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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트와 헤겔의 자연개념 - 자연윤리학의 정초 가능성
1.환경 위기의 시대에 왜 칸트와 헤겔인가?
오늘날 적지 않은 환경론자들이 인류가 직면한 생태 위기의 근본 원인을 인간과 자연에 대한 이분법적 사고와 인간중심주의적인 지배적 세계관에서 찾고 있다. 그리고 이 같은 사고와 전통을 해체 및 극복하는 데서 환경 위기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동물이나 생명체 나아가 자연 자체의 가치를 근본적으로 새롭게 인식하고자 하는 노력들을 경주해왔다. 환경철학, 생태철학은 물론 환경윤리학, 생태윤리학, 자연윤리학 등의 용어들이 이 같은 상황을 대변해준다. 이제 ‘자연’ 자체가 철학의 새로운 ‘화두’로 부상한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자연이라는 주제는 철학적 탐구에서 전적으로 배제되거나 배척받은 적은 없었다. 다만 시대적 관심사에 따라 그 위상을 달리해왔을 뿐이었다.
그렇다면 어떤 점에서 상황이 달라졌는가? 이는 특히 그 바탕에 환경철학을 전제할 수밖에 없는 환경윤리학의 주제와 문제 의식에서 엿볼 수 있다. 이제 우리는 다음과 같은 환경윤리학의 쟁점들을 외면하거나 무시할 수 없게 되었으며, 보다 적극적으로 답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자연은 고유한 도덕적 가치를 갖는가? 아니면 인간만이 그러한가? 인간중심주의적인 전통 윤리는 생태학적 위기에 직면한 오늘날에도 여전히 정당화될 수 있는가? 인간은 인간에 대해서만 존중의 의무가 있는가? 아니면 자연에 대해서도 그러한가? 또 대지, 바다, 숲, 강, 식물, 동물에 대해서도 경외심을 가져야 하는가? 우리는 동물에 고통을 가하는 실험을 중지해야 하는가? 아니면 식용으로 소비하거나 살해해도 괜찮은가? 인간의 이익을 위한 것이라면 강과 바다나 동물과 식물이나 자연 경관을 어떤 식으로 처리하든 상관없는가? 아니면 이들은 고유한 도덕적 가치를 갖기 때문에 그래서는 안 되는가? 또는 자연 자체를 위한 자연 보호만이 허용되어야 하는가?
이전의 서양철학의 지배적 전통 속에서는 단 한 번도 진지하게 자연 또는 자연 속의 생명체들이 고통받고 있다거나 비도덕적인 대우를 받는다거나 하는 문제 의식을 적극적으로 가져본 적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러한 자연윤리학적 물음들에 답할 수 있는 가능성을, 비록 다른 문제 의식 속에서 이루어지긴 했지만, 인간과 자연의 관계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사유했던 독일이상주의, 특히 독일 관념론자들에게서 발견하게 된다.
독일이상주의(Deutscher Idealismus)란 대체로 정신의 보편적인 원리에 따라 이념적 실재를 추구함으로써 낙후된 민족의 현실과 역사의 이성적 발전 그리고 형이상학의 체계적 완결을 지향하는 일련의 사상 체계를 이른다. 특히 주로 인식론, 존재론, 역사철학 등을 중심으로 한 철학적 체계와 방법론을 강조할 경우에는 독일 관념론이라 부른다. 그리고 세계관, 인생관, 윤리 사상, 가치관 등 의식의 태도나 정신 운동의 측면을 광범하게 고려할 경우에는 독일 이상주의라 부르기도 한다. 이러한 경향은 또 문학 예술 방면에서 ‘독일 낭만주의’로 발전했다.
독일 관념론은 크게 보면 피히테(Fichte, J. G.)와 셸링(F. W. J. Schelling), 헤겔(G. W. F. Hegel)에 이르는 사변적 관념론, 훔볼트(K. W. von Humboldt), 슐라이어마하(F. E. D. Schleiermacher)의 휴머니즘적 관념론, 노발리스(F. von H. Novalis) 등에 의한 낭만주의적 마술적 관념론, 프리이스(J. F. Fries), 헤르바르트(J. F. Herbart) 등의 실증주의적 관념론, 쇼펜하우어(A. Schopenhauer)의 비합리주의적 주의주의적 관념론 등을 모두 포함한다. 그러나 관념론은 통례적으로 좁은 의미의 것, 즉 사변적 관념론만을 지칭한다. 관념론의 융성기는 19세기 후반(1980년대)부터 20세기 중반(1930년대)까지의 약 50년 내외며, 학문적 성과의 핵심 노작들의 출현은 19세기의 첫 10년대에 집중되어 있다. 관념론자들의 사고 형성의 근거지가 되었던 예나(Jena)대학은 이 무렵 독일 정신 문화의 중심을 이루었고, 뒷날 피히테, 셸링, 헤겔, 슐라이어마하, 쇼펜하우어 등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또는 동시에 강단에 서면서 사회적 실천쪽에 더욱 골몰했던 신설 베를린(Berlin)대학은 관념론 철학의 야외 실습장 격이었다.
관념론이 19세기 전반기의 가장 유력한 철학 사조로 결집될 수 있었던 것은 오직 공통의 문제 의식과 상황 설정의 동질성 때문이다. 18세기 서구 사회를 지배했던 ‘계몽 사상’은 르네상스 이래의 휴머니즘과 합리주의 그리고 자유주의를 근간으로 하여 인간의 근대적 자기 해방을 고취했으며, 이를 위해 전근대적 신앙 태도나 비과학적 사고 방식에 대한 소위 과학적 의식 개혁, 즉 계몽이 요구되었다. 그러나 계몽 운동의 전개와 함께 점차 합리주의적 실증적 방법론, 자연주의적 경험적 세계관 또는 유물론적 기계론적 세계관 그리고 세속적 쾌락주의나 공리주의적 윤리관 등이 보편화 추세에 들어가는 한편, 그 반작용으로 전래의 ‘형이상학’과 그 존립 가능성에 대한 회의가 더욱 심화되어갔다. 당초 관념론은 계몽주의의 이상과 목표에 전적으로 공감할 뿐 아니라 그 진로에 동참한 바 있으나, 결국 계몽주의가 지닌 자체의 한계, 즉 과학지상주의와 보편적 형식주의 그리고 실증주의적 단순 사고에 의한 ‘근원성의 포기’에까지 이르자, 이에 실망한 나머지 반계몽주의적 경향을 취하게 되었다. 이러한 사상적 갈등은 칸트와 관념론자들 사이에서도 나타났다. 주지하다시피 칸트는 관념론자들의 철학적 사유를 가능하게 했던 원천이었다. 그런 점에서 칸트의 철학에는 독일 관념론과의 동질성과 이질성이 공존하고 있다.
그러나 독일 관념론자들은 대체로 그들 스스로 칸트에게서 미해결의 과제로 남아 있다고 생각했던 문제들, 즉 자연과 자유, 현상과 물 자체, 유한과 무한, 이념과 실재, 이성과 감성, 이론과 실천 등의 조화와 통일을 꾀하고자 했다. 그들은 정도의 차이는 있었지만 칸트철학의 두 중심 축이자 칸트 자신도 충분히 해결하지 못했다고 생각했던 자유 또는 인간과 자연의 통일을 정초하려는 열망을 갖고 있었다. 특히 그들은 이 같은 열망을 철학적 체계 속에 담아내면서 한결같이 칸트가 멈추어 서 있던 경계를 넘어서 직관과 사변(이성)을 통해서 사물의 본질 속에서 신적인 것을 통찰할 수 있다고 생각했으며, 다만 이 신적인 것을 어떻게 규정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만 견해를 달리 했다.
근대의 시작과 더불어 일기 시작한 인간과 자연 그리고 자유에 대한 점증하는 관심은 칸트와 독일 관념론에 이르러 최고점에 도달했다. 오늘날 우리가 목도하고 있는 ‘제2의 르네상스’라 일컬을 만한 자연에 대한 관심을 제외한다면 우리는 역사상 그 어떤 시기도 이들만큼, 비록 인간의 자유가 그들에게는 더 큰 매력이요 관심사요 과제이긴 했지만, 자연에 대한 철학적 사유를 진척시킨 경우도 없었다. 그들은 한결같이 당시 자연과학적 성과들에 대한 충분한 지식과 식견을 갖고 있었으면서도 오늘날의 과학적 세계관을 확립한 당대의 과학적 경향에 완전히 매료당하지도 않았다. 특히 칸트와 헤겔은 자연을 경험적 탐구의 결과에 의존하는 협소한 시각에서만 보려 하지 않고 그 궁극적인 개념적 구조라는 보다 포괄적이고 근원적인 관점에서 보려고 노력했다. 이들의 자연철학은, 비교적으로 말하자면 그 성격상 근대적 의미의 자연과학보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학에 더 가깝다.
