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에 의한 역사정초 - Hegel의 보편적 자기의식을 중심으로 하여 -
박인성
목 차 Ⅰ. 서 론 Ⅱ. 경험적 의식에 있어서 보편적 자기의식 Ⅲ. 역사에 있어서의 보편적 자기의식 Ⅳ. 맺 음 말 |
Ⅰ. 서 론
주지하는 바대로 Hegel은 역사를 철학에 의해 정초시키려고 하였던 바 그렇게 되면 철학자체가 현실을 압도하게 된다고 하겠으니 실로 Hegel은 대담한 시도를 하였다고 하겠다. 이제 본고에서는 Hegel의 보편적 자기의식을 중심으로 하여 Hegel의 그 성과를 고찰하고자 한다.
먼저 보편적 자기의식에 도달하기 이전까지 Hegel의 그 성과를 간략히 요약해 보겠다. 이미 잘 알려진 바와같이 Hegel은 정신현상학에서 ①인간의 경험의 발전 ②의식의 역사적 발전 ③이러한 발전과정의 결과 생성된 이데올르기를 동시적으로 분석하고 있는 것이다. 정신현상학에서 인간경험적 의식의 최초단계는 대상의식에 있어서 감각적 확신이다. 그러나 이 확신은 단지 '이것의 있음'만을 언표할 수 있을 뿐이고, 그것도 보편자에 있어서의 '이것'임이 판명된다. 이러한 대상내의 어떤 내용도 없는 '순수실재'만이 자각되는 현실역사는 빛을 숭배하는 페르시아의 의식수준이다. 감각적 확신은 지각으로 발전하고, 지각의 대상은 物이다. 物은 一이면서 多의 속성으로 이루어진 단일체이다. 이것은 대상의 내용, 구별을 규정하려는 것인데 이 단계의 현실역사는 다양한 동물, 식물을 숭배하는 시리아의 의식수준이다. 物에 있어서 一과 多의 모순을 자각한 의식은 무제약적 보편성으로 나아간다. 무제약적 보편자, 그것은 힘이다. 物에서의 一과 多의 분리는 物이 物이 아니고 힘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힘은 一이면서 그 자신을 多로 外化한다. 그리하여 Hegel은 현상계를 매개로 하여 그 배후의 내면적 본질을 인식하려고 한다. 이와같이 다양성을 법칙적 표현으로 정화시키려는 오성의 단계는 工作的, 상징주의적 형태를 갖는 이집트의 의식수준이다. 수수께끼와 같은 스핑크스야말로 이집트의 간판이며 이것은 정신적 내용에 대한 감성적 상징을 찾는 오성단계의 의식수준이다.
오성은 현상의 배후에 있는 본질을 탐구할 때에 자기자신을 체험하게 된다. 이리하여 대상의식은 자기의식으로 이행하고, 자기의식의 최저단계는 대상의 자립성을 파괴하고 부정하는 욕망으로 나타난다. 이 욕망적 자기의식단계의 현실역사는 배타적이고 이기적인 유태의식의 수준이다. 유태종교의 유일신은 순수정신으로서 자연에의 몰입에서 벗어났으나 그것은 배타적, 부정적이다. 그런데 인간은 단순히 대상을 파괴하고 부정할 뿐인 아욕성의 단계를 넘어서야 하며 인간적 욕망은 인간이 인간에 의해 인정된다는 것에 대한 욕망으로 고양되어야 한다. 이러한 인정을 얻기 위해서는 투쟁이 일어나게 되고 그 결과 의식의 분열이 생겨 자립적 의식(주인)과 비자립적 의식(노예)이 대립하게 된다. 이단계의 현실역사는 희랍적 수준이다. 인정을 둘러싸고 확립되는 자기의식의 단계는 사유재산제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으로 희랍에서는 토지의 사유를 둘러싸고 투쟁하게되어 최초의 유럽관념의 주인ㆍ노예관계가 성립된 것이다. 그러나 자기의식의 발전은 이 관계를 역전시킨다. 이와같이 Hegel은 개념들 사이의 논리적 친화력을 역사적인 발생과정속으로 또 역사적 사건의 계열을 논리적인 변증법으로 변형시킨다. 이하로는 Hegel의 보편적 자기의식이 전개되는데 이제 본고에서는 먼저 경험적 의식에 있어서의 보편적 자기의식을 고찰하고 그 다음 역사에 있어서의 보편적 자기의식을 분석하고자 한다.
Ⅱ. 경험적 의식에 있어서 보편적 자기의식
이미 말하였듯이 인정하는 자기의식의 단계에서는 의식의 분열이 생겨 자립적 의식과 비자립적 의식 즉 주인과 노예가 대립하게 된다. 그러나 자기의식의 발전은 이 관계를 역전시킨다. 즉 주인은 노예의 노동에 의존하게 되고 노예는 노동을 통하여 주인에게 봉사함으로써 物을 가공하게 되어 자유에 대한 이념이 고양되는 것이다. "노동을 통해서 그 형식을 부여받는 물성의 측면은 모두 의식 이외의 그 어떤 실체일 수가 없다. 여기서 우리는 새로운 형태의 자기의식이 출현하게 됨을 본다. 즉 그것은 무한성의 형식을 취하면서 동시에 의식의 순수한 운동을 본질로 삼고 있으니 이것은 곧 스스로 사유하는 것, 즉 자유로운 자기의식을 말한다." 이때 사유의 주체는 추상적인 자아가 아니라 스스로가 세계의 실체임을 인식하는 의식이다. 달리 말하면 사유란 객관적 세계가 실제로는 주관적 세계라는 것, 그것은 주체의 객체화라는 것을 의식하는데 있다. 참으로 사유하는 주체는 세계를 그의 세계로 파악한다.
