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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 Hegel(1770-1831)/헤겔

헤겔의 자기 의식의 변증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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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겔의 자기 의식의 변증법                                            

 

1. 칸트의 초월적 자기 의식, 헤겔의 사회적 자기

 

  의식사물 인식, 곧 대상 의식의 확실성의 방식에서 진상은 의식 자신이 아닌 다른 어떤 것이다. 그리고 이 "진상"은 헤겔(G. W. F. Hegel : 1770∼1831)의 대상 의식의 변증법에서는 의식의 경험, 곧 "의식이 자기 자신에 대해, 말하자면 자기의 지식 작용과 자기의 대상에 대해 행사함으로써 그로부터 참된 대상이 생겨나는 변증법적 운동"(GW9-60)에서 나타났다 사라진다. 그러므로 헤겔이 파악한 대상 의식에서의 대상, 곧 독일어 낱말 뜻 그대로 '의식(Bewu t-sein)'에서 '알려지는 것', 그러니까 감각의 확실성에서 '이것'이라는 존재자, 지각에서의 구체적인 '사물', 지성에서의 '힘'은 직접적으로 그 자체로 있는 것, 곧 즉자적인 것이지만, 이 대상은 오히려 의식에 대하여 잠시 있다가 사라지는 것, 곧 진상이 아닌 것으로 밝혀진다. 그래서 이 즉자 존재라는 개념은 진정한 대상에서 지양되고, 경험에서의 최초의 직접적인 표상은 진상에서 사라져버린다. 그래서 정신은 "다름 아닌 그 자신이 실재임을, 바꿔 말해 모든 현실은 바로 그 자신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님을 확신"(GW9-132)하는 "자기 의식(Selbstbewu tsein)"에 이른다.
"자기 의식"은 단적으로 자기와 자기라는 대상에 대한 의식이다. 여기서는 '나'의 확실성이 그것의 진상과 동일하다. 왜냐 하면, 자기 의식에서는 대상 의식에서와는 달리, 확실성 그 자체가 그것의 대상이며, 의식 자체가 진상이기 때문이다. 자기 의식도 '의식의 경험'의 도정 중의 한 국면(Phase)인 한에서, 물론 여기에서도 타자 존재[Anderssein. 타자임. 他在]가 있다. 곧 자기 의식도 일종의 의식인 한에서 그 안에 분열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자기의 자기 자신과의 분열이다.
칸트(I. Kant : 1724∼1804))에서 "모든 표상이 나의 것이라는 의식"인 자기 의식은 모든 표상에 수반하는 의식(ad- perceptio, apperceptio : 통각)으로서 표상들 일반을 가능하게 하고 그것들을 통일하는 최고로 근원적인 초월적 의식이다. 이 초월적 의식으로서 자기 의식은 일체의 표상, 그리고 우리에게 존재하는 것, 곧 대상 모두를 가능하게 하는 원리로서 일체의 대상에 선행하는(a priori한) 고정 불변적인 12개의 범주 형식에서 기능하는 의식이다. 그래서 이 초월적 자기 의식은 대상 인식의 기반이자 그 인식에서 인식된 것인 대상, 곧 '우리에 대해서 존재하는 것', 존재자 일반의 궁극의 기반이다. 그러니까 칸트가 주제적으로 고찰하고 있는 초월적 자기 의식은 어디까지나 인식론적·존재론적 위상을 가질 따름이다. 반면에 헤겔의 '정신현상학'에서 "자기 자신의 확실성의 진상"을 드러내는 자기 의식은 즉자적(an sich)으로 존재하는 사물이 아니라 자기 자신과 '자기'라는 대자적(f r sich)으로 존재하는 것을 대상으로 갖는다. 그렇기 때문에 헤겔에서 '자기 의식'은 단지 존재자 자체와 관계하는 인식하는 의식에 머물지 않고, '자기'로 현상하는 '나'[자아]들에 대한 의식으로 나아간다.
헤겔에서 자기 의식은 '나는 나다'는 형식적이고 추상적인 자기 의식을 지양한다. '나는 나다'는 의식은 근원적으로 모순적이다. 그것은 '나는 곧 나다'는 자기동일성에 대한 의식이자, '나는 네가 아니고 나다'는 타자 상관적인, 그러니까 동등한 또 다른 자기 의식에 대한, 자기 분할적인 의식을 내용으로 갖고 있으니 말이다. 자기 의식이란 결국 자기 자신과 더불어 자기라는 타자, 다른 자기에 대한 의식을 말한다. 그러므로 헤겔에게서는 순전히 자연 대상을 아는 의식인 대상 의식과는 달리, 자기 의식은 자기들을 아는 의식, 곧 자기들이 공존하는 '사회'에 대한 의식이라고 말할 수 있다. 헤겔에게서 자기 의식은 곧 자기들에 대한 인식이기도 하다. 칸트는 통각인 (초월적인) 자기 의식과 구별하여, '자기 인식'을 자기라는 현상에 대한 (경험적) 인식으로 이해했지만, 헤겔에게서 자기 인식은 자기라는 타자에 대한 인식을 포함한다. 아니, 타자에 대한 인식이 본질적이다. 그래서 칸트에게서 자기 인식, 자기에 대한 지식 체계의 문제는 한갓 경험 심리학의 과제가 되지만, 헤겔에게서 자기 인식, 자기들에 대한 지식 체계는 사회학의 문제를 포함한다.
그러니까 헤겔이 의식 → 자기 의식 → 이성으로 전개되는 '정신현상학'에서 주제화한 자기 의식은, 칸트가 '순수이성비판'에서 주제로 삼은 순수하게 이론적인 '나'가 아니라, 동시에 실천하고 행위하는 '나'로서 '나'들 사이의 변증법적인 역동적 자기 변환적 운동을 통하여 "나 곧 우리, 우리 곧 나"임을 아는 정신의 지(知)다. 이 앎은 그러므로 한낱 지(知)의 작용이 아니라 원초적으로 욕구 일반이고, 그렇기에 생명인 자기 의식의 실천적 활동을 통하여 매개되는 것이다. 헤겔의 '정신'은 애초부터 칸트에게서와는 달리 '이론 이성'과 '실천 이성'의 연속성을 가지고 있어서, 양자 사이의 교량을 따로 마련할 필요가 없는 것이고, 이것은 바로 피히테(J. G. Fichte : 1762∼1814) 이후의 독일 이상주의 사상가들이 칸트 사상에 내재되어 있다고 본 '두 이성' 사이의 간극을 메우고 싶어했던 열망에 부응한 것이다.
자기 의식의 변증법적 운동의 결과 정신현상학은 개별자 '나'와 보편자 '우리'가 동일한 국면에 이른다. 그러나 이 국면에 이른 정신은 더 이상 자기 의식이 아니고, 헤겔적 의미의 "이성(Vernunft)"이다. 이 보편적 자기 의식에서 '나'의 규정들은 곧 사물들의 규정들이고, '나'의 자기 자신에 대한 사고는 곧 대상들에 대한 사고이니 말이다. 그래서 헤겔에서 자기 의식은 의식과 이성을 매개하는 정신의 자기 전개의 중간 국면이다.

