하면서도 새롭게 디오니소스적인 예술, 관습과 세계관 위에 건립하는 것, 이것이 이제 보다 밝은 조명 아래서 우리에게 자신을 드러내는 에우리피데스의 경향이다. 

 

에우리피데스 자신이 인생의 황혼기에 이러한 경향의 가치와 의의에 대한 물음을 하나의 신화에서 자신의 동시대인들에게 가장 강력한 어조로 제기했다. 도대체 디오니소스적인 것은 존속해도 좋은가? 그것을 그리스 땅에서 강제로 근절시켜야 하는 것은 아닌가? 그것이 가능하기만 하면 그래야 한다고 시인은 말한다. 그러나 디오니소스 신은 너무나 강력하다. 가장 현명한 적대자조차도 - 『바쿠스의 시녀들』에 나오는 펜테우스 같은 자도 -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디오니소스에게 매혹되고 이렇게 마력에 걸려든 상태에서 나중에 나락으로 떨어지게 되는 것이다. 두 노인, 카드모스와 테이레시아스의 판단은 노년의 이 시인의 판단인 것처럼 보인다. 즉 가장 현명한 몇몇 사람들이 숙고하는 것으로는 저 오래된 민간의 전통, 끝없이 번져가는 저 디오니소스 숭배를 뒤질 수 없다. 아니, 그렇게 놀라운 힘에 대해서는 최소한 외교적으로 조심스러운 관심을 보여주는 것이 낫다. 그러나 이때에도 신이 그러한 미지근한 참여에 화가 나서 그 외교관을 - 여기서는 카드모스와 같은 - 결국은 용으로 변신 시키는 일이 언제라도 일어날 수 있다. 위와 같이 에우리피데스는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 그는 영웅적인 힘으로 오랜 세월에 걸쳐서 디오니소스에게 저항했다. 그러나 결국은 자신의 적을 찬양하면서 스스로 목숨을 끊음으로써 인생을 마감했다. 그는 더 이상 견딜 수 없는 끔찍한 현기증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탑 위에서 몸을 던지는 현기증 환자와 같았다. 저 비극 『바쿠스의 시녀들』은 자신의 경향(소크라테스적 경향)이 실행되는 것을 저지하려는 에우리피데스의 저항과 같은 것이었다. 아아, 그러나 이미 그 경향은 실행되고 말았다! 놀라운 일이 벌어진 것이다. 그 시인이 자신의 경향을 취소하려고 했을 때는 이미 그것이 승리를 거둔 뒤였다. 디오니소스는 이미 비극 무대로부터 쫓겨났고, 그것도 에우리피데스를 통해서 말하는 악마적인 어떤 힘에 의해서 쫓겨났다. 에우리피데스조차도 어떤 의미에서는 하나의 가면에 지나지 않았다. 그를 통해서 말하고 있는 신은 디오니소스가 아니었으며 아폴론도 아니었다. 그것은 새로 태어난 마신 소크라테스였다. 이것은 디오니소스와 소크라테스적인 것의 대립이라는 새로운 대립이다. 그리스 비극작품은 이러한 대립으로 인해 몰락했다. 에우리피데스가 자신의 경향을 취소함으로써 우리를 위로하려고 했을지라도 그것은 도움이 되지 않았다. 가장 훌륭했던 신전은 폐허가 되어 버렸다. 그것이야말로 모든 신전 중에서 가장 훌륭한 신전이었다는 파괴자의 비판과 고백이 무슨 쓸모가 있겠는가? 에우리피데스가 그 벌로 모든 시대의 예술 비평가들에 의해서 용으로 변했다 하더라도 이러한 빈약한 보상에 누가 만족하겠는가?

 

이제 저 소크라테스적 경향을 살펴보자. 이것을 무기로 에우리피데스는 아이스킬로스의 비극과 투쟁했고 그것에 승리했던 것이다. 