사유는 외부세계를 인식하려는 것이 아니라 외부세계는 무시되고 나의 개념이 대상이 된다. 여기서 나의 개념이 대상이 된다는 것은 의식의 대상인 개념과 의식이 통일을 이룩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자유를 획득하였다는 것이다. "사유에 있어서 나는 자유로운 존재일 수 있다. 왜냐하면 여기서 나는 타자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나 자신에게 머물러 있게 되므로 결국 나에게 본질적 요소로 작용하는 대상은 완전히 불가분리적 통일속에 있는 나의 자기실존일 뿐이기 때문이다." 자유란 자기충족이고 모든 외적인 것으로부터의 독립이며 모든 외적 존재가 주체에 의하여 점유되어 있다고 하는 상태이다. 만일 자유가 완전한 자기충족 이외의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면 또 완전히 나의 것이 아닌 것, 혹은 나 자신이 아닌 것이 모두 나의 자유를 제한하는 것이라면 자유는 다만 사유 속에서만 실현이 가능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자유는 공허하고 추상적이다.
Hegel은 금욕주의를 자기의식적 자유의 최초의 형태로서 파악한다. 금욕주의적 의식은 그의 세속적 지위에 대해서 무관심적이다. "외적 세계는 사유하는 의식의 대상도, 또한 진리인 것도 아니기 때문에 자기의식의 자유는 자연적 세계에 있어서 그의 지위에 무관심적이다." 따라서 금욕주의에 있어서 노예는 자기자신을 설득하여 그의 실제적인 존재의 조건을 전혀 무시하고 단지 자유에 대한 추상적인 개념을 갖고 있다는 것에 의해서 자유가 실제로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존재의 실제적 조건은 전혀 중요성을 갖지 않는다. 즉 그가 Rome의 황제인지, 노예인지, 부자인지, 가난한 자인지, 건강한 자인지 간에 그것은 별로 중요치 않고 단지 자유의 개념만을 갖는 것으로 충분한다. 다시 말하면 존재의 주어진 모든 조건으로부터 절대적으로 독립되어 있다는 자율성에 대한 개념만을 가지면 충분하다." 이렇게 현실세계로부터 사유의 세계로 후퇴하는 태도를 Hegel은 금욕주의라고 일컫는다.
이러한 금욕주의적 의식의 본질은 "오직 개별적인 현존재가 감수해야만 하는 모든 의존성으로부터 해방되어 적극적인 작용의 행사나 소극적인 고통의 감수를 막론한 갖가지 현존재의 영향권을 벗어나 부단하게 사상의 단순한 본질성으로 후퇴하는 무기력한 상태를 유지하는데 있다." 그러나 이것은 참된 자유가 아니다. "아직도 추상화된 상태에 머물러 있는 개념은 사물의 다양성을 스스로 멀리함으로써 그 자신으로부터 창출되는 어떤 내용도 지닐 수가 없기 때문이다." 금욕주의적 자기의식은 개별성 그 자체에 관계하는 형식을 갖지 않고, 그 자신을 단지 보편적인 것으로 생각하는 자기의식이므로 이 의식은 내용에 대한 인식에로까지 나아가지 아니한다. 이러한 형태의 자기의식은 개별성으로부터 사유의 일반성에로 복귀한 의식이기 때문에 즉 사유하는 의식일반이며 즉자존재와 대자존재의 직접적 통일에 불과하기 때문에 그러한 통일은 단순한 사상성에 그치며 자기의식은 일체의 구체적인 현실로부터 떨어져 있다. 이러한 점에서 "이 의식은 한낱 자유의 개념이기는 하지만 결코 생동하는 자유 그 자체를 의미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러한 진리에 있어서는 사유일반만이 자기의 본질을 이룰 뿐 그것은 사물의 독자성과는 멀리 떠나서 그 자신의 내면으로 빠져 들어가는 형식이기 때문이다."
모든 내용을 초월한 순수형식에 있어서의 사유의 전개야말로 금욕주의적 의식의 완성된 형태이고 거기에서 어떤 개별적인 것에도 구속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은 현실과 단절된 형식적 자유이고 현실 속에서 발생하는 진, 선의 질문에 대해서 구체적인 해답을 제시할 수 없다. 이리하여 금욕주의적 의식은 자기의 추상적이고 무내용성을 자각하고 단순한 무관심에 의해서 타자를 부정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어 동요를 일으키지 않을 수가 없게 되며, 이제는 구체적 현실을 향하게 된다. 여기서 성립하는 것이 회의주의적 의식이다.