 

2. 자기 의식의 원초적 모습 : 욕구와 생명 1) 자기 자신의 확실성의 성격헤겔에게서 자기 의식의 전개는 의식의 다른 국면에서와 마찬가지로 3단계 구조를 갖는다. 자기 의식은 일차적으로는 '나는 나다'는 직접적인[무매개적인] 자기동일성이다. 그런데 이 자기 의식은 '너'가 아니라 '나'라는 의식의 본성 상 이내 또 다른 자기 의식을 대면하게 되고, 여기서 '오로지 나만이 나다'는 상호간의 자립성 확보 투쟁 곧 인정 싸움이 벌어진다. 그 결과로 '나 = 우리, 우리 = 나'라는 매개된 자기동일성이 획득된다. 그것은 '나'의 소멸을 통한 진정한 의미에서 나의 나 자신으로의 복귀다. 여기서도 우리는 헤겔의 "동일성과 비동일성의 동일성"의 논리를 발견한다.
직접적인 자기 의식은 대상 의식의 경험 결과다. 의식의 직접적 형태인 대상 의식의 대상은 감각적인 존재였다. 그러나 의식은 그의 대상에서 결국 진상을 얻을 수는 없었다. 지성이 갖가지 설명 형식을 빌어 현상의 내면에서 경험한 것은 "실제로는 자기 자신일 따름"(GW9-102)이었다. 대상 의식은 사실은 자기에 대한 의식이었던 것이다. 이제 새로운 국면인 "자기 의식은 감각적인 지각된 세계의 존재로부터의 반성이고, 본질적으로 타자 존재로부터 [자기 자신으로의] 복귀다"(GW9-104).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온 자기 의식이란, 내가[의식이] 나를[의식을] 의식함이다. 그러니까 "자기 의식은 다름 아닌 오직 자기 자신만을 자기 자신과 구별한다"(같은 곳). 자기 의식에서는 개념과 대상이 동일한 '자기'다. 그러므로 이 "자기 의식과 더불어 우리는 이제 진상의 원래 고장"(GW9-103), 곧 개념이 바로 대상[존재]인 영역으로 들어선다.
그러나 정신의 한 현상으로서 자기 의식은 근본적으로 의식의 한 형태다. 자기 의식이 '자기에 대한 지식'으로서 대상 의식과 다르다고는 하지만, 그러나 '지식[앎]'의 형태를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역시 '지식 작용[앎]-지식 대상[알려지는 것]'의 관계 계기를 가지고 있다.
의식에 대해서 독립해 있는 것이 없으면 '∼에 대한 의식'이란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자기 의식은 감각적인 지각된 세계 존재를 대상으로 갖는 것은 아니니, 자기 의식이 대상을 갖는다면 그것은 단지 자신을 자신과 구별함으로써만 가능하다. 그러나 다른 한편, 자기와 자기의 구별은 진정한 구별은 아닌 만큼, 마침내 양자의 통일은 이뤄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자기 의식은 이중 구조를 갖는다. 자기를 자기와 구별하면서 또한 자기와 자기를 통일한다. 자기와 자기의 구별을 자기 의식의 현상이라 한다면, 자기와 자기의 통일은 자기 의식의 진리이자 진상이다.
자기 의식은 대자적 자기다. 존재하는 것으로서의 자기 의식은 "자신 안에 비추어진 존재"(GW9-104), 곧 자기 자신의 의식이며 그것은 자신의 자신과의 충돌이다. 그것은 말하자면, 대자적(對自的)으로 있는(f r-sich-seiend) 자기 의식이 이 자기 의식의 대상, 곧 다른 자기 의식과의 구별을 의식하는 것이며, 여기서 자기 의식은 또 다른 자기 의식의 독립성[실체성]을 경험한다. "이로써 자기 의식은 그에 대하여 독립적인 생명으로 나타나는 이 타자를 지양함으로써만 자기 자신을 확신(GW9- 107)"하기에 이른다. 그래서 원초적으로 "자기 의식은 오로지 또 다른 자기 의식에서만 자기의 충족에 이르는"(GW9-108) "욕구(Begierde)"(GW9-107)다. 자기 의식의 활동은 도대체가 "무한한 욕구"이고 "욕구 일반"(GW9-104)이다.
욕구란 존재하는 것을 그 자체로 존중하기보다는 오히려 그것을 부정하고, 그것을 빼앗아 자기의 소유물로 만들려는 의식 활동이다. 자기 의식은 근원적으로 욕구이고, 그것도 절대성 속에서 자기를 정립하려는 욕구다. 욕구라는 것은 욕구하는 자, 곧 주체와 욕구되는 것, 곧 대상을 맺어주는 끈이다. 그래서 자기라는 주체와 자기라는 대상의 분열이 있고, 자기와 타자 사이에는 팽팽한 긴장이 생기고, 거기에는 '생명(Leben)'이라 일컫는 내적 운동 내지 "유동성"이 있다. "욕구란 순수한 자기동일성을 유지하는 생명체, 즉 오직 스스로 자기에게만 관여하는 자기 의식의 절대적 불식성(不息性)에 의하여 끊임없이 산출되는 것"으로, 원초적으로 욕구인 자기 의식의 본래 대상은 "생(生) 자체"(GW9-104)이고, 그러니까 "직접적인 욕구의 대상은 생명[살아] 있는 것"(같은 곳)이다. 이로부터 본래적으로 생(生)인 "자기 의식과 생(生)의 대립"(GW9-105)이 생긴다. 2) 자기 의식의 생(生)과 욕구의 충족"자기 의식의 직접태는 개별자"(GW20-428 : Enzy. §426)다. 하나의 자기 의식에 대하여 또 하나의 자기 의식이 마주하는 것은 그 자기 의식들이 개별적인 생명이기 때문이다. '생명[生. Leben]'이란 본래 무엇이던가?
헤겔에서 생명이란 근원적으로 "직접적인 이념"(GW12-179 : LdW II, GW20-219 : Enzy.§216)이다. 생명은 곧 "한 육체 안에서 영혼으로 실재화한 개념"(GW20-219 : Enzy.§216)이다. 여기서 '이념' 내지 '개념'이란 부동의 한낱 이론적 관념이 아니라 무한한 이상적인 실천적 지향이자 과제다. '개념'은 그 자체로는 아직 실현되지 않은 힘, 이념이지만, 타자 속에서 곧 특수한 매체를 통하여 자신을 현시하고 자신을 완성해가는 보편자, 절대자다. 그러니까 생명은 이를테면 육체라는 특수한 "외면성에 매여 있는 무한성"이다.
한 육체는 그 안에 영혼이 실재함으로써 보편성과 함께 특수성 및 개별성을 갖는 '살아[생명] 있는 것'이 된다. 한 육체를 살아 있는 것으로 만드는 생명력, 곧 영혼은 그래서 세 가지 성격을 동시에 갖는다. "영혼은 육체라는 외면성에 대하여 직접적인 자기 자신과 관계 맺고 있는 보편성이자 또한 그 육체가 그 자신이 지니고 있는 개념 규정 외에는 어떠한 다른 구별도 표현하지 못하도록 하는 그 육체의 특수화[성]이고, 끝으로 무한한 부정성인 개별성이다"(GW20-219 : Enzy.§216). 영혼은 그 자체로는 보편적인 것이지만, 육체와 합해짐으로써 특수성을 얻게 되고 그 육체를 개별화한다. 이로써 영혼이 깃든 육체는 현상적으로는 살아 있는 개체이나, 그렇기에 이 개체에서 영혼과 육체는 언제든 분리될 수 있고, 이 성격이 바로 살아 있는 것의 가사성(可死性)이다. 그래서 개별적인 육체를 가진 살아 있는 것은 그 생명을 잃을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개별자는 바로 이런 성격으로 인해 그의 개별성을 버릴 수도 있고, 그것을 통하여 보편성으로의 복귀, 곧 유(類)가 될 수도 있다.
