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양명
1. 역사적 맥락에서 본 왕양명 왕양명은 명나라 헌종 성화 8년인 1472년에 태어났다. 왕양명의 이름은 수인이고 자가 백안으로 절강성 여요 사람이다. 왕양명은 젊은 날, 병법에 관심이 많았고 28세 때 진사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랐다. 34세 때 탄핵 상소를 올렸다가 오히려 곤장 40대를 맞고 기절하였다. 37세 때 유배지인 귀주 용장역에서 머무는 동안 깨달음을 얻었다. 밤중에 격물치지의 의미를 홀연히 깨닫고 자기도 모르게 소리 지르고 펄쩍 뛰어 시종을 놀라게 했다. 그 당시 왕양명은 성인의 도는 나의 성으로 충분하기 때문에 이전의 방법론인 사물로부터 리를 추구하는 것은 오류라는 것을 깨달았다. 왕양명은 43세 때 치량지만을 학생들에게 가르치다가 명나라 세종 가정 7년인 1528년에 타계하였다. 향년 57세였다.
2. <대학문大學問> <대학문>은 양명학의 교본이다. + 명명덕(明明德) 왕양명은 <대학문>에서 말하기를 "대인은 세계의 모든 사물과 일체가 된 자이다. 따라서 그는 현상세계를 한 집안으로, 중국을 한 인간으로 여긴다. 육체를 근거로 너와 나를 구별하면 소인이다. 대인이 세계 모든 사물과 일체가 된 것은 의도한 것이 아니라 그 마음의 본래 인으로 인하여 세계 모든 사물과 일체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어찌 대인만 그렇겠는가. 소인의 마음도 그렇지 않음이 없지만 스스로 작아져 좀스러워진 것이다. 아이가 우물에 빠지려는 것을 보면 누구나 깜짝 놀라 측은지심이 생긴다, 그 이유는 마음의 인이 그 아이와 일체이기 때문이다. 이런 일체의 인은 소인의 마음에도 반드시 있다. 이 성(性)은 신의 계시로부터 나온 것이므로 저절로 빛나고 꺼지지 않는 영(靈)이므로 명덕(明德)이다. 따라서 대인이 되려는 학생은 오직 사욕을 제거하여 막힘이 없어지면 그 명덕이 저절로 빛남으로써 본래대로 세계의 모든 사물과 일체가 되는 것이지 본체의 밖에서 무엇인가 들어와 덧붙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왕양명은 모든 사물과 일체가 되는 것을 인(仁)으로 보았다. 이러한 인을 실현시키는 것이 명명덕(明明德)이다. 그럼, 명명덕은 어디 있는가. 명명덕은 인간이 신으로부터 부여받은 성이다. 이 성은 꺼지지 않는 영이지만 사심으로 인하여 막혀 있으므로 그 밝은 빛을 볼 수 없게 되어서 사물과 일체를 이룰 수 없는 것이다. 육상산에 따르면 우주가 인간을 격리시킨 것이 아니라 인간이 스스로 우주를 격리시켰다. 우주를 격리시킨 자는 소인이다. 맹자가 말한 측은지심, 수오지심 등 사단은 명덕이 빛남으로 인하여 생기는 현상이다. + 친민(親民) 왕얌명은 <대학문>에서 말하기를 "밝게 비추는 명명덕은 세계의 모든 사물과 일체인 그 본체를 드러내 세우고, 백성을 사랑함은 그 본체를 실현토록 하는 것이다. 따라서 명명덕은 친민을 위해 나온 것이고 친민은 그 명덕이 빛나는 곳이다. 군신, 부부, 친구, 더 나아가 산천, 귀신, 금수, 초목 등과 친하여 나와 일체의 인을 이루면 나의 명덕은 완전히 밝혀진 것이고 세계 모든 사물과의 일체가 된 것이다. 