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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aximandros(기610-540)/아낙시만드로스

아낙시만드로스 - 아페이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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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페이론 

                                                                                                     

 

아낙시만드로스에게서 우리는 우주와 자연세계를 포괄적으로 이해하려는 체계적인 시도를 처음 만나게 된다. 후대의 문헌이 전하는 그의 저술 목록들을 보면 그의 관심사는 대단히 광범위했던 것 같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그의 풍부한 사고 편력을 알려주는 자료들은 극히 적다. 그나마도 자연세계와 인간 및 동식물의 형성에 관한 내용에 치우쳐 있고 우주발생론의 첫걸음인 아페이론에 관해서는 더더욱 빈곤하다. 아낙시만드로스의 육성이 담긴 것으로 여겨지는 유일한 토막글조차 직접 인용에 의해서가 아니라, 테오프라스토스의 설명을 심플리키오스가 되풀이하는 대목의 일부로서 남아 있는 형편이다. 아폴로도로(기원전 2세기)가 아낙시만드로스의 책, 그것도 개괄적인 해설본을 접했다는 말은 있으나)1 아리스토텔레스와 테오프라스토스 이후의 어떤 저자가 그의 책을 참고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현재로서는 우리에게 두 사람이 유일한 증언자들인 셈이다. 알다시피 아리스토텔레스의 증언들은 충실한 보고서이기보다는 자신의 학설을 구축하기 위한 목적에 맞게 요약되고 윤색된 부분이 많다는 것은 공공연한 사실이다. 그에 비하면 테오프라스토스의 철학사 저술인 『자연철학자들의 학설들』)2은 역사적인 서술에 충실한 것으로 믿어져왔다. 한 세기 전에 딜즈는 소크라테스 이전을 다루는 모든 고대 학설사가들이 테오프라스토스의 『학설들』에 어떤 식으로든 의존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것은 유실된 테오프라스토스의 원본을 재구성하기 위해서 여러 증거자료들을 비교 검토한 결과였다. 그 후 딜즈의 연구 결과는 폭넓게 사용되어 왔다. 그러나 유실된 원형을 보다 분명하게 그려보려는 시도와 그렇게 함으로써 다른 발췌들의 문서적 가치를 평가하려는 시도는 아직도 완성되지 않았고 지금도 진행 중이다. 아낙시만드로스를 다룰 때 이 문서적 문제는 특히 중요하다. 아리스토텔레스와 테오프라스토스가 실제로 무슨 말을 했는지를 결정하고 평가하는 작업이 바로 그 사상가의 생각을 제대로 확인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본 논문의 작업도 예외 일 수는 없다.

 

딜즈의 연구를 통해서 더욱 분명해 진 사실이지만, 테오프라스토스의『학설들』의 첫 권에서 나온 것으로 확인된 토막글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A에서의 초기 자연철학자들의 아르케들에 관한 개관 사이의 유사성은 일찍부터 주목을 받아왔다. 이러한 유사성으로 인해서 테오프라스토스의 독자성은 부분적으로 수정되었지만, 역으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증언들이 신뢰성을 확인받는 측면이 있다. 이 문제에 관해서 이 글의 논의가 덧붙이는 새로운 점은 없다. 아낙시만드로스의 유일한 토막글에 대한 해석을, 그것도 아페이론에 한정해서 시도해 보는 과정에서 이 두 가지 측면, 즉 아리스토텔레스의 증언들이 갖는 자료서의 가치를 드러내고, 테오프라스토스가 아리스토텔레스적 개념을 사용하는 방식과 그에 따른 오해의 일단을 보여주는 정도이다. 토막글을 인용하는 것부터 시작해 보자.

 

[1]그것[근원]은 하나이고 운동하며 무한정하다고 말하는 사람들 가운데, 프락시아데스의 아들이며 밀레토스 사람으로서, 탈레스의 후계자요 제자인 아낙시만드로스는 아페이론을 있는 것들의 근원(arche)이자 원소라고 말하면서 이것[아페이론]을 근원에 대한 이름으로서 처음 도입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것[근원]은 물도 아니고, 원소라고 불리는 것들 가운데 다른 어떤 것도 아니며, [물이나 원소들과는]다른 무한정한 어떤 본연의 것으로서, 그것에서 모든 하늘들과 그것[하늘]들 속의 세계들이 생겨난다. 그런가 하면 그것들로부터 있는 것들의 생성이 있게 되고, 이것들에로 [있는 것들의] 소멸도 필연에 따라 있게 된다. 왜냐하면 그것[원소]들은 [자신들의] 잘못에 대한 배상과 보상을 시간이 정해주는 순서에 따라 서로에게 지불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그는 보다 시적인 용어로 그것[원소]들을 말한다. 이 사람은 4가지 원소들의 상호 변화를 주목하고서 이것들 가운데 어떤 하나를 기체로 삼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여기고, 이것들 외에 다른 어떤 것을 [기체로 삼는 것이 적절하다고 여겼음이] 분명하다. 이 사람은 생성을 원소의 변화로부터 설명하지 않고, 영원한 운동으로 인한 대립자들의 분리되어 나옴으로 설명한다. 그렇기 때문에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사람을 아낙사고라스 학파 사람들과 같은 부류에 놓았다.(『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학」에 대한 주석』24, 13)

 

