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 약 문
이 글은 아낙시만드로스의 무한정자를 중심으로 그의 존재문제를 다룬 것이다. 디오게네스(Diogenes Laertius)는 탈레스를 7현인 중에 한 사람으로 보았다. 고대 그리스에서 현인의 의미는 당시 신화적인 입장에 대해서 과학적인 사고방식을 갖고 대처한 사람이었다. 이런 관점에서 Simplikios는 탈레스의 ‘물’ 대신에 아낙시만드로스의 Apeiron을 최초의 Arke라고 주장하였다.
아낙시만드로스는 탈레스와는 다르게 모든 사물에 존재하는 동일물질의 가능성에 대해서 부정하였다. 이는 곧 신적인 창조의 연속성을 단절하는 것이므로, 당시의 근본적인 신화사상을 바꾼 것과 같은 것이다. 이렇게 신화사상에서 탈피한 그가 가장 먼저 한 것은 우주의 체계를 새롭게 연구한 것이다. 새로운 우주의 형성을 위해서 그가 가정한 질료가 곧 Apeiron이다. 아낙시만드로스는 이 Apeiron으로 우주론을 설명하려고 하였다. 그의 우주 문제는 곧 존재의 문재이기 때문에, 그의 Arke 문제는 존재문재였다.
아낙시만드로스의 Apeiron은 세계형성의 4대요소와 무관한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Apeiron을 중간자 내지 중성자로 보고 있다. 탈레스는 물이라는 물질을 Arke로 보았지만, 아낙시만드로스는 물질이 아닌 것으로 Arke로 보고 있다. 그럼 왜 그는 중간자로 Arke로 보았는가? 물질의 생성과 소멸은 끊임없이 이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모든 존재물을 끝없이 생성해 낼 수 있는 것은 어떤 물질이 아니라 중간자가 되어야 한다고 본 것 같다.
아낙시만드로스의 우주론은 지구의 비고정성과 가정적 실체이론으로 설명할 수 있다. 이 두 가지 이론은 그가 신비주의 철학자와 우주론적 철학자로 불리게 된 가장 큰 이유이다. 지구를 돌고 있는 원과 같은 띠, 이것은 원심력으로 비고정적인 지구를 고정된 상태로 묶을 수 있는 힘이며, 동시에 가정적 실체 구실을 하였다.
지구는 우주의 중심에 놓여 있으면서 어떤 지지대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Apeiron은 물질의 중간자로 우주의 중심에 놓여 있는 지구형성의 중요 Arke이다. 이런 관점에서 지구는 아낙시만드로스에 의해서 최초로 과학적인 사고방식에 따라 귀납적으로 관찰되었다. 이렇게 그는 자신의 Apeiron으로 Arke를 주장하였기 때문에, 지지대가 없는 지구가 그 만큼 견고했고, 그의 우주론 곧 존재론은 가정적 실체이지만 오늘날까지 굳건히 지켜지고 있는 것이다.
1. 들어가는 말
철학사에서 탈레스는 최초의 고대 그리스 철학자라고 서술되고 있으며, 일반적으로 우리는 그렇게 알고 있다. 물론 이러한 입장은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해서 그가 “자연철학자의 원조”로 불리어 졌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이렇게 탈레스가 최초의 자연철학자로 불리어진 이유는 남들보다 먼저 사물의 본래적인 원리와 본성에 대해서 신화적이지 않는 입장에서 설명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탈레스의 주장 중 우리에게 알려진 것은, 그가 만물의 근원 혹은 원질(아르케, ἀρκη)이 ‘물’이라고 주장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탈레스의 물에 대한 만물근원사상도 부정적으로 보고, 그의 주장이 아닐 가능성이 있다고 하는 사상가도 있다.
탈레스의 물에 대한 만물근원사상을 부정하는 입장에서 빼 놓을 수 없는 것은 탈레스가 고대그리스 7현인 중에 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플라톤도 탈레스가 7현인 중에 한 사람임을 입증하였다고 디오게네스는 주장하고 있다. 이런 관점에서 “우리는 철학자와 실제의 과학자를 겸한 경우를 밀레토스의 탈레스에서 분명히 본다.”는 코플스톤의 주장에 동의한다. 아마도 당시 팽배해 있던 신화적인 입장에 대해 과학적인 사고방식을 갖고 대처했던 사람을 오늘날 우리의 입장에서 과학자로 보겠지만, 당시로서는 그들을 현자로 보았을 것이다. 이런 탈레스의 사상을 아리스토텔레스는 조금 과장하여 “우리는 탈레스에게서 신화로부터 과학과 철학으로의 전이를 똑똑히 보며, 아울러 그는 그리스 철학의 창시자로서 그의 전통적 성격을 유지”하고 있다고 표현하였는지도 모르겠다.
만약 탈레스의 ‘물’에 대한 만물근원사상이 자연철학적인 입장에서 수용될 수 없다면, 우리는 자연철학의 근원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이 문제는 결국 탈레스와 같은 시대에 살았고, 탈레스와 함께 자연철학을 논의한 것으로 추정되는 아낙시만드로스에서 해결되어야 할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우리는 아낙시만드로스가 탈레스와는 다르게 자연철학에 대해서 하나의 체계를 형성한 것에 대해서 부정할 수 없기 때문에, 최초의 포괄적인 자연철학자로 볼 수 있다.