필자가 보기에 오늘날의 생태학적 위기에 직면하여 우리의 행위를 인도할 수 있고, 통제할 수 있는 자연윤리학의 정초가 가능하려면, 그 이론적 토대로서의 자연철학 혹은 환경철학은 어떤 방식으로든 다른 생명체들과 그 존재론적 지위에서 구별되는 인간을 매개로 한 것이 아니면 안 된다. 인간과 동물을 포함한 인간 이외의 존재들과의 차별성이 무시되거나 확보되지 않는 자연철학 내지 존재론은 우리에게 인류가 생존을 위해서 분투해왔던 숱한 행위를 조금도 설명해줄 수 없으며, 또 어떻게 오늘날 인류가 직면한 환경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지에 대한 어떠한 구체적 지침도 제시해줄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설사 인간을 수단으로 삼아야 하는 자연의 감추어진 원대한 목표가 있어 인류에게 장차 어떤 희생이나 봉사가 요구된다 하더라도, 그것은 반드시 인간 존재를 매개로 한 것이 아니면 안 될 것이다.
당시에 피히테의 자아 철학과 셸링의 동일 철학은 다같이 칸트의 사상을 일면적으로 계승하고 있으면서도, 또한 무엇보다도 방법론상 오성주의적 분석적 사고의 고착성에 따른 역사적 변화의 상황 무시, 체계상 물 자체 개념의 존재론적 실패와 도덕형이상학적 변질 등과 같은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정신 활동의 모든 역량을 경주했다. 특히 “피히테는 윤리적 종교적 행위의 능동성에 기반하여 인간을 그의 주체적 실재에 정초시키려 했으며, 셸링은 칸트가 거부한 지적 직관에 의거하여 인간을 자연의 창조적 근원에 더욱 근접시키려는 노력을 경주했다.” 그러나 사고와 존재의 원리적 통일과 전체성의 회복을 꾀하는 과정에서 피히테는 극단적인 주관주의로 또 셸링은 추상적 심미적 객관주의로 양극화되기에 이르렀다. 그 결과 피히테는 주체와 객체, 인간과 자연의 객관적 통합을 산출해낼 수 있는 자연철학을 정립하는 데 실패했다. 반면 셸링은 자연에 관한 관심과 통찰에서 헤겔을 능가하는 사변적 자연철학을 개척했다. 그러나 헤겔의 선구자로서 근대적 자연관의 한계를 뛰어넘는 탁월한 안목을 갖고 있었음에도, 셸링은 인간과 자연의 연관성을 넘어서 그 차이를 철저하게 사유하는 데 성공하지 못했다.
필자가 보기에, 인간적 자유의 본질과 근원에 대한 그의 집요한 사유와 추구에도 불구하고, “자아와 대상 세계를 자연이란 동일 지평에서 관조”함으로써 셸링에게서 동일성을 넘어선 인간과 자연의 차이는 점점 시야에서 사라져버리는 결과가 되고 만다. 근원에의 동경이나 충동 그리고 예술적 천재의 지적 직관에 호소하기에 이르는 절대자의 무차별적 동일성 이론에 강하게 작용하고 있는 신비주의와 범신론의 경향이 그러하듯이, 자연과 정신의 동일성을 사유하는 셸링의 자연철학에서 우리는 오늘날 인류가 왜 이런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는지, 또 어떻게 난관을 극복할 것인지 등에 대한 구체적인 지침을 구하기 힘들다. 반면에 피히테와 셸링을 그들 자신의 철학적 사유로 인도한 선구자인 칸트의 철학에는 자연 속에서의 인간의 지위에 대한 치밀한 사유와 또 인간이 자연과 어떻게, 어느 정도 그리고 왜 조화를 이루어야 하는지에 대한 방도가 예시되어 있다. 그리고 헤겔 역시 인간과 자연의 불화의 불가피성과 함께 정신으로서의 인간을 매개로 한 자연과의 화해를 강조하고 있다.
심층생태론(deep ecology)을 필두로 한 일련의 생태주의자들이 서구적 합리성과 인간과 자연을 대립적으로 파악하는 이원적 세계관을 환경 위기의 원인으로 주목하고 있지만, 어떤 방식으로든 인간과 자연의 차별성을 고려하지 않는 방식은 원칙적으로 설득력을 갖기 어렵다. 그런데 이 점에서 칸트와 헤겔은 이 두 가지를 모두 갖추고 있다. 왜냐 하면 “칸트의 선험철학과 헤겔의 사변철학은 인간이 합리성의 한계를 인식하면서 동시에 합리적으로 세계를 이해할 수 있는 탁월한 두 가지 대안들이기 때문이다.” 이 글은 바로 이러한 인간의 차별성과 합리성의 한계를 간파하면서 자연과의 대화를 시도하고 있는 칸트와 헤겔의 자연 개념을 살펴봄으로써 자연윤리학의 정초가능성을 모색해보려는 데 그 목적이 있다.
2.칸트의 선험적 자연철학
1)칸트철학에서 자연 개념의 변천사
칸트는 과연 자연에 대해서 확고하면서도 분명한 하나의 일관된 생각을 갖고 있었을까? 아마 이에 대한 대답을 칸트 자신으로부터 직접 듣기는 힘들 것 같다. 왜냐 하면 이성의 한계 안에서 고찰된 자연 개념에는 이성 자신의 능력 너머에 위치하고 있는 자연의 고유한 모습이 항상 미지의 영역처럼 남아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이런 제약으로 인해 칸트의 철학 안에는 그 각각에서는 분명한 듯해도 서로간에는 상당한 편차가 있어보이는 세 가지 자연 개념이 가로놓여 있다. 칸트가 이성의 한계 안에서 우리에게 제시해주고 있는 자연 개념은 자연과학적 자연, 도덕적이성적 존재자의 예지적 자연, 역사적․합목적적 자연 세 가지다. 이는 순수이성비판, 실천이성비판, 판단력비판에서 주제적으로 다루어지고 있는 자연 개념에 각각 대응한다. 특히 처음 두 가지는 이론 이성과 실천 이성에 의해서 제각기 파악된 자연이다. 즉, 브루노와 스피노자 및 라이프니츠의 소산적 자연과 능산적 자연에 기인된 사상이라 볼 수 있는 현상체와 가상체 혹은 감성적 기체와 초감성적 기체, 단적으로 감성적 자연과 초감성적 자연이 그것이다. 그러나 이 서로 분리되어 있는 자연은 그 자체로는 불완전한 것들이다. 왜냐 하면 자연과학적 자연은 현상으로서의 자연이므로 이미 그 기저에 세계(물) 그 자체로서의 자연을 전제하고 있으며, 또한 이성적 도덕적 존재자의 자유 또한 오직 현상 중에서만 실현될 수 있으며 또 실현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떻게든 이 둘은 하나로 통일되지 않으면 안 된다. 바로 이 양자를 통일시켜주는 매개가 되는 것이 세 번째 확장된 의미에서의 자연 개념이다.
칸트가 이러한 제3의 자연 개념에 도달하게 되는 실마리는 그의 유기체에 대한 사고다. 엄밀한 의미에서 본다면, 넓은 의미의 자연 개념 중에 예지적 자연은 자연이라기보다는 자유라 불러야 한다는 점에서 칸트의 자연 개념은 이를 제외한 한정적 의미만 갖는 기계적 자연과 확장적 의미를 갖는 합목적적 자연 두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다만 문제가 되는 것은 예지적 자연으로서의 자유와 물 자체로서의 자연 자체의 근원적 동일성에 관한 칸트의 분명한 사고가 무엇인지 여부다. 우리는 이런 문제들에 대한 해명을 통해서 비로소 칸트의 자연관의 본령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우선 자신의 철학적 목표의 대강을 시적인 표현으로 웅변하고 있는 다음과 같은 칸트의 말에 귀기울여 보자.
내가 두 가지 사물을 거듭 또 오랫동안 생각하면 할수록 그것은 더욱 새롭고 더욱 드높아지는 감탄과 경이로 나의 마음을 가득히 채워놓는다. 이 두 가지 사물이란 내 머리 위의 반짝이는 하늘과 내 마음속의 도덕 법칙이다.
이 구절에서 알 수 있듯이 칸트는 하늘(자연)과 도덕 법칙을 ‘나’라는 인간을 중심으로 이해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칸트의 철학은 인간 자체를 중심으로 하여 양극으로 뻗어나가는 대칭적 구조의 건축술적 체계를 이루고 있다. 여기서 비가시적인 예지적 자아를 통해 도덕 법칙으로 나아간다. 그리고 이때의 예지적 자아의 실재성은 도덕 법칙을 통해 우리에게 알려진다. 반면에 『순수이성비판』에서 보여주고 있듯이 선험적 자연 이해는 가시적인 감성적 경험적 자아를 통해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에, 수학적 정밀성을 모범으로 하는 과학적 인식은 감성적 직관의 상관 영역에 한정될 수밖에 없었으며, 따라서 이러한 한계에서 정립된 자연 개념은 엄밀한 의미에서 자연 그 자체에 대한 이해에는 이르지 못한다. 즉, 자연의 입법자로서의 인간(오성)에 의해 규정된 자연에 불과하다. 이 같은 자연 이해의 한계를 극복하려는 노력은 『판단력 비판』을 통해 칸트 자신에 의해 수행된다. 그러나 이런 시도는 무엇보다도 다양한 자연 현상들 중에 오성적 인식으로 포착되지 않는 나머지 현상들을 포함한 총체적 규정의 일환에서 기인하는 것이지 자연 그 자체에 대한 근본적 이해를 위한 것은 아니라는 것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이를 염두에 두고서 자연 개념의 변모 과정을 좀더 추적해보자.