이것이 진성(盡性)이다."라고 하였다. 육상산에 따르면 마음은 신과 인간이 공유하는 판이다. 따라서 신과 인간은 다르지 않다. 마음의 본체인 본심은 모든 사물과 인간으로 이루어진 현상세계로부터 나온다. 따라서 본심의 명명덕은 현상세계의 모든 사물과 인간을 비추고 있는 것이다. 인간은 사심을 버리면 성이 활동하게 되므로 사물과 일체를 이룰 수 있다. 사물과 일체를 이룬다는 것은 현상세계의 본질을 파악하게 된다는 것이다. + 지선(至善) 왕양명은 <대학문>에서 말하기를 "지선은 명덕과 친민의 최고 기준이다. 신이 계시한 성은 순수한 지선으로서 그 빛나는 영은 꺼지지 않는다. 이 지선이 나타나는 곳은 명덕의 본체이고 그곳은 양지(良知)의 판이다. 지선이 나타남으로 인하여 옳은 것은 옳게 되고 그른 것은 그르게 됨은 경중, 후박에 따라 그 느낌과 감동이 변하여 운동하면서 종잡을 수 없이 저절로 신 가운데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지선은 백성과 현상의 기준으로서 그 사이에는 조금의 증감이나 의혹도 있을 수 없다."고 하였다. 지선이란 신으로부터 부여받은 인간의 성이다. 지선, 즉 인간의 최고 성은 바로 현상세계의 양지다. 치량지(致良知) 즉, 양지를 깨닫는 것은 신天이 부여한 성을 회복하는 것이다. 이 영원히 빛나는 영인 성 즉, 지선은 인간과 사물로 가득 찬 현상세계의 본질이다. 이러한 성을 깨닫기 위해서는 사심에서 벗어나야 한다. 왕양명을 비롯한 심학자들은 세계의 이원성을 부정하면서 오로지 형이하의 현상세계만을 인정한다. 왕먕명은 말하기를 "인간의 마음은 신의 연못이니 이 마음의 본체는 담지 않은 것이 없는 판이다. 원래 하나의 신만 있으니 사욕으로 인하여 장애가 생기면 이 신의 본체를 상실한다. 따라서 이제 생각에 생각을 더하여 양지를 깨달으면 치량지을 얻고 그런 장애와 질곡이 일제히 제거되어 인간의 마음은 다시 본체가 되어 신의 연못이 된다."고 하였다. 인간의 마음은 사욕이 제거 되어야만 성 즉, 양지, 지선을 깨닫고 신의 마음을 회복할 수 있다.
3. 지행합일(知行合一) 왕양명에 따르면 양지는 성이고 치량지는 성을 깨닫는 것이다. 지행합일이란 양지는 인간의 마음에서 진행하여 신의 본체인 본심과 합일하는 것이다. 측은지심의 양지는 인간의 성이지만 그 본체인 신과 합일을 이행한다. 교부철학자 안셀무스는 '알기 위하여 믿는다.'고 했다. 왕양명의 술어로 말하자면, 믿는 대상은 양지이고 믿는 대상이 시공을 경과하여 드디어 알게 된 것은 치량지이다. 치량지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사심이 제거되어야 한다. 왕양명은 말하기를 "신이 계시한 성은 내 마음의 본체로서 스스로 빛나면서 깨우쳐 밝히는 영이다. 오직 내 마음의 양지만이 스스로 그 선을 알고, 또 오직 내 마음이 양지만이 그 불선을 안다."고 하였다. 양지는 그 본체인 신을 향하고 있으므로 선악을 분별할 수 있다. 왕양명의 제자가 묻기를 "사람들은 이미 부친에 대하여 효도해야 함을 알고, 형에 대하여 공손해야 함을 알지만 실제로는 효도하지 않고 공손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지와 행은 분명히 다른 것입니다."