탈레스에서도 마찬가지였지만 아낙시만드로스도 우주가 단순한 어떤 물질에서 어떻게 발전하였는가하는 문제를 스스로 해결해야 할 것으로 생각하였다. 탈레스가 신화적인 면을 탈피하고 원질을 논한 이유는, 모든 물질에 공통으로 포함되어 있는 어떤 물질을 인정하고 “물”로 모든 물질의 설명이 가능하다고 판단하였기 때문인 것이다. 그러나 이런 탈레스의 입장은 신화의 발전단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즉 신화에서 필수요소로 등장하는 물, 불, 공기, 흙은 천지창조를 위해서 절대적인 4대 요소였다. 탈레스가 주장한 물은 이러한 신화적 사고 안에서 4대 요소가 함께 갖고 있는 물질의 동질성을 찾은 것에 불과하였던 것은 아닌가 생각된다.
아낙시만드로스는 탈레스와는 다르게 모든 사물에 존재하는 동일물질의 가능성에 대해서 큰 의미를 두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그가 모든 물질에 존재하는 동일물질을 부정함으로 신적인 창조의 연속적인 진행을 단절함으로 근본적으로 신화사상을 바꾼 것이 되고 말았다. 신화사상에서 탈피한 그가 가장 먼저 한 것은 우주의 새로운 조직이었다.
아낙시만드로스는 세계를 형성하고 있는 하나의 질료를 가정하였는데, 그것은 잘 알려진 것처럼 무한정자(ἄπειρον)이다. 이것은 우주 형성의 4대 요소 중 하나도 아니며, 어떤 것을 의미하지도 않는 ‘중성자’ 내지 ‘중간자’적인 어떤 것이며, 이는 곧 모든 물질에 존재하는 공동물질의 원질이다. 이렇게 탈레스와는 다른 의미에서 아낙시만드로스는 원질을 찾으려했던 것이다. 그 결과 그는 당시의 모든 신적인 요소와도 결별할 수 있었고, 새로운 원질의 문제를 추구하였던 것이다.
아낙시만드로스는 원질문제를 특히 우주의 문제로 해결하려고 하였다. 이 우주의 문제는 곧 오늘날의 우주론 그리고 존재론과도 깊은 관계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런 관점에서 본고에서는 아낙시만드로스의 원질문제를 그의 존재문제로 보고 접근하려고 한다. 특히 이 문제를 아주 짧게 남아 있는 그의 단편집을 중심으로 살펴보고, 분석하고자 한다. 뿐만 아니라 아리스토텔레스나 그 외 다른 고대사상가들의 아낙시만드로스에 대한 관점도 함께 연구하여 외적으로나마 그의 존재론에 대해서 완성하고자 한다.
2. 아낙시만드로스의 단편집 분석
“존재하는 사물의 처음과 근원은 무한정자(ἄπειρον)이다. 그러나 그곳에서부터 존재하는 사물들이 생성되고, 또한 그 속으로 생성물들이 사라져 버리는 것은 필연적이다. 왜냐하면 존재하는 사물들은 그들이 저지른 불의를 시간의 흐름에 따라 정당한 벌과 보상으로 정리되기 때문이다.”
위에 인용한 단편집의 내용은 아낙시만드로스의 분실된 “자연론” 중 남아 전해지고 있는 단편 5절 중 첫 번째 절이다. 이 절을 우리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고, 첫 부분을 다시 두 부분으로 나누어 살펴 볼 수 있다. 즉 다음과 같이 나누어 정리할 수 있다 :
문장 A :
문장 A1: 존재하는 사물의 처음과 근원은 무한정자이다.
문장 A2: 무한정자에서부터 존재하는 사물들이 생성되고 또한 그 속으로 생성물 들이 사라져 버리는 것은 필연적이다.
문장 B: 존재하는 사물들은 그들이 저지른 불의를 시간의 흐름에 따라 정당한 벌과 보상으로 정리한다.
‘문장 A1’은 무한정자에 대한 정의이며, ‘문장 A2’는 원질로서의 무한정자에 관한 설명으로 보인다. 본고에서는 ‘문장 A1’을 아낙시만드로스의 무한정자에 대한 규정으로 보고, 당시의 4대 원소였던 물, 불, 흙, 공기와의 관계성 속에서 살펴보고자 하며, ‘문장 A2’는 탈레스의 원질과는 다른 아낙시만드로스의 원질에 관한 내용으로 보고, 원질과 무한정자와의 관계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문장 B’는 ‘문장 A’와는 다르게 아낙시만드로스의 우주론에 관한 내용으로 보고 설명하여야 할 것 같다. 물론 원질과 존재에 관한 문제로도 볼 수 있겠지만, 실질적으로 당시의 4대 원소를 아낙시만드로스는 우주의 문제와 관련시켜 논하고 있기 때문에, 우주론으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 이런 관점에서 ‘문장 B’는 우주론의 문제와 관련시켜 살펴보고자 한다.
단편집 1절 내용은 오늘날 우리의 입장에서 봐도, 결코 무미건조한 문제는 아니지만, 학문적인 표현을 담고 있다고는 설명할 수 없을 것 같다. 그러나 신화적인 면이 당시의 사상이나 사고 속에 어느 정도 남아 있었다고 전제할 때, 탈레스와는 다르게 단편집 1절은 자연철학적인 사색인 것만은 틀림없다. 신화적인 고찰이나 영혼을 흔드는 듯한 비밀스러운 이야기나, 신비한 어떤 것을 찾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즉 아낙시만드로스는 그 동안 신비에 쌓여 있던 모든 신화적인 베일을 벗기고 진리를 찾기 위한 작업을 시작한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보다 잘 이해하기 위해서 단편집에 관한 내용을 좀 더 깊이 살펴보아야 할 것 같다. 다른 고대 그리스 철학자의 단편집이 그러하듯이 아낙시만드로스의 단편집도 다른 사람의 손에 의해서 정리되어 전해지고 있다. 심플리키오스(Simplikios)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학”에 단편집 1절의 내용을 주석으로 달았다고 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단편집이 심플리키오스에 의해서 전해지고 있음은 분명하다. 그러나 일부 철학자는 단편집이 심플리키오스가 아닌 테오프라스투스(Theoprastus, B.C. 372 - 288)에 의해서 전해지고 있다고도 한다.