칸트철학의 근본 원리이자 궁극 목표는 아니었지만, 칸트가 자신의 지적 성장의 전과정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지속적으로 관심을 갖고 숙고를 거듭한 주제가 바로 자연철학(자연형이상학)이었다. 18세기 중엽의 독일철학의 일반적 경향에 따라서 1746년 칸트의 최초의 발표 논문인 「활력의 참된 측정에 관한 견해들」로부터 시작해서 그 이후에 계속 이어진 저술들의 테마도 자연철학에 관한 것들이었다.
이 시기의 칸트는 자연형이상학을 경험적 물리학과 구분함으로써 여전히 자연 현상의 근원적 원리와 기초를 확립하고자 하는 열망을 내비치고 있다. 관찰을 통해 물체의 운동의 법칙 등 자연의 기계적 법칙을 탐구하는 경험적 물리학과 달리 자연형이상학은 이성에 의해서 물체 운동의 내부 힘의 법칙과 같은 자연의 동력학적 법칙을 탐구하는 데 열중했다. 종래의 형이상학이 확고한 토대를 갖추지 못한 것에 대한 불만을 토로함으로써 자신의 목표가 무엇인지 강조하던 태도는 보편적 자연사를 포함한 이후의 일련의 저술에서도 한동안 그대로 유지된다. 특히 『보편적 자연사』와 같은 해인 1755년에 발표된 『형이상학적 인식의 제1원칙들에 대한 새로운 해명』에는 자연형이상학의 확고한 토대를 마련하고자 했던 칸트의 관심이 가장 잘 나타나 있다. 다시 말해서 비판철학을 상징하는 별칭이기도 한 칸트 사고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회” 또는 “선험적 전회”는 물론, 이에 앞서 “1760년대의 혁명”이라 일컬을 “루소적 전회(Rousseauian turn)”의 국면이 감지되던 시기 이전까지 칸트의 주된 관심은 자연 현상의 근거를 물체의 내부적 힘 개념에 대한 고찰을 통해 설명해내려는 데 집중되어 있다. 이는 곧 자연에 대한 실재론적 태도를 견지하면서 자연의 본질에 대한 규정을 시도하는 것이며, 또 칸트가 라이프니츠를 따라 그러한 가능성을 믿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 시기의 칸트가 독단적 형이상학자였다는 것은 아니다. 비록 칸트가 라이프니츠의 추종자로서 자연 현상과 자연 운동의 내부에서 작용하는 힘의 실체를 파악하려 시도했지만, 이는 무엇보다도 당시의 경건주의 자연철학의 신비주의를 물리치고, 수학적 방법에 의거한 데카르트적 물리학의 기계론의 한계를 지적함으로써 자연 현상에 대한 설명을 보다 완전하게 하려고 한 것이었다. 이런 점은 칸트가 라이프니츠와 데카르트학파간의 쟁점은 “사실 자체의 문제가 아닌 인식 방식에 관한 문제에 지나지 않는다”고 중재함으로써 쌍방간의 결실을 모두 인정하고 있는 데서도 엿볼 수 있다. 그러나 자연에 대한 데카르트식의 수학적 접근법과 라이프니츠식의 형이상학적 접근법의 역할을 모두 인정한 것은 오히려 칸트가 보편적인 기계적 법칙에 따라 작용하는 자연 내부의 고유한 힘은 수학적 접근만으로는 완전한 해명에 이를 수 없다는 것을 지적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시기의 칸트는 유기체든 비유기체든 기본적으로 기계론에 의거하여 일체의 자연 현상을 설명하려는 태도를 견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칸트는 기계적 법칙을 단순한 기계적 작용이 아니라 사물들의 내부적 힘들의 작동에 근거하여 이해하고 있다. 때문에 칸트는 자연의 역사를 자연의 내면적 법칙에 따라 발생․소멸하는 과정으로 설명하기도 한다. 신의 존재와 자연 법칙의 양립 가능성에 대한 관심을 보여주고 있는 보편적 자연사에서 칸트는 자연을 뉴턴처럼 “신의 직접적인 손”, “신의 직접적인 의지의 통솔” 또는 “신의 선택”에 의해서 조정되고 간섭받고 지배되는 그런 존재가 아니라 자연 자체의 자족적인 운동 법칙에 따라서 움직이는 하나의 거대한 건축물로 이해한다. 이러한 자연 법칙의 필연성이 곧 물질에 내재되어 있는 힘을 움직이고 지배하는 원리로 파악되고 있다. 그리고 신을 바로 기계론적 운동 법칙 및 이에 따라서 스스로 발전해가는 물질을 창조한 자로 상정함으로써 신 존재와 자연 법칙의 양립 가능성을 옹호하고 있다. 그러므로 자연 개념을 오성의 입법 능력 밑에 두게 되는 『순수이성비판』의 세례를 받지 않은 이러한 자연 개념에는 자연 사물들이 갖는 내재적 힘들이 자연 법칙이라는 자족적인 원리에 따라서 지배되는 “끊임없는 창조와 우주적 진보”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어떤 점에서 비유기체보다도 유기체가 갖는 특성이 오히려 이에 더 부합한다. 왜냐 하면 칸트가 이해하는 유기체는 단지 움직이는 힘만을 갖는 것이 아니라 자신 속에 물질을 유기화하는 힘, 즉 자신을 번식시키고 형성하는 힘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칸트의 자연 이해 방식과 관련하여 무엇보다도 주목해야 할 것은 자연에 대한 최초의 확정적인 개념 규정이 등장하는 『순수이성비판』에서의 입장과 비교할 때, 전비판기, 특히 1740년대 중반부터 1750년대 중반까지 칸트가 견지하고 있던 자연에 대한 그의 사고의 가장 중요한 측면은 순수이성비판은 물론이고 그의 말년에까지 완전히 사라지지 않고 보존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다름 아닌 자연은 그에 대한 체계적 인식 이상의 것이라는 생각이다. 선험철학적 토대 위에서 그리고 인간 이성의 한계에서 발견하고 또 근거 짓고자 했음에도 불구하고 칸트에게 자연은 항상 그 이상의 무엇이었다.
자연 개념을 이성의 한계 안에서 근거 짓고자 한 순수이성비판에서의 칸트는 유기체를 포함한 자연의 모든 사물들은 선험적 관념론에 입각하여 이해된 합법칙성으로서의 기계론적 법칙에 따른다고 말하고 있다. 따라서 이러한 대전제에 의하면, 유기적 자연에 대한 어떠한 설명도 기계론과 상호 모순되어서는 안 된다. 그런데 문제는 유기체가 보여주는 합목적적 특성은 이에 대한 기계론적 설명만으로는 만족스럽지 못하다는 데에 있다. 즉, 생명 현상은 비유기체와 판이한 특성을 갖고 있으며, 또 인간이 이러한 유기체들 내부에서 일어나는 복잡한 기계적 관계를 통찰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유기체에 대한 논의를 전개하는 『판단력 비판』에서의 칸트의 시각은 간접적으로 그의 생물학적 지식에 의존한다. 심지어 『순수이성비판』의 핵심적 논의에 해당하는 ‘직관과 개념의 종합이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하는 문제에서도 이러한 유기체에 대한 그의 기본 시각이 전제되어 있다. 이 문제를 칸트는 인식의 두 이질적인 형식이 선험적 구상력의 매개를 통해 실제적인 결합을 가능케 한다는 설명을 통해 해결한다. 칸트에 의하면 “구상력은 지적 종합의 통일성을 위해 오성에 의존하고, 그 각자의 다양성을 위해 감성에 의존한다.” 그러면서도 이 구상력은 양자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심성의 독립적인 근본 능력이다. 구상력을 통해서 감성과 오성이 서로 동화되어감으로써 소위 종합이 이루어진다고 볼 수 있다. 바로 이런 일이 가능한 것도 이성 자신의 유기적 성격에 기인한다. 칸트는 이성의 이런 성격을 “순수 이성의 후생(後生. Epigenesis) 체계”라 부른다. 오성의 범주가 모든 경험 일반의 가능성의 근거를 가지고 있는 것도 이성의 이러한 성격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유기체가 갖는 독특한 지위에 대한 물음은 이미 17세기의 기계론적 체계 안에서 제시되고 있었다. 더욱이 생물학의 역사는 생명체를 물리적-화학적 과정으로 환원하려는 입장(기계론 또는 환원주의)과 여러 가지 이유에서 그러한 환원을 불가능한 것으로 보려는 입장(물활론, 생기론, 신생기론, 전체론 등) 양자의 원칙적인 갈등을 조정․중재하려고 시도한 역사이기도 하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18세기의 칸트 역시 이러한 배경과 전망 아래에서 유기체에 대한 입장들 사이를 중재하려는 하나의 해결책을 『판단력 비판』에서 제시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칸트가 『순수이성비판』에서 분명하게 정립한 형식적 자연 개념은 유기적 존재나 창조적 존재가 아니라 인식론적 관심에서 출발한 현상의 합법칙성 자체와 관계한다. 여기서 자연은 물 자체가 아닌 현상에 대한 오성적 규정에 의해 파악된 감성적 자연이며, 이는 인과 법칙의 지배를 받게 된다. 그러나 『실천이성비판』에서 자연을 이성만이 인식하는 초감성적 자연으로서의 “원형적 자연(die urbildliche Natur;natura archetypa)”과 원형적 자연을 의지의 규정 근거로 삼았을 때 나타날 가능한 결과인 감성적 자연으로서의 “모형적 자연(die nachgebildete Natur;natura ectypa)”으로 구분하는 지점에 이르게 되면, 자연은 기계적 법칙만의 지배를 받는 존재가 아니라 기계론적 설명으로는 불충분한 목적적 자연이 된다. 이러한 자연 설명에 적합한 목적론은 사물의 생성 변화나 질서를 목적의 실현이라는 관점에서 고찰하는 방식이므로 사물을 단지 맹목적인 원인과 결과의 연결에 의해 설명하는 기계론과 대립된다. 또한 한편으로 유기체를 포함한 자연을 기계론적 원리와 목적론적 원리로 설명하는 것은 다 같이 반성적 원리들이다. 기계론적 원리는 보편적인 인과성의 법칙으로부터 도출된다. 이 인과성의 법칙은 오성의 산물이다. 이 때문에 모든 실질적인 경험에 앞서서 우리는 자연 속의 모든 사건은 기계적 원인에 의해서 결정된다고 인식한다. 따라서 기계론적 원리는 경험적 사실과 관계하는 오성이 주관한다. 반면에 목적론적 원리는 경험적인 사실과는 직접적으로 관계하지 않는 이성이 주관한다. 이는 곧 칸트의 목적론은 유기체를 포함한 생물학적 사실에 관계하는 것이 아니라 생물학에 대한 하나의 설명 원리라는 것을 의미한다.