이 인용문과 관련해서는 무엇보다도 아낙시만드로스의 육성이 담긴 토막글의 범위와 그것의 해석을 둘러싸고 많은 논의들이 개진되어 왔는데, 여기서는 다루지 않고 아페이론에 관한 내용에만 주안점을 둔다. 인용문을 보면 심플리키오스는 먼저 아낙시만드로스를 일원론자로 분류해 놓고, 아페이론에 대해서 아낙시만드로스가 무슨 말을 했는지를 인용한 다음, 자신의 해설과 평가를 덧붙이고 있다. 전체적으로 볼 때, 심플리키오스의 진술들은 토막글로 평가받는 비유적 표현)3을 제외하면 용어와 표현방식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진술들을 생각나게 한다. 테오프라스토스와 심플리키오스의 손을 거친 것이지만 해석상의 중요한 표현은 아리스토텔레스에서 직접 나왔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I. 텍스트[1]에서 아페이론을 규정하는 첫 번째 용어들은 그리스어로 '아르케'와 '스토이케이온'이다. '아르케'의 일차적인 의미는 어떤 일이 처음 시작됨이라는 뜻의 '발단(發端)', 또는 그 계기가 되는 바탕으로서의 '근원(根源)'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연철학자들의 학설들을 논하면서 이 말을 주로 사물의 궁극적인 구성 성분으로서의 요소(要素), 또는 사물들의 운동과 생성 원리(原理)를 가리키는데 사용한다. 그런가 하면 '스토이케이온'은 소크라테스 이전 문헌에는 사용되지 않은 용어로서 음절의 구성 요소가 되는 음소나 자모를 가리키는 말이었는데, 사물의 궁극적인 구성 원소(元素)라는 뜻으로 사용한 것은 아리스토텔레스였다)4. 그러고 보면 아페이론을 아르케라고 말하는 것은 '근원'이라는 일차적인 의미 때문에 어색하게 들리지 않지만, 아페이론을 스토이케이온이라고 하는 것은 자연스럽지 않은 구석이 있다. 아페이론이라는 말을 일단 '무한정한 것'이라고 번역한다고 할 때, 단수로 사용된 이 '무한정한 것'이란 말의 의미가 불투명한 탓이겠지만, 우선 원소라는 말만 두고 보더라도 그것이 우주 만물을 구성하는 궁극적인 조각(particle)이라면, 아페이론은 원소들의 집합체 정도로 표현되어야 할 것 같다. 이른바 4원소 물, 불, 흙, 공기가 각각 하나의 스토이케이온이라 불리는 것은 그것들 각각이 실제에서는 조각들의 집합체이면서도 각자 나름의 질적인 동일성을 갖기 때문이라 할 수 있겠는데)5, 텍스트[1]에서 분명히 밝히고 있듯이 아페이론은 4원소와 같은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아페이론이 어떤 의미에서 하나의 스토이케이온인가? 아낙시만드로스의 아페이론에 대해서 아르케와 스토이케이온이라는 말을 함께 쓰는 예가 학설사 계열의 다른 유력한 전거)6에서도 확인되는 것으로 볼 때  테오프라스토스가 실제로 그렇게 표현했던 것 같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가 아낙시만드로스의 아페이론을 직접 또는 암시적으로 언급하는 여러 대목들을 보면, 아페이론에 대해서 아르케와 스토이케이온을 나란히 쓰고 있지는 않다. 또 아페이론을 가리켜 스토이케이온이라고만 말하는 곳도 눈에 띄지 않는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두 용어를 병기해서 사용하는 대목은 『형이상학』A에서 볼 수 있다. 『형이상학』A편은 직간접적으로 테오프라스토스를 거쳐서 후대의 모든 학설사에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심플리키오스의 인용문[1]과 비교해 보자.

 

 

[2]최초의 철학자들 대부분은 모든 것들의 질료적 아르케들만이 있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그것으로부터 있게 되고, 그것으로부터 최초에 생겨나서 마침내 소멸되어 그것으로 [되돌아가는데], 그것의 상태는 변하지만 본질은 영속하므로, 그것을 그들은 있는 것들의 스토이케이온이자 아르케라고 말하기 때문이다.(『형이상학』983b7~12)

 

테오프라스토스가 아낙시만드로스의 아페이론을 아르케이자 스토이케이온이라고 말했을 때는 질료적 아르케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런 정식화에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크다. 인용문[1]에서 그것으로부터 모든 하늘들과 그것들 속의 세계들이 생겨난다. 그것들로부터 있는 것들의 생성이 비롯되고 그것들에로 [있는 것들의] 소멸도 필연에 따라 있게 된다는 인용문[2]의 표현과 닮은꼴이다. 인용문[2]은 아르케와 스토이케이온을 두 가지 관념으로 표현하고 있는데, 첫 번째 'ex hou ~'는 이런 맥락에서는 '기원'(origin)이나 '구성 재료'(material)의 뜻을 가지며, 두 번째는 ex hou ~ eis ho는 스토이케이온을 가리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전형적인 용어법)7이다.

 

한편 인용문[1]에서 아페이론과 연결되는 관계문은 “그것으로부터 ~ 세계들이 생겨난다”까지다. 그리고 다음 문장 그것들로부터 ~ 소멸도 필연에 따라 있게 된다는 관계사가 복수임을 감안 할 때, 그리고 그 내용이 순환적 상호 변환의 관념을 표현하고 있는 것으로 볼 때, 관계문의 선행사는 4원소들(내지는 그것들의 대립적 성질들)로 보는 것이 적절하다)8. 그래서 심플리키오스의 글[1]은 아페이론에 대해서 ex hou ~ eis ho의 개념이 빠져 있는 것으로 보인다.)9 묘하게도 학설사 계열의 유력한 증거자료들은 이 대목에서 아르케와 스토이케이온을 함께 쓰면서도 ex hou ~ eis ho를 빠뜨리고 있다. 반면에 별로 신뢰성이 없는 자료들에서는 스토이케이온이란 말은 쓰지 않지만 아르케를 ex hou ~ eis ho로 서술하고 있어서 아페이론을 스토이케이온으로 간주한 것이다. 어쨌든 테오프라스토스가 스토이케이온이라는 말을 의미 있게 쓰고 있는 것이라면 ex hou ~ eis ho를 함께 놓고 있다고 봐야 하는데, 전체 해석과 연관 지어 판단해 볼 문제다.