아낙시만드로스의 단편집이 누구에 의해서 전해지고 있는가 하는 것이 중요성을 갖는 이유는 시대적인 차이 때문으로 보인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테오프라스투스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제자로 아리스토텔레스의 학원을 이어 받아 아리스토텔레스학파를 이끌었고, 플라톤의 아카데미아에 겨룰만한 페리파토스(Peripatos)의 학교를 확립한 인물이다. 반면 심플리키오스는 6세기 전반의 신플라톤학파로 알려져 있으며, 529년 아카데미아가 폐쇄된 후, 여러 나라로 여행하면서 그곳의 문물을 익힌 철학자로 알려져 있다. 그는 독창적인 사상은 갖고 있진 않았지만,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을 일치시키려고 노력하였다. 무엇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여러 주석을 집필한 사상가로 알려져 있다. 테오프라스투스와 심플리키오스의 시대와 사상적 배경이 이렇게 다르기 때문에, 아낙시만드로스의 단편집의 해석 또한 달라질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1) 아페이론과 4원소
문장 A1 : 존재하는 사물의 처음과 근원은 무한정자이다.
심플리키오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학” 주석에서 아낙시만드로스가 “최초로 아르케(ἀρκη)”라는 개념을 사용한 사상가라고 서술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잘 알려진 것과 같이 아낙시만드로스는 아페이론을 아르케로 보았다. 심플리키오스의 이 주장에 대해서 두 가지 의문을 제시할 수 있다. 첫 번째 의문은 철학사에서 찾아보아야 할 것이다. 철학사에서 우리는 아르케를 원질이라 번역하고, 그것의 최초 주장자는 탈레스라고 서술되고 있다. 그리고 그는 ‘물’을 아르케라고 주장하였다. 물론 탈레스의 단편집이 남아 있는 것이 없기 때문에, 우리는 탈레스 스스로 물을 원질이라고 하였는지, 아니면 철학사를 정리하면서 아낙시만드로스의 아르케라는 용어에서 소급하여 탈레스의 물을 원질이라고 하였는지 알 수 없다.
두 번째 의문은 탈레스가 주장한 ‘물’을 우리는 원질로 볼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아낙시만드로스가 “물” 뿐 아니라 “다른 어떤 원소”도 원질로 보지 않았다고 주장되고 있다. 즉 아낙시만드로스는 “우주의 모든 것이 그 속에서 질서 지워지는 하나의 확실하고 무한정적인 자연”이 곧 아르케라고 설명하고 있다. 물론 이 두 번째 의문은 아낙시만드로스의 입장에서 본 문제이다. 하지만 우리가 이 의문을 간과할 수 없는 것이 아낙시만드로스가 최초로 원질이란 개념을 사용하였고, 비록 후세 사상가이긴 하지만 심플리키오스가 원질에 대한 정의를 아낙시만드로스의 입장에 따라 하였기 때문이다.
아낙시만드로스가 “물”과 “다른 원소”들을 원질로 보지 않았다면, 여기서 ‘다른 원소’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이것은 세계형성의 4대 원소로 잘 알려진 물, 불, 공기(안개), 흙 중에서 물을 제외한 다른 세 원소를 의미한다. 아낙시만드로스가 이 4대 원소를 원질로 보지 않았다는 것은, 세계를 형성하는 원질이란 나누어지지 않는 하나의 질료, 즉 중성적인 어떤 물질을 의미하는 것일 것이다. 즉 4대 원소 중 어떤 것도 원질로 보지 않은 것이다.
아낙시만드로스의 무한정자는 4원소가 아니기 때문에,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 스스로도 알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아낙시만드로스는 왜 탈레스의 입장뿐 아니라 4대 원소를 원질로 인정하지 않았는가? 가장 큰 이유는 4대 원소는 각각 반대의 상태에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한 상태가 무한정 상태가 된다면, 반대 상태의 물질은 소멸을 의미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아낙시만드로스는 중립적이면서도 미분화된 무한정자를 상정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무한정자는 “존재하는 사물의 처음과 근원”인 것이다.
무한정자가 존재하는 사물의 근원이기 때문에, 그곳에서 “존재하는 사물들이 생성”되고, 그곳으로 “생성물들이 사라져 버리는 것은 필연적인” 것이다. 이런 생성과 소멸의 과정, 즉 원소에 대한 침탈과정을 아낙시만드로스는 불의(ἀδικία)로 보았다.
“여름에는 따뜻한 요소가 불의를 범하고 겨울에는 찬 요소가 불의를 범한다. 확정적인 요소들은 불확정적인 무한정자 속으로 다시 흡수됨으로써 그것들이 저지른 불의를 보상한다. 이것은 법의 개념을 인생으로부터 우주 일반에까지 확장한 예이다.”
원질 외에 어떤 물질도 무한정 할 수 없기 때문에, 각각 반대의 상태에 있는 원소들은 결코 소멸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성과 소멸은 하나가 다른 하나에 침탈하기 때문에 생긴다. 이렇게 무한정자 외에 다른 물질이 무한정하기 때문에, 그 과정이 불의이고, 불의를 저지른 물질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정당한 벌(δίκησις)”을 받아 소멸하고, 불의를 당한 물질은 역시 시간의 흐름에 따라 그에 상응하는 정당한 “보상(τίσις)”을 받아 생성하는 것이다.