금욕주의적 사상의 파탄의 이유는 자유를 사유에서 파악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추상적 사유라는데 있다. 그래서 그 이유는 구체적 내용을 갖지 못하는 공허한 것이다. 그 다음 단계인 회의주의적 의식은 "단지 사유의 형식이 아니라 사유의 내용"과의 관계로 나타나고 그 본질을 부정적인 태도에서 갖는다. 즉 회의주의는 사유의 자유에 대한 현실적 경험의 과정으로서 외적 세계를 부정하는 단계이다. 금욕주의는 현실을 고려하지 않는 것이었으나 회의주의는 현실을 부정하는 것이다. 회의주의에 있어서는 부정의 형식이 행위가 아니라 사유라는데에 있다. 그렇기 때문에 "행위를 통한 부정과는 달리 사유를 통한 부정은 그것이 부정하는 대상의 현존을 요구치 아니한다." 그리하여 회의주의적 의식은 일체의 객관적 진리를 의심하고 일체의 현실을 단순한 가상이라고 생각함으로써 의식의 자유를 확보하고져 한다. "이러한 태도는 유아론(Solipsimus)에서 정점을 이룬다. 그것은 모든 현실적인 것 자체와 그 가치를 부정한다."
회의주의적 의식은 대상이 회의주의적 부정성에 의해 소멸되는 것으로 취급함으로써 외적 실재에 대한 진리는 자기자신에 의해 구성되고 정립되는 진리로 취급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궤변을 고집하는 자신의 태도"인 것이다. 이것은 외적 실재의 고유한 변증법적 운동을 인식하지 못하고 의식의 운동만을 고집함으로써, 외적 실재의 인식에 있어서 전체적인 개념의 운동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고, 단순히 지각의 상태에서 외적 실재를 파악하기 때문에 생긴 현상이다. 따라서 회의주의적 의식의 자유 또한 자신의 자유에 대한 확실성을 단순한 지각적 가상 가운데서 경험하여 그러한 경험을 진리의 단계로까지 고양시킨다. 그리하여 그것을 고정된 불변의 것으로 여긴다. 그러나 이러한 회의주의적 의식 속에 있는 구별은 참된 구별이 아니고 어떤 영속성도 보존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참된 구별이란 바로 자기자신 속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본질을 어떤 타자 속에 지녀야 하기 때문이다." 참된 사유는 타자 즉 외적 실재로부터 구별된 것의 본질이 어떠한 것인가를 통찰하는데 있으며 그것은 단순한 궁극적 형태에 있어서 부정적인 본질인 것이다.
그러므로 회의주의적 의식은 자유에 대한 확실성을 외적 실재의 구별을 참된 사유적 통찰을 통해서 확증한 것이 아니고 사유 가운데서만 자신에 대한 확실성만 보증하는 Ataraxie상태에서 발견하게 된다. 결국 이것은 "오직 자기자신에 의한 사유에서 빚어지는 Ataraxie일 뿐이며 또한 불변적이고도 진정한 자기자신에 관한 확신이기도 하다." 이러한 확신은 어떤 타자로부터 주어진 것이 아니고 오히려 이 의식은 "절대적인 변증법적인 동요, 불안이며, 나아가서는 서로의 구별마저도 융합되거나 혹은 일단 조성되었던 양자의 동일성도 어느덧 - 왜냐하면 이 동일성은 그 자체가 비동일성을 불용하는 규정성이므로 - 다시 해소되고야마는 이를테면 한낱 감각적인 표상과 그리고 어떤 사유된 표상과의 혼합물인 것이다." 바로 이 점에 있어서 이 의식은 보편적인 자기동일적인 것과 개별적, 우연적인 것 사이의 동요속에서 끊임없이 반복되는 자기모순된 의식이다. 따라서 회의주의에 있어서의 회의는 부정의 적극적인 거점을 확보하기 위한 Descartes적 회의와는 달리 모든 것을 부정하는 연속적인 회의이므로 어떤 적극적인 입장도 제시할 수가 없다. "이러한 의식은 자기동일적인 의식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맹목적인 우연에 지배된 혼미와 현기증이 날만큼 끊임없이 새로운 불씨를 마련해가는 혼란에 비길 수 있다." 결국 이러한 회의주의적 의식은 "스스로 불변성과 동일성을 한편으로 하고 또한 우연성과 비동일성을 함께 간직하고 있는 이중적인 모순의식일 수 밖에 없다." 이러므로, 회의주의적 의식은 일체의 현실을 부정함으로써 의식의 자유를 확보하려고 하였으나 그러나 그것은 결국 자기모순이었다. 그리하여 이러한 분열된 의식을 자각한 회의주의적 의식은 변화적인 현실과 불변적인 이상 사이에서 번민할 수밖에 없으니 이러한 의식이 다음에 올 불행한 의식이다.