 

그런데 아리스토텔레스의 글[2]은 스토이케이온으로서의 아르케 개념이 최초의 철학자들 '대부분'에 적용된다고 말한다. '대부분'이라는 유보적인 표현이 특별한 의미 없이 일반성을 좀 완곡하게 표현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겠으나, 그가 다른 곳에서 아낙시만드로스의 아페이론을 스토이케이온이라고 명명하지 않는다는 점과 어떤 연관이 있을 수도 있다. 사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오니아 철학자들 가운데 어느 누가 스토이케이온으로서의 아르케 개념을 이런 식으로 정식화해서 설명했다고 말하고 있지 않다)10. 아마도 이것은 아리스토텔레스 자신이 정식화했을 것이다. 그는 '대부분의' 이오니아 철학자들이 이 아르케 개념을 공유했다고 보았거나, 아니면 적어도 그렇게 해석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테오프라스토스는 이런 아르케 개념을 아낙시만드로스에게 그대로 적용하고 있는 셈이다. 아무튼 아낙시만드로스는 자연철학자들 가운데 이런 아르케 개념에 '아페이론'이라는 이름을 최초로 붙인 사람이다.

 

II. 아르케의 원래 뜻이 사물이 비롯되는 근본이나 원인이라고 했을 때, 거기에는 소멸해서 되돌아가는 귀환 처라는 뜻까지 들어있지는 않다. 아르케가 이런 뜻을 갖게 된 것은 자연철학자들의 통찰 덕분임은 분명한데,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그런 함의를 갖는 아르케를 처음 주장한 사람은 탈레스이다. 이는 아리스토텔레스 자신의 질료적 기체 개념에 맞추어 평가한 것인데, 물에 대해서 탈레스가 어떻게 생각했는지를 알려주는 믿을 만한 증언들이 없는 형편이고 보면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아르케 개념이 얼마나 들어맞는지 정확히 판단할 수는 없다. 어쨌거나 생성  소멸의 순환적 변화 관념에 맞추어 알기 쉽게 추리해보자면 물에서 시작해서 공기도 되고 흙도 되고 하다가 다시 물로 되돌아가는 식의 변화를 생각할 수가 있겠는데)11, 기실 이런 순환적 변화 관념은 아낙시메네스에게서 분명히 확인된다. 아낙시메네스의 공기는 '응축'과 '희박'의 정도 여하에 따라 불도 되고 바람도 되고, 물이나 흙이 되기도 한다)12.

 

그런데 인용문[1]에서 테오프라스토스가 말하는 아낙시만드로스의 아페이론은 이런 식의 순환적 변화 관념을 함축하는 아르케인지 의심스럽다. 심플리키오스의 해설[1]에 따르면, 아낙시만드로스가 4원소들을 아르케로 놓는 것이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한 동기는 4원소들의 상호 변화, 즉 앞서 말한 바의 순환적 변화에 주목했기 때문이다. 이 4원소들의 상호 변화를 심플리키오스가 정확히 어떻게 이해하는지 본문에서 분명히 드러나 있지 않아서 당장 판단하기는 어렵지만, 스토이케이온으로서의 아르케 개념을 정식화하고 있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말[2]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확인해 볼 수 있다. 그것은 양태는 변하지만 본질은 영속하는 그런 것이다. 그래서 그것은 생겨나지도 소멸하지도 않는다 그리고 이어지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언급을 보면 그가 말하는 아르케는 자신의 개념 틀로 주조해 낸 질료이자 기체로서의 아르케임이 잘 드러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런 개념으로 보자면 공기는 물의 양태 변화에 불과한 것이고 물 자체는 변한 것이 아니라고 설명할 수는 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이곳에서 탈레스의 물을 그런 아르케라고 말하는 것으로 봐서 실제로 그렇게 생각한 것 같다.

 

기체 내지는 질료라는 아리스토텔레스적 포장을 벗겨 내더라도 변화를 겪지 않고 항존하는 이 아르케 개념이 잘 들어맞는 이오니아 철학자들이 있다. 엠페도클레스나 아낙사고라스, 데모크리토스의 아르케가 그렇다. 이를테면 엠페도클레스의 '뿌리들'은 그것들의 섞임과 분리에 의해서 사물이 생겨나고 소멸하는 그런 것이지만, 뿌리들 자체는 이합집산만 되풀이 할 뿐, 공기가 불로되거나 물이 흙으로 되는 일은 없다)13. 이처럼 물이면 물, 불이면 불로서 자신의 정해진 고유성을 항시 유지하면서 사물의 구성요소가 되는 것, 사실 '스토이케이온'은 바로 그런 대상에 딱 어울리는 말이다.

 

스토이케이온의 완전한 의미가 이런 것이라고 할 때, '아페이론'이라는 말과 어울릴 수 있는 경우는 한가지 밖에 없다. 즉 스토이케이온으로서의 아페이론이란 아페이론적인 측면을 갖는 스토이케이온이라는 것. 이를테면 원소이면서 무한정한 것으로 가정되는 아낙시메네스의 공기와 같은 것을 생각하면 된다. 여기에 아낙시만드로스의 아페이론은 4원소들과는 다른 것이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는 상황이고 보면, 스토이케이온으로서의 아페이론 개념에 가장 유력한 후보는 아낙사고라스의 '같은 부분으로 된 것들'로 좁혀진다. 인용문[1] 말미에서 심플리키오스가 아리스토텔레스를 거명하며 아낙시만드로스를 아낙사고라스와 같은 부류로 놓는 것도 다 이유가 있어 보인다.