칸트는 이처럼 자연 사물들 중에서 기계적 법칙에 의해서는 설명이 불충분한 유기체의 문제를 바로 목적의 개념을 자연에 투입함으로써 해결한다. 물론 유기체 자체가 실제로 자연 목적을 갖느냐 하는 것은 인간의 인식 능력을 초월한 것으로서 불가능한 일이다. 따라서 칸트의 목적론은 과학적 인식이 아니며, 당연히 이성의 규제적 원리로서만 의미를 갖는다. 이처럼 유기체에 대한 설명에 라이프니츠의 조화(Harmonie) 개념에 비견되는 합목적성 개념을 적용한다는 것은 곧 칸트가 “유기체의 설명에 대한 과학적 탐구로부터 과학 이론적 분석으로의 전향”을 통하여 이 문제에 접근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다시 말해 칸트가 순수이성비판에서 일차적으로 정립한 자연 개념은 오성적 자연이다. 즉, 오성에 의해서 구성된 자연이요 따라서 과학의 대상으로서의 자연이다. 이러한 자연은 기계적인 법칙에 따라 작용하는 세계로서 인과 법칙적 필연성의 지배를 받는다. 그러나 동시에 칸트에 의하면, 이러한 오성적 자연으로는 자연의 모든 사물과 그 산물들에 대한 총체적인 조망에는 도달할 수가 없다. 이 때문에 자연에 대한 포괄적이고 확장된 개념이 『판단력 비판』을 중심으로 해서 마련된 것이다. 이것은 목적론의 문제가 반성적 판단력의 문제와 관련하여 제기되는 시점과 일치한다. 그러나 이 같은 자연 개념의 확장은 이미 『도덕형이상학 정초』에서 예시되어 있으며, 『판단력 비판』을 통해서 체계적인 해명이 이루어지고 있다. 동시에 이는 칸트철학 체계의 대단원에 속하는 자연과 자유의 통일의 근거를 발견하려는 시도와 맞물려 있다.
2)인간의 궁극 목적과 자연의 최종 목적
이상의 고찰을 요약하면, 생물학적 합목적성까지도 포괄하는 확장된 자연은 단순히 오성 개념(Begriff)으로서의 자연을 넘어서 이성의 이념(Idee)으로까지 고양되고 있다. 이 같은 변화는 칸트의 자연철학의 면모를 이해하는 중요한 관건이 된다. 왜냐 하면 다름 아닌 이 대목에서 우리는 칸트철학에서의 인간과 자연의 연관성과 차이, 그리고 자연과 역사에서의 인간의 지위와 역할이 무엇인지를 읽어낼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실마리를 이끌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칸트에 의하면 인간은 이성적, 자율적, 도덕적 존재며, 이는 자연의 여타의 존재자들과 근본적으로 구별되는 징표다. 그리고 인간은 또한 자연의 최종 목적(letzter Zweck)이자 역사의 궁극 목적(Endzweck)이라는 점에서 다른 자연 존재자들과도 확연히 구별된다. 그런데 우리는 이러한 구별이 인간과 자연 자체의 차이가 아니라 인간과 여타의 자연 산물들과의 차이임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칸트는 근본적으로 기계론적 자연관처럼 자연을 일면적으로 규정하는 태도를 경계한다.
그렇다면 인간만이 자연의 최종 목적이요 또 궁극 목적일 수 있으며, 또 인간이 자기 스스로를 이렇게 규정할 수 있는 정당성은 무엇인가? 칸트는 이를 옹호하는 몇 가지 논증 방식을 제시하고 있다. 먼저 가장 강력하게 옹호되고 있는 방식은 『실천이성비판』에서 등장하는 인간이 도덕적(이성적) 존재자라는, 오직 그 때문에 인간이 인간일 수 있다는 사실에 의존한다. 이 근거는 달리 정당화될 수 없는 “이성의 사실(Faktum der Vernunft)”, 즉 우리 자신에게 직접적으로 통찰되는 사실이다. 칸트에게서 인간에게 이성이 부여되어 있다는 것은 곧 인간에게 도덕성이 선천적으로 부여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인간의 선의지(도덕성)는 그 실현을 요구하는 실천 이성의 고유하고 본래적인 관심에 기초하여 인간을 근본적으로 규정짓는 특징이다. 그것은 동시에 인간의 목적을 근거 짓는 행위의 원리이자 목적 자체다. 이러한 자기 정당성을 옹호하는 도덕적 필연성 논증 방식과는 달리 『판단력 비판』에서 뿐만 아니라 이에 앞서 『도덕형이상학 정초』와 『순수이성비판』에서는 이성 내지는 도덕성이 인간에게 주어진 이유는 자연이 의도한 그 자체의 고유한 목적이 있기 때문이라는 논증에 의거한 우회적인 시도가 이루어진다.
그러면 우회적인 방식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가? 그것은 인간이 궁극 목적이 되기 위하여 스스로 해야만 하는 일을 준비시키도록 자연이 어떠한 일을 수행할 수 있는가를 탐구해야 하며, 그것을 우리가 오로지 자연에게만 기대할 수 있는 일들에서 기인하는 가능한 일체의 목적들로부터 분리하는 방식이다. 이는 곧 자연에 의존해서만 시종 가능한 일과―그 근본 소질을 자연이 부여했다는 점에서는 자연에 의존하고 있다 해도― 인간이 자력으로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을 구분하여 후자만이 자연의 최종 목적으로서 인간에게 부여된 궁극 목적임을 논증하는 방식이다. 이를 입증하기 위해서 칸트는 『판단력 비판』에서 “인간의 행복”과 “인간의 문화”라는 두 가지 목적을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다.
그러나 칸트에게서 행복은 항상 자연적 경향성(본성)의 만족과 관계한다. 그리고 이러한 “인간의 자연적 본성은 소유와 향락에서는 어디에선가 멈추어서 만족하도록 되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행복은 인간에 의해서는 결코 명령되지도 도달되지도 않는 것이다. 더욱이 자연은 인간에게 다른 동물들보다 더 큰 은혜를 베풀어준 것도 아니며, 그들과 마찬가지로 보호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자기 고뇌나 인류 파멸에까지 몰아넣는 자연적 소질마저 부여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외부의 자연이 아무리 자비롭다 할지라도 그리고 자연의 목적이 우리 인류의 행복에 향해 있어 은혜로운 자연에 의해서 설사 만족을 얻을 수 있다 하더라도―만일 그렇다면 한 존재자가 행복이라는 목적을 수행하기 위해서 이성과 의지를 소유하고 발휘하도록 계획되었다는 것은 자연이 그 준비 면에서 대단히 서툴렀다는 얘기가 된다―우리의 내부의 자연적 본성이 이러한 자비로운 자연을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에, 자연의 목적은 지상에서의 자연의 체계 안에서는 달성되지 못한다. 이럴 경우 인간은 언제나 자연 목적의 연쇄 중의 한 항에 불과하게 된다.