 

우리는 이제 이렇게 물어야 한다. 연극을 오직 비디오니소스적 것에 세우려 한 에우리피데스의 의도가 최고의 이상적인 형태로 실현되었을 때, 그것은 어떤 목적을 가질 수 있었는가? 만일 연극이 음악이라는 모태로부터, 디오니소스적인 것의 신비스런 여명으로부터 태어나지 않는다고 한다면 어떠한 형태의 연극이 남겠는가? 오직 '극화된 서사시'만이 남을 것이다. 말할 것도 없이 이러한 아폴론적 예술영역에서 비극적 효과는 존재할 수 없다. 이러한 비극적 효과와 관련해서는 표현된 사건의 내용이 중요한 것이 아닌 것이다. 아니 나는 이렇게까지 주장하고 싶다. 괴테는 자신이 기획한 『나우시카(Naushikaa)』에서 저 목가적 존재의 자살을 - 제5막을 채울 내용이었다 - 비극적인 감동을 일으키는 방식으로 표현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서사적-아폴론적인 것의 힘은 너무나 강력해서 가장 가공할 사물들조차도 가상에 대한 저 즐거움과 가상을 통한 구원으로 마법을 걸어서 우리 눈앞에서 찬란하게 변용시켜 버린다. 극화된 서사시의 작가는 서사 음유시인과 마찬가지로 자신이 떠올리는 형상들과 완전히 융합될 수 없다. 그는 항상 조용히 움직이지 않은 채 먼 눈길로 자신 앞에 있는 형상들을 바라본다. 이렇게 극화된 서사시에서 배우는 근본적으로 여전히 음유시인이다. 그의 모든 연기에는 자신이 내면에서 꿈꾸고 있다는 느낌이 감돌고 있기 때문에, 그는 절대로 완전한 배우가 되지 못한다. 

 

이러한 아폴론적 연극의 이상에 대해 에우리피데스의 작품은 어떠한 연관을 갖는가? 그것은 고대의 엄숙한 음유시인에 대해서 후세의 음유시인이 갖는 관계와 같다. 후세의 음유시인은 플라톤의 『이온』에서 자신의 본질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슬픈 일을 말할 때면 내 눈은 눈물로 가득 찬다. 그러나 내가 끔찍하고 섬뜩한 일을 말할 때면 내 머리칼은 공포로 곤두서고 가슴은 두근거린다." 여기서 우리는 가상 속에서의 서사적 망아라는 것을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진정한 배우의 무감각한 냉담함도 찾아볼 수 없다. 진정한 배우는 자신의 최고의 연기 속에서는 전적으로 가상이며, 가상에 대한 즐거움 자체인 것이다. 에우리피데스는 가슴이 두근거리고 머리털이 곤두서는 배우이다. 소크라테스적 사상가로서 그는 계획을 세우고, 열정적인 배우로서 실행에 옮긴다. 그는 기획 면에서도 실행 면에서도 순수한 예술가는 아니다. 따라서 에우리피데스의 연극은 차가운 동시에 열정적인 것이 되고 딱딱하게 굳어버리면서도 불타오를 수도 있는 것이다. 서사시가 갖는 아폴론적 효과를 낸다는 것은 그에게는 불가능했다. 반면에 다른 한편으로 그는 디오니소스적 요소를 가능한 한 배제했기 때문에 이제는 어떤 효과든 일으키기 위해서 새로운 자극 수단을 필요로 했다. 이러한 새로운 자극 수단은 아폴론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이라는 비할 바 없는 두 예술충동 속에는 존재할 수 없다. 이러한 자극 수단들이 아폴론적 관조 대신에 냉정한 역설적인 사상이며, 디오니소스적 황홀 대신에 불 같은 격정이다. 더구나 이것들은 극히 사실주의적으로 모방된 것이었을 뿐 예술의 에테르 속에 젖었던 사상과 격정이 아니다. 