 

III. 아리스토텔레스가 아낙시만드로스를 아낙사고라스와 함께 분류했다는 심플리키오스의 말을 확인해 줄 만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언급이 있다.

 

[3]자연철학자들의 말에 따르면 두 가지 설명 방식이 있다. 기체(基體)로서의 물체를 ―그것이 셋 중에 어떤 것이든, 아니면 불보다는 더 촘촘하고 공기보다는 더 성긴 다른 어떤 것이든― 하나로 보는 사람들은 촘촘함과 성김에 의해서 [그 하나를] 여럿으로 만들어서 다른 것들을 산출해낸다. [……] 한편 다른 사람들은, 아낙시만드로스가 말하는 것처럼, 대립자들이 하나 속에 있다가 거기에서 분리되어 나온다고 말한다. 엠페도클레스와 아낙사고라스처럼 하나와 여럿이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인데, 이들 역시 섞인 것으로부터 다른 것들을 분리해내기 때문이다. (『자연학』A4 187a12~23)

 

여기서 아리스토텔레스가 아낙시만드로스, 아낙사고라스, 그리고 엠페도클레스를 4원소 가운데 하나(혹은 중간적인 것)를 기체로 놓는 철학자들과 구별하는 포인트는 인용문[1]의 심플리키오스의 해설과 같다. 즉 4원소들 중 하나를 기체로 놓는 사람들이 말하는 생성의 원리는 '촘촘함과 성김'인 반면에 아낙시만드로스, 아낙사고라스, 엠페도클레스의 그것은 '분리'이다. 좀 부연하자면, 전자는 원초적인 물체, 즉 '원소'(심플리키오스[1]의 표현에 따르면)의 밀도(密度) 변화에 따라 원소 자체가 이러저러한 것으로 변화해서 여럿을 산출한다는 것이고, 후자는 원초적인 물체에서 여타의 것들(심플리키오스의 표현[1]에 따르면, 대립자들)이 분리되어 나온다는 것이다. 그런데 아리스토텔레스의 언급은 심플리키오스의 것처럼 단순하지가 않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아낙시만드로스를 아낙사고라스와 같은 부류로 묶으면서도 다시 또 구별을 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아낙시만드로스와 아낙사고라스를 같은 부류로 묶는 공통점은 두 가지다. 하나는 생성의 원리를 '분리'로 설명한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원초적 물체의 성격이 '섞인 것'이라는 점이다. 반면에 구별되는 점은 아낙시만드로스는 일원론자이지만, 아낙사고라스는 단순한 일원론자가 아니라는 점이다. 심플리키오스는 양편의 공통점만을 보고 있다. 게다가 그 공통점이라는 것도,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엠페도클레스와도 공유하는 공통점이다. 아낙시만드로스를 아낙사고라스 쪽으로 몰고 가는 심플리키오스의 이런 해석을 더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 있다.

 

[4]⑴또한 테오프라스토스는 이점에 관해서 아낙사고라스가 아낙시만드로스와 아주 비슷한 주장을 한다고 말한다. ⑵왜냐하면 저 사람은 아페이론에서의 분리과정에 유사한 것들이 서로에게로 이동한다고 말하며)14, 모든 것 속에 금이 있었기에 금이 생기는 것이고, 모든 것 속에 땅이 있었기에 땅이 생기는 것이라고 말한다. 마찬가지로 여타의 모든 것들, 정확하게 말해서, 생겨난 것들이 아니라 속에 들어있었던 것들 각각도 그러하다고 말한다. ⑶아낙사고라스는 운동과 생성의 원인을 지성(nous)으로 놓았는데, 이것에 의해서 <같은 부분으로 된 것들이> 분리됨으로써 그것들이 세계들과 다른 모든 것들의 자연을 산출했다. ⑷그[테오프라스토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렇게 볼 때, 아낙사고라스는 질료적 아르케들을 무한정한 것들로 놓았고, 지성을 운동과 생성의 유일한 원인으로 놓았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모든 것들의 혼합체를 성질에서나 크기에서나 한정되지 않은 하나의 자연(自然)으로 상정한다면, 그[아낙사고라스]는 두 가지 근원, 즉 무한정한 것으로서의 자연과 지성을 말하고 있는 셈이다. 따라서 그는 물체적인 원소들을 아낙시만드로스와 비슷하게 상정하고 있음이 분명하다.(『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학」에 대한 주석』27, 2)

 

테오프라스토스에서 나왔음을 확인시켜주고 있는 이 구절은 '섞인 것'과 아페이론의 관계에 대해서보다 자세한 정보를 제공해 준다. 후반부 테오프라스토스의 말을 직접 인용하는 곳[⑷]을 보면 아낙사고라스의 '섞인 것'이 어떤 의미에서 아페이론인가를 짐작할 수 있다. 모든 것들의 혼합체를 성질에서나 크기에서나 한정되지 않은 하나의 자연으로 상정할 경우에 바로 그런 의미에서 아낙사고라스의 질료적 아르케들을 아페이론이라 할 수 있다는 것. 아낙사고라스가 말하는 '모든 것들의 혼합체'는 분리되기 전의 모든 것들 속에 모든 것들이 들어있는 상태를 가리킨다. 테오프라스토스는 그런 섞인 상태를 곧바로 아페이론이라고 말하지 않고, 그런 상태를 질적으로나 양적으로 한정되지 않은 하나의 자연으로 놓는다면 그것을 아페이론이라 할 수 있다고 말한다. 테오프라스토스가 말하는 질적으로나 양적으로 한정되지 않은 하나의 자연이란 다름 아닌 기체이다)15. 이것이 심플리키오스가 인용하고 있는바, 아낙시만드로스의 아페이론과 아낙사고라스의 섞인 것 대한 테오프라스토스의 해석이다.