생명체의 발전은 생명의 논리 구조에 따른다. 생명으로서 이념은 "자기의 객관성[타자, 대상 세계]과는 구별되면서 단순히 자기 안에 깃들어 그의 객관성에 침투하고, 자기 목적으로서 그 객관성에서 그의 수단을 마련하여, 바로 이 객관성을 그의 수단으로 정립하고, 그러면서도 그 수단에 내재하여 그 안에서 실현된, 자기 동일적인 목적인 그런 개념"(GW12-177 : WdL II)이다. 이러한 이념은 직접적으로는 "그의 실존의 형식으로 개별성"을 취하지만, 그러나 "자기 안에서의 절대적 과정에 대한 반성은 이 직접적인 개별성을 지양함이다. 그리고 이로써 직접적인 개별성에서 보편성을 띠는 가운데 내적인 것이 된 개념은 외면성을 보편화한다. 바꿔 말하면 그의 객관성을 자기 자신과 똑같은 것으로 정립한다"(같은 곳). 그래서 이념으로서 생명은 세 양상을 갖는다. 생명은 첫째로 "그 자체로는 주관적인 총체성으로서, 그에 대하여 무관심하게 마주 서 있는 객관성에 대해 무관심한 것으로 전제되어 있는 살아 있는 개체(lebendiges Individuum)다"(GW12-182). 둘째로, 생명은 "그의 전제를 지양하고, 그 자신에 대해 무관심한 객관성을 부정적인 것으로 정립하면서, 자신을 그것의 힘[권력]이자 부정적 통일성으로 실현시켜가는 생의 과정(Lebensproze )이다"(같은 곳). 이렇게 함으로써 생명은 자기 자신을 자기 자신과 자기의 타자가 통일이 되는 보편자로 만든다. 그래서 셋째로, 생명은 "그의 개별화를 지양하고, 자기의 객관적인 현 존재를 마치 자기 자신을 대하듯 하는 유(類)의 과정(Proze  der Gattung)이다"(같은 곳). 이 과정은 한편으로는 생명의 본래 개념으로의 복귀로서, 최초의 분열의 되돌림·새로운 개체의 생성·최초의 직접적인 개체의 죽음이고, 반면에 다른 한편으로는 생명의 자기 안으로 몰입한 개념으로서, 그것은 "자기 자신에 대해 보편적이고 자유롭게 태도를 취하는 대자적으로 실존하는 개념의 생성"(같은 곳)이다.
이런 시각에서 헤겔은, 각기 독립적인 한 개체[한 여자]와 한 개체[한 남자]가 대립 관계에서 서로 자기를 버리고 통일함[부부 관계를 맺음(Begattung)]으로써 유[Gattung : 자식]로 번성하는 것이 가족을 형성하는 생명의 논리적 구조라고 본다. 이 생명의 논리가 또한 본래적으로 생명인 '나'라는 자기 의식이 분화·대립·통일하면서 자연과 관계 맺고, '우리' 곧 사회를 형성해가는 과정을 이끈다. 그것은 '사회의 논리'이기도 한 것이다.
생명은 자기 안에 구별들을 갖는 존재, 곧 생성하는 존재이자, 그 생성의 유동성 중에서도 자기를 보존 전개하는 본질적 실체다. "본질"이란 "모든 구별이 지양된 무한성, 축을 중심으로 도는 순수한 운동, 절대적으로 불안정한 무한성인 자기 자신의 안정"(GW9-105)을 일컫는다. 이 생명의 운동은 진정한 자기가 되기 위해 자기와는 다른 것으로 자기를 정립하고, 그를 통해 자기를 회복하는 운동이다. 그래서 살아 있는 것으로서 자기 의식은 끊임없는 분화와 통일을 겪는다. 그 과정이 자기 의식적 존재자의, 생물학적인 의미에서뿐만 아니라 사회학적인 의미에서의 생(Leben)이다. 생은 그러니까 "과정"(GW9- 106)으로서, "스스로 전개하면서 자기가 전개한 것을 해소하는, 이런 운동 중에서 자신을 단적으로 보존하는 전체"(GW9-107)다. 생은 말하자면 거기에서 자기 의식이 자기 자신을 경험하고 자기 자신을 실현하는 장(場. Medium)이다(GW9-106 참조).
살아 있는 것인 자기 의식으로서 "주체는 외적 실재에 의존적"이고, 생을 위해 외적 사물들을 필요로 한다. 그러면서도 그는 낯선 타자를 만나면 긴장하고, 특히 힘있는 타자인 다른 생명체들을 자기 지배 아래 두려 욕구한다. 이때 주체인 자기 의식은 무엇보다도 그에게 독립적인 생명으로서 자기를 제시하는 타자를 지양함으로써만 자기 자신의 확신에 이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본질적으로 자기 의식은 끊임없이 또 다른 자기 의식을 지양하려 한다. 자기 의식은 타자 속에서 자기 자신을 추구하고, 자기 의식으로서 인간은 다른 인간으로부터 인정받음으로써 안정을 얻으려 욕구한다. 살아 있는 것으로서 자기 의식은 타자 속에서 자기 자신을 획득하려 하는, 이를테면 불안정한 욕구다.
모든 생명체의 살아 있음의 징표가 충동과 욕구이지만, 자기 의식으로서 인간의 욕구는 유례가 없을 만큼 크다. 그렇기에 자기 의식은 말하자면 가장 큰 "공허(das Leere)" 위에 서 있는 것이다. 욕구란 텅 비어 있는 자가 그 공허를 채우는 기제(機制)이니 말이다. 타자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확신하면서 자기 의식은 그 '아무것도 아님(Nichtigkeit)'을 타자의 진상으로 정립하고, 그 독립적인 대상을 없애버리고, 그렇게 함으로써 자기 자신의 공허를 메우고 비로소 자기 자신의 확실성을 진정으로 확신한다. "정확히 말해서 생(生)은 타자를 자기 자신으로 환원하고 또 이 타자 속에서 자기 자신을 발견하는 운동이다."
그러나 자기 의식은 이러한 욕구 충족에서 그의 대상의 독립성을 경험하지 않을 수 없다. 욕구와 그것의 충족에서 이르게 된 자기 자신의 확실성은 그것의 대상에 의해 제약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이 자기 자신의 확실성은 타자의 지양에 의거한 것이니 말이다. 그런데 이런 타자의 지양이 있기 위해서는 이 타자가 있어야만 한다. ― '나'란 항상 '너'를 짝으로 해서만 '나'인데, 이 '너'란 또 다른 '나'다. ― 그래서 실상 자기 의식은, 대상의 독립성으로 인하여, 이 대상 자체가 자기 의식에 대립함으로써만 충족에 이를 수 있다. 대상이 없는 곳에서는 욕구도 그것의 충족도 없을 터다. 그러니까 자기 의식은 의식과는 달리 근본적으로는, 오직 다른 자기 의식에서만 그의 충족에 이른다.
"하나의 자기 의식에 대해서 또 하나의 자기 의식이 있다" (GW9-108, GW20-430 : Enzy. §430). 나는 '나'이지만, 너도 '나'며, 그 역시 또 다른 '나'다. 이로써 자기 의식은 현실적으로 있다. 자기 의식에게는 비로소 그의 타자 존재에서만 자기 자신과의 통일이 이루어진다.