 

우리가 위와 같이, 연극을 아폴론적인 것 위에만 세우려는 에우리피데스의 계획이 성공하지 못했고 오히려 그의 비디오니소스적 경향이 자연주의적이고 비예술적인 경향으로 빠져버렸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이상, 우리는 이제 미학적 소크라테스주의의 본질을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보아도 될 것이다. 이것의 최고 법칙은 대략 다음과 같다. "아름답기 위해서는 모든 것이 지적으로 이해될 수 있어야만 한다." 이것은 소크라테스적인 명제인 "아는 것만이 유덕하다"와 병행한다. 이 기준을 손에 들고 에우리피데스는 모든 것 하나하나를 측정했으며 그 원리에 맞게 그것들을 수정했다. 언어를, 성격을, 극의 구조를, 합창곡을. 우리가 소포클레스의 비극과 비교하여 그렇게도 자주 에우리피데스의 문학적 결함이자 퇴보로 간주하곤 했던 것은 주로 저 철저한 비판과정의 산물이며 저 대담한 이지의 산물인 것이다. 에우리피데스의 프롤로그는 합리주의적 방법이 갖는 생산성의 한 예가 된다. 에우리피데스의 연극 중에서 프롤로그만큼 우리의 무대기술에 맞지 않는 것도 없다. 작품의 서두에 한 사람이 무대에 나와 자신이 누구인지, 가장 먼저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지, 지금까지 무슨 일이 일어났었는지, 심지어 작품의 진행 속에서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지를 이야기한다는 것은 근대의 연극 작가에게는 긴장 효과를 고의적으로 포기하는 용서할 수 없는 행동일 것이다. 사람들은 이제부터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두 알고 있다. 누가 이것이 실제로 일어날까 하고 기대할 것인가? 여기에는 예언적 꿈이 나중에 일어날 사건에 대해서 갖는 긴장된 관계는 전혀 없다. 에우리피데스는 전혀 다르게 생각했다. 비극의 효과는 결코 서사적인 긴장, 지금 그리고 나중에 일어날 일의 매혹적인 불확실성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주인공의 정열과 변론술이 도도하고 거센 강물처럼 전개되는 저 위대한 수사학적, 서정적 장면에 근거하는 것이다. 줄거리가 아니라 열정을 위해서 모든 것은 준비되어야만 했다. 열정을 일으킬 수 없는 것은 배척해야 할 것으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관중이 마음껏 그러한 장면에 몰입하는 것을 방해하는 것은 관객이 모르고 있는 전후맥락, 그 전에 일어난 일의 줄거리의 공백이다. 이런저런 인물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성향과 의도들의 이런저런 갈등이 무엇때문에 일어났는지를 청중이 계산해 내야만 하는 한, 주인공의 고통과 행위에 완전히 몰입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주인공의 고통과 공포에 대한 숨죽인 공감도 불가능하다. 아이스킬로스나 소포클레스의 비극은 관객들에게 작품 이해에 필요한 실마리를 최초의 여러 장면에서 어떤 의미에서 우연히 제공하기 위하여 재치 있는 기교를 사용한다. 이와 같은 점에서 '필연적인 형식'에 해당하는 것을 말하자면 위장해서 우연한 것으로 나타나게 하는 저 고상한 예술가적 재능이 입증된다. 그러나 어쨌든 에우리피데스는 관객이 최초의 여러 장면에서 그 이전에 일어났던 일을 헤아려 내느라 불안한 상태에 놓이게 되고 따라서 서막이 갖는 시적인 아름다움과 열정을 놓치게 될 것이라고 믿었다. 따라서 그는 서막 앞에다 서사를 두고서 그것을 사람들이 신뢰할만한 등장인물로 하여금 낭독하게 했던 것이다. 때로는 하나의 신이 비극이 어떤 식으로 진행될지를 관객에게 보장하고 신화의 실재성에 대한 모든 의혹을 제거하는 역할을 맡아야만 했다. 이것은 데카르트가 경험세계의 실재성을 신의 진실성, 거짓말을 할 수 없는 신의 성격에 호소하는 것을 통해서만 증명할 수 있었던 것과 유사하다. 즉 에우리피데스는 자신의 주인공의 미래를 관객에게 보장하기 위해서 극의 마지막에서 신의 진실성을 다시 한 번 필요로 한다. 바로 이것이 저 악명 높은 기계장치의 신(deus ex machina)의 임무이다. 과거와 미래에 대한 서사시적 조망 사이에 극적-서정적 현재, 본래의 '연극'이 존재하는 것이다.