 

그런데 심플리키오스가 테오프라스토스를 충실히 따르고 있는지 연구자들로부터 의심을 받아온 구절이 있다. 문제의 구절은 두 번째 문장[⑵]의 '저 사람'이다. 정상적인 문법으로 치자면 이 말은 아낙시만드로스를 가리킨다. 그래서 이 문장은 앞 문장[⑴]에 대한 이유를 제시하는 문장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고, 접속사 'gar'의 용법에도 잘 맞는다. 그런데 '저 사람'이 말하는 내용을 보면 아무래도 아낙시만드로스의 말 같지가 않는다는 것이 문제다. 무한정한 것에서의 분리 과정에 유사한 것들이 서로에게로 이동 한다 까지는 그런대로 수긍이 가지만, 모든 것 속에 금이 있었기에 금이 생기는 것이고, 모든 것 속에 땅이 있었기에 땅이 생긴다는 좀 곤란한 것 같다. 어디에서도 아낙시만드로스가 이런 식의 말을 했다는 증거를 찾을 수가 없다. 전거라면 이 구절이 유일한 전거가 되는 셈인데, 그렇기 보기에는 아낙사고라스의 이론과 너무 똑같아 보인다. 아낙시만드로스의 아페이론이 '저 사람'이 말하는 것처럼 아낙사고라스의 섞인 것과 대동소이 한 그런 것이라면, 직접 인용[⑷] 속의 테오프라스토스가 조건문장을 사용할 필요도 없지 않은가.

 

간단한 해결책은 심플리키오스가 테오프라스토스를 충실히 따르지 않았다는 쪽으로 정리하는 것이다. 인용문[3]에서 테오프라스토스의 말을 직접 인용하는 부분[⑷]을 제외한 나머지는 심플리키오스가 테오프라스토스에서 본 것을 풀어쓴 것이며, 아낙사고라스의 이론이 아낙시만드로스의 것과 유사하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니까 풀어쓰는 과정에서 심플리키오스 자신의 생각이 많이 들어갔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아페이론을 스토이케이온으로 강하게 해석한 것은 분명히 테오프라스토스였으므로 심플리키오스에게 부담을 덜어주는 쪽으로 얼마든지 이해할 수 있다. 

 

문제의 두 번째 구절[⑵]은 아낙시만드로스의 아페이론이 아낙사고라스의 섞인 것과 일치점을 생생하게 보여주기 위해서 아낙사고라스의 언어로 아페이론을 설명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사실 무한정한 것에서의 분리 과정에라는 표현에서의 '아페이론'은 아낙사고라스의 섞인 것을 직접 가리킨다고 보기 어렵다. 아낙사고라스의 학설과 관련된 전거들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섞인 것을 바로 아페이론이라고 표현하는 구절이 없다. 아낙사고라스에서 아페이론은 주로 술어로 쓰이는데, 그것은 모든 것들 속에 들어 있는, 또는 섞인 것에서 분리되는 '같은 부분으로 된 것들' 내지는 '씨앗들'에 대해서 이다)16.

 

그렇다고 해도 모든 것 속에 금이 있었기에 금이 생기는 것이고, 모든 것 속에 땅이 있었기에 땅이 생긴다는 아낙사고라스의 이론을 설명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기는 하다. 그 점을 염려해서 '저 사람'을 아낙사고라스로 읽을 수도 있다.)17 그러나 내가 보기에는 부자연스러운 점이 더 많은 것 같다. 우선 그 문장만 놓고 보더라도 이미 지적했다시피 무한정한 것에서의 분리 과정에라는 표현이 걸린다. 그리고 '저 사람'이 아낙사고라스라면 중간에 새삼스럽게 아낙사고라스 이름을 문장의 주어로 거명하는 것도 어색하다. 무엇보다도 앞문장과의 연결이 문제다. 접속어 'gar'의 해결이 어렵다. 테오프라스토스의 말을 인용하는 첫 문장[⑴]앞에 나오는 내용이 아낙시만드로의 학설에 관한 서술이라면 몰라도, 그렇지가 않고 아낙사고라스의 학설에 대한 서술이 나온다.)18 그래서 이 구절[⑵]을 앞에서 시작된 아낙사고라스의 학설에 대한 개요의 연속으로 봐야 할 터인데, 어쨌거나 첫 문장은 공중에 뜬다. 심플리키오스가 테오프라스토스의 말을 성급하게 미리 인용했다가 곧 거둬들인 거라고 보는 것)19은 아무래도 궁색하다. 내용을 봐도 그렇다. 금에 관한 언급은 인용문[⑴]에 앞서 아낙사고라스의 학설에 대한 서술에서도 나온다. 표현이 약간 다르다 해도 같은 말을 반복하는 셈이다. 테오프라스토스의 말을 불쑥 인용하는 바람에 중단했던 설명을 다시 하는 것으로 보는 것)20 보다는, 아낙사고라스의 이론에서 언급했던 예가 비교 상대인 아낙시만드로스의 이론에도 그대로 적용된다는 것을 설명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낫다)21. 즉 아낙시만드로스는 '아페이론'이라는 표현을 썼다는 점에서 다르지만, 생성을 '분리'로 설명하는 것은 마찬가지이므로 나머지는 아낙사고라스의 말로 비슷하게 설명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다음 구절[⑶]의 운동과 생성의 원인을 지성(nous)으로 놓았다는 아페이론에서의 분리만을 언급한 아낙시만드로스와 대비를 의식한 언급으로 보면, 다음 구절[⑷]에서의 되풀이 언급도 어색하지 않다.