이제 우리는 회의주의적 의식을 거쳐서 하나의 새로운 의식을 경험하게 된다. "회의주의를 통하여 의식이 경험하는 것은 자기 스스로가 자체내에서 모순되어 있는 하나의 의식이라는 사실이다. 이와같은 경험을 근거로 하여 의식은 회의주의에 있어서 구별, 분리된 두 개의 사상을 하나로 모으는 새로운 형태를 취하게 된다. 이제는 회의주의가 자기자신에 대하여 지녀온 사상적 공백상태는 종식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그 자체내에서 두 가지 양식을 함께 포함하고 있는 것은 사실에 있어서 <단 하나의 의식>일 뿐이기 때문이다." 이제는 두개로 양분되었던 이중화작용이 단 하나의 요인으로 귀착되는데 이는 "자기의식의 자체내적 이중화 현상이다." 그리하여 정신의 개념 속에 본질적으로 개재해 있는 즉 그 자체로서 이중성을 띠고 있는 자기의식이 현존하게 된 것은 분명하지만 그러나 아직은 그 이중성이 단일화되지 못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제 여기서 불행한 의식은 중복되어진 의식, 모순된 본질을 지닌 의식으로 등장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이 불행한 의식에 있어서 개별자와 불변자간의 분열은 다음과 같은 3가지 형태로서 나타난다. 첫째로 의식자체는 불변적 본질에 대립되어 양자간의 관계가 양립과 투쟁의 상태로 나타난다. 둘째로, 의식은 그 불변자 자체가 개별자성의 형식을 띠고 나타나는 것을 본다. 여기서 개별자는 모든 실존적 양식을 떠맡지 않으면 안될 불변자의 형태로 화하게 된다. 셋째로 의식은 불변자의 위치에 들어선 개별자로서의 자기자신을 발견하여 자신의 개별성이 보편성과 화해함으로써 정신의 단계에 도달하였음을 깨우치게 된다. 그러나 불변자가 현실에 일정한 형상을 지님으로서 개별자에게 접근한듯이 보이지만 피안적 요소는 구체적인 사실에 얽힌 동요함이 없는 견고함을 지닌 까닭에 불가항력적인 일자의 위치에서 개별자와 대립하는 것이므로 끝내 피안계와 일체가 되고자 하는 희망은 아무런 구체적인 결실도 거둘 수 없는 상태에 머무를 수 밖에 없다. "결국 다변적인 존재를 통합하는 일자가 지닌 본성 속에서 그리고 또 일자가 마련한 현실양상 속에서 일자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머나먼 곳에 자리잡은 것으로 그칠 수 밖에 없다."
이리하여 진실한 자기는 개인의 내면에서 발견되는 것이고 아득히 먼 피안의 세계에서 발견되는 것이 아니므로 불행한 의식은 다음과 같은 3가지 방법으로 불변자와의 화해를 시도한다. 첫째는 내적 감정 즉 명상적인 종교적 태도이다. 의식은 신비적 경험 또는 종교적 양식에 의해서 자기자신을 불변자와 결합시키려고 한다. 그러나 내적 감정은 개념적 사고가 아니라 순수한 감정이므로 그것은 감정의 주관적 상태 즉 자기자신의 상태 이외의 어떤 것도 발견할 수가 없다. 둘째는 외면적인 노동의 행위 즉 활동적인 종교적 태도이다. 의식은 모든 노동의 성공을 자기자신에게 귀결시키지 아니하고 자기 재능의 공급자인 신에게로 돌려 의식은 자신이 단지 불변자의 도구로서 불변자와의 합일을 달성해 내려고 한다. 그러나, 의식은 노동을 통하여 희망의 성취를 발견하지 않을 수가 없게 되고, 또한 만족감을 획득하지 않을 수가 없게 된다. 그결과 이러한 의식의 활동은 이 의식의 경험적 자아를 긍정하게 된다. 셋째는 자기희생 즉 금욕적인 자기부정적인 종교적 태도이다. 의식은 최후로 자기희생이라는 수단을 취한다. 그것이 우선 금욕이라는 형태를 취한다. 그러나 육체의 금욕을 하면 할수록 인간은 점점 더 욕구에 사로잡힌다. 그리하여 의식이 자기자신을 소멸시키기 위해서 자신을 타인, 매개자(즉 개별적 의식을 불변자와 관계지우는 일을 담당하는 사제)에게 위탁하는 것이다. 그러나 불행한 의식이 스스로를 무로 돌리는 데에는 최종적으로 성공하는 듯 하면서도 결국 성취의 보수를 사제를 통해서 다른 세계에서 약속받는다는 것은 아이러니칼한 일이다. 성취와 자기실현은 의식에 의해서 개별적인 것으로 발견되어야 하는 것이라는 진리가 이 약속 가운데에는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에 불행한 의식은 순수사유와 개별을 통일하고는 있지만 아직은 양자의 화해를 자각하는 곳에서 서있지 않다. "불행한 의식은 금욕주의와 회의주의를 넘어서서 순수사유와 개인성을 결합하고 통일하여 있기는 하지만 그러나 그것은 아직도 의식의 개인성과 순수사유와의 화해를 자각한 사고에까지 고양되어진 것은 아니다. 그것은 추상적 사유가 의식의 개별성과 접촉하는 중간에 서 있는 것이다." 불행한 의식은 이 양자의 접촉점에 있다는 의미에서는 순수사유와 개별성의 통일이 이루어져 있으나 아직은 개별성의 형태를 얻은 불변자가 의식의 개별성인 자기자신이라는 것이 자각되어 있지는 않다. 그리하여 Hegel은 이제부터는 개인의 형태를 얻은 불변자에 관한 문제를 삼고 있다. 즉 자기의식의 내부에서 개인성과 보편성의 통일, 차안성과 피안성의 통일을 구한다. 이런 통일이 보편적 자기의식 다음에 올 이성의 단계에서 이루어진다.
