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명학
1. 출현배경
주자학의 국교화 →본래의 도덕주의를 상실, 철학적 사유의 힘과 예리한 이론성이 쇠퇴
2. 왕양명 37세 - 용장오도(龍場悟道) "성인의 도는 나의 본성만으로 만족하고 있다. 이전에 理를 사물 가운데서 구한 것은 잘못이었다"
지행합일설을 제시(용장오도 직후)
수행방법 - 묵좌징심(默坐澄心), 정좌
묵좌 - 마음을 맑게 함, 원기회복과 신체보양을 위함
정좌 - 소학단계 '구방심의 공부를 보조
수렴을 위주
수렴 - 어느 것이 진정한 자아이고 어는 것이 기질, 사욕의 자아인지를 구별하는 공부
→仁體를 체득
→공허, 참신한 언론이 사라지고 학문이 생기가 없게 되었다.
43세 - 남경에서 "존천리 거인욕"을 성찰극치의 실제 공부로 삼음, 정좌는 거론하지 않았다.
3. 철학사상
1) 심즉리(心卽理)
타고난 인간의 마음인 심(心)이 우주 자연의 이법인 리(理)와 일치한다.
2) 지행합일설 - 용장오도 3-4년 후
서애가 물었다 "지금 사람들은 단지 부친께 마땅히 효도를 해야 함을 알고 형에게는 아우노릇을 해야 함을 알지만 실제로는 효도를 다하지 못하거나 아우 노릇을 잘못하기가 일쑤입니다 이에 비춰 보면 知와 行은 분명히 두 가지 서로 다른 일입니다." 이에 양명이 대답하였다. "이는 이미 사욕에 의해서 知와 行이 단절되었기 때문에 知行의 본체가 아니다. 알면서도 행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 알면서 행하지 못하면 이것은 바로 알지 못한 것과 같은 것이다. 성현이 사람들에게 知行을 가르친 것은 바로 그 본체(양지의 知行 본체)를 회복하게 하자는 것이었지 그대들로 하여금 그처럼 멋대로 行하게 두려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므로 (대학)에서는 진실한 知와 行을 지적하여 사람들에게 보여주면서 知行은 '아름다운 색을 좋아하고, 악취를 싫어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고 하였다. 아름다운 색을 보는 것은 知에 속하고, 아름다운 색을 좋아하는 것은 行에 속한다. 바로 그 아름다운 색을 보았을 때 이미 스스로 자연스럽게 이것을 좋아하게 된 것이지. 아름다운 색을 보고 난 후에 또다시 다른 마음으로 그 색을 좋아하는 것은 아니다. 악취를 맡는 것은 知에 속하고, 악취를 싫어하는 것은 行에 속한다. 그 악취를 맡았을 때 이미 스스로 자연히 그 냄새를 싫어한 것이지. 그 악취를 맡고 난 후 또다시 다른 마음으로 그 악취를 싫어한 것이 아닌데 어떻게 知와 行을 분류할 수가 있겠는가. 이것이 바로 知行의 본체이다. 즉 사욕에 의한 단절이 없는 지행의 본체이다. 성인은 '사람들에게 반드시 이와 같아야만 비로소 진정한 앎이고, 만약 그러하지 않다면 알았던 것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고 가르쳤다. 이것이야말로 얼마나 중요하고 실질적인 공부가 되겠는가? 그런데도 지금 억지로 知와 行을 둘로 나누어야 한다고 말하려고 하는데 이는 무슨 뜻인가? 나는 知行을 하나로 해야 한다고 말하는데 이는 또 무슨 뜻인가? 만약 지행설을 세운 종지를 모르고서 단지 知行이 하나이다 혹은 들이다라고 말하기만 하면 이 또한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전습록>
어느 날 왕양명이 남진이라는 곳을 거닐고 있을 때. 한 친구가 바위 위에 피어 있는 꽃을 가리키며, "선생께서 마음 밖에 사물이 없는 것이라고 하였는데, 저 꽃은 스스로 피고 집니다. 그렇다면 내 마음과 필경은 무슨 관계가 있다는 것이지요?"라고 물었다. 이에 대해 왕양명은 "그대가 저 꽃을 보지 않았을 때에는 저 꽃과 그대의 마음이 다 같이 적막(寂寞)하였다가 그대가 저 꽃을 보았을 때에 저 꽃의 빛깔이 일시에 명백하게 드러나는 것이니. 어찌 저 꽃이 결코 그대의 마음 밖에 있다고 하겠소?"라고 하였다.
사물의 형체와 빛깔은 마음의 지각과 인식에 의해 비로소 작용이 일어나는 것인데, 그렇지 않으면 비록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없는 것과 마찬가지가 된다. 선생에서 일찍이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사람이 선을 좋아하는 것이 좋은 색깔을 좋아하는 것과 같이하고, 악을 싫어하는 것을 악취를 싫어하는 知는 行의 시작이고 行은 知의 완성이다. 성인의 학문은 단지 하나의 공부일 뿐이므로 知와 行을 두 가지 다른 일로 분류할 수 없다."