라고 하자 왕양명은 답하기를 "그것은 이미 사욕에 의하여 지와 행이 단절된 경우이지 지행의 본체는 아니다. 지가 행하지 않는 경우는 없다. 알면서 행하지 않는다면 아직 모르는 것이다. 지행에 대한 성현의 가르침은 바로 그 본체를 회복하려는 것이지 다른 것이 아니다. 지는 행의 주된 뜻이고 행은 지의 실현이다. 지는 행의 시작이고 행은 지의 완성이다. 때를 만나 실현되면 오직 지만 말하더라도 이미 행이 내재하고 오직 행만 말하더라도 지가 내재한다."고 하였다. 아이가 우물에 빠지려 할 때 누구나 깜짝 놀라 측은지심이 생긴다. 마음의 측은함, 즉 양지는 그 선을 향하여 나아간다. 따라서 사심을 제거하여 지행의 본체를 본 자가 있다면 그는 그 본체를 따라 행동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4. 주왕이동(朱王異同) 왕양명은 자신의 학문을 주자의 학문과 구별 지었다. 왕양명은 말하기를 "주자가 말한 격물은 사물 안에 있는 그 리를 연구하는 것으로서 즉물궁리(卽物窮理)란 모든 사물 안에 있는 리를 확정하는 것이다. 내 마음은 모든 사물 안에 놓여 있는 리를 찾게 되므로 그것은 마음과 리를 둘로 쪼개는 일이다. 반면에 내가 말하는 치지격물(致知格物)은 내 마음의 양지는 모든 사물로부터 나온 것이라는 의미이다. 따라서 내 마음의 양지 안에는 리가 있는 것이다. 리를 담고 있는 모든 사물은 내 마음 판의 양지가 되면서 저마다 리를 세우게 된 것이다. 내 마음에 사물이 들어와 양지로 전환되는 것이 치지이고 그 사물이 마침내 내 마음에 리를 세우는 것이 격물이다. 따라서 마음과 리는 합하여 통일된다."고 하였다. 주자는 형이상의 리와 형이하의 성을 구별하였다. 형이하 모든 사물의 성은 그 형이상의 리와 합하여야 한다. 인간의 성도 리와 합일하여야 하고 인간 마음의 성도 리와 합해져야 한다. 이것이 즉물궁리이다. 즉 즉물궁리란 모든 사물과 현상의 리를 연구하여 정립하는 것이다. 반면에 왕양명은 형이상을 인정하지 않으므로 신과 리는 형이하에 존재한다. 신의 세계, 즉 형이하의 현상세계와 모든 사물은 저마다 리를 갖고 있어서 인간 마음에 들어오면 양지가 된다. 이것이 치지다. 이 치지, 즉 양지가 스스로 자신을 실현하면서 마음을 깨우치는 것이 격물이다. 재미있게도, 리의 성격을 갖고 있는 치지, 즉 양지는 인간의 마음 판에 들어와서 자신을 실현시키기를 기다리다가 사욕으로 가득 찬 마음이 깨지면서 본심을 실현시키는 것이다. 이것이 치지격물이다. 따라서 마음이 없으면 양지는 자리 잡을 데가 없는 것이다. 즉 마음이 없으면 리도 없다. 왕양명은 말하기를 "심즉리(心卽理), 즉 마음이 곧 리이다. 현상세계에 어찌 마음 밖에 일이 존재하고 또 마음 밖에 리가 존재하겠는가."라고 하였다. 왕양명에 따르면 마음 판에 놓여있는 모든 사물은 그 리를 내포하고 있다. 즉 심즉리이다. 한 인간이 효도를 한다면 그 인간의 마음은 효도의 양지, 즉 마음 판에 놓여있는 리가 본심으로 돌아가 합일을 실현한 것이다. 한 인간이 효도를 하지 않는다면 그 인간의 마음 판에는 효도의 양지가 아직 들어오지 않았거나 들어왔어도 사욕으로 인하여 본심과 합일하지 못한 것이다. 