그런데 인간은 다른 목적에 더 이상 의존하지 않는 궁극 목적으로서의 규정 근거를 스스로 갖고 있다. 이 경우에 인간은 “자연과 자기 자신 사이에 하나의 목적 관계를 부여할 줄도 알고 또 그럴 의지도 갖고 있다는 조건 하에서만” 여러 가지 목적들에 관한 원리면서 동시에 다른 항들의 메커니즘에서 그 합목적성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서는 자연의 최종 목적일 수 있다. 이러한 자기 목적성, 자기 규정 근거의 소유자는 인간의 이성이요 도덕성이어야 한다. 자연에 대해서는 단적으로 무조건적 원리요, 우리의 행위를 규정하는 초감성적 원리요, 목적들의 서열에서 유일한 가능 원리인 도덕성과 이 도덕성에 종속되는 인과성, 즉 목적에 따르는 인과성은 자연 원인에 의해서는 절대로 불가능하다. 따라서 “목적 관계에서는 자기 자신에게 지고한 법칙일 수 있는 그와 같은 이성의 현존만이 세계의 현 존재의 궁극 목적이라고 생각될 수 있다. 이러한 조건을 갖추고 있기 때문에 인간은 더 이상 다른 것에 종속하지 않는 자연의 최종 목적이 된다.
이어서 칸트는 더욱 중요한 또 하나의 가능성을 인간의 문화에서 찾는다. 칸트가 말하는 인간의 문화는 인간이 자신 속에 갖고 있는 “자연을 (외적으로도 내적으로도) 사용할 수 있는 온갖 목적에 대한 유능성(Tauglichkeit)과 숙련성(Geschicklichkeit)”에 의해 산출되는 자연의 목적을 의미한다. 여기서 숙련성을 칸트는 유능성의 가장 중요한 조건으로 보기도 하므로 인간의 문화란 곧 자유로운 이성적 존재자로서의 인간의 유능성의 발휘를 뜻한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유능성이란 “자기 스스로 목적을 세우고 또 (자기의 목적 규정에서는 자연에 의존하지 않고) 자연을 자기의 자유로운 목적 일반의 준칙에 알맞도록 수단으로 사용하는” 능력과 소질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칸트는 자연이 그런 유능성을 인간에게 부여했다는 점에서, 인간으로 하여금 “자연이 자연의 밖에 있는 궁극 목적에 관하여 수행할 수 있는 일이며, 따라서 이것이 자연의 최종 목적으로 간주될 수 있다. ……그러므로 문화만이 인류에 관한 한 자연에 귀속시켜야 할 이유가 있는 최종 목적일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칸트는 여기서 더 나아가 그렇다고 모든 문화가 자연의 최종 목적이 되기에 충분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칸트에 따르면, 문화에는 진보의 단계들이 존재한다. 목적의 촉진과 달성을 위한 유능성의 가장 중요한 주관적 조건인 숙련성의 도야 그리고 이 목적 달성을 위해서는 유능성에 본질적으로 포함되어야 할 목적의 규정과 선택의 조건인 훈육(Zucht) 또는 훈련(Disziplin)의 도야가 있을 수 있으나, 이것은 그 기능상 소극적인 것이며, 의지를 욕망의 지배로부터 해방하는 데에 그 본질이 있다. 즉, 이러한 단계는 단지 어떤 자연물에 집착하여 충동의 질곡에 몸을 내맡기게 하는 욕망 때문에 인간이 스스로 선택을 할 수 없는 상태에서 벗어나게 하는 역할만을 한다. 물론 칸트는 이 같은 욕망과 충동이 갖는 긍정적인 기능을 인정한다. 왜냐 하면 인간의 내부의 동물성이 맡고 있는 역할을 등한히 하거나 훼손하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하여 자연이 우리에게 부여한 고삐 같은 것이며, 또 이러한 동물성이나 경향성의 상호 충돌이나 갈등으로부터, 마치 자연(이성)의 간계처럼 인간이 자신을 무의도적으로 발전시키게 만드는 계기가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욕망과 충동의 합리적 조정을 통하여 이성의 목적이 요구하는 데에 따르는 문화의 진보의 최종 단계는 더 이상 자연 안에서 발견되는 그런 것의 촉진과 실현이 아니며, 따라서 최종 목적도 더욱이 궁극 목적도 아니다. 왜냐 하면 궁극 목적은 무조건적 목적이며, 이는 곧 자연이 충분히 실현할 수 있고 그 이념에 따라 산출할 수 있는 목적이 아니기 때문에, 그리고 그 어떤 것도 그것의 규정 근거가 자연 속에서 발견되는 것이면 그 규정 근거는 언제나 다시 제약되어 있는 법이요, 자연 (감각적 존재자로서의) 가운데에는 그렇지 않은 것이란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최고의 목적 그 자체를 자신 속에 가지고 있어서, 가능한 한 이 최고의 목적에 전 자연을 예속시킬 수 있으며, 적어도 이 최고의 목적에 반해서는 자연의 어떠한 영향에도 복종해서는 안 되며, 의존적 존재자들이 세계 안의 사물의 상호 의존적․종속적인 목적들의 연쇄를 완결시킬 수 있는, 이상의 조건에 부합하는 자가 바로 “가상체(Noumenon)로서 고찰된 인간”, “도덕적 존재자로서의 인간”, “도덕성의 주체로서의 인간”이다.
칸트는 창조의 궁극 목적을 “세계의 성질, 즉 우리가 오직 [도덕] 법칙에 따라서만 명확하게 지시할 수 있는 것에 합치하는, 다시 말하면 우리의 순수 실천 이성의 궁극 목적[최고선]에 합치하는, 그것도 이성이 실천적인 한에서 합치하는 성질이다”고 정의한다. 한마디로 도덕적 근거에서만 창조의 궁극 목적에 대해서 말할 수가 있다는 것이다. 동시에 자연의 최종 목적으로서의 “도덕 법칙 아래에 있는 인간”, 즉 “모든 이성적 세계 존재자”로서의 도덕적 존재자만이 창조의 궁극 목적일 수 있는 것이다. 결국 인간의 도덕적 본질에 근거를 둔 자연의 최종 목적과 실천 이성의 궁극 목적은 창조의 궁극 목적에서 일치한다.
3)인간(도덕성)과 자연
선험철학적 지평에서 정초된 칸트의 자연관은 인간중심주의에 기초해 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서 칸트에게 자연은 알 수 있는 그 무엇이면서 동시에 알 수 없는 그 무엇이다. 즉, 대상화된 현상이자 인식 대상으로 우리와 마주하고 있는 자연이면서 또 인간의 사유를 넘어선 대상화될 수 없는 자연이기도 하다. 칸트는 알 수 있는 길로부터 시작해서 알 수 없는 길로 나아가는 방도를 선택했다. 이 두 길이 한 길에서 만날 수 있는 연결점을 인간의 도덕성과 자유에서 찾았다. 이는 곧 인간만이 목적이요, 인간 이외의 것들은 수단적 가치만을 갖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러한 표현은 상당한 주의를 요한다. 목적적 가치를 갖는 것은 인간 자체가 아니라 인격, 정확히는 인격성이요 도덕성이다. 또 수단적 가치만을 갖는 것은 자연 자체가 아니라 생명체들을 포함한 자연의 산물들이다. 나아가 인간의 도덕화를 위해서는 때로는 자연의 생명체들은 단순한 수단적, 도구적 가치 이상의 존재로서 격상되기도 한다. 왜 그런가?
