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王陽明(1472-1528)/왕양명

왕양명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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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양명 1472 ~ 1529 

 

중국 명나라 중기의 유학자로서 호는 양명이며 이름은 수인(守仁)이다. 그리고 자는 백안(伯安)이며 시호는 문성(文成)이다. 저장성 여요 출생으로 관직에 나간 부친을 따라 베이징에서 자랐고, 28세에 진사에 합격하였다. 결혼식날 불로장생의 술법인 양생술(養生術)에 대해 도사와 토론하는 데 열중하여 결혼 초야를 도교사원에서 보내고 말았다. 1492년 성시에 합격하여 거인(擧人)이 되었다. 베이징에 있던 아버지를 찾아갔을 때 위대한 성리학자 주희의 가르침대로 대나무 앞에 조용히 앉아서 그 이치를 찾아내려 했으나 1주일의 명상 끝에 병에 걸렸을 뿐 별 소득이 없었다.

 

그렇게 학문적으로는 당시의 관학이었던 주자학(朱子學)을 배웠으나 만족하지 않았고, 선(禪)이나 노장(老莊)의 설에 심취한 때도 있었다. 이후 공부하는 친구 담감천(湛甘泉)을 만난 무렵부터 성현의 학을 지향하게 되었다. 1499년 마침내 전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었으며, 공부주사에 임명되었다. 황제에게 국경의 수비·전략·행정 등에 관한 8개 조항의 정책을 상소하여 일찍이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다. 1500년 형부주사에 임명되었고, 1501년 난징 부근에 있는 감옥의 죄수기록을 조사하라는 명령을 받고 많은 부조리를 시정했다.

 

1502년 건강이 나빠져 양명 계곡에서 정양하다 도가의 도인술을 수련한 듯하다. 산둥 지방의 과거시험을 감독했고 이어 병부주사가 되었으며, 1505년경부터 학자들이 문하에 몰려들었다. 유교의 성인이 되는 데에는 성인이 되고자 하는 결심이 중요하다고 가르쳤고, 경전을 암송하고 화려한 문장을 써내는 일 등을 비난했다. 보수적인 학자들은 그가 인기 전술을 쓴다고 매도했으나, 존경받는 학자·관리였던 잠약수 같은 사람은 그의 학설을 높이 평가하고 친구가 되었다.

 

35세, 병부주사일 때 환관 유근의 노여움을 사 귀주용장의 역승으로 좌천된 것이 학문적 전기가 되었다. 즉, 당시 큰 권력을 쥐고 있던 부패한 환관 유근을 탄핵하다가 투옥된 한 검열관을 옹호하여, 그 자신도 40대의 곤장을 맞고 여러 달 동안 옥에 갇혔다. 그후 구이저우 성 룽창의 역승으로 좌천되었다.

 

원래가 병약한  몸으로 만지에서 고통스러운 생활을 보내던 어느날 밤 석관 속에서 깨친 것이 심즉리, 지행합일, 만물일체였다. 이 용장에서의 득도는 37세의 일로서 그 후 중앙으로 소환되어 순조로운 재출발을 하게 되었다. 그는 주로 장시 ·안후이 ·저장 등 각성의 지방관으로 있었는데, 비적의 토벌과 영왕 때 신호의 난에서 활약하였다. 격무 중에도 항시 강학을 멈추지 않았으며, 각처에 학교를 설치하여 후진 교육에 진력하였다.  1510년 장시의 지방관이 되어, 10가구씩을 묶어 서로의 행위에 대해 연대책임을 지게 하는 10가패법을 실시하는 등 많은 개혁안을 시행했다. 그뒤 형부와 도찰원 등에서 근무한 후 1516년 장시의 지사가 되었다. 장시 지방에는 수십 년 동안 비적과 반도들이 들끓고 있었다. 양명은 1517~18년 4차례에 걸친 토벌전을 벌여 이들을 소탕했다. 그는 복구사업, 세제 개혁, 서원 설립 등을 추진했고, 부락민들의 교화를 목적으로 하는 향당의 규약인 남공향약을 만들었다. 1521년 새로 등극한 황제 가정제는 그를 병부상서에 임명하고 신건백에 봉했다. 1522년 부친상으로 고향으로 돌아가 3년 동안 상중에 있었으며, 5년 이상을 고향에 머물면서 중국 각지에서 찾아온 수백 명의 문하생들과 함께 도에 대해 토론했다. 이 즈음 처음으로 치량지(致良知:인간의 마음 속에 있는 선천적인 판단력이나 논리적인 감수성 등을 실현하는 일)의 설을 제창하고 강학에 전념하면서 영향력이 더욱 융성해졌다. 왕심재 ·전서산 ·왕용계 등이 입문하였고, <전습록(傳習錄)> <양명문록> 등을 간행했고 양명서원을 건립했다. 명대 사상계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될 기초가 이 시기에 확립되었다.

 

하지만 56세 때 광둥 ·광시의 묘족이 반란을 일으키자 병든 몸으로 출전했고 진압한 후 돌아오는 길에 과로와 고열로 죽었다. 이 반란을 진압하기 위한 출발 전야에 양명학의 진수를 논한 것으로 일컬어지는 유명한 4구결(四句訣)이 있다. 4구결은 “無善無惡是心之體(무선무악시심지체), 有善有惡是意之動(유선유악시의지동), 知善知惡是良知(지선지악시량지), 爲善去惡是格物(위선거악시격물):마음의 본체는 본래 선과 악이 없는 것이지만, 선과 악이 나타나는 것은 뜻[意]의 작용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미 나타난 선과 악을 구별하여 아는 것이 양지(良知)이며 선을 행하고 악을 버려 마음의 본체로 돌아가는 것이 바로 격물(格物:사물의 이치를 깨달아 마음을 바로잡음)이다”가 그것이다. 그가 장시의 난안에서 죽었을 때 한 세력가가 그를 미워해 작위와 세습봉록을 박탈했다. 때문에 그의 두 아들은 전혀 혜택을 받지 못했다. 이 조치에 항의한 사람들은 파면되거나 유배당했으며, 또한 그의 가르침을 전파하는 것도 철저히 금지되었다. 사후 38년 새로 등극한 목종이 그에게 신건후의 작위와 문성이라는 시호를 내렸고 1584년초에는 공자묘에 배향되는 최고의 영예를 얻었다.

 

격물치지에 대한 왕문우파 전서산의 견해를 4유설(四有說)이라 한다. 이는, 의(意)에 선악이 있기 때문에 선을 행하고 악을 제거하는 실천 수행을 필요로 한다고 주장하였다. 한편 왕문 좌파인 왕용계의 견해를 4무설(四無說)이라 하며, 마음의 본체가 무선무악이면 의(意)도 무선무악이며, 의에 선악이 있으면 마음의 본체에도 선악이 있어야 한다고 하였고, 이는 스승인 양명의 한때의 언사일 뿐, 철두철미한 이론은 아니었다고 주장하였다. 이 양설(兩說)에 대하여 양명은 양자 모두가 상호보완해야 한다는 양가상자(兩可相資)로 답을 했다. 우파는 스승의 말씀을 계승 ·조술(祖述)하는 데 역점을 두었고 좌파는 발전시키는 데 노력하였다. 이들 제자와의 토론을 모은 <전습록 3>이 있으며, 전서산은 시문 ·주소(奏疏:상주문) ·연보 등을 더한 <왕문성공전서(王文成公全書)>를 편집했다.

 

참고 : 두산대백과사전, 브리태니커백과사전

 

눈에비친햇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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