무한정자의 정의로운 행위로 생성과 소멸이 계속되어, “무한정자는 나이가 없으며”, “죽지 않고, 멸망하지 않는다”. 실재 세계는 가멸적이지만, 무한정자의 벌과 보상이라는 영원한 운동에 따라 생성소멸 되기 때문에, 수많은 세계가 동시에 존재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것을 아낙시만드로스는 시간성으로 본 것이다. 비록 4원소가 무한정자의 지시에 따라 생성과 소멸을 하지만, 그들 사이에는 아무런 질서도 존재하지 않는다. “4원소는 어떤 특정한 방법에 따라 변하여 생성이 있게 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끝없는 운동을 통하여 분리된” 것이 생성인 것이다. 아낙시만드로스는 아마도 이런 관점에서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보상과 벌로 존재세계가 질서 진다고 본 것 같다.
2) 무한정자와 아르케
문장A2:무한정자에서부터 존재하는 사물들이 생성되고 또한 그 속으로 생성물들이 사라져 버리는 것은 필연적이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끊임없이 새로운 세계가 무한정자로부터 생성되고, 또 그곳에서 소멸한다고 본 아낙시만드로스의 입장에 따르면, 무한정자는 영원불멸한 존재로 공간적 시간적으로도 무한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물’을 원질로 본 탈레스의 위치가 흔들리게 된 지금, 우리는 아낙시만드로스가 어떻게 무한정자로 물을 포함한 4대 원소의 생성을 설명하고 있는지 논의하지 않을 수 없다. 아낙시만드로스는 무한정자를 원질로 보았고, 그에 의해서 이 개념이 처음으로 사용되었음을 우리는 심플리키오스를 통해서 알고 있다.
아낙시만드로스는 무한정자를 원질로 보고, 먼저 이것을 다른 원소들과 구별하였고, 다음으로 4원소들의 중간에 위치하여 서로 대립짝을 이루게 중간자의 역할을 하게 하였다. 이런 관점에서 우리는 무한정자를 “중간자” 혹은 “중성자”라고 표현되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여기서 여전히 의문으로 남는 것은 4원소들의 대립짝이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대립짝을 나눌 때, 무게로 대립짝을 나누기도 하지만, 온도로도 나눈다. 특히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두 입장을 모두 수용하여 처음에는 무게에 비중을 두고 “공기와 물”로 대립짝으로 보았다. 그러나 온도로도 대립짝의 설명이 가능하기 때문에 “공기와 불”로 대립짝을 삼았다고 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무한정자를 이들 대립짝의 “중간자” 혹은 “원소와 동등자”라고 표현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왜 이렇게 대립짝을 두 측면에서 모두 나누었는지 아리스토텔레스 스스로도 답을 주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가 굳이 이것에 대한 답을 찾는다면, 그것은 아낙시만드로스만이 갖고 있는 무한정자의 특징으로밖에 볼 수 없는 것이다.
그럼 왜 아리스토텔레스는 중간자를 한 번은 “공기와 물”로 보고 또 한 번은 “공기와 불”의 대립짝으로 보고 설명하고자 하였는가? 아낙시만드로스는 무한정자를 4원소의 대립짝으로 중간자로 보지 않고, 4원소 모두의 중간자로 보았다고 가정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이 중간자로서 무한정자는 개념상 혹은 공간상으로만 존재하는 단순한 사고형식일 수도 있다. 이렇게 단순한 사고형식으로서 중간자를 이해한다면, 원소의 대립짝은 어떻게 이루어져도 상관이 없다. 즉 아낙시만드로스에 있어서는 대립짝보다 중간자가 더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으며, 그것을 중심으로 4원소가 설명되고 있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있어서는 중간자의 위치가 아낙시만드로스와 같지는 않다. 즉 아리스토텔레스는 질료의 문제를 논하면서 이웃하는 질료를 간과할 수 없었고, 대상들을 설명하면서 4원소를 도입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한 일련의 작업을 위해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아낙시만드로스의 무한정자를, 대립짝을 이루는 4원소로 설명할 수밖에 없었고, 대립짝을 나눔에 있어서 원소의 특성에 따라 “공기와 불” 그리고 “공기와 물”, 이렇게 둘로 나누어 설명한 것 같다. 어찌되었던 아낙시만드로스의 중간자는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해서 처음으로 불안전하긴 하지만, 과도기적으로 한 번 정의되었다.