반면에 주자에 따르면 한 인간이 효도를 하는 이유는 효도의 리가 형이상의 본체세계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현상세계의 모든 인간은 본체세계에 존재하는 효도의 리에 그 성을 구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효도하지 않는다면 악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주자와 왕양명의 차이이다. 왕양명은 말하기를 "풀, 나무, 기와, 돌은 인간의 양지가 없다면 풀, 나무, 기와, 돌이 될 수 없다. 세계 또한 인간의 양지가 없었다면 세계가 될 수 없었다. 세계 모든 사물과 인간은 원래 일체이고 그 흔적은 영의 공간에 남겨져 있다. 인간 마음속의 한줄기 빛나는 영이 그 흔적이다."라고 하였다. 인간의 마음은 영이다. 영의 공간에는 세계와 모든 사물이 구비되어있다. 즉, 마음이 곧 세계이다. 마음을 알면 세계를 아는 것이다. 이것이 유심론이다. 이것이 왕양명의 포인트이다. 반면에 주자에 따르면 본체세계의 존재인 리는 현상세계에서 성으로서 생성되었다. 성은 모든 사물의 형이하적 상이지, 그 자체는 리가 아니다. 주자가 말하는 마음의 리는 본체세계에 따로 있다. 왕양명의 친구가 바위틈의 꽃을 가리키며 묻기를 "현상세계에, 마음 밖의 사물은 없다고 했으나 이처럼 꽃은 산에서 피고 지니 내 마음과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왕양명은 답하기를 "그대가 이 꽃을 보지 않았을 때 이 꽃과 그대의 마음은 함께 적막 속에 돌아가 있었네. 그대가 이 꽃을 보게 되자 꽃빛은 즉각 환하게 빛나게 되었네. 따라서 이 꽃은 그대의 마음 밖에서는 존재할 수 없는 것이라네."라고 하였다. 모든 사물은 원래 그 자체의 빛을 갖고 있다. 사물의 빛은 인간의 마음 밖에서는 빛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마음속의 영이 사물을 비추어야만 사물은 빛나기 때문이다. 따라서 모든 사물은 인간의 마음 판에서만 빛남으로써 존재하게 된다는 것이다. 왕양명은 말하기를 "세계, 귀신, 모든 사물은 내 빛나는 영이 밝게 비춤으로써 존재하는 것이다. 나의 빛나는 영이 밝게 비추지 않는다면 세계, 귀신, 모든 사물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제, 죽은 사람을 한번 보라. 이미 그의 맑은 영이 흩어지면 세계와 모든 사물은 도대체 어느 공간에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왕양명에 따르면 먼저, 인간 마음이 있고 나서 세계와 모든 사물이 있는 것이다. 빛나는 영은 세계와 모든 사물을 비추면서 세계와 모든 사물을 세계화하고 사물화 한다. 따라서 마음 속 빛나는 영이 떠나면 세계와 사물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왕양명은 현상세계에 마음 밖의 사물은 없다고 했다. 반면에 주자는 현상세계에 성 밖의 사물은 없다고 했다.