자기 의식에서 개념 상 대상인 '나'는 사실은 대상이 아니며, 그 욕구의 대상은 순전히 독립적이다. 왜냐 하면, 그것은 보편적인, 제거될 수 없는 실체며, 유동적인 그러면서도 자기 자신과 동일한 본질이기 때문이다. 한 자기 의식이 대상이면, 그것은 대상이면서 또한 그 만큼 자아인 것이다. 자기 의식에서 자기의 대상과 자기 자체는 이를테면 "하나의 자기 의식을 위한 두 자기 의식"이다. 이것이 "자기 의식의 고유한 형식, 곧 '자기의 타자 존재에서 자기 자신과의 통일'"이다. ― 여기에서 정신(Geist)의 개념이 우리 앞에 나타난다. 의식의 경험으로서 정신현상학의 제2단계에서 나타나는 정신 말이다. 이 정신은 그것의 대립, 즉 서로 다른 독자적인 자기 의식들의 완전한 자유와 독립성 가운데서도 이 자기 의식들의 통일이다. 말하자면, "우리인 나며, 나인 우리다"(GW9-108). 의식은 비로소 이 '자기'와 함께 '낯선 자기(das fremde Selbst)'를 인정하는 자기 의식에서, 곧 정신의 개념에서 그의 전환점을 갖는데, 이 전환점에서 의식은 감성적인 이편(세계)의 다채로운 가상들로부터, 그리고 초감성적인 저편의 어두운 밤으로부터 현재의 정신적인 낮으로 넘어 들어온다. 자기 의식은 말하자면 육체라는 특수성을 가진 개별적인 '나'들의 변증적인 생명 운동을 통하여 '우리'라는 보편자에 이르는 정신의 자기 복귀의 국면이다.

 

3. 자기 의식의 변증법 1) 자기 의식의 타자와의 관계자기 의식에 대해서는 또 다른 자기 의식이 있다. 자기 의식은 "곧 직접적으로는 타자에 대하여 타자로 있다"(GW20-430 : Enzy. §430). "나는 '나'인 타자 안에서 직접적으로 나 자신을 직관하며, 또한 그 안에서 하나의 직접적으로 현존하는, '나'로서 나에 대항하여 절대적으로 독립적인 다른 객체를 직관한다"(같은 곳).
그래서 자기 의식으로서 나는 나의 밖에서 나를 본다. '나'는 나의 밖에 있는 것이다. ― '너' 없는 곳에 '나'가 어디 있겠는가! ― 이 사태는 이중의 의미를 갖는다. 첫째로, 자기 의식은 자기 자신을 잃어버린다. 그것은 자신을 자기가 아닌 다른 것으로 발견하니 말이다. 나는 남에게 '인정받는 자'로서 나만을 발견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헤겔의 자기 의식은 "한낱 자기 자신과의 관계가 아니라, 자기 밖에 있음으로부터 자기 자신으로 돌아옴", 곧 자기 회복의 의미를 얻는다. 둘째로, 그러나 그것은 타자를 지양하는 일이다. 그것은 타자를 본질로 보지 않고, 타자 중에서 자기 자신을 보니 말이다. 그에게 타자는 또 다른 '나'가 아니라 나만을 '나'로서 인정하는 자에 불과한 것이다. 다른 자기 의식을 전제로 해서만 자기 의식일 수 있으면서도, 다른 자기 의식을 부정하지 않으면 자기 의식일 수 없는 자기 의식은 그렇기에 모순된 통일체다. 자기 의식은 자기의 타자임을 지양해야만 한다. 자기 의식은 자기가 본질임을 확신하게 되기 위해서는 다른 독립적인 본질을 지양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렇게 되면 자기 의식은 결국 자기 자신을 지양하기에 이른다. 왜냐 하면, 이 타자에 의해서 자기 의식은 자기 의식인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다른 나' 없이는 있을 수 없는 것이며, '다른 나'에 의해 인정받음으로써만 '나'인 것이니 말이다.
그러나 자기 의식은 이 이중적 지양을 통하여 자기 자신을 다시 얻을 뿐만 아니라 다른 자기 의식을 해방시킨다. 왜냐 하면, 자기 의식은 자기의 타자임을 지양함으로써 다시금 자신과 동일하게 되는 한편, 다른 자기 의식을 그 자신에게 되돌려주기 때문이다.
자기 의식의 이와 같은 운동은 자기 의식의 다른 자기 의식과의 관계 속에서 쌍방적으로 일어난다. 한 자기 의식과 또 다른 자기 의식은 양자 똑같이 독립적이며 자기 완결적이며, 자기 자신에 의한 것이 아닌 것은 아무것도 자기 안에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기 의식의 지양 운동은 단적으로 두 자기 의식의 이중적 운동이다. 각자는 그가 행하는 것과 똑같은 것을 타자도 행하고 있음을 본다. 그리고 각자는 그가 타자에게 요구하는 것을 스스로 행한다. 그리고 타자가 똑같은 것을 행하는 한에서만 그 자신이 행하는 것을 행한다. 이 운동은 오직 양자를 통해서만 성립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서 그들은 상호 인정하며, 서로가 서로를 인정하는 것으로서 인정한다. 그래서 '나'로부터 '우리'가 생긴다.
그러면 자기 의식에서 이 "인정(認定. Anerkennen)"의 과정은 어떻게 진행되는가? 2) 자기 의식의 인정 투쟁 과정자기 의식은 본디, 다시 말해 아직 '우리'를 이루기 전엔, 단순한 독자[독립] 존재다. 그것은 모든 타자를 자신으로부터 배제시킨 자기 동일적인 것이다. 그의 본질과 절대적 대상은 그에겐 '나'며, 이 '나'는 그 독자 존재의 직접적 존재 중에서는 "육체성"을 가진(GW20-430 : Enzy. §431 참조) "개인(Einzelnes)"(GW9-111)을 의미한다. '나'라는 개인에 대해 타자인 것은 비본질적인 대립[부정]자의 성격으로 특징지어지는 대상이다. 그래서 똑같은 자기 의식이지만 이 '나'는 또 다른 어떤 '나'에 의해 대치될 수 없다. 하나의 사과는 똑같은 다른 하나의 사과로 대치할 수 있지만, '나'는 그렇게 할 수가 없다. 만약에 그러한 일이 일어난다면, 그것은 다름 아닌 자기의 "소외(Entfremdung)"다.
물론 한낱 대상으로 여겨진 타자 역시 하나의 자기 의식이다. 그 또한 한 개인으로, 다른 하나의 개인에 마주하여 등장한다. 이렇게 직접적으로 등장함으로써 이들은 서로에 대해서 통상적인 대상의 방식으로 존재한다. 각자는 어쩌면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충분히 확신할 터다. 그러나 타자에 대해서는 그렇지 못하다. 그리고 바로 그 때문에 자기에 대한 그 자신의 확실성도 아직 진상을 얻지 못한다. 다시 말하면, 그들은 아직 현실을 개시(開示)하지 못한다. 곧, 하나의 객관적이고도 상호 주관적인, 보편적으로 인정된, 따라서 실존적이고 타당한 본질을 개시하지 못한다. 왜냐 하면, 자기의 대자[對自. 獨自] 존재가 대타(對他) 존재로 드러나고, 그리고 타자 역시 대자 존재로 드러나는 곳에 자기 의식의 진상이 있으니 말이다. 그런데 이런 상황의 도래는, 인정의 개념상 타자가 그에 대해서와 마찬가지로 그가 타자에 대해서, 그리하여 각자가 그 자체로 그 자신의 행위를 통해, 그리고 타자의 행위를 통해 대자[독자] 존재의 이 "순수 추상"(GW9-111)을 완수함으로써만 가능하다.