Ⅲ. 역사에 있어서의 보편적 자기의식
이상에서 살펴본 Hegel의 보편적 자기의식의 분석은 역사적으로는 Rome시대의 이데올르기와 일치한다. 먼저 보편적 자기의식의 형태로 만들려진 Rome시대의 종교부터 우선 살펴보자. 신은 필연적으로 목적과 일치하게 행동하는 것으로 생각되어진다. 유태종교의 신은 본질적으로 무한하고 또한 보편적인 하나의 목적을 가진다. 희랍의 신들은 유한한 목적을 가진 유한한 존재들이다. Rome의 종교는 유태종교와 희랍종교의 결합으로부터 생긴 것이다. 즉, 일신교인 유태종교와 결합해서 Rome의 신은 하나의 유일한 보편적 목적에 이바지한다. 희랍종교와 결합해서 이 목적은 유한한 특수적 목적, 인간적 목적, 이 세속세계에 종속하는 목적이 된다. 이러한 유일하고 세속적인 단 하나의 목적은 오로지 국가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 국가는 이성적으로 명석하게된 조직체가 아니고 보편적인 힘을 가지고 모든 사람들을 그의 지배권속으로 몰아넣은 국가이다. Jupiter Capitolinus는 이러한 관념의 화신이다. 그는 그의 목적을 위해서 Rome인들에 대해서 보편적인 통치권과 지배력을 가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Rome에서는 특수적 목적들에 이바지하는 다수의 신들이 있다. 이 다수의 목적들이 통치권의 하나의 목적과 화해되기 위해서는 다수의 목적들은 하나의 유일한 목적에 기여하지 않으면 안된다. 즉 다수의 신들은 Jupiter Capitolinus에 기여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므로 희랍의 신들은 자유를 누렸고 독립적이고 환희에 가득찼었다. 그러나 이제 Rome의 신들은 하나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의 지위로 하락하였다. Rome에서는 국가의 유일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무수히 많은 목적들이 기여하지 않으면 안된다. 희랍종교는 낭만적이나 Rome의 종교는 무미건조하다. 희랍의 신들은 상냥하고 유쾌하나 Rome신들은 그들이 봉사하는 목적들에 얽매여서 그들은 진지하고, 창백하고 불안을 느낀다.……이 종교는 실용성의 종교(a religion of utility)이므로 모든 실용적인 것은 신적인 것으로 숭배된다. 빵을 굽는 도구도 신적인 위치에 선다. Fornax신, 즉 곡물을 건조시키는 가마솥도 하나의 신이다. Vesta신 즉 빵을 굽기 위해서 사용되는 불도 하나의 신이다. 그러나 보편적인 목적은 국가, 권위, 통치, 바로 그것이다. 그러므로 현실적이고 현존적인 권위자인 황제가 그 보편적 목적의 화신이 되어 신으로 숭배되기에 이르렀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이상과 같은 보편적 자기의식의 형태로 만들려진 Rome의 종교적 원리는 Rome의 역사적 현실의 이데올로기를 반영한다.
"Rome인들은 희랍인들 다음으로 나타난 민족으로서 여기에서 우리는 세계사적 민족으로 규정지을 수 있는 시기와 접촉하게 된다. 우리들은 이 시기를 세속적인 면과 정신적인 면이라고 하는 두 개의 근본적인 면에서 고찰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리고 세속적인 면에 관해서도 역시 두개의 계기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 중 하나는 지배자의 독재적인 성격의 면이고, 다른 하나는 개인 그 자체가 인격으로 전환한다고 하는 면 즉 권리의 세계이다." 먼저 제정을 살펴보면 Rome의 정치가 제정에의 대변동에도 불구하고 그 정치에 아무런 변경도 일어나지 않았다고 할정도로 추상적인 것이었다고 하는 것에 주의하지 않으면 안된다. 황제는 명의상 여전히 존속하고 있었고, 정치상의 제반의 제도는 황제의 한 몸에 통합되어 있었다. 황제의 의지가 일체의 것 위에 군림하여 그 앞에서는 모두가 평등하였다. 이리하여 개별적 주관성이 황제폐하라고 하는 한 개인안에서 실로 큰 힘의 존재로 증가하였다. 그러나 이와같이 존재와 의욕과의 유한성이 무제한한 것으로까지 올려지게 되면 정신이라고 하는 본존은 대수롭지 않은 것이 된다. 오직 이와같은 자의를 저지하는 유일한 한계로서는 모든 인간이 면할 수 없는 한계인 죽음이 있을 뿐이다. 그런데 그 죽음마저도 또 연극으로 얼버무려 버렸다. 이처럼 여기서는 "개별적인 주관성이 완전히 무궤도하게 되면 거기에는 벌써 아무런 반성도 없고 앞뒤의 가름도 할 수 없게 되어 회한도 없을 뿐만 아니라 희망도 없고, 공포도 없을 뿐더러 도대체 사상이라고 하는 것은 없어져 버린다. 왜냐하면 이러한 것들은 모두 일정한 원리와 목적을 가지는데서 일어나는 것인데도 여기서는 일체의 정규가 완전히 없어지고 아무렇게도 상관이 없는 것으로 되어져 버리고 말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기서는 개별적인 주관성은 욕망, 쾌락, 정열, 착상이며 요컨대 무엇이든 되는대로의 자의일 수가 있다. 그럴 때에는 다른 사람들의 의지 따위는 상관하지 않는다. 따라서 "의지와 의지와의 관계는 오히려 절대적인 지배와 예속의 관계가 된다." 이 지상에는 황제의 의지밖에는 없다. 그 대신 황제란 일자의 지배밑에서는 일체가 질서를 유지하고 있다. 