칸트에게서 자연이란 한편으로는 인간의 이성을 수단으로 하여 최고선을 향해 점진적으로 자신의 의도를 달성해가는 과정이요, 다른 한편으로는 “플라톤의 에로스에 버금가는” 인간 이성이 자연과 투쟁하고 조화를 이루면서 자신의 욕구를 실현해가는 과정이다. 따라서 역사적 맥락에서 사용되고 있는 칸트의 자연 개념은 카울바하가 지적하고 있듯이 두 가지 분명히 구분되는 의미를 갖는다고 할 수 있다. 기계론적 인과성의 지배를 받는 오성적 역사로서의 자연 개념과 목적론적 인과성의 지배를 받는 이성적 역사로서의 자연 개념이 그것이다. 이는 동일한 하나의 대상을 언급하는 상이한 방식에 불과한 것으로서 도덕적 목적론에 의해서 하나로 연계되어 있으면서도 오성적 역사관이 이성적 역사관에 종속하는 구조를 갖는다. 이러한 의미의 자연은 인간의 자유를 제한하는 역할과 그 자유를 실현해가는 역할을 동시에 수행한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인간 자신의 도덕적 자유가 실현되어간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칸트는 실제로 자연을 때로는 역사의 의미와 동일시하기도 하고, 또 역사 속에서 작용하는 신의 섭리라는 의미까지도 부여한다. 이러한 의미의 자연은 심지어 “도덕이요 문화요 역사”라고까지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역사를 인간의 자연적 욕구를 실현해가는 과정으로만 보면 자연의 산물들은 이를 위한 수단적 가치만을 갖는다. 그러나 도덕적 인간 이성의 궁극적이자 최종적인 목적이 도덕적 문화의 성취에 있게 되면, 자연의 산물들은 간접적이며 소극적이긴 해도 도덕적 고려의 대상으로 격상된다. 칸트는 심지어 그것을 자연이 인간에 이성을 부여한 이유이자 목적으로까지 해석한다. 그리고 자율적 이성은 이러한 목적을 스스로 성취해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 점에서 칸트에게서 역사는 한편으로는 원초적 자연으로서의 신의 섭리의 작용사며, 다른 한편으로는 단순히 섭리만의 작용사가 아니라 동시에 그것은 인간의 자유가 도덕과 문화 나아가 자연과 상호 작용하는 가운데 점진적으로 자연의 합목적성과 조화를 이루어가는 과정이 된다. 그러므로 역사의 목적은 “도덕으로부터 생기며”, 이러한 도덕적 목적은 “실천 이성이 자신의 도덕성에 기초하여 상정하는 하나의 이념이며, 역사의 진보는 자연의 숨겨진 계획에서만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실천 이성의 의식적 노력에서 기인하기도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칸트의 관점에서 볼 때, 자연은 도덕적 측면에서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가? 기본적으로 칸트의 인간중심주의적 자연관에 따를 경우, 우리가 자연 속에서 마주치는 생명체를 포함한 사물들은 수단으로서의 상대적 가치만을 갖는, 즉 전혀 도덕적 고려의 대상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가 칸트의 논리를 따라 “자연”과 “자연 산물”을 구분하게 되면 사정은 달라진다. 인간의 도덕화가 자연의 최종 목적이자 역사의 궁극 목적이며, 그에 따른 인간의 의무를 고려할 때 가치 중립적인 자연 산물들은 인간적 관점에서는 단순한 수단이나 도구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도덕적 가치도 함께 갖는다. 비록 고려의 정도가 소극적이고 간접적일지라도, 칸트는 자연 사물들이 인간의 도덕적 행위와 깊은 관련이 있음에 주목하고 있다. 칸트에 의하면, 생명이 없는 아름다운 수정이나 식물계 등을 파괴하려는 성향은 “도덕성을 촉진하는 감성”에 나쁜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인간의 자기 자신에 대한 의무에 위배된다.” 또 이성을 갖지 않은 동물일지라도 그들을 난폭하고 잔인하게 다루는 것은 “도덕성에 도움을 주는 자연적 소질을 약화시켜 차츰 사라지게 하기 때문에” 그 같은 행위를 삼가야 할 의무는 “인간의 자기 자신에 대한 의무에 보다 더 근접해 있다.” 이러한 이유에서 칸트는 “동물이 고통을 느끼지 않도록 신속하게 죽이는 것”, “동물에게 그 능력을 넘어서지 않는 범위에서 일을 시키는 것” 등을 인간의 권한이라는 관점에서, 그리고 “목적 성취를 위한 다른 방도가 없는 불가피한 경우가 아니라면 동물에 대한 가혹한 생체 실험은 피해야 한다”, “오랫동안 마치 한 가족처럼 헌신해왔던 늙은 말이나 개에 대한 감사는 간접적으로 인간의 의무다”, “동물과 관련한 감사는 직접적으로 언제나 인간의 자기 자신에 대한 의무다” 등을 인간의 의무라는 관점에서 강조하고 있다.
물론 이런 요구들은 “도덕적 의무”에 부여했던 “행위의 필연성”과 동일한 자격을 갖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인간을 위한 자연(산물)과의 관계에서 요구되는 의무일 뿐이다. 심지어 칸트는 아름다운 것들과 아름답지 않는 것들, 인간에게 중요한 동물들과 그렇지 않은 동물들을 차별적으로 대우하는 것을 허용함으로써 역으로 자연 생명체들의 가치를 상대화시키는 것뿐만 아니라 그 기준의 임의성으로 말미암아 어떤 행위도 정당화될 수 있는 논리적 약점을 안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생태학적 위기를 경험해보지 못한 칸트에게 모든 문제에 대한 만족할 만한 답변을 기대할 수는 없다. 분명 자연에 대한 칸트의 윤리적 관점은 인간의 욕구 충족을 위한 수단적 가치만을 자연에 허용하는 인간중심주의적 환경 윤리와는 다르다. 근본적으로 칸트의 자연 개념에는 과학적 자연관을 넘어서 인류의 도덕화를 위한 형이상학적 의미가 담겨 있다. 자연에 대해서 인간이 저지른 행위는 인간 자신의 도덕성에 나쁜 영향을 미치고 결과적으로 자연의 피조물로서 인간의 사명을 거역하는 것이며, 이는 결국 자연의 황폐화는 곧 인간성의 황폐화를 초래하게 될 것이라는 칸트적 경고에 다름 아니다.
3.헤겔의 사변적 자연철학
1)자연학적 자연 개념
자연이란 무엇인가? 이에 대한 헤겔의 답변은 무엇일까? 과연 헤겔은 분명한 답을 제시하고 있는가? 헤겔이 자연을 주제로 삼고 있는 글들은 예나 시대에 씌어진 몇몇 단편들을 포함하여 『정신현상학』의 「이성」 부분의 “자연의 고찰”과 그의 전철학 체계를 집대성해놓은 『엔치클로패디』 제2부 「자연철학」 등이다. 특히 헤겔의 자연 개념은 『엔치클로패디』의 제2부 「자연철학」에 체계적으로 기술되어 있다. 헤겔철학의 다른 주제들과 달리 그의 자연철학은 역사적으로 엥겔스의 자연변증법의 영향 아래서 주목받은 경우를 제외하면 “헤겔철학의 서자”로 평가절하될 만큼 상당히 소홀하게 취급받아왔다.
그러나 헤겔은 오히려 자신의 특유한 언어로 그 이전에 그 누구도 자연의 정체에 대해서 명료하게 해명하지 못한 한계를 극복하려 한다. 일단 헤겔의 언어와 사고 그리고 논리를 따라가보자. 이를 위해서는 우선 자연철학의 원리와 체계를 담고 있는 『엔치클로패디』의 구성 방식에 따라 그의 자연학(Physik)과 자연철학(Naturphilosophie)의 구분 및 그 관계에 대한 고찰로부터 접근하는 것이 좋다. 넓은 의미에서 자연은 인간의 본성에 속하며, 또 인간은 자연의 일부분이다. 그런 점에서 자연은 어떤 방식으로든 인간과 관계한다. 그렇다면 그것은 어떤 방식으로 관계하는가? 헤겔적 사유에 의하면, 여기에는 ‘인간에게 자연이란 무엇인가?’와 ‘자연에게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두 가지 종류의 물음이 공속해 있다. 과연 헤겔은 자연이라는 거대한 미로에 어떻게 접근하면서 우리의 궁금증을 풀어줄 것인가?
우선 자연학과 자연철학에 대한 헤겔의 입장이 첫 번째 실마리가 된다. 헤겔은 전통적 의미의 자연철학을 자연학에 속하는 탐구로 평가절하한다. 성격상의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칸트의 자연철학 또한 예외가 아니다. 그러나 헤겔은 전통적 자연철학의 사유 방식과 역사적 전개 및 그 한계를 부정적으로 보는 데만 그치지 않고, 자신의 사변적 자연철학과의 발전적 연관 속에서 파악한다. 결국 헤겔은 자연학과 자연철학의 근본적인 연관성과 차이점을 규명하는 일로부터 자연에 대한 탐구를 시작한다.
헤겔은 자연학과 자연철학을 엄격하게 구분한다. 자연학 또는 전통적 의미의 자연철학을 오성적 사유에 의해 자연을 고찰하는 방식(학문) 또는 “자연에 대한 사유적(denkend) 고찰”로 규정한다. 그리고 이를 자연에 대한 개념적(begreifend) 고찰로서의 자신의 사변적 자연철학과 대비시키고 있다. 오성적 사유와 사변적(이성적) 사유로도 표현되는 이들 양자의 관계는 헤겔철학에서 이들 용어가 차지하는 고유한 의미를 고려할 때, 완전히 질적으로 차원이 다른 자연 고찰 방식이다. 그러나 헤겔은 자연학 자체가 그 무엇을 보편적 규정에 따라 고찰할 줄 아는 존재의 능력으로서의 사유의 자연스러운 성과이기도 하기 때문에, 자연학에 대한 정당한 평가를 통하여 자연의 개념에 접근해나간다.