5. 불교와 도교 비판 주자에 따르면 유가는 성을 실(實)로 여기고 불가는 성을 공(空)으로 여긴다. 반면에 왕양명은 심을 실로 보았다. 왕양명은 특히 마음 속 빛나는 영을 강조하였다. 마음 속 빛나는 영은 양지를 비추고 양지는 빛나게 된다. 왕양명은 말하기를 "도교는 허(虛)를 강론하는데 성인이 어찌 허에 한 점의 실을 덧붙이겠는가. 불교는 무를 강론하는데 성인이 어찌 무에 한 점의 유를 덧붙이겠는가. 도가의 허는 양생에서 비롯되었고 불교의 무는 생사고해의 해탈에서 비롯되었다. 따라서 본체에 대하여 그와 같은 의도를 덧붙인 것이므로 저 허와 무는 본색이 아니라 오히려 본체에 장애를 가한 것이다. 성인은 다만 양지의 본색으로 돌아갈 뿐 어떤 의도에도 집착하지 않는다. 양지의 허는 곧 신의 태허이고 양지의 무는 곧 태허의 무형이다. 해, 달, 바람, 번개, 산천, 인간, 사물 등 모든 형태의 존재는 다 태허의 무형 속에서 발현하여 나온 것이므로 신은 아무런 장애가 되지 않는다. 그래서 성인은 양지가 드러난 대로 따를 뿐이다. 세계 모든 사물은 내 양지가 빛남에 따라서 존재하는 것이므로 한 사물이라도 양지가 되어서 빛나지 못한 적이 있었는가."라고 하였다. 양지는 절대적 기준으로서 현상세계, 즉 신의 세계와 모든 사물의 가능성이다. 인간은 그러한 양지에 따를 뿐이고 도교와 불교처럼 그 본체에 인위를 가하지 않는다.
6. 악惡의 기원 왕양명에 따르면 현상세계에 마음 밖의 사물은 없고 마음속에는 빛나는 영이 있다. 그럼, 악惡은 어디에서 비롯되는가. 왕양명은 말하기를 "지선이 마음의 본체이다. 조금이라도 이 본체를 넘어서면 악이다. 하나의 선이 있고 그에 대립하는 하나의 악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선악은 한 물건일 뿐이다."고 하였다. 선악은 서로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선으로부터 빗나간 것이 악이다. 왕양명은 말하기를 "희(喜), 노(努), 애(哀), 구(懼), 애(愛), 오(惡), 욕(慾)은 7정(情)이다. 이 7정은 인간의 마음과 합하여 함께 있으므로 양지는 더 밝게 빛나지 않으면 안 된다. 마치 햇빛처럼 조금의 틈이라도 있으면 일제히 빛을 비추어 드러내 밝히는 것과 같다. 구름과 안개가 온 공간을 뒤엎더라도 태허의 빛은 구별되듯이 햇빛 역시 소멸되는 것이 아니다. 구름이 햇빛을 가린다고 하여, 신은 구름이 필요 없다고 가르치지 않는다. 7정이 스스로 그러하게 흘러가는 것은 모두 양지의 기능이므로 7정을 선악으로 나눌 수 없지만 기회를 주면 안 된다. 7정이 나타나면 마음은 욕망과 함께 있는 것이므로 양지의 빛은 가려져 있는 것이다. 그러나 때마침 양지가 모여 비춤으로써 편견이 제거되고 그 본체는 회복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7정에 기회를 주면 마음의 본체, 즉 본심은 가려지게 된다. 그러나 7정은 마음 속 영을 완전히 가릴 수는 없다. 때에 맞게 빛나는 영이 양지를 비추면, 즉 치량지에 이르면, 새롭게 빛을 얻은 양지는 빛을 반짝이며 7정으로 인한 편견을 제거하고 본심을 회복하게 된다. <대학>에 따르면 마음에 분노가 있으면 바르게 될 수 없다고 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왕양명은 <전습록>에서 말하기를 "분노가 인간의 마음에 어찌 없으리오만 다만 기회를 주어서는 안 된다. 사람이 분노에 조금이라도 기회를 주어 적당함을 넘는 것은 확연대공(廓然大公)한, 즉 크게 일어나 저절로 빛나는 본체를 벗어난 것이다. 그래서 분노가 있으면 바르게 될 수 없다. 분노가 사물화 되어 들어오면 단지 그에 순응하기만 할뿐 조금의 기회도 주지 않으면 심체는 저절로 크게 빛나므로 본체의 바른 상태에 도달한다. 이를테면 밖에서 사람들이 싸우는 것을 볼 때 그것이 불의하면 내 마음은 분노하지만 본심은 저절로 크게 빛나므로 조금의 기도 발동하지 않는다. 