왜냐하면 일체의 것은 그것이 존재하는 한 질서안에 있는 것이기 때문이고 지배 혹은 통치라는 일체의 것이 일자와 조화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살펴볼 점은 Rome에 있어서는 개인이 인격(Persona)으로 규정되어 있다는 점이다. 개인은 완전히 평등하며 일체의 차별이 폐지되었고 사법이 발달하여 이 평등을 완성시켰다. Rome에 있어서 추상적인 내면성의 원리는 이제야 인격이라고 하는 형태와 사법안에서 실재적인 형태를 취하게끔 되었다. 사법이란 인격 그 자체가 자기자신이 취하는 실재적인 형태안에서 즉 소유안에서 보여진 그 권리 이외의 다른 아무 것도 아니다. 이와같이 해서 "국가의 성원과 그 혼으로서 각 개인안에 살아있었던 바의 Rome정신이란 생명이 없는 사법으로 환원되어 개별화되어 버렸다……. 즉 국가의 유기체가 사적 인격(Privatperson)이라고 하는 원자로 분해하여 버렸다. 이것이 Rome생활의 실태이다. 바꾸어 말하면 한편에는 지배의 추상적인 보편성이 있고, 다른 편에서는 개별적인 추상, 즉 인격이 있다." 요컨대 Rome에 있어서는 인격이란 개인 즉 자체의 존재가 그 생생한 면, 충실한 개성의 면에서 보여지는 것이 아니고, 추상적인 개체로서 보여지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이와같은 추상적 인격의 귀결은 아래와 같다. 각 개인이 사적 인격으로서 침범할 수 없는 절대적인 가치를 가진다고 하는 것은 개인의 자랑이다. 왜냐하면 자아는 무한한 권리를 가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그 권리의 내용 즉 각자의 소유(des Meinige)는 단지 외면적인 물건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이와같은 원리가 산출한 결과인 사법의 발달은 정치생활의 부패와 결부된다. "황제는 단지 지배할 뿐이고, 통치는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지배자와 피지배자사이의 합법적인 인륜의 매개체는 거기에 없고 또 국가를 각종 단체라든가 각 주로 구분한다는 것은 국가의 일반적인 이익을 위해서 필요한 것이지만 그 각종의 단체라든가 각주의 자치적 행정체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국가조직이라든가 국가의 기구라고 하는 유대는 거기에는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인간의 염두에 떠오르는 것은 조국이라든가 그와같은 종류의 인륜적 통일 따위와 같은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Rome에 있어서는 국가는 스스로를 추상적인 상태로나마 부각시키며, 동시에 하나의 목적으로 형성되어 가기 시작하며 또한 모든 개인은 이 목적에 관여하는 것은 사실일지라도 여기서 모든 개인이 관여하는 것은 결코 투철하고도 구체적인 성질의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모든 자유로운 개인은 그 가혹한 목적에 희생될 수밖에 없으며 또한 그들은 바로 이와같은 추상적 일반자를 위한 봉사를 통해서 그 목적을 향하여 헌신하여야만 하기 때문이다. 거기서는 더 이상 아무런 즐거움이나 환희도 없는 각고에 찬 달갑지 않은 노력과 봉사만이 요구될 뿐이다."
그리하여 여기서는 일체의 관심이 개인적 범위와는 소원한 방향으로 움직이게 됨으로써 결국 모든 개인은 이제 스스로의 필요에 따라서 추상적이며 형식적인 일반성을 획득하는데 그칠 뿐이다. 인간이 오직 마음에 두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은 다만 운명을 감수하게끔 자신을 그 방향으로 돌린다는 것, 인생에 대한 전적으로 무관심한 태도를 닦아 몸에 지니게 되며 그들은 이 무관심을 사상의 자유안에서 구했던 것이다. Hegel은 현실세계로부터 사유의 세계로 후퇴하는 이러한 태도를 "Stoizismus"라고 일컫고 있다. 왜냐하면 이러한 태도는 Stoa학파의 철학에서 볼 수 있는 것으로서 역사적으로 Rome시대의 이데올르기였기 때문이다. 생각컨대 Rome시대의 철학이었던 Stoa철학, 회의론등은 현실세계의 일체에 대해서 정신을 무관심한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는 것을 목표로 하였던 것이다. 이 철학은 보편성을 획득하는 능력인 사유에 의해서 자기자신 안에 인간의 "부동심"(Unerschütterlichkeit)을 붙잡으려고 노력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 철학에 의한 내면성의 유화도 그 자체에 단지 인격성(Persönlichkeit)이라고 하는 순수한 원리 안에 있어서의 추상적인 유화에 지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순수사유로서 자기자신을 그 대상으로 하며 자기와 유화하는 것과 같은 사유는 완전히 대상이 없는 것이 때문이다. 따라서 이를테면 회의론의 이른바 "판단중지"(Enthaltung von Urteil)는 목적이 없다는 것, 바로 그것을 의지의 목적으로 하는 것 이외의 다른 아무런 것도 아니었다. 요컨대 이 철학은 "단지 일체의 내용의 부정이라고 하는 것을 알았는데 지나지 못하고 따라서 벌써 어떠한 불변적인 것을 가지지 않은 그 세계에 대한 절망을 가르쳐 주는데 지나지 못하였다. 따라서 그것은 당연히 한층높은 유화를 요구하는 산 정신을 만족시켜줄 수는 없었던 것이다."