(知是行之始. 行是知之成. 聖學只是一傾工夫. 知行不可分作兩件事.)(전습록 上)
3) 치량지설
50세, 강서에서 정식으로 '치양지'를 학문의 종지(宗旨)로 삼아 오직 치량지 3자만 주장
致良知(양지를 向外로 확충)
치(致) 자(字)의 직접적인 의미는 '앞으로 밀고 나간다.'이며, 이는 맹자가 말한 '확대하면서 충실하게 한다(擴而充之)'와 같은 의미이다.
구체적, 실제적 도덕 실천 → 立己立人, 成己成物
양명은 대학의 '치지(致知)'를 '치양지'로 해석하였는데. 이때 '치'(致)는 '앞으로 밀고 나감(推致)' 즉 '확충(擴充)'의 의미이다. 그리고 '격물'은 바르게 한다의 정물(正物)로 해석하였다. 이때 격물과 정물의 '物'은 事를 지칭하는데, 이 事는 바로 행위의 처음부터 끝까지의 과정이다. 내 마음의 양지는 "시비선악을 스스로 판별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스스로 옳은 것을 행하고 그른 것을 제거하며", "선을 좋아하고 악을 싫어한다". 그러므로 양지는 도덕 실천의 절대 근거인 천리 자체이다. 이 양지를 지극한 곳까지 확충하여 이 양지로 하여금 행위의 처음부터 끝까지의 모든 과정에서 행위를 주재하도록 하면 자연히 옳은 것을 행하고 그른 것을 제거하며, 선을 좋아하고 악을 싫어하게 되기 때문에 그 행위는 필연적으로 善의 행위가 된다. 하나의 선한 행위를 표현하는 것은 곧 하나의 선한 일을 성취하는 것이며. 이는 또 "하나의 사물이 제 위치에 바르게 놓이게 되는 것(物得其正)"이다.
"묵(默)은 반드시 정좌(靜坐)를 빌려서 할 필요가 없게 되었고, 心은 인위적으로 맑게 하지 않아도 스스로 자신을 드러내게 되었으며, 후천적으로 배우고 생각하지 않아도 표현하는 것마다 모두 천리였다. 양지가 곧 미발의 中이며. 이 양지 앞에 또 다른 미발이라는 것은 없다. 양지가 곧 발현하여 중절하는 和이다. 이 양지 후에 또 다른 이발(已發)이라는 것은 없고 스스로 수렴하므로 다시는 수렴에 주력할 필요가 없다. 또한 이 양지는 스스로 발산하므로 다시는 발산을 기다릴 필요가 없다. 수렴은 감(感)의 체(體)이고, 정중(靜中)의 동(動)이다. 발산은 적(寂)의 용(用)이고, 동중(動中)의 정(靜)이다." <명유학안>
탐구문제
1. 격물치지에 대하여 주자학과 양명학의 차이는 무엇인가?
주자의 해석 - 道門學
격물 - 사물의 이치를 극한까지 궁구한다
치지 - 나의 지식을 미루어 다한다
주지적, 대학 본래의 뜻과 괴리
왕양명의 해석 - 尊德性
격물 - 마음 속의 事를 바르게 한다
致知 - 내 마음의 良知를 발현한다 (치양지)
물(物)은 사(事)로 이해하여 격물을 정물(正物)로 해석하고, 지를 양지로 해석하므로 치 지는 치양지이다.
致는 '회복'(맹자가 말한 구방심(求放心) 및 육상산의 복기본심(復其本心)의 의미이다.) 의 의미도 포함한다.
2. 주자의 성즉리설과 왕양명의 심즉리 비교
주자는 인간 본성으로서의 마음은 하늘이 부여한 이치, 즉 천리(天理)로서 순수하며 지극히 선하지만 기질로서의 마음은 기운으로 되어 있어 선해질 수도 악해질 수도 있다고 보고, 하늘의 이치를 바로 규명하는 것이 인간의 마음을 유지하는 방법이 된다고 주장하였다 그에 반해 왕양명은 '마음 밖에 어떤 사물도 얼고 마음 밖에 어떤 이치도 없다.'는 유명한 명제를 제시하였다. 그는 사물이나 이치는 모두 마음과 상관 관계를 통하여 드러나는 것이지, 마음을 떠나 따로 어떤 사물이나 이치가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지적하였다. 다시 말해 주자가 모든 것을 존재하는 까닭으로서의 원리가 먼저 존재한다고 본 데 반해, 왕양명은 마음이 곧 이치라고 보았다.
3. 지(知)와 행(行)의 관계에 대해 주자와 왕양명의 차이를 비교해 보자.
주자 - 이(理)의 파악없이 도덕적 실천 불가능 → 선지 후행(先知 後行)
왕양명 - 타고난 앎을 근거로 양심에 대한 자각과 실천 강조 (知行合一) → 지행의 선후 관계 불인정
4. 마음의 불변적인 본질을 왕양명은 양지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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