그렇다면 우선 오성적 사유에서 파악되는 자연학이 우리에게 제시해주는 자연 개념은 어떤 것인가? 자연학적 자연 고찰은 한마디로 과학적 내지는 오성적 자연 인식 방식이다. 이러한 자연 고찰은 인간 본성의 자연스런 경향이다. 그런데 사유의 본성 자체를 변증법적인 것으로 파악하는 헤겔에게서 “오성으로서의 사유는 자기 자신의 부정, 즉 모순에 빠질 수밖에 없다.” 즉, 오성적 사유는 결국 자연 자체의 내면적 본질이 아니라 주관적 원리 위에서 표상적 사유에 의해서 대상화, 객관화된 자연, 즉 다양성으로서 외면화된 개별적이고 특수한 사물로서의 자연 대상들 일반에 대한 규정에 불과한 것이기 때문에 자연학은 이러한 오성의 한계를 올바로 통찰하지 못하는 모순에 봉착한다. 이러한 규정 속에서 이들 자연 안의 생명체들은 각자 타자와 관계를 맺으면서 자신을 목적으로 타자를 수단으로 하여 존재하는 것으로 경험된다. 특히 대자적으로(für sich) 자기의 목적을 인식한다는 점에서 동물과 구별되는 인간은 스스로 모든 자연 대상들에 우선하는 목적적 존재로서 행동하게 된다. 이 같은 방식의 자연 고찰은 “유한적-목적론적(endlich- teleologisch) 입장”을 낳는다. 헤겔에 따르면 이는 인간과 자연 상호간의 본질적인 내적 연관을 보지 못하고, 다만 상호 외면적으로만 파악하기 때문에 자연에 대한 지배와 도구화를 정당화시켜준다.
유한적-목적론적 입장은 자연 대상으로서의 타자를 수단으로, 그것도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는 데 적합하도록 규정한다. 주관에 대한 객체로서 정립되는 자연 대상들은 인간의 목적 실현을 위해서 도구적으로 변형되며, 이를 보다 수월하게 하도록 분량 또는 측정 가능한 방식을 도입하며, 이를 학문성의 규준으로까지 정립한다. 자연이란 결국 이 같은 개별적이고 특수한 자연 대상들의 총체에 불과한 것이 된다. 여기에는 인간을 포함한 자연 대상들간에는 수단과 목적이라는 상호 관계의 형식적 규정만이 존재한다. 그런 자연은 수단적 가치만을 갖는 존재로 전락하게 된다.
이렇게 자연(과)학적으로 그리고 오성적으로 파악된 자연 개념은 자연 가운데 내재하는 갖가지 힘, 법칙, 유 등의 보편성을 주관적 규정에 따라 인식하여 체계적으로 정리, 분류, 조직하려 든다. 근대의 과학적 세계관이 보여주듯이 이 같은 작업의 성공은 자연에 대한 합리적 지배를 보장한다. 그러나 헤겔에 따르면 이런 자연 고찰은 자연에 고유한 내재적 필연성을 통찰하지 못하는 일면적 고찰이다. 왜냐 하면 오성적 자연학은 힘, 법칙, 유 등의 개념으로 자연 그 자체인 자연의 보편자를 파악하려 하지만 이들 개념들은 단순히 자연학의 근본 개념들로서의 보편성에 불과한 것이어서 스스로 작용하는 자연 그 자체의 내면적 본질과 운동의 근원을 파악할 수가 없다. 때문에 자연학은 다수의 힘들, 법칙들, 유들의 형식적 통일에 그치고 만다. 이들 보편적 개념들은 자연 자체가 아니라 대상화된 자연 대상들의 규정 방식일 뿐이다. 여기에는 자연이 이미 주관에 대하여(für) 객관으로 전제되어 있다. 따라서 개별적인 자연 대상들은 자연 일반의 목적에 대해서 답할 수 없으며, 여기에 오성적 사유에 의한 자연학적 자연 고찰의 한계가 있다. 헤겔에 의하면, 오성은 기본적으로 주관적이며, 객관과 대립하며, 그 제한성으로 말미암아 규정된 것들이 상호 대립하는, 즉 “유한한 규정만을 산출하는 사유”이기 때문에 그 같은 자연 규정은 일면적이다.
2)사변적 자연 개념
헤겔이 경험적 자연과학들의 성과를 비판적으로 수용하면서 최종적으로 도달한 자연 개념은 이성 내지 사변(Spekulation)에 의해서만 파악될 수 있는 그런 것이다. 어떤 사태를 근원으로부터 통찰하는 사변은 개념적 사유의 능력이며, 칸트와 비교하자면 반성의 반성 능력이다. 헤겔은 “반성을 반성할 줄 아는 철학”을 “사변적”이라 말한다. 그런 점에서 이 같은 이성의 반성 능력으로서의 사변은 개념으로서의 절대자의 인식 가능성을 보장한다. 그러나 헤겔이 말하는 개념은 오성적 사유에 의해 파악되는 것, 즉 개별자로 주어진 다양들로부터 추상된 형식적 보편자가 아니라 내용과 형식의 규정이 함께 하는 구체적 보편자다. 헤겔의 사변적 자연 개념도 이러한 의미에서 자연을 개념적으로 파악할 것을 요구한다. 그렇다면 자연을 개념적으로 파악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를 위해서는 개념 자체의 성격에 대한 이해가 요구된다. 이 때문에 헤겔의 사변적 자연철학은 전적으로 그 자신의 필연성으로부터 유래하는 “개념의 자기 규정”의 해명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다면 자연학의 사유적 고찰이 아닌 사변철학의 개념적 고찰, 즉 개념적으로 파악함의 필연성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러한 사유의 필연적 수행은 사태 자체의 본질을 개념으로 파악하도록 인도한다. 칸트와 비교해보자. 칸트는 자연 현상들의 과학적 원리들을 근원적 통각에 근거하여 정초하였지만, 칸트의 자아는, 비록 이 또한 개념이긴 하지만, 다만 형식적 의미만을 갖는 선험적 원리 그 이상의 것에는 이르지 못한다. 헤겔에 의하면 표상적 사유의 형식에만 관계하는 개념이 아니라 표상으로서의 현상 규정들을 가능하게 하는 개념 자체의 본성이 해명되어야 한다. 헤겔철학을 구축하고 있는 본령에 속하는 이 ‘개념의 논리’에 따르면, 칸트식의 자아가 대상을 규정하려면 그 자아는 이미 확실히 먼저 개념이지 않으면 안 된다. 왜냐 하면 칸트가 ‘연역’으로 정당화시켜놓은 범주의 근저에는 이미 그러한 개념적 이해가 전제되어 있지만, 칸트 자신은 단순히 “자아의 근원적 활동성”으로 전제할 뿐이다. 그러나 자아가 그러한 근거지음의 원천이라면 자아 자체 또한 사유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지 않을 경우 대상 인식의 필연성은 정당화되지 못한다. 칸트에 의하면 그것은 인식의 한계를 넘어서는 일이었지만, 헤겔은 자기 자신 및 대상과 관계하는 개념으로서의 자아가 선행적으로 파악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본 것이다. 이는 ‘파악한다’, ‘붙잡는다’는 의미의 ‘greifen’으로부터 온 ‘개념(Begriff)’이란 말 자체의 어원적 의미와도 상통한다. 이 같은 헤겔의 논리는 자연 고찰의 경우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헤겔에 따르면, 주-객 대립의 이원적 자연 고찰은 대상화된 개별적이고 특수한 대상들만을 탐구한다. 따라서 자연의 보편자, 자연 자체는 추상화된 형식적 규정이자 통일에 불과한 것이 되고 만다. 가령 대상들의 공통된 표상만을 의미하는 추상적이고 형식적인 규정, 즉 대상성(Gegenständlichkeit)의 규정이 칸트적 의미에서의 개념이다. 반면 헤겔의 개념은 대상 규정만이 아니라 자기 자신과 관계하는 본질 규정의 원천이요, 자기 규정의 원리이자 단적으로 이성(정신)의 자기 인식이다. 따라서 헤겔에게서 이 같은 “이성의 최고의 힘(Kraft), 아니 이성의 유일한 절대적 힘”으로서의 개념은 이성 자신이며, “이성의 가장 내적인 본질로부터 나오는 힘이다.” 그리고 이러한 힘으로서의 개념은 “자신을 실재화하는 능력을 갖고 있으며, 그러한 능력 자체다.”
헤겔은 이런 의미의 개념에 또 하나의 중요한 성격을 부여한다. 그것이 곧 개념 자신의 “내재적 필연성”이다. 따라서 개념적으로 파악한다는 것은 그 내적 필연성의 파악을 뜻한다. 헤겔에게서 모든 것은 근본적으로 개념 자신의 내적 운동이요 활동이다. 또 이 필연성의 고찰은 근원적으로는 정신의 자기 파악이며, 어떤 사태의 모순과 대립도 개념의 내적 필연성이 전개되고 실현되는 자기 귀환의 운동 과정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러한 “개념의 필연성”과 그 과정을 인식할 수 있는 것은 그러한 능력을 소유하고 있는 정신이기도 한 인간을 매개로 해서다. 따라서 인간의 이성은 이러한 필연성을 파악할 수 있는 절대적 입장의 소유자인 것이다. 헤겔은 인간의 정신을 매개로 한 개념의 파악과 그 같은 개념 파악을 허용하는 절대적 입장을 전제로 해서 자연 또한 개념으로 파악한다.
『엔치클로패디』의 구성이 보여주듯이 헤겔의 철학 체계는 논리의 학, 자연철학, 정신철학으로 구성된다. 자연의 개념적 규정을 시도하는 자연철학은 논리의 학이 일단락 된 후에 전개된다. 또 논리의 학은 논리적으로 자연철학을 포괄한다. 이는 곧 자연 개념이 개념으로부터 이념, 자연, 정신에 이르는 절대 이념의 자기 귀환이라는 일련의 과정 속에 위치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헤겔은 자신의 사변적 자연 개념을 다음과 같이 규정한다.