이와 같이 분노한 사람은 이러한 마음으로 기회를 주지 않으면 바르게 될 수 있다."고 하였다. 분노하는 것은 생각이 대상에 기회를 주었기 때문이다. 7정에 기회를 주어서 적당함을 넘는 것은 본체를 벗어나는 일이다. <단경>에 따르면 첫 생각에 대상이 떠오르면 번뇌이고 다음 생각에 그 대상을 벗어나면 깨달음이라고 했다. 정호는 <정성서>에서 성인의 기쁨은 기뻐해야하는 대상에서 오고 성인의 분노는 분노하지 않으면 안 되는 대상에서 온다고 하였다. 성인의 마음은 맑은 거울처럼 저절로 밝게 비추므로 사물화 된 분노가 도래하면 그에 순응하지만 기회를 주지 않으므로 얽매이지 않는다. + 선악론 왕양명에 따르면 선악은 좋아하고 싫어하는 감정에서 비롯된다. 원래 모든 사물은 선악의 구분이 없다 설간이 화단의 잡초를 뽑으면서 양명 선생에게 묻기를 "세계에 왜 선은 기르기 어렵고 악은 뽑기 어렵습니까."라고 하였다. 왕양명은 답하기를 "그런 선악의 개념은 육체로부터 일어난 것으로서 그릇된 것이다. 세계의 뜻은 꽃이든 잡초든 똑같으니 무슨 선악의 구분이 있겠는가. 네가 꽃을 관상하려고 하므로 꽃은 선이고 잡초는 악으로 간주한 것이다. 만약 잡초를 약으로 쓰려한다면 잡초는 선, 꽃은 악으로 간주할 것이다. 이러한 선악의 개념은 모두 네 마음의 좋아함과 싫어함으로부터 생긴 것으로서 그릇된 것이다."라고 하였다. 설간은 묻기를 "그럼, 선도 없고 악도 없다는 말씀입니까."라고 하였다. 왕양명은 답하기를 "선도 없고 악도 없음은 '리의 정지'이고 선도 있고 악도 있음은 '기의 운동'이다. 기가 운동하지 않으면 선도 없고 악도 없게 되므로 이것이 지선이다."라고 하였다. 설간이 묻기를 "그럼, 불교에서 말하는 선도 없고 악도 없다는 말과 어떻게 다릅니까.'라고 하였다. 왕양명이 답하기를 "불교는 선도 없고 악도 없는 상태가 떠오르기를 기다리면서 일체의 일을 상관하진 않으므로 현상세계를 다스릴 수 없다. 그러나 유교의 성인이 말하는 선도 없고 악도 없음은 오직 일부러 좋아하거나 싫어하지 않고 오직 기가 운동하지 못하도록 성인의 도을 좇아 그것을 기준으로 삼고 한결 같이 리에 따라 모든 사물을 돕고 완성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설간은 묻기를 "그럼, 잡초는 뽑아서는 아니 되겠군요."라고 하였다. 왕양명은 답하기를 "그와 같은 입장이 부처와 노자의 견해이다. 잡초가 방해가 된다면 뽑지 못할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설간은 묻기를 "그렇게 된다면 일부러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이 아닙니까."라고 하였다. 왕양명은 답하기를 "일부러 좋아하거나 싫어하지 않는다고 전혀 호오의 감정이 없다는 뜻이 아니다. 그렇다면 지각이 없는 사람일 것이다. 작위하지 않는다는 것은 호오가 리를 좇아 드러나도록 조금의 기회도 감정에 휘둘리지 않는 것이다. 이와 같이 하면 호오는 같은 것이 되어버린다."고 하였다. 설간은 묻기를 "잡초를 뽑는 일이 어떻게 리가 드러나도록 하는 일이고 감정에 기회를 아니 주는 일입니까."라고 했다. 왕양명은 말하기를 "잡초가 방해가 된다면 뽑아야 하는 것이 이치이므로 뽑을 따름이다. 우연히 뽑지 못하더라도 마음에 번뇌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조금이라도 호오의 감정에 기회를 주면 심체에 번뇌가 되어 기의 공간이 심히 운동하게 된다."고 하였다. 우리는 자기의 신체를 나로 여기고 나와 대립하는 모든 사물을 타자로 보는데 이것은 바로사심 때문이다. 그래서 왕양명은 개인의 호오의 감정으로부터 선악의 개념이 일어난다고 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호오의 감정을 인정하면서도 기회를 주지 않으면 호오는 서로 다른 것이 아니게 되고 호오는 그 이치에 따라 사물화 되므로 번뇌할 필요가 없게 된다.