자기 의식의 순수 추상으로서의 자기 자신의 개진(開陳)은 그의 대상적 방식에 대한 순수 부정으로서 자신을 제시하는 데에, 바꿔 말해 어떤 특정한 현존재에도, 현존재 일반의 보편적 개별성에도, 따라서 생(生) 일반에 매여 있지 않음을 제시하는 데에 있다. 그래서 이 개진은 이중적 행위로 나타난다. 곧, 그것은 타자의 죽음을 겨냥하며, 바꿔 말하자면, 자기 자신의 목숨을 건다(GW6-310 이하 참조 : Entw. I). 그러므로 두 자기 의식의 관계는, 그들이 "생사(生死)를 건 투쟁"(GW9-111, GW8-221 : Entw. III)을 통해 자신을 그리고 서로를 확증하도록 정해져 있다. 그리고 여기서 '확증'한다 함은 각자가 가지고 있는 순전히 주관적인 확실성을, 객관적인 보편적으로 타당한, 말하자면 인정된 진리로 전화시킴을 뜻한다.
두 자기 의식은 이 생사를 건 투쟁에 들어갈 수밖에 없다. 왜냐 하면, 그들은 그들 자신이 독립적으로 존재한다는 확실성을 타자에게서 그리고 그들 자신들에게서도 진리로 고양해야 하기 때문이다. 생(生)을 건다는 것은 그것을 통해 자유가 확증되는 유일한 것이며, 또한 그것을 통해 자기 의식에게는 그저 존재하는 대로가 아니라 순수 대자[독립적] 존재임이 확증된다. 생을 걸어본 적이 없는 개인(Individuum)도 어쩌면 표면적으로는 인격(Person)이라고 인정될 수도 있겠으나, 그러나 그는 하나의 독립된 자기 의식으로서 "인정됨[인정받음]의 진리"(GW9- 111)에 도달하지는 못한다. 그렇기에 그는 '자유롭게 살 권리를 인정받은 자'라는 의미의 진정한 인격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 그래서 각자는 자기의 목숨을 걸 듯이 타자의 죽음도 겨냥한다. 왜냐 하면, 타자는 그에게는 타자 이상의 것이 아니며, 타자의 본질은 그에겐 타자로서만 드러나며, 타자는 그러므로 자기의 밖에 있는 것이고, 그렇기에 그것은 자기 밖에 있는 존재를 지양하여 자기만의 세계를 만들려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 자기 의식이 타자의 죽음을 통해 얻은 자기 확증은, 그로부터 생겨났을 진리와 함께 또한 자기 자신의 확실성을 지양해버린다. 왜냐 하면, 생(生)이 의식의 자연적 긍정이고, 독립성은 절대적 부정성이 없는 것이듯이, 사(死)는 의식의 자연적 부정, 곧 인정(認定)에서 마땅히 요구되는 의미도 없는 채 있는, 독립성 없는 부정이다. 생사의 투쟁에서 그들은 모두 목숨을 걸었고, 따라서 그들에게 목숨은 대수롭지 않은 것으로 여겨졌다는 확실성이 형성되었지만, 그러나 투쟁에서 패배자가 목숨을 잃어버린 그 결과는 그 투쟁을 이겨낸 자에게도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들은 자연적 현 존재인 타자의 실재 안에 놓인 그들의 의식을 폐기하고, 말하자면 스스로를 폐기하고, 독자적으로 존재하고자 하는 극단으로서 그들은 지양된다. 그리고 이와 함께 "상호 교환의 놀이"(GW9-112)로부터, 대립적인 규정성들의 극단으로 분열하는 본질적인 계기가 사라진다. 그래서 중심은 더 이상 대립적이 아닌, 양극단으로 분열되어 있는 죽은 통일로 함몰한다. 그래서 양자는 의식을 통해 서로간에 교호하지 못하고, 서로간에 아무래도 좋은 "사물"(GW9-112)로 방치된다. 왜냐 하면, 죽어 있는 자에 대해서 살아남은 자는 아무것도 기대할 수 없기 때문이다. 패자가 죽음으로써 생을 마감한다면, 승자가 누구한테서 인정을 받을 수 있겠는가!
그래서 의미 있는 투쟁은 자기 의식들간의 추상적 부정이지, 의식의 부정이 아니다. 의식은 지양되는 것을 보지(保持) 보존(保存)하고, 그 지양된 것이 살아남는 방식으로 지양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싸우는 자기 의식을 변증법적으로 지양한다는 것은, 그 자의 자연적 존재를 없애버린다는 것이 아니라, 그에게 생명과 의식은 남겨두고 그 타자의 독립성을 파괴한다는 것, 곧 그를 자기의 지배 아래 두는 노예로 만든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인정 투쟁의 결과로 생겨나는 것은 주인[승자]-노예[패자], 지배-예속의 관계다. 여기서 노예가 노예가 된 것은 그가 생사 투쟁에서 목숨을 잃는 대신에 목숨 구출을 택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따지고보면 그는 주인의 노예라기보다는 생명[목숨]의 노예인 셈이다.
생사 투쟁에서 자기 의식이 경험한 것은, 그에게는 순수 자기 의식 못지 않게 다른 자기 의식과의 관계, 곧 삶이 본질적이라는 사실이다. 본래 직접적인 자기 의식에서는 단순한 자아는 절대적 대상이며, 이 절대적 대상은 '우리'에게서 절대적 통일의 매개다. 목숨을 내건 투쟁에서 경험한 것은 이 통일성의 해체다. 이 경험을 통해 하나의 자기 의식과, 순전히 대자(對自)적이 아니라 대타(對他)적인 의식 곧 "사물성의 형태를 가진 의식"(GW9-112)이 정립된다. 이 두 계기 모두 본질적이다. 왜냐 하면, 이 양자는 대립적이되 불평등하고, 그것들의 통일에의 반성은 아직 나타나지 않고, 여전히 의식의 두 대립 형태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한 형태는 독립적인 것으로, 그에게는 독자적임[對自存在]이 본질이고, 또 하나의 형태는 비독립적인 것으로, 그에게는 생명 내지는 타자를 위한[對他的인] 존재가 본질이다. 전자가 다름 아닌 주인이고 반면에 후자는 노예다. 목숨을 걸고 끝까지 싸워 이긴 자인 주인은 '인정받는 자'로서 일을 시키는 자가 되고, 목숨 잃은 것이 두려워 무릎을 꿇은 자인 노예는 '인정하는 자'로서 시키는 일을 수행하는 자가 된다. 3) 주인-노예 관계의 변증성과 자기 의식의 진상주인-노예의 관계에서 주인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현실적인, 곧 힘을 발휘하는 의식이다. 그것은 "다른 의식을 통해 자신과 매개된"(GW9-112), 곧 자신을 확인한 의식, 바꿔 말해 자신이 독립적인 존재와 사물성 일반이 종합되어 있음을 본질로 갖는 것임을 의식하는 자다. 주인으로서 독립적 의식은 그래서 한편으로는 욕구의 대상인 사물 그 자체와, 다른 한편으로는 사물성이 그의 본질인 의식 곧 노예와 관계한다.