 

IV. 테오프라스토스가 아낙시만드로스의 아페이론을 아낙시만드로스의 섞인 것과 유사한 것으로 보았다면 아페이론을 스토이케이온이라고 할 만한 이유가 있다. 그리고 그와 더불어 아페이론을 스토이케이온으로 놓게 한 4원소들의 상호변화 문제를 어떻게 이해했는지도 짐작 가능하다. 4원소들의 상호변화의 문제는 심플리키오스의 해설 부분에 나온다. 이 해설 부분(이 사람은 ~ 인용문 끝까지)은 학설사 계열의 다른 전거들에서는 확인되지 않는다. 사용되는 용어들을 미루어 볼 때 심플리키오스가 아리스토텔레스에 의지해서 해설을 하고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4원소들의 상호변화는 토막글과 연결되어 스토이케이온 개념으로 정식화되어 있어서 테오프라스토스의 말에 대한 심플리키오스 자신의 해설에 해당된다.

 

테오프라스토스가 아페이론을 스토이케이온으로 봤다는 것은 인용문[1]에서 그가 4원소들과는 다른 어떤 본연의 것을 4원소들과는 다른 종류의 원소들의 집합체로 해석했고, 그 후보자로서 아낙사고라스의 '같은 부분으로 된 것들'을 생각했다는 말이 된다. 그리고 4원소들의 상호변화, 즉 질적 변화가 그 이유였다. 그렇다면 4원소들의 질적 변화가 스토이케이온으로서의 자격에 결격사유가 되기 때문이라고 해석했다는 말이 된다. 심플리키오스의 이런 해석이 맞는지 평가해야 한다. 심플리키오스가 이 부분을 언급하면서 보았을 것으로 여겨지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텍스트는 다음과 같다)22.

 

[5]그러나 무한정한 물체는 결코 하나이며 단순한 것일 수가 없다. 그것이, 어떤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원소들과는 별개의 것으로서 이것으로부터 그들이 이것들[원소들]을 산출해내는 그런 것이든, 아니면 단순히 [무한정한 물체]든 간에 말이다. 실제로 이것[원소들과는 별개의 것]을 무한정한 것으로 놓는 반면에, 다른 것들이 그것들[공기나 물]의 무한정함에 의해서 소멸되지 않도록 공기나 물을 무한정한 것으로 놓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왜냐하면 공기는 차갑지만 물은 습하고 불은 뜨거운 것처럼, 그것들[원소들]은 서로 간에 상반되기 때문이다. 만약 그것들 중 하나가 무한정하다면, 다른 것들은 모두 이미 소멸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무한정한 것은 [원소들과는]다른 것이며 그것으로부터 이것[원소]들이 생겨난다고 그들은 말한다.

 

그런데 그런 것은 있을 수 없다. 그것이 무한정하기 때문이 아니라, … 원소들로 말해지는 것들 이외에 그런 류의 감각적 물체는 없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것으로부터 모든 것들이 있게 되었다면, [다시] 분해되어 그것으로 돌아가기 마련이며, 따라서 공기와 불, 흙, 물과는 별도로 여기에 [그런 것이] 있을 텐데, 전혀 그런 것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자연학』A4, 204b24~35)

 

인용문[5]은 4원소들의 상호 변화가 왜 문제가 되는지를 비교적 분명하게 말해주고 있다. 설명의 핵심 요지는, 4원소들은 서로 대립적 성질을 가지고 있는데, 어느 한편의 것을 무한정한 것으로 놓게 되면 대립의 균형이 깨져서 결국 다른 한쪽의 소멸로 귀결된다. 그렇기 때문에 4원소들 중 어느 하나를 아페이론으로 놓을 수가 없어서 4원소와는 별개의 것을 아페이론으로 놓았다는 말이다. 얼른 보면 심플리키오스의 해석이 맞는 것 같다. 그러나 자세히 보자.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은 4원소 외에 별도의 것을 아페이론으로 놓는 직접적인 이유는 4원소들의 상호변화, 즉 질적 변화 자체에 있다기보다는 상호대립의 균형을 깨뜨린다는데 있다는 것이다.

 

심플리키오스가 이 대목에서 4원소들의 질적 변화 자체의 문제로 읽었다면 그것은 스토이케이온 개념에 섣불리 경도되어 있는 탓이다. 사실 질적 변화 자체가 문제라면 굳이 4원소들과 별개의 것을 찾을 필요가 없다. 알다시피 엠페도클레스처럼 해결할 수도 있다. 질적 다양성의 확보 때문에? 그것은 스토이케이온 개념을 전제하고 한걸음 더 나간 것인데, 그렇다고 아낙사고라스로 갈 필요는 없다. 대립자들의 상호 균형을 깨뜨리지만 않으면 된다. 다양성은 대립자들의 질적 변화가 해결해 준다. 우주와 세계의 무한성 때문에 그것은 부분적으로 스토이케이온 개념도 피해갈 수 없는 문제이고, 그럴 경우 4원소들의 상호변화 문제와 직접 결부되는 사안도 아니다. 조금 더 자세히 언급해 보자. 세계의 무한성은 두 가지 측면, 공간적인 무한성과 시간적인 무한성이다. 시간적 무한성이란 생성의 연속성과 다르지 않다. 그러니까 4원소들의 질적 변화 문제와 관련해서 스토이케이온 개념이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은 생성의 연속성에서 이다. 그러나 이 경우에 스토이케이온은 변화의 완전한 사이클을 함축하므로 무한정한 것으로 가정될 이유가 없다)23. 공간적 무한성의 경우는 4원소들의 질적 변화 문제와는 무관하게 가정되어야 한다. 요컨대 스토이케이온이라면 무한정 할 필요가 없고 스토이케이온으로 무한정하다면 질적 변화의 문제와 관련이 없다는 이야기다.