아낙시만드로스가 무한정자를 원질로 보았다함은, 질료적인 측면에서 무한정자는 무한한 어떤 것을 의미하고, 4원소는 한정된 질료를 뜻한다. 이런 입장을 아리스토텔레스가 그의 질료개념에 적용했다면, “무한한 성질을 가진 어떤 것”과 “무한성”을 나누어서 논의하여야 했을 것이다. 그리고 4원소 중 어떤 것을 무한성으로 보았다면, 나머지 원소는 자연히 유한한 어떤 질료에 불과하였을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아낙시만드로스에게 있어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을지도 모르는 4원소의 문제를 대립짝과 연관시켜 살펴볼 수밖에 없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런 입장과 관련하여 우리는 아낙시만드로스의 무한정자에 대한 테오프라스투스와 심플리키오스의 다른 입장을 볼 수 있다. 테오프라스투스에 따르면 아낙시만드로스의 무한정자는 “공기 혹은 물 혹은 흙 혹은 기타 다른 어떤 질료”를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고 한 반면, 심플리키오스는 “물도 다른 어떤 원소”도 아니라고 하였다. 무한정자에 대한 이 두 사상가의 정의에서도 나타나듯이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미 4원소를 그의 질료의 문제에서 중간자의 의미를 포괄적으로 수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무한정자, 그것이 무엇이든, 아리스토텔레스처럼 4원소의 대립짝을 이룬 것이든 아니든, 탈레스처럼 4원소 중 어떤 것이든 아니든, 그것은 최소한 아낙시만드로스에 있어서는 중립적, 중성적 혹은 중간자적인 물질인 것만은 틀림이 없다. 아리스토텔레스와 같이 무한정자가 “물과 공기” 혹은 “공기와 불”의 중간적인 위치에 있던 탈레스와 심플리키오스와 같이 이 모든 원소를 인정하지 않던 아낙시만드로스의 무한정자로서 중간자는 변하지 않는 원질의 다양성에서 공간적인 분리와 결합을 통하여 우주의 개별적 존재를 생성하는 것임에는 틀림이 없다.
우리는 지금까지 아낙시만드로스에 있어서 원질로서 무한정자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아낙시만드로스에 있어서 무한정자는 무엇보다 물질의 중간자적인 입장에서 설명이 가능하다. 여기서 우리가 제기할 수 있는 또 하나의 물음은 ‘왜 무한정자인가?’라는 것이다. 탈레스는 물질을 원질로 보았다. 하지만 우리가 심플리키오스의 주장을 인정한다면 아낙시만드로스가 사용한 개념 ‘원질’은 탈레스와는 다른 의미에서 찾아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탈레스 역시 원질에 대한 확실한 고찰을 하였을 것이고, 나름 데로 물질에서 찾았을 것이다. 그럼 왜 아낙시만드로스는 물질에서 원질을 찾지 않고 물질의 중간자적인 위치에 있는 무한정자에서 찾았는가?
“생성이 멈추지 않아야”하기 때문이라고 우리는 설명할 수 있다. 물질의 생몰현상을 우리는 부정할 수 없기 때문에, 존재를 끊임없이 생산해 낼 수 있는 원질을 아낙시만드로스는 원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기 때문에 아낙시만드로스는 바다와 땅을 ‘측량할 수 없는 것’이란 의미로 사용한 호머의 ἀπείρων에 개념과 표상이란 측면을 더 강조하고, 존재물에 한정하여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사실 호머의 아페이론은 신들과의 관계성 속에서 찾아 볼 수 있는데, “죽지 않는”이란 의미를 갖고 있다. 물론 이 개념은 시간 속에서 유한한 존재에 대한 반대개념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즉 호머의 아페이론은 신적인 개념에서 존재의 개념으로 발전한 것이 아낙시만드로스의 무한정자이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아낙시만드로스의 무한정성은 그리스적인 신의 개념과는 다른, 오히려 반대의 개념으로 설명될 수 있다.
그리스적인 신의 개념은 결코 설명될 수 없는 것이고, 불확실한 것이며,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발생한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아낙시만드로스는 이 개념에서 무한정자의 개념을 발전시킬 수 있었는가? Fränkel은 Chaos의 개념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고 있다. 즉 그는 “카오스는 무”이며, “카오스의 뒤를 이어” 나타난 아페이론이 존재자와는 반대로 존재를 “가능하게 하는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무한정자의 중간자적 입장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다. 탈레스는 이러한 것을 물질적인 어떤 것으로 보았다면, 아낙시만드로스는 규정할 수 없는 이러한 원소를 물질의 중간에 위치하고 있다고 보고, 그것이 곧 원질임에 틀림없지만, 규정할 수 없는 아페이론으로 본 것이다.
이 원질로서 아페이론은 “무한한 것 혹은 무한정적인 것”이다. 그러나 아낙시만드로스는 아페이론을 결코 “무한성”안에서가 아니라 “무한한 질료”안에서 다른 것이 생성된다는 “비물질적인 원소의 본질”을 주장하는 “플라톤이나 피타고라스학파처럼 무한한 것”으로 이해하지는 않았다. “무한성은 주개념이 아니라 빈개념”이기 때문에, “대상”을 의미하며, “속성”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무한성은 결코 중간적인 위치를 인정하지 않는다. 이런 관점에서 아낙시만드로스의 아페이론은 결코 무한성이 아니라 무한정자인 것이다.
3. 아페이론과 아낙시만드로스의 우주론
문장B:존재하는 사물들은 그들이 저지른 불의를 시간의 흐름에 따라 정당한 벌과 보상으로 정리한다.
‘문장 A’에서 아낙시만드로스는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의 근원이 탈레스가 생각했던 것처럼 물도 아니고, 4원소도 아니며, 불명확한 어떤 물질이라고 주장하였다. 아낙시만드로스에 의하면 4원소는 한 마디로 “한계를 지닌 요소이고, 따라서 이 요소들을 위해서 지배하는, 눈에 보이지 않는 초월적인 요소가 있을 것”이라고 믿고 그것을 무한정자로 설명하였다. 이 무한정자에 대한 설명과 규정인 ‘문장 A’는 ‘문장 B’의 이해를 돕기 위한 것으로 보아도 무관할 것이다.