주인은 독립적인 존재인 사물을 통해 간접적으로 노예와 관계를 맺는다. 노예는 목숨, 동물적인 생존을 유지하기 위해 바로 이 사물에 매여 있기 때문이다. 사물은, 노예가 투쟁 중에서 도외시할 수 없었던, 그것에 대해서 자신을 비독립적인 것으로 드러냈던 "사슬"(GW9-113)이다. 주인은 반면에 이 사물성을 초극하는 힘, 권력이다. 왜냐 하면, 그는 투쟁 중에서 이미 사물적 존재란 그에게는 단지 부정적인 것일 따름이라는 것을 입증했다. 주인은 사물적 존재 위에 군림하는 힘인 데 반하여, 노예는 사물적 존재의 힘에 굴종하는 자이므로, 결국 주인은 이 사물적 존재를 매개로 해서 노예를 수중에 갖는다. 그러면서 주인은 노예를 통해 간접적으로 사물과 관계 맺는다.
노예도 자기 의식이기는 하기 때문에 또한 사물과 부정적으로 관계 맺는다. 즉, 사물을 지양한다. 그러나 사물은 그에 대해서 독립적이므로, 그 때문에 노예는 그의 부정을 통해 사물을 송두리째 없애버리는 데에 이르지는 못하고, ― 주인은 사물을 완전히 먹어 치워버리지만 ― 노예는 사물을 단지 가공(加工) 개작(改作)한다. ― 즉, 노예는 주인이 그것을 잘 소화할 수 있도록 조리한다. ― 반면에 주인에게는 이 매개, 곧 원료로 있는 사물을 소화가 잘 되도록 변화시킨 노예의 노동을 통해 사물과의 순수한[완전한] 부정[폐기]으로서의 직접적인 관계 맺음, 말하자면 "향유(Genu )"(GW9-113)가 가능하게 된다. 이로써 그는 직접적인 욕구에서는 성취하지 못했던 것을 이룬다. 곧, 주인은 향유에서 자기 만족을 얻게 된다. 직접적인 욕구에서는 이것이 사물의 독립성으로 말미암아 달성되지 못했다. 그러나 노예를 사물과 자신 사이에 끼워넣은 주인은 그로써 자신과 사물의 비독립성을 연결시키고 그것을 순전히 향유한다. 그러면서도 그는 사물의 독립성의 측면을 여전히 그것을 가공하는 노예에게 위임한다.
이 관계에서 우선 주인은 또 다른 자기 의식인 노예에 의해 인정받음이 드러난다. 왜냐 하면, 노예는 한편에서는 사물을 가공한다는 점에서, 다른 한편에서는 특정한 현 존재에 의존하고 있다는 점에서 자신을 비본질적인 것으로 정립하기 때문이다. 노예가 사물에 대하여 행한 활동은 원래는 주인의 활동이다. 노예가 일한 것은 오직 주인과 주인의 필요 충족을 위한 것으로, 자기 자신의 필요 충족을 위한 것이 아니니 말이다. 반면에 주인의 욕구는 노예 안에서 노예를 통하여 활동한다. "그래서 자기 의식은 주인의 인격에서 정점에 이른다. 노예에게는 주인의 대자[독자] 존재가 본질이다. 노예 자신은 수단일 따름이다." 그러나 무슨 사태에서나 정점은 내리막의 시점이기도 한 법이다.
주인-노예, 지배-예속의 관계에서도 이내 역전(逆轉)과 주객 전도의 상황이 발생한다. 주인은 노예한테 인정받는 자에 불과하다. 주인은 독립적인 자기 의식으로서 자립성을 표방하지만, 그러나 그 진상을 노예에 대한 지배와 노예의 노동에서 구하는 한, 비자립적인 것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노예는 당초에는 비자립적인 것으로 자기 의식을 상실한 것으로 등장했다. 그의 존재는 그의 밖에 있었고, 그는 생의 포로로서 고작 동물적 실존 속에 매몰되어 있었다. 그는 대자 존재가 아니라 자기 의식에 대하여 타자 존재일 따름이었다. 그러나 그는 노동을 통해 인간적 활동의 원천이 됨으로 해서 자립성을 획득한다. "그래서 자립적 의식의 진리는 노예의 의식이다"(GW9-114). "노예의 의식은 당초에는 자기 밖에 있는 것으로 나타났고, 따라서 자기 의식의 진리가 아닌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지배(상태)가 본래 의지했던 것의 전도(顚倒)로 그 본질을 드러냈듯이, 예속(상태)은 오히려 그 자신을 완성함 속에서 그가 직접적으로 놓여 있던 상태와 반대의 것으로 전화(轉化)하기에 이른다. 다시 말하면, 자기 속으로 떠밀려 들어간 의식으로서 예속은 이제 진정한 자립성으로 반전되는 것이다"(같은 곳).
주인은 노예로 하여금 노동하도록 강요했지만, 그러나 노예는 노동함으로써 사물적 자연 위에 군림하는 주인이 된다. 노동이 노예를 사물적 자연으로부터 해방시킴으로써, 그것은 또한 그를 그의 노예적 본성[자연]으로부터 해방한다. 노동은 노예를 마침내 주인으로부터 해방한다. 반면에 노예의 노동 산물을 향유하는 주인은 결국은 그 노예의 작품에 놀아난다. 주인은 사실상 노예의 자의(恣意)에 예속되고마는 것이다. 이로써 사태는 역전된다.
그러니까 자기 의식이 독립적인 것과 비독립적인 것으로 나뉘어 있는 한, 어느 쪽도 진정한 의미에서의 자기 의식의 본질, 곧 "자유"를 얻지는 못한다. 이를 경험한 두 자기 의식은 상호 인정을 통하여 함께 자기를 회복할 길을 찾는다. 그것은 주인과 노예의 종합이 현실이 되는 곳에서, 바꿔 말해 모든 자기 의식이 보편적이고 동질적으로 자립적 존재자가 되는 곳에서, 곧 완전한 국가 안에서 시민이 되는 때에 비로소 성취될 수 있는 것이다. ― 이것이 주인-노예 관계에서의 자기 의식의 변증법이 가르쳐주는 바다.

 

4. 주인-노예 관계사로서의 인간의 역사 1) 인간 문화사에서 노동의 의미목숨 보장의 대가로 노예는 주인의 지배 아래 들어간다. 그러나 주인은 노예의 노동을 필요로 하고, 그런 한에서 노예에 의존적이 된다. 반면에 노예는 주인이 필요로 하는 사물들을 노동을 통하여 지배할 수 있게 됨으로써 주인을 갖고 놀 수 있는 힘을 얻는다. 노예는 말하자면 노동을 통하여 지배권을 스스로 "형성한다". "이로써 노예는 그를 노예로 인정했던 저 동일한 자기 의식에 도달한다."
이 같은 지배-예속의 변증법적 운동을 이끈 결정적인 요인은 "공포"와 "노동"과 "형성[Bildung. 도야. 교양]", 이렇게 셋이지만 그 가운데서도 핵심적인 것은 노동으로, 그것은 또한 인간 문화사의 중추이기도 하다.
노예가 느끼는 "죽음의 공포, 절대적 주인에 대한 공포"는 노예의 내면을 밑바닥까지 뒤흔들어놓고, "모든 존립하는 것의 절대적 유동화(流動化)"(GW9-114)를 야기한다. 그러나 이 같은 "순수한 보편적 운동"이야말로 "자기 의식의 단순한 본질, 절대적 부정성, 순수한 대자 존재"다. 순수한 대자적 존재의 계기는 이제 노예에게도 의식되고, 그것은 노예로 하여금 사역(使役)함으로써 "보편적인 해소"를 실현하도록 한다. 다시 말해 노예는, 사역 속에서 "그가 의존하고 있는 자연적 현 존재를 하나 하나씩 지양하고 노동함으로써 제거해나간다"(같은 곳). 절대적인 지배 권력에 대한 감정, 주인에 대한 공포의 감정은 노예를 노동의 질곡에 가두지만, 그러나 그것은 "지혜를 싹트게 하는 단초"(같은 곳)가 되어 노예는 대상을 다룰 수 있는 "꾀(List)를 갖게"(GW8-206) 되고, 그의 손과 지성에 의한 노동을 통해 그의 예속 상태를 벗어난다. 그러니까 당초에는 부정적 자기 의식이었던 노예 의식은 노동을 통하여 "자기 자신으로 돌아와"(같은 곳) 자기의 자립성을 의식하는 긍정적인 것으로 바뀐다.