 

그러면 왜 4원소들과는 별개의 것을 아페이론으로 놓는가? 그렇게 하지 않고서도 4원소들의 질적 변화 문제를 해결할 수는 있다. 4원소들의 대립적 균형을 깨뜨리지 않는 쪽으로, 즉 4원소 가운데 어떤 것이든 무한정한 것으로 놓지 않으면 된다. 그러나 이 경우는 세계의 무한성 문제에 걸린다. 또 논리적으로는 4원소들의 대립적 균형을 유지하는 조건이라면 도대체 4원소들 중 어느 하나를 아르케로 놓는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모호해진다는 문제도 있다. 그래서 4원소들 가운데 하나를 무한정한 것으로 놓게 되면 다시 대립자들의 상호 균형의 논리에 걸려들게 되어 일종의 딜레마다. 4원소들과는 별개의 것을 무한정한 것으로 놓아야 된다.

 

실상 스토이케이온 개념을 전제하지 않고 물이나 공기를 아르케로 놓는다는 것은 물이나 공기를 무한정한 것으로 놓는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24. 아르케의 일차적인 뜻이 사물들이 생겨나는 바탕으로서의 기원내지는 원천이라는 점에서 볼 때, 그것으로부터의 생성이 끊이지 않고 계속되려면 그 원천이 한정되어 있어서는 곤란하다는 것을 생각하기는 어렵지 않다.)25그리고 대립자들의 상호 균형은 물의 상태변화라든가 낮과 밤의 교체, 계절의 변화 등의 경험으로부터 쉽게 접할 수 있는 현상이다. 4원소들의 상호변화의 문제는 이처럼 4원소들 가운데 하나를 아르케로 놓는 이오니아 일원론자들의 가설과 경험적 현상 간에 제기될 수 있는 문제를 간명하게 구성해 놓은 것이다. 그래서 비록 이것이 대립자들을 사용하는 아리스토텔레스 특유의 논증이라고 해도 아낙시만드로스의 생각을 반영하지 않는다고 볼 이유는 없다.)26 대립자들의 상호 균형의 관념은 인용문[1]에서 토막글과 함께(그런가 하면 그것들로부터 ~ 배상과 보상을 시간이 정해주는 순서에 따라 서로에게 지불하기 때문이다.) 생생하게 표현되고 있다.

 

인용문[5]에서 정작 아리스토텔레스가 스토이케이온 개념을 끌어들이는 것은 대립자들의 상호 균형 원리에 근거해서 4원소들과는 별개의 것으로 놓은 아페이론을 비판할 때 이다. 대립자들 간의 상호 균형 논증에 근거해서 4원소들과는 별개의 것을 아페이론으로 놓는다고 하자. 그렇다면 그것은 실제 사물들의 스토이케이온 역할을 하는 것일 테고(ex hou ~ eis ho), 그렇다면 물이나 공기처럼 경험할 수 있는 것으로 우리 곁에 있어야 할 텐데, 아페이론은 그렇지가 못하다는 것이 비판의 요지다. 이 비판의 의미는 만약 아낙시만드로스가 스토이케이온 개념을 사용했다면(제대로 알았다면), 그는 아페이론을 아르케로 놓지 않았을 것이라는 정도로 읽힌다.

 

V. 테오프라스토스는 아낙시만드로스의 아페이론을 아낙사고라스의 섞인 것과 바로 동일시하지는 않았더라도, 개념적으로 명료화되지 않았을 뿐 내용적으로 다르지 않다고 이해했던 것 같다. 아페이론을 스토이케이온이라고 명명한 것도 그렇고, 아리스토텔레스[3]가 아낙시만드로스를 아낙사고라스와 같이 분류할 때 엠페도클레스를 포함시키는데 비해서, 테오프라스토스는 아낙사고라스만을 언급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섞인 것'과 '분리'라는 공통점만을 주목한다면 엠페도클레스를 뺄 이유가 없다. 엠페도클레스를 제외시킨 것은 섞였다는 점만이 아니라 섞인 것의 성분까지 고려했기 때문이다)27. 아페이론의 명칭인 스토이케이온을 단수로 쓴 것은 아페이론이 그렇듯이 '섞인 것'을 하나의 질료적 실체로 간주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여럿으로 분리되어 사물들을 형성하는 원소들이 된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와 여럿은 별개의 존재가 아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엠페도클레스와 아낙사고라스를 하나와 여럿이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라 한 것(인용문[3])은 바로 이런 의미에서이다. 그리고 이들의 차이점으로 엠페도클레스는 하나와 여럿의 순환 주기를 상정하지만, 아낙사고라스는 대립자들의 분리를 단 한번만 상정한다는 말(주26)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점은 심플리키오스의 인용문[1]에서 아페이론의 스토이케이온 개념을 정식화는 ex hou ~ eis ho이 빠진 것으로 보였던 문제에 해결책을 제공한다. 아낙사고라스는 대립자들의 분리를 단 한번만 상정한다. 그래서 하나의 질료적 실체인 '섞인 것' 자체는 스토이케이온의 역할을 하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그것은 아르케의 일차적인 의미와 같다. 따라서 그것으로부터 ~ 세계들이 생겨난다로 충분하다. 다음단계로 섞인 것에서 분리되어 나온 것들은 여럿이며 스토이케이온의 기능을 한다. 이것은 다음문장 그것들로부터 ~ 이것들에로이 표현해 주는 것으로 보면 된다. 그러나 테오프라스토스의 해석을 끝까지 밀고 나간다면 그렇다는 이야기고 그렇게 할 이유도 또 그럴 필요도 없다. 스토이케이온 개념만 제거 하면 더 깨끗하게 비슷한 그림이 그려진다. 뒤집어 보면 테오프라스토스가 아낙사고라스와 비슷하게 읽은 것은 아리스토텔레스 탓만도 아니다. 아낙시만드로스의 글을 직접 접하지 못한 상황에서, 아니면 기껏해야 요약본 정도를 접한 상황에서)28 애매하고 불투명한 아낙시만드로스의 체계를 가능한 이해할 수 있는 형태로 정리하는 것은 해설자의 본분에 충실한 것일 수도 있다.