4대 원소 중 어떤 하나가 다른 원소에 대해 불의를 저질렀을 때, 즉 “다른 요소의 영역을 침범했을 때, 초월적인 요소, 즉 아페이론은 영역을 침범한 요소를 원래의 자연적 경계 안으로 다시 쫓아”버리는 것이다. 앞에서도 잠시 언급하였지만, 아낙시만드로스의 단편집 1절은 아주 시적인 표현으로 정의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신비적인 요소도 함께 묻어 있다. 특히 “그리스의 여러 신과 마찬가지로 기회만 있으면, 자신과 반대 입장에 있는 요소에 공격을 가하려고 하는 것”으로 그의 단편집은 보인다. 하지만 “필연(χρεών)”이니 “보상”과 같은 표현은 우주에 대한 초월적인 질서를 설명하고자하는 신비적인 욕구가 있음을 추측하게 해 준다.
아페이론을 주장한 아낙시만드로스가 우주와 지구의 관계를 어떻게 설명했는지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가 아페이론을 “필연”적인 것으로 본 것은 아페이론이 지구와 우주의 모든 것을 감싸 안고 지탱해 준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를 신비주의 철학자인 동시에 우주적인 철학자라고 부른다.
“문장 A”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를 “필연”으로 본다면, “문장 B”에서는 “보상”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필연”적으로 아페이론이 존재할 수밖에 없다면, 4원소는 원질에 의해서 “보상”을 받아야 한다. 아낙시만드로스는 “지구는 마치 돌기둥과 같다”고 하였는데, “높이 보다는 지름이 엄청나게 큰, 마치 둥근 케이크 같은 모습으로 우주 중심의 공기에 떠 있다”고 하였다. 이 지구는 아페이론의 무한한 운동의 결과로 생성된 것이다.
우리가 아낙시만드로스의 우주론을 논하기 위해서 먼저 규정하여야 할 것도 누구에 의해서 그의 사상이 전해지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그가 자신의 우주론에 관해서 직접 남긴 내용은 “지구는 마치 돌기둥과 같다”는 것뿐이다. 그 외 모든 내용은 다른 사상가들에 의해서 철학사에 남아 전해지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그의 사상을 단편적으로나마 전해준 테오프라스투스와 심플리키오스가 있다. 그 외에 빼놓을 수 없는 사상가는 힙폴리토스(Hippolytos)와 위(僞) 플루타르크(Pseudo-Plutarch)이다. 이 두 사상가는 사실상 테오프라스투스와 심플리키오스 사이에 가교 역할을 하였다.
우리는 아낙시만드로스의 우주론이 아리스토텔레스와 그 외 몇몇의 철학자에 의해서 전해지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힙폴리토스와 플루타르크가 없었다면, 아낙시만드로스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이 오늘날까지 전해지지 않았을 수도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힙폴리토스와 플루타르크는 아낙시만드로스에 대한 테오프라스투스의 입장이 심플리키오스에게 까지 전해질 수 있게 도왔다. 특히 플루타르크는 아낙시만드로스에 대한 테오프라스투스의 입장을 잘 정리하였다. 플루타르크는 몇 권의 저서를 남긴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특히 “기상학”에서 아낙시만드로스의 생애와 관련된 내용을 서술하였는데, 이 저술에 아낙시만드로스의 우주론에 관한 중요한 내용이 담겨 있다.
플루타르크에 의하면 먼저 4원소 중에서 “차가운 것(ψύχρά)”과 “뜨거운 것(θερμή)”이 아낙시만드로스의 아페이론에 의해서 분리된다고 하였다.
“태초에는 무한의 물질인 아페이론만이 존재했는데 이어서 뜨거움과 차가움이 분리되어 뜨거움은 우주의 바깥쪽에, 차가움은 중심에 자리를 잡았고, 뜨거움은 건조함을 차가움은 습함을 낳았다”
분리된 두 대상은 회전운동을 시작하고, 원심분리 현상에 의해서 4원소 중 ‘뜨거운 것’(불)은 ‘차가운 것’(공기, 물, 흙) 둘레를 돌게 되는 것이다. 회전운동을 통해서 ‘뜨거운 것’과 ‘차가운 것’이 질서를 잡게 되면, 차가운 것도 서로 분리되어 각자의 위치를 갖게 된다. 회전운동에 의해서 역시 차가운 것 중에서 무거운 흙이 가운데에 놓이고 그 주위를 물이 띠를 이루듯 돌며, 그 밖으로 공기가 둘러싸고 있다. 그 결과 흙이 가장 가운데에 놓이고, 물, 공기, 불의 순서로 4원소가 자리를 잡게 된다.
4원소는 계속 회전운동을 하기 때문에, 거대한 원 모양의 환대를 이루고 있으며, 그 가운데 지구가 마치 원통 모양처럼 놓여 있는 것이다. 이 지구는 어떤 것에 의해서도 지탱되고 있지 않으며, 환대의 가장 중심점에 놓여 있어서 모든 것과 같은 거리를 유지하고 있다. “지구가 어느 쪽으로도 떨어지지 않는 이유는 우주의 정 중앙에 있기 때문에, 어떤 한 방향을 선택해야 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라고 아낙시만드로스는 주장하고 있으며, 지구라는 원통의 두께는 “지름의 1/3정도이고 돌로 이루어져 있다”고 믿었다.
아낙시만드로스의 우주론 역시 그가 직접 남긴 사상이 아니고, 역사가들에 의해서 전해지고 있지만, 일식을 예견한 탈레스에 비해 ‘공기층의 구멍이 막힌 현상이 일식’이라고 설명한 아낙시만드로스의 사상에 더 큰 매력을 느낄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우주론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중요한 생각을 찾아 볼 수 있다. 첫 번째 주요 사상은 지구가 물질적인 지지대를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리스로마 신화에서 아틀라스가 지구를 바치고 있다는 생각 이후, 많은 천문학자들은 중세까지 지구의 지지대를 주장하면서, 지구의 고정성을 설명하려는 의무감에 쌓여 있었다.