주인의 욕구는 그것의 충족에서 결국 사물을 소멸시키고 만다. 그러므로 주인의 욕구는 "대상에 대한 순수한 부정, 따라서 순전한 자기 감정만을 포함"할 따름이다. 그래서 주인의 욕구 충족에는 "대상적인 면", 다시 말해 대상의 "자립성"이 결여되어 있다. 반면에 노예 의식은 사물과의 비본질적인 관계 맺음이므로, "거기에서 사물은 그의 독립성을 보존한다." 그렇기 때문에 노동은 제대로 발산되지 못한, "저지당한 욕구, 억제당한 소멸"(GW9-115)이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에, 바꿔 말하면, 노동은 "사물을 형성[도야]하는 것"(같은 곳)이다.
노동의 이면(裏面)은 "형성", 곧 "형태화하는 행위(formierendes Tun)"(같은 곳)다. 노동은 사물을 형성하는 일인데, 그런데 이 형성 행위의 "부정적 중심"은 실존하는 "개별자, 바꿔 말해, 노동을 통해 자기를 벗어나서 항존하는 존재의 터전에 발을 들여놓는 의식의 순수 대자 존재"(같은 곳)다. 그러므로 사물의 "형성에서는 이 대자적 존재가 바로 의식 그 자체의 고유한 존재로 받아들여짐으로써 마침내 여기서 노예 의식은 자기 자신이 즉자대자적으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우치게 된다"(같은 곳). "그리하여 노동하는 의식은 이제 자립적인 존재가 다름 아닌 자기 자신임을 직관하기에 이른다." 그래서 노동하는 의식이 사물을 형성하는 가운데서 경험하게 되는 것은, "그가 낯선 의미만을 지닌 것으로 나타났던 다름 아닌 그 노동에서, 자기 자신을 통해 고유한 의미를 가진 자기 자신을 재발견함이다"(같은 곳). 노동의 산물로 형성된 사물은 그의 "외화(Ent u erung)"이고 그의 "작품(Werk)"이며, 이 작품을 통하여 노예 의식은 사물에 대하여 자립성을 얻고, 동시에 그의 작품에 매달려 있는 주인에 대해서도 자립성을 얻는다. 그러니까 노예는 노동을 통하여 자유롭게 되고, 해방되는 것이다. 노예는 노동함으로써, 다시 말해 죽도록 일함으로써 '동물'로서는 죽되 '인간'으로서 다시 태어나 자연의 주인이 되고 주체적 자기 의식이 된다.
보다 더 일반적으로 말해, 노고를 치르는 노예야말로 모든 인간적인·사회적인·역사적인 생산의 원천이다. 노동은 세계를 변화시키고, 인간을 문명화시키고, 형성·도야·교육한다. 역사 문화는 노동하는 자, 노예의 것인 셈이다.
헤겔에게서의 이와 같은 노동 의미 이론은 일반적인 노동의 철학이 될 수 있다. 인간은 노동을 통하여 자연 세계를 개작하고 사물을 형성하는 한편 인격으로서 자유를 획득한다. 곧, 한낱 동물[짐승]이 아니라 인간으로서 인간이 된다. 사물을 형성해가면서 인간은 또한 자기 자신을 세우고 형성 도야해가는 것이다. 인간 문화의 전 역사 과정에서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것은 갖가지 형태의 지배와 예속, 노동하는 자의 뼛골빠지는 봉사와 사역 가운데서도 "노동은 사물과 더불어 인간도 함께 발전시킨다"는 사실이다. 충분히 그렇게 말할 수 있겠는데, 이것은 노동이 간직하고 있는 신비다. 2) 주인-노예 관계의 전변사(轉變史)"인간은 자기 의식이다. 인간은 자신을 의식하며, 자신의 인간적 현실과 위엄[존엄성]을 의식한다." 인간이 '나'를 의식한다는 바로 이 점에서 인간은 한낱 "자기 감정"(GW20-411이하 : Enzy. §407 참조) 수준을 넘어서지 못하는 동물과는 본질적으로 구별된다. 그러나 인간 역시 하나의 생명체로서 동물이기 때문에 여느 동물이나 마찬가지로 그의 자기 의식의 바탕에는 "욕구"가 있다.
욕구는 인간을 불안정하게 만들고, 그로 하여금 행위하도록 밀친다. 행위란 욕구에 의해서 생겨나는 것이므로, 행위는 이 욕구를 충족시키려 애쓴다. 행위는 오로지 그 욕구된 대상을 "부정"하고 변화시킴으로써만 이를 달성할 수 있다. 부정하는 활동으로서 행위는 외적인 것을 파괴하거나 동화시키고 내면화함으로써 새로운 현실을 만들어낸다. 그러나 그 같은 부정적 활동에 의해 실현되는 욕구를 통해 형성되는 '자기'가 그 욕구가 향해 있는 대상들과 성질 상 같은 것, 곧 자연적인 것에 머물러 있는 한, 그 '자기'는 그저 살아 있는 나, 동물적인 나일 따름이다. 이 '자연적인 나'는 자신에 대해서나 모든 타자들에 대해서나 한낱 '자기 감정'으로 나타날 따름이며, 결코 자기 의식에 이르지 못한다.
욕구가 비자연적인 대상, 즉 현존하는 현실을 뛰어넘는 어떤 것과 관계 맺을 때, 그것은 자기 의식의 것이 된다. 그런데 현존하는 현실을 뛰어넘는 유일한 것은 욕구 자체다. 욕구 그 자체, 충족되기 전의 욕구 자체란 존재하지 않는 것, 곧 공허, 무(Nichts)다. 그래서 자기 의식은 원초적으로 욕구인 것이다.
자기 의식은 자연 존재로서의 자기 자신과 관련해서 자기를 초월함을 전제로 한다. 이것은 욕구가 현존하는 것에가 아니라 존재하지 않는 것에 관계할 때 가능하다. 현존하는 것을 욕구한다 함은 이 현존하는 것에서 자기를 만족시킨다 함이요, 이것은 곧 그것에 자기가 예속한다 함을 뜻한다. 존재하지 않는 것을 욕구한다 함은 현존하는 것으로부터 자신을 해방시킨다 함이요, 이것은 자기의 자유를 획득한다는 것을 뜻한다. 욕구가 자기 의식의 것이기 위해서는 존재하지 않는 것, 곧 또 다른 욕구, 또 다른 공허, 즉 "다른 자기", 다시 말해 다른 자기 의식과 관계해야만 한다.
자기 의식으로서의 인간은 자신을 사물에 종속시키는 것이 아니라 끝내는 자신을 다른 욕구 앞에 마주 세운다. 자기 의식으로서 사물을 욕구하는 인간에게는 사물 그 자체는 그다지 문제가 되지 않고 오히려 그 사물에 대한 그의 권리 인정, 즉 사물의 소유자로서 인정받는 것이 문제다. 이것은 결국 다른 사람들, 다른 자기 의식들에 의해 자기가 그들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인정받기를 노리는 것이다. 이러한 인정에 대한 욕구만이, 그러한 욕구로부터 비롯하는 행위만이 인간적인 그러니까 비생물학적인 자기 의식을 개시한다.