 

따라서 시인으로서의 에우리피데스는 무엇보다도 자신의 의식적 인식의 반영이다. 그리고 바로 이 점이 그에게 그리스 예술사에서 기념할 만한 지위를 부여하고 있다. 에우리피데스는 자신의 비판적이고 생산적인 창작과 관련해서 아낙사고라스 저술의 첫머리에 있는 다음 말을 살려보고 싶었음에 틀림없다. "시초에 모든 것은 혼돈이었다. 그때 정신이 와서 질서를 창조했다." 그리고 아낙사고라스가 만취한 자들 중에서 최초의 깨어 있는 자처럼 자신의 '누스'를 가지고 철학자들 사이에 등장했던 것처럼 에우리피데스도 다른 비극작가들과 자신의 관계를 유사하게 파악했을지도 모른다. 만물에 질서를 부여하는 유일한 자요, 만물을 주재하는 자인 누스가 예술창작에서 배제되어 있는 한, 모든 것은 아직 혼란스런 근원적인 혼미상태에 있다고 에우리피데스는 판단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술에 취한' 시인들을 최초의 '깨어 있는 자'로서 단죄해야만 한다. 소포클레스가 아이스킬로스에 대해서 한 말, 즉 그는 무의식적으로 해도 옳은 일을 한다는 말은 분명히 에우리피데스적인 의미에서 한 말은 아니다. 에우리피데스는 아이스킬로스가 무의식적으로 창작하기 때문에 옳지 못한 것을 만들어 낸다고 말하고 싶어 했을 것이다. 신성한 저 플라톤마저도 시인의 창조적인 능력이 의식적인 통찰이 아닌 한 그것에 대해서 거의 대부분의 경우 단지 빈정거리는 투로 말하고 있을 뿐이며, 그것을 예언자나 해몽가의 재능과 동일시하고 있다. 그는 시인이 의식을 잃고 지성을 전혀 갖지 않을 때까지는 시를 쓸 수 없다고 말하고 있다. 에우리피데스는 플라톤이 기도했던 것처럼 '비이성적인' 시인에 대한 대립물을 세계에 제시하려고 했다. "모든 것은 아름답기 위해서는 의식적이어야 한다"라는 그의 미학적 근본명제는 내가 말한 것처럼 "선하기 위해서는 모든 것은 의식적이어야 한다"라는 소크라테스의 명제에 상응하는 명제이다. 따라서 우리는 에우리피데스를 미학적 소크라테스주의의 시인으로 간주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고대 비극을 이해하지 못했고 따라서 존중하지도 않았던 저 두 번째 관객이다. 그와 동맹을 맺고 에우리피데스는 새로운 예술창조의 선구자가 되려고 했다. 이로 인해서 고대 비극이 몰락했다면 미학적 소크라테스주의는 살인적 원리인 셈이다. 그러나 (미학적 소크라테스주의의) 그러한 투쟁이 고대 예술의 디오니소스적인 것을 향하고 있었다면, 우리는 소크라테스에서 디오니소스의 적, 새로운 오르페우스를 보게 된다. 오르페우스는 디오니소스에 반기를 들어 아테네 법정의 디오니소스 여자 시종들에 의해서 갈기갈기 찢기게 되는 운명에 처해지지만 저 강력한 신마저도 도망하도록 만들었다. 디오니소스는 그가 에도의 왕 리쿠르고스에게서 도망쳤을 때와 마찬가지로 바다 깊은 곳으로, 즉 점차 온 세상에 퍼져 가는 비밀제의의 신비한 물결 속으로 몸을 숨긴 것이다.

 

 

눈에비친햇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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