Rome시대의 일자의 가혹한 지배밑에 있는 인간은 Stoa적 현실도피에 만족할 수 없는 동시에 또한 회의주의의 모순이 자각되어 그러므로써 이제 한편으로는 차안의 생활에서 완전히 떠나 버릴 수 없음과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피안을 동경하여, 변화적 현실과 불변적 이상사이에서 당혹하고 고민하지 않을 수가 없게 된다. 이 의식이 바로 앞 장에서 살펴본 "불행한 의식"이다. Hegel 정신현상학에서의 "불행한 의식"에 대한 서술은 기독교(구교)적 이데올르기에 대한 암시로 가득차 있다. 일자의 가혹한 지배를 통한 고뇌속에서 현실계와의 분열에 괴로워한 Rome인들은 그 때문에 단지 정신안에서만 내면적으로 획득될 수 있을 것같은 만족에 대한 일반적 동경이 솟구쳐 일어났던 것이다. 그 점에서 Rome의 세계는 보다 높은 정신적 세계에 대한 지반을 마련하여 주고 있었던 것이다. "보다 높은 정신은 정신의 유화와 해방을 간직하고 있다. 왜냐하면 인간은 이 정신의 보편성과 무한성과의 안에서 정신에 관한 의식을 획득한다는 것으로 되기 때문이다. 정신이야말로 절대적인 객체이고, 진리이다. 더구나 인간은 그 자신이 정신이기 때문에 인간은 이 객체안에 현존하고 있으며, 따라서 또 이 절대적인 대상안에 본질을, 그것도 자신의 본질을 발견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 위에 이 본질이라고 하는 대상성의 면이 지양되어, 정신이 자기자신의 곁에 있기(beisich selbst sein)위해서는 인간은 특수적이고, 경험적인 인간으로서 가지고 있는 정신의 자연성이 부정되지 않으면 안된다. 그것에 의하면 비로소 부정한 요소가 근절되며 정신의 유화가 실현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Rome세계의 "비참성", "모순", "불행"이야말로 세계의 훈육(die Zucht)으로서 그들은 이 운명의 고뇌를 달게 받지 않으면 안된다. 그리하여 이 외적 불행이 인간의 내심의 고뇌가 되는 것이 아니면 안된다. 즉 인간은 자기를 바로 자기자신의 부정자(악인, 죄인)으로서 느끼지 않으면 안된다. "인간은 인간자신의 불행이 인간본성의 불행이라는 것, 인간이 그 자신에 있어서 분리되어진 것(das Getrennte), 분열한 것(das Entzweite)임을 알아야 한다." 이러므로, 이제 인간은 그가 도달하고자 하는 바의 자기를 자신과는 완전히 격리된 먼 곳에 있는 피안의 세계에 투영하는 것이다. 그리고 Hegel은 인간이 도달하고자 하는 열망의 가능한 관계의 표시로서 기독교의 삼위일체교리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 성부는 먼 피안에 있는 불변자를 말한다. 성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변자가 개인적인 인간 생활가운데서 인간의 모습을 취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표시한다. 성령은 그러한 개인 즉 불행한 의식이 불변자와 화해에 도달해도 좋다고 하는 희망을 약속하는 것이다. 이리하여 성육(incarnation)과 속죄의 사상은 불행한 의식이 그 분열된 상태로부터 탈출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한다. 여기서 생기는 중요한 문제는 "자기자신이 죄인이라는 의식과 신에 대한 신앙 즉 속죄와 유화의 원리가 근본관념이 되어 이것이 객관적인 보편적 의의로 확대되어 인간의 구체적 본질로 보여지고 그 본성의 완성으로 보여지게끔 되는데 있다……. 그때문에 여기서 인간의 비참성은 단지 맹목적인 운명에 대한 맹종으로는 되지 않고 도리어 갈망의 무한한 에네르기가 된다." Stoa 철학은 부정적인 것은 단지 존재하지도 않고 따라서 고통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가르치는데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기독교적 이데올르기에 있어서는 고뇌와 불행이 인간과 신과의 통일을 매개하기 위해서는 필요불가결한 것이 된다. 이리하여 인간도 그 자신 신의 개념안에 포용되게 되고, 인간과 신과의 통일이 이루어진다. 다시말해서 신과 부정적인 것으로서 세워진 실재성 즉 신에서 분리, 분열된 주관성과의 통일이 이루어지게끔 된다.
이상에서 우리는 보편적 자기의식의 형태로 진리를 파악하는 Rome시대의 세속적인 면과 거기에서 귀결되는 정신적인 면에서 대해서 살펴보았다. 이제 우리는 Rome 시대의 역사적인 현실을 요약하여 보고 그것이 그 다음단계로 나아가야 할 이유를 분석하여 보기로 하자. Rome시대에는 추상적 일반성의 원리도 충분히 발달하였으며, 개인이 그 원리를 재현시키는가 하면, 다시 주관이 인격적 주체로 등장하기에 이른다. 이리하여 여기에는 모든 주관의 개별화현상이 나타나기도 하고, 일반성 즉 그것도 모든 주관에게 부착된 추상적 일반성이 바로 이 주체를 법률상의 인격체로 즉 그 특수성에 있어서 독립적이며 본질적인 인격체로 만든다. 그리하여 타면에서는 형식적이며 추상적인 법의 세계 즉 소유권의 세계가 발생하되 그러나 모든 인격체가 다원적 상태로 붕괴되는 바로 이러한 과정이 국가에서 행해지기 때문에 이 국가는 더이상 국가라는 추상물로서 모든 개인에게 대치되는 것이 아니라 개성을 지배하는 황제의 강권으로 군림하게 된다. 그러므로, "더이상 일반적 목적으로서의 최고자와는 다른 인격적 개체의 권리만을 간주하는 추상적 경지에서 행해지는 이와같은 붕괴 현상에 있어서는 권력이나 또는 그와같은 유대도 단지 자의적인 강권일뿐 결코 합리적인 국가 권력이 될 수 없다."