 

어쨌든 테오프라스토스가 아낙사고라스에서 일치점을 찾는 것은 아리스토텔레스적인 개념으로 아낙시만드로스를 강하게 해석한 결과다. 스토이케이온 개념이 그렇고 아낙사고라스의 섞인 것을 분리 이전의 '하나'로 해석하는 것이 단적인 예다. 실제로 아리스토텔레스가 아낙사고라스를 일원론자로 언급하는 곳은 기체로서의 질료 개념을 부각시키는 대목이다)29.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의 해석은 한 방향으로만 가지 않는다. 의도적이지는 않을 지라도 보고에 충실한 경우도 있다. 초기 자연철학자들의 견해들을 개괄하는 곳[3]에서는 엠페도클레스와 아낙사고라스를 다원론자들로 분류하고 아낙시만드로스와 구별하는데, 이것은 어느 정도 정확한 서술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게다가 대립자들의 상호 균형의 문제로 설명하는 대목에서는 '섞인 것'이라는 표현을 쓰지 않고 '원소들 이상의 것'(또는 원소들과는 별개의 것)(인용문[5])이라는 표현을 쓴다. 이것은 단순히 우연적인 구별이 아니다. 이 맥락에서 '섞인 것'이라는 표현을 쓰게 되면 원소들이 지니는 대립적인 힘들의 균형의 논리에 다시 말려들게 된다)30. 그가 섞인 것이라는 표현을 쓴 곳은 기체로서의 질료 개념에 따라 자연철학자들을 분류하는 대목이다. 아리스토텔레스 자신은 대부분의 연구자들이 믿고 있는 것처럼 아낙시만드로스의 아페이론을 섞인 것으로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들은 이런 세심한 구별을 주목하지 못했다. 적어도 이런 구별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아페이론을 단순히 섞인 것으로 믿었다는 결론을 유보하게 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전거들은 아리스토텔레스 특유의 개념 장치들을 맥락에 따라 잘 분간해서 읽으면 의외로 우리가 바라는 사실에 다가서게 할 수도 있는 것이다.

 

아페이론에서 스토이케이온 개념을 제거하면 아낙사고라스의 체계에 의지하지 않고도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은 아낙사고라스의 체계와 비슷한 그림이 그려진다. 두 번째 단계에 해당되는 토막글은 4원소들을 포함한 대립적 힘들의 상호 균형에 따르는 풍부한 변화의 세계를 그러낸다)31. 대립적 힘들은 스토이케이온이 아니기에 그것들의 순환적 변화는 소모적이다. 그래서 아페이론은 아페이론이어야 한다. 대립하는 힘들의 세력 균형은 궁극적으로 그것들의 공급처인 아페이론에 의존한다. 그런 의미에서 아페이론은 세계를 에워싸고(포함하고) 조종한다. 실로 아낙시만드로스의 아페이론은 스토이케이온 개념이 자리 잡기 이전 이오니아 철학자들이 보여주는 일원론들의 완결판이다.

 

이 아페이론의 정체를 명료화할 것을 요구하는 것은 곤란한 주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와 테오프라스토스의 침묵이, 어쩌면 궁극적으로는 아낙시만드로스의 침묵이 그것을 증명해 주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들의 말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아페이론이 양적으로 무한한 그러나 질적으로는 '4원소들' 중 어떤 것과도 동일하지 않은 그런 것이라는 정도다. 그 외는 추측만이 있을 뿐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아페이론을 비판할 때처럼, 물이나 불처럼 감각으로 경험할 수 있는 성질을 갖는 물체라는 관념으로는 생각하자면, 아페이론에 대해서 우리가 떠 올릴 수 있는 것은 대립자들의 섞인 것 내지는 혼합체 정도 일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엠페도클레스나 아낙사고라스 아니면 데모크리토스 류의 섞인 것이 아니라면 별로 알려주는 바가 없다. 사실상 아페이론은 우리가 지각할 수 있는 어떤 물체와도 동일하지 않다고 봐야 한다)32. 아리스토텔레스가 자신의 전문 용어인 질료나 기체라는 용어를 쓰지 않은 곳에서 표현을 바꾸어 가며('섞인 것', '원소들과는 별개의 것', '중간적인 것') 아페이론을 표현하는 것도, 그리고 테오프라스토스가 아낙사고라스를 모델로 삼은 것도 그런 사정을 반영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고 아페이론을 비물질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것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비물질적 존재라는 것은 기원전 6세기의 사람들에는 거의 생각할 수 없는 관념이다.  게다가 아페이론이 모든 물질적 사물들의 원천이라면 그것은 그 자체가 어떤 종류의 물체였다는 것을 뜻한다. 일찍이 어떤 그리스인도 물질적 세계가 비물질적인 것에서 나올 수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이다. 비록 그들이 원초적 실체는 그것에서 나온 결과물과는 다른 것이어야 한다고 믿을 준비가 되어 있었을 지라도 말이다. 요컨대 우리는 아페이론을 그 자체로서 묘사할 수 없다.

 


김인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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