지구의 비고정성을 주장한 아낙시만드로스가 물론 지구의 자전을 주장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지지대라는 개념이 지구의 고정성에 대한 문제를 해결해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문제를 복잡하게 한다고 판단한 그는, 4원소가 회전하는 환대를 이루고 있다는 입장을 과감하게 받아 드려 지구가 중앙에 위치한다고 주장함으로 지구의 비고정성을 주장한 것이다. 4원소가 “필연”적으로 존재하는 아페이론의 “보상”으로 존재하게 되었고, 이 4원소는 회전을 통해 환대를 이루어, 지구를 고정시키는 원심작용을 계속함으로 지구를 고정하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것이다.
두 번째 새로운 사상은 아낙시만드로스는 우주론을 설명하면서 가정적 실체를 내포하고 있는 이론에 따른 설명방식을 취하고 있다는 것이다. 지구를 중심으로 공기의 환대층이 있고, 이 공기의 층은 완전히 밀봉된 것이 아니라, 숨을 쉬기 위한 숨구멍이 있다. 그리고 그 밖으로 불의 환대층이 있다. 우리 인간은 공기 환대층의 숨구멍으로 불의 환대층 전체를 보는 것이 아니라 불의 일부분만 보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공기층의 숨구멍을 통해서 보여지는 것이 달, 해, 별 등이다.
우리 인간은 환대층 전부를 보지 못하기 때문에 환대층은 일종의 가상 내지 가정적 실체에 불과한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우리가 던질 수 있는 의문은 ‘왜 아낙시만드로스는 환대로 설명하는가?’이다. 즉 불이나 공기를 설명하면서 지구를 설명하는 것처럼 단순한 방법에 만족하지 않고, 보다 복잡한 환대로 설명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우리는 다시 플루타르크의 입장으로 돌아가야 할 것 같다. 그는 아페이론에 의해서 먼저 4원소 중에서 “차가운 것”과 “뜨거운 것”이 분리된다고 하였다. 보다 정확히 표현하면 “차가운 어떤 생산물”과 “뜨거운 어떤 생산물”이 분리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생산물(γόνιμον)”에 대해서 생각해 보아야 할 것 같다.
‘나누어진’ 무엇은 대립물이 아니라 생산물(γόνιμον)이다. 이 나누어짐은 균열이 아니라, 분할이다.”
아페이론에서 4원소가 차가운 것과 뜨거운 것으로 완전히 분리되었기 때문에, 4원소도 각각 완전히 분리되어 존재한다. 아마도 아낙시만드로스는 이렇게 4원소가 어떠한 것에도 섞여 있지 않고, 완전히 분리된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 환대의 개념을 도입한 것 같다.
플루타르크의 입장에 따라 아낙시만드로스의 두 번째 우주론에 관한 사상을 살펴보면, 지구를 둘러싸고 있는 물체들은 이미 농축되어 중심을 이루고 있는 지구를 향하여 움직이고 있다. 이때 지구만 보면 어떻게 될까?
지구도 농축된 무거운 물체이기 때문에, 모든 물체는 가장 무거운 중심부를 향하여 움직이고 있을 것이다. 여기서 아낙시만드로스도 지구 외에 이미 농축된 물체로 해와 달이 지구로 향해 움직이든지, 아니면 반대로 지구가 그 쪽을 향해서 움직여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이렇게 될 어떠한 장소도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아낙시만드로스는 원통 모양의 지구 외관에도 불구하고 달과 태양이란 환대로부터 같은 거리에 놓여 있다고 진정으로 믿었던 것이다. 특히 이러한 믿음은 지구 그리고 달이 일직선상에 놓일 때, 즉 월식일 때 더더욱 확신하였을 것이다.
우리가 살펴 본 아낙시만드로스의 추측이 사실이라면, 그는 이미 학문의 이론적인 설명의 본질을 파악하고 있었다고 보아도 될 것이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관찰을 설명하고, 관찰로 일반화된 법칙이나 자연의 규칙성을 이야기한다. 이때 관찰된 법칙에 따른 자연현상의 모순점이 없음을 증명하기 위해서 우리는 귀납적인 방법을 동원하여 관찰되지 않은 실체를 가정하고, 그것에 대한 결론을 진리로 받아들인다.
탈레스도 일식을 예언하고, 풍작과 흉작을 예언하였다고 철학사에서 서술되고 있다. 이것 역시 관찰에 의한 방법임에 틀림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떨어지지 않은 달과 해가 낙하하지 않는다는 것을 관찰하여, 현상으로 보고 관찰되지 않은 실체인 지구를 두르고 있는 환대를 가정한 아낙시만드로스의 관찰과는 다르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귀납적인 방법이 오늘날 과학적인 사고에도 필수적임을 감안할 때, 탈레스와는 다른 방법에서 관찰을 시도한 아낙시만드로스를 귀납적인 사고의 창시자였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아낙시만드로스의 우주론에 대한 두 가지 이론, 즉 지구의 비고정성과 가정적 실체이론은 그가 신비주의 철학자와 우주론적인 철학자로 불리게 된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지구를 돌고 있는 원과 같은 띠, 이것은 원심력으로 비고정적인 지구를 고정된 상태로 묶을 수 있는 힘이며, 동시에 가정적 실체 구실을 하였다. 당시까지만 하여도 신비주의와 신화주의에 얽매여 있던 사상가도 아낙시만드로스의 이와 같은 과학적인 사상이나 특성을 파괴할 어떤 반론도 갖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이론은 더더욱 과학적인 특성으로 받아들여졌던 것이다.