따라서 역사의 진행과정속에서 인격이 더 큰 비중을 차지하는 가운데 각개의 원자로 와해되어 버린 전체가 단지 외형상의 유대만을 맺고 있을 경우에는 강권적 지배력이 대두하기 마련이다. 왜냐하면 "추상적 합법측성이란 자기자체가 구체성을 띠지 않고 그 자체내에서 조직화되어 있지도 않다는 뜻을 갖는 것으로서 결국 그러한 합법측성이 권력을 획득할 경우에는 우연적인 주관성의 양식에 따라서 단지 하나의 자의적인 강권만을 원동자이며 동시에 지배자로 삼을 뿐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미 살펴본 바대로 개별자로서는 발달된 사법에서 자기가 상실한 자유에 대한 위안을 구하고져 할 뿐이었다. 이렇게 함으로써 여기에는 자의적 권력이 출현하기도 하며 또한 대립의 해소도 이루어지고, 질서도 평등도 확보된다. 그러나 "이와같은 평온은 동시에 내면의 절대적 분열을 자초하게 되어 여기서 성립한 대립의 해소란 단지 외면적이거나 전적으로 세속적인데 불과할 뿐만 아니라 동시에 전제통치로 인한 고통을 감촉하게 되는 내면의 분노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다음으로 문제가 되는 것은 이 대립을 화해시키기 위해서는 더 고차적이며 진실한 정신적 유화가 달성되어야만 하는 까닭에 여기서 특히 강조되어야 할 것은 "개인의 인격이 그 자체의 힘으로 일반성으로까지 순화되거나 정화된 것으로 직관되고 인지되며 또한 의욕되어야만 하는데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자기의 가장 내면적 심층으로 압축된 정신은 이제 "신적인 것이 없는 세계"(die götterlose Welt)로부터 이탈하여 자기자신 속에서 유화를 추구하며 이제야 비로소 자기의 내면성과 하나의 충만된 구체적 내면성의 삶을 개시하게 된다. 이 때의 내면성이란 "단지 외면적인 현존재에 뿌리박고 있는데 그칠 수만은 없는 하나의 실체성을 소유한다고 하겠다." 따라서 이미 살펴본 바대로 Rome 세계에서는 단순한 세속적 왕국은 정신적 왕국과 대치될지라도 여기서의 왕국은 "바로 자기를 인지하는, 그것도 더우기 그 본질속에서 스스로를 인지하는 주관성의 왕국이며 현실적인 정신의 왕국으로 될 것이다." 이리하여 마침내 주관성이 일반성으로 화하는 정신의 원리가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세계가 바로 다음에 올 이성의 형태로 진리를 파악하는 현실역사의 단계인 German적 세계이다.
Ⅳ. 맺 음 말
지금까지 본고에서는 Hegel이 철학으로 역사를 정초시킨 그 성과의 일부를 보편적 자기의식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이미 살펴본 바와같이 Hegel은 개념들 사이의 논리적 친화력을 역사적인 발생과정속으로, 또 역사적 사건의 계열을 논리적인 변증법으로 변형시킨다. 이렇게 함으로써 Hegel은 역사속의 철학적 현실을 최초로 "하나의 철학"속에 정초시키려고 하였던 바 만약 역사가 철학에 의해서 정초된다면 철학에 의해서 모든 현실이 이끌어 내어진다고 하겠다. 그러나 여기에 어려움과 내적 긴장이 없는 것은 아니다. 어떻게 객관적 총체성이 개별적 사유의 주관성에 종속되는가? 또한 거꾸로 어떻게 개별적 사유의 주관성이 객관적 총체성에 종속되는가?
그리하여 Haym은 Hegel이 선험적, 심리적인 것과 현실적, 역사적인 것의 두 종류를 혼합시켰다고 하고 이 둘의 결합에 대해서는 부정적이다. Haym의 해석에 따르면 Hegel의 철학에 의한 역사의 정초는 성공하지 못했다고 하겠다. 그러나 이것은 Hegel에 대한 Haym의 오해라고 하겠다. 자세히 말하자면 Hegel에 대한 Haym의 오해는 "證明"(Beweis)이란 관점에서 본 것이다. 즉 "선험적ㆍ심리적 증명"과 "역사적 증명"이란 관점에서 본 것이다. "증명"이란 관점에서 본다면 양자는 조화하기가 어렵다. 그러나 Hegel은 양자를 동시에 증명하려고 하지 아니하고 단지 역사적으로 도달된 것에 의해서 의식이론적으로 설명하려고 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Hegel은 "이미 주지된 사실을 개념적으로 파악하여 올바로 인식된 것이 되도록 하는 것이며 이것이 또한 사유의 관심사이기도 하다"고 하였던 바 따라서 Hegel은 현실과 역사의 의미를 철학적으로 정초하려고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결국에는 모든 실증적, 역사적 방법론을 거부하였던 것이 아니겠는가? 요컨대 우리가 Haym과 같이 Hegel의 철학을 심리학적 내지 역사적 계기의 혼합물로 간주하여 양자를 양분화시켜 분석적인 증명을 가하고 그것이 부분적으로만 타당시된다고 해서 그 전체를 파괴하려는 것은 온당치 못한 것이다. Hegel철학의 위대성은 일관된 명맥속에서 단 하나의 전체로 통합되어 있는데 있다고 할 것이다. 참 고 문 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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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인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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