7. 동정합일(動情合一) 이른바 한결 같이 리에 따른다는 것은 왕양명의 술어로 말하자면 양지의 흐름에 맡긴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양지는 리의 기준이기 때문이다. 왕양명은 말하기를 "성인이 앎에 이른 업적은 쉼 없이 성에 다다른 것이다. 그 양지의 본체는 맑은 거울처럼 밝으므로 조금의 먼지도 없으니 추한 것이 도래하면 추한대로 마주하고 아름다운 것이 도래하면 아름다운대로 마주한다. 맑은 거울은 조금도 오염되지 않았으므로 이른바 '정으로 모든 일에 마주하지만 정이 없다.'는 말과 같다. 불교 또한 "그 대상이 없음에도 그 마음이 일어난다."고 하는데 이와 다른 것이 아니다. 맑은 거울은 아름다운 것은 아름다운 것에 아름답게 마주하고 추한 것은 추하게 마주하는데 한번 비추기만 하면 모두가 모두 진실이 된다. 빛줄기가 그 마음 공간에서 일어나면 아름다운 것은 아름다워지고 추한 것은 추해지지만 한번 비추고 나면 그림자를 남기지 않으므로 비춘 대상이 없다는 말이다."라고 하였다. 양지의 본체는 본심이므로 사심이 제거되면 본심의 빛줄기는 있는 그대로 진실을 밝히지만 그림자를 남기지 않으므로 보통의 빛과는 다른 것이다. 양지는 이 빛줄기에 의하여 치양지가 된다. 왕양명은 말하기를 "마음은 운동도 정지도 없다는 말은 정지는 마음의 본체이고 운동은 마음의 기능이라는 말이다. 군자는 운동과 정지를 분리하지 않는다. 마음은 정지할 때도 늘 자각하고 있으니 없지 않고 따라서 늘 마주한다. 마음은 운동할 때도 늘 평정되므로 있지 않고 따라서 늘 고요하다. 늘 마주하고 늘 고요하므로 운동과 정지는 각자 그 일이 있다. 이것이 집의이다. 의를 축적하므로 큰 후회가 없는데 이른바, 운동할 때도 평정하고 고요할 때도 평정하다는 말이다. 리를 따르는 것이 정지이고 욕망을 좇는 것이 운동이다. 욕망이란 꼭 음악, 미색, 재물, 이익 등 외적인 유혹만이 아니라 마음 속의 사심은 다 욕망이다. 따라서 리를 따르면 온갖 변화에 대처하더라도 정지이다. 염계(주돈이)는 정(靜)을 주로 삼아서 사욕을 없앤다고 했다."고 했다. 동정합일은 절대적 정지이다. 활동할 때도 평정하고 고요할 때도 평정한 것이 참된 평정이다. 정호는 <정성서>에서 이와 똑같이 언급하였다. 동정합일에 이르면 리, 즉 밝게 비추는 영의 본체는 조금도 모자라지 않게 되므로 동요, 걱정, 두려움, 환희, 분노, 편견, 아집, 불만족, 부끄러움이 사라지고 모든 행동이 예에 합당하게 되고 마음이 바라는 대로 따르더라도 법도에 맞게 된다는 것이다.
눈에비친햇빛
<참고문헌> 풍우란. 중국철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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