아페이론이란 “필연”적인 것으로부터 “보상”이 이루어진 것이 곧 4원소에 의한 우주이다. 이 우주의 중심에 놓여 있으면서 어떤 지지대도 필요 없는 실체가 곧 지구인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지구는 아낙시만드로스에 의해서 최초로 과학적인 사고방식에 따라서 귀납적으로 관찰되었다고 할 수 있다.
4. 나오는 말
우리가 일반적으로 ‘원질’이라 함은 ‘그로부터 만물이 생겨나게 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탈레스의 ‘물’이나 아낙시만드로스의 ‘무한정자’나 우리는 둘 다 원질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탈레스도 아낙시만드로스와 같이 관찰을 통해서 귀납적인 사고를 한 철학자임에 틀림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탈레스가 물을 만물의 원질로 말했다고 해서 반론을 제기할 수 없다. 뿐만 아니라 이런 관찰을 통한 귀납적인 사고로 세계를 설명하였기 때문에 탈레스 이후 철학자들을 우리는 신화적 사고에서 벗어났다고 한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아낙시만드로스의 무한정자도 탈레스의 물과 다른 것이 전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두 철학자 사이에서 분명한 차이를 찾는다면 두 사람이 남긴 내용이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모르지만 아낙시만드로스와는 다르게 탈레스의 단편집은 남아 전해지는 것이 없다. 물론 두 철학자의 사상은 단편집 외에도 여러 철학자의 단편집 속에 남아 전해지고 있다. 그것을 인정하기에 우리는 탈레스의 물을 아낙시만드로스의 무한정자와 구별하고, 그의 주장의 중요성을 인정한다.
그리스의 “정의” 개념과 관계있는 아낙시만드로스의 “보상”은 곧 자연법사상이다. 이것은 그의 단편집 1절 후반부(문장 B)에 분명히 나타나 있다. 물론 이런 단편적인 내용이나 문장을 갖고 그의 세계관 내지 우주관을 논의하는 것은 아주 위험한 것이다. 그러나 신화에 대한 합리화 사상과 신화 자체의 자연법적인 개념을 내포하고 있다고 믿고, 탈레스의 원질 개념이 흔들린다고 가정한다면, 우리는 철학과 과학의 출발점을 아낙시만드로스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
아낙시만드로스는 단편집에서 아페이론에서(문장 A1) 모든 존재들이 생성되고, 그곳으로 사라져 버리는 것은 필연적이며(문장 A2), 그것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벌과 보상을(문장 B) 받는다고 하였다. 결국 아페이론이란 전제에 의해서 존재의 생성과 소멸이 있으며, 우주가 존재하게 된다는 결론이 이끌어져 나온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한 번 “무한정자”에 대해서 두 가지 질문을 던질 수 있다. 첫 번째 질문은 ‘왜 무한정자는 무한정적이며, 무한적인가?’ 하는 것이다. 두 번째 질문은 ‘왜 아낙시만드로스는 원질을 확실한 어떤 물질이나 특성을 가진 것으로 설명하지 않고, 무한정적인 것으로 하였는가?’하는 것이다.
당시 고대 사상가들은 “현존하는 생성이 하나도 빠짐없이” 남아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혹은 “과잉 생성의 억제”를 위해서 그리고 “계속적인 생성이 쇠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무한정적인 표현을 사용하였다는 것이다. 아낙시만드로스 역시 이런 당시의 표현을 자신의 원질로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두 번째 질문은 화학적이고, 물리적인 원소에 기인하는 것으로 보인다. 아낙시만드로스는 4원소를 물질적 질료로 받아들였지만, 구별하지 않고 사용하였다. 단지 단순한 의미에서 무한정적인 것을 설명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원질이 꼭 어떤 물질적이거나 특성을 가질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실제적으로 우리가 무한정자를 논의할 때, 시간과 공간의 입장을 모두 받아들여 시간적인 영원성과 공간적인 크기를 함께 논의하여야 한다. 사실 아낙시만드로스에 있어서 원질로서 아페이론은 시간적인 의미를 가진 ‘ἄπειρος’와 공간적인 의미 ‘άπείρων’을 모두 갖고 있다. 즉 시간적으로 영원하며 공간적으로 무한한 것으로 무한정자를 아낙시만드로스는 생각하고 자신의 원질로 삼았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원질인 아페이론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필연”적으로 “보상”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시간적인 영원성이 필연적이라면, 공간적으로 끝이 없는 보상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아페이론은 항상 중간자적 입장에서 사물을 균형 잡아 준다고 하였다. 이 힘은 신의 냉혹함과 인간의 정의 사이에서 항상 냉정하게 중간을 지키고 있는 어떤 힘이다. 이러한 힘은 플라톤 철학에 가장 중요한 개념이었던 “정의” 개념과 일맥상통한다. 플라톤은 정의를 벗어난 불의는 어떤 경우에도 용서받을 수 없다고 하였다. 물론 이 사상은 이미 인간의 도덕적인 입장으로 빠진 후의 이야기다. 그렇다면 아낙시만드로스에 있어서 중간자는 무엇인가?
아낙시만드로스는 특히 합리주의적인 철학과 귀납적인 과학을 기틀로 자신의 원질론을 주장하였고, 그것을 바탕으로 우주론을 정립하였기 때문에, 지지대가 없는 지구가 그 만큼 견고했던 것처럼 그의 학문적인 이론배경은 가정적 실체이지만 오늘날까지 굳건히 지켜지고 있는 것이다.
서정욱
'Anaximandros(기610-540) > 아낙시만드로스'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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