진정한 자기 의식으로서 인간은 그래서 그의 비생물학적인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서 자기의 생물학적 생(生)을 건다. 직접적으로 생과 관련이 없는 목표들에 이르기 위해 자기 목숨을 걸 수 없는, 인정 투쟁에 자기 생을 걸지 않는, 순전히 위신을 세우기 위해 투쟁에 들어갈 수 없는 존재자는 그러니까 진정한 자기 의식, 인간적 존재자가 아니라 해야 할 것이다.
인정 싸움에서 패배자란 인정에 대한 자기 의식적 욕구를 목숨을 유지하기 위한 생물학적 욕구 아래에 놓은 자이고, 이 같은 자의 행위는 그가 그 자신과 승리자에게 그 자신이 승리자의 아래에 놓여 있음을 인정하는 짓이다. 승리자란 생물학적 목숨과 직접 관련이 없는 목표를 위해 자기 생을 건 자이고, 이 같은 자의 행위가 그가 패배자 위에 있다는 징표다. 이렇게 해서 주인과 노예의 관계가 생기고, 그것은 양자에 의해서 인정된다.
인간은 자연 안에서 하나의 생명체로, 하나의 동물로 태어났으나, 주인과 노예의 출현으로 끝이 나는 인정 투쟁과 더불어 비로소 "인간의 공동 생활(Zusammenleben der Menschen)"은 시작되었고(GW20-431 : Enzy. §433 참조), '인간의 역사'가 개시되었다. 주인-노예의 변증법은 말하자면 "사회학적 근본 법칙"이다. 이 말은 언필칭 '사회적 동물'인 인간은 시초에서부터 주인이거나 노예며, "주인도 없고 노예도 없는 곳에서는 현실적인 인간은 없다"는 것을 뜻한다. 인간들 사이의 상호 작용과 인간과 자연 사이의 상호 작용의 역사인 세계사는 그러니까 실상은 명예를 위해 목숨을 내놓는 전투가 주인과 목숨을 지키기 위해 죽도록 일하는 노동자 노예 사이의 상호 관계사다.
이 역사 발전의 도식을 다시 한 번 그려보면 다음과 같다. 목숨을 건 투쟁을 통해 주인은 현존하는 자연과 그의 현존하는 동물적 '자연(Natur)', 곧 본성(Natur)을 넘어서서 자기를 의식하고 자신을 주체로서 형성하는 인간적 존재가 된다. 그때 그 주인은 그의 노예로 하여금 노동하도록 한다. 이 노예는 노동을 통하여 자연 세계를 변화시키고, 그로써 그는 자신을 자연에 대해 우위에 세우며, 또한 그로써 그의 동물적 자연 본성에 대해서도 우위에 선다. 왜냐 하면, 그는 자연을 직접적으로 있는 그대로와는 다르게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자연 세계가 변화하면 그 자신도 변화한다. 그가 바로 세계를 변화시키는 자이므로, 그러니까, 그는 스스로 자신을 변화시키는 자다. 반면에 주인은 단지 노예를 통해서만 변화한다. 그러므로 역사의 과정, 역사적 생성(生成. Werden)은 "노동자 노예의 작품이지, 전투가 주인의 작품이 아니다." 물론 주인 없이는 역사가 없을 터다. 그러나 그것은 주인이 없으면 노예도 없을 터이고, 따라서 노동도 없겠다는 의미에서 그러할 뿐이다.
노예는 노동의 덕택으로 전변(轉變)하고 그의 현재 상태와는 다른 자가 된다. 그로써 그는 노예이기를 중지할 법도 하다. 노동이야말로 인간을 자연의 주인이 되도록 하는 유일의 것이니 말이다. 노동은 이중의 의미에서 형성(Bildung)이다. 첫째로, 노동은 세계를 형성하고 또 바꾸어 형성하고, 세계를 인간에게 적응시킴으로써 인간화한다. 둘째로, 노동은 인간을 당초에는 단지 그 자신이 만들어냈던 추상적 관념, 곧 이상일 따름이었던 이념에 보다 합치시킴으로써 인간을 도야하고 교육하고 인간화한다. 노동을 통한 인간의 이 도야, 자기 형성의 도정이 인간의 역사다. 그러기에 노예는 인간 및 자연 역사의 주인이 되기에 충분하다. 그럼에도 그의 노동을 통하여 자유의 추상적 관념에 이른 노예가 그를 실현하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걸린다. 그는 쉽사리 주인에 대한 공포를 극복하지 못하고 죽음에 대한 불안을 극복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는 아직도 자신의 독립성을 얻기 위해 주인에 대항하여 싸우고, 이 자유를 위한 투쟁에 자기 목숨을 걸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노예는 그 자신의 자유를 실현하기에 앞서 자기 자신과 자신의 노예 상태를 정당화하고, 자유라는 '이상'과 노예 상태라는 '사실'을 관념적으로나마 화해시키기 위한 시도로서 "일련의 이데올로기들을 고안"해냈고, 우리는 그것을 인류 문화사의 발자취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것을 헤겔은 스토아[금욕]주의 → 회의주의 → 기독교적 불행한 의식으로 이어지는 서양의 고대 중세 역사에서 예증한다(GW9-116 이하 참조).
근세 계몽주의를 거쳐 인간은 이제 '시민사회'에 이르러, 단지 관념적으로가 아니라 현실적으로도 주인-노예 관계를 탈피한 듯하지만, 그는 여전히 사유 재산·돈·자본의 노예로 남아 있다. 노동을 통해 사람 주인 밑의 비자립적 위치를 벗어난 또 하나의 자기 의식은 이내 기독교적 사고 속에서 "저편"(GW9- 131) 세계의 절대자를 구상하고, 기꺼이 하느님 주(主)의 노예가 되어 영생(永生)을 얻으려 했다. 그러나 저편의 '절대자'가 사실은 그 자신의 구상의 산물임을 깨달은 사람들은 다시금 '계몽'의 기치 아래 자신의 이성에서 진정한 구원을 얻으려 안간힘을 썼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스쳐간 일이고, 이제 그들은 돈에 기꺼이 복종하고, 그것을 통해 '진정한' 영생(永生)을 대망(待望)한다. 하느님을 받들 듯 돈을 받드는 물신주의(物神主義) 배금(拜金) 사상은 돈에 복종함으로써만 생명을 지킬 수 있다는 생각이다. 그런 생각에 젖어 사람들은 목숨 잃는 것이 두려워 돈의 노예가 된다.
사람(주인)-사람(노예) → 하느님(主)-사람(從) → 돈(주인)-사람(노예)의 관계 속에서 진행되어가고 있는 것이 지나간 3000년 이상의, 언필칭 인간의 역사다. "전해오는 옛말에, 군자는 사물을 부리고, 소인은 사물에 부림을 당한다(傳曰 君子役物 小人役於物)" 했으니, 먼 옛날에는 그나마 소수의 주인 사람[군자]이 있어 돈 위에 군림했었나보다. 이제 다수의 사람이 사람 주인의 예속에서도 벗어났고 주 하느님의 그늘에서도 벗어나 모두가 '주인' 행세를 하게 됐지만, 그러나 사람 주인과 주 하느님이 물러간 자리에 돈 주인이 들어섰고, 노예의 수는 더 늘었으면 늘었지 줄어든 것 같지는 않다. 돈 주인-사람 노예 관계는 언제 어떻게 지양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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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종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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