자연은 타재(Anderssein)의 형식에서의 이념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이념은 자기 자신의 부정으로 또는 스스로 외적으로 존재하기 때문에 자연은 이 이념(및 이념의 주관적 실존인 정신)에 대해서 상대적으로만 외적인 것이 아니라, 외면성이 그 안에서 자연으로서 존재하는 규정을 형성한다.
이 구절이 보여주듯이 자연과 이념의 관계를 통해서 개념으로서의 자연의 본질이 규정되고 있다. 헤겔의 존재론적 논리학에 의하면 개념은 최초에 추상적 존재로부터 시작하여 자신의 내용과 최고로 부합하는 개념인 절대 이념, 즉 “충만된 존재, 스스로를 파악하는 개념”으로 끝맺는데, 이 이념이란 “개념과 사실성의 통일”을 의미한다. 또 이념은 자기 속에서 자기 스스로를 현상시키고 스스로를 전개시키면서 자신을 실현해나간다. 자연 역시 직접적으로는 정신의 타자면서 이념의 한 존재 방식이다.
이러한 자연은 한편으로 이념과 구별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이념 자신의 내적 규정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다. 그렇게 규정되어 드러난 이념의 외면성 자체가 곧 자연이다. 여기서 외면성이란 따로 내면이 있고 또 속과 다르다는 의미의 밖이 아니다. 아직은 완전한 통일(또는 자기)에 이르지 못한 이념의 자기 모습이다. 또 자연은 이런 외면적 대상들의 세계이기도 하다. 따라서 두 개의 자연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즉, 우리가 목도하는 자연 현상 이외의 또 다른 본질적 자연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전통적 존재론은 본질과 현상, 필연과 우연, 영원과 시간, 존재와 생성 등 존재하는 것 일체를 상호 대립적인 두 규정을 통해서 존재자의 본질을 탐구해왔기 때문에, 자연은 항상 본질적 자연과 비본질적 자연으로 대비되어 왔다. 넓은 의미에서 칸트도 예외는 아니다. 반면 헤겔에게 자연은 다른 그 무엇이 됨으로써 비로소 자기 자신이 되는 것, 즉 그 자체가 이념의 타재다.
이처럼 헤겔은 자연을 이념으로 소급시킨다. 그리고 이념이 자연으로 외화하는 것을 밖을 향한 것이 아니라 안을 향한 것으로 파악함으로써 하나의 자연만이 존재하며, 자연을 곧 이념의 외면성으로 규정한다. 그리고 이 이념 내부에서 이루어지는 이념의 외면성 자체가 유일한 자연의 모습이다. 단순히 어떤 본질이 있고 그것의 현상이 따로 있다는 의미에서의 외면성이 아니다. 이념 내부에서 이념이 자신을 개념의 원리에 따라 규정한 이념 자신의 자기 부정의 모습이 자연 그것인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자연이 개념으로 파악되기 위해서는 먼저 절대자로서의 이념 자체가 개념으로 파악되지 않으면 안 된다. 또한 이러한 개념 파악을 수행하는 그 본질에서 정신인 인간 또한 개념이지 않으면 안 된다. 그래야만 이념으로서의 자연은 비로소 개념으로 파악될 수가 있다. 역으로 이 말은 이념이 자신을 스스로 (자연으로) 개시하기 위해서는 정신인 인간을 중재자로 삼아야만 한다는 것을, 다시 말해 (주관적) 개념으로서의 인간은 자신을 매개로 하여 이념으로서의 자연이 그 자신이면서 또 자신과 다른 존재라는 것을 비로소 알게 된다. 결국 헤겔에게서 자연 그 자체가 무엇인가 하는 것은 이념을 넘어서 정신이란 무엇인지에 대한 이해로 귀착된다. 자연을 포함하여 우리가 마주치는 “현실을 개념적으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사변적인 자연철학 이외에도 사변적인 정신철학이 불가결한 것”도 이 때문이다.
3)인간(정신)과 자연
헤겔철학에서의 대전제이자 대원칙은 정신은 반드시 구체화되어 나타나지 않으면 안 되며, 이런 구체화 없이 정신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헤겔에게서 이념은 본래 그 자신으로 되어가는 정신이다. 이념이 자연으로 외화하는 것은 자연의 최고 형태인 생명(체), 그리고 생명 형태들 중에서 궁극적으로 인간의 생명에서 (영혼과 의식의 단계를 거쳐) 정신으로 발현하기 위해서다. 결국 이념의 일시적인 타재의 형태가 자연이며, 자신으로 되어가는 정신이 자연이며, 또 그런 점에서 자연은 생성하는 정신(der werdende Geist)이다.
헤겔은 『엔치클로패디』의 「논리의 학」을 유론, 본질론, 개념론으로, 개념론의 마지막 절을 ‘절대 이념’으로 마치고 있다. 그리고 이념의 외화로서의 자연을 고찰하는 「자연철학」은 공간과 시간, 유한 역학(물질과 운동론), 절대 역학(천문학)을 다루는 “역학(Mechanik)”, 빛, 원소, 밀도, 응집력, 음향, 열, 자기, 전기, 화학적 과정 등 무기적 대상들을 다루는 “자연학(Physik)”, 물체의 참된 통일체인 생명을 다루는 “유기체적 자연학”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마지막 유기체학에서 비로소 등장한 생명은 지질적 자연, 식물적 자연, 동물적 유기체의 단계를 거친다. 그리고 이 동물적 생명 다음에 육체적 생명을 가진 인간적 정신에로 이행한다. 이처럼 무기적 자연에서 유기적 자연으로, 생명과 정신으로 진행되는 과정에는 연속성과 계층성이 함께 한다. 즉, 다음 단계는 이전 단계에 연속해서 일어나지만 그 전단계와는 질적으로 완전히 다른 계층성을 갖는다. 따라서 헤겔에게서 같은 생명체면서 동물과 인간은 전혀 다른 원리에 입각해서 이해되어야 하는 존재들이다.
헤겔은 이러한 과정을 거쳐서 결국 자연을 정신화한다. 그러나 자연은 그 본질에서 이미 정신이다. 헤겔의 말을 빌리면 “정신은 우리에 대하여 자연을 자신의 전제로 삼으며, 자연의 진리 곧 그 절대적 우선자가 정신이다.” 결국 헤겔적 의미에서 자연이란 곧 정신철학의 문제에 다름 아니며, 정신은 자연의 진리태로 정립된다. 자연에서 정신으로의 전개는, 정신의 관점에서 볼 때 자연에 대한 정신의 지배를 허용한다. 왜냐 하면 정신(생명)이 결여되어 있는 자연은 “스스로의 힘으로 완전한 자기 규정에 이를 수 없는 유한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연은 이미 그 본질에서 정신이기에 그것은 일방적인 지배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런데 헤겔이 말하는 정신은 우주적 정신이면서 또한 구체화된 주체로 파악된다. 그런 정신 또는 우주적 정신은 구체화되어 나타나려면 반드시 어떤 방식으로든 매개되어야 하고 외면화되어야 한다. 경험적 자연 대상들, 무생물, 생물, 생명 등은 다 그렇게 구체화된 것들이다. 보다 추상적인 것에서 보다 구체적인 것으로의 운동 과정은 언제나 그때마다 정신(이념)과 동일한 것이면서도 그 자신과 대립한다. 따라서 절대 정신이 구체화되어 완전한 인식에 도달할 때까지 유한한 정신이 필연적으로 존재해야 한다. 그가 인간이다. 결국 정신은 유한한 정신으로서의 인간을 매개로 해서 구체화되어 나타난다. 이런 점에서 소위 규제적 이념으로서의 칸트적 의미의 자기 형성적 유기체(자연)의 목적론이 헤겔에게서는 존재론적 의미의 (자연) 목적론으로 전화되고 있다.
이러한 존재론적 과정들은 시간적 발생이나 자연적 진화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그 본질에서 정신인 이념 안에서 일어나는 개념의 자기 운동이며 자기 규정이자 자기 실현 과정이다. 따라서 헤겔의 관점에서 보자면, 진화 자체가 정신으로서의 자연 자체의 운동의 결과인 것이다. 그런데 인간은 자연의 일부분이면서 동시에 그 본질에서는 정신이다. 인간과 더불어 자연 또한 정신의 자기 실현 및 귀환의 한 단계를 형성한다. 이 과정에서 인간을 포함한 일체의 것들은 전체의 부분으로 현존하며, 또 인간은 자연을 정신과 대립하는 것으로 정립한다. 그러나 만일 인간이 자신을 자연과 대립시키고 분리시키기만 한다면, 이는 결국 인간 자신을 분열시키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인간은 정신과 자연의 분열과 대립을 극복함으로써만 자신과 자신의 생명을 보존할 수 있다. 따라서 정신으로서의 인간은 자신의 의지에 따라 자연을 이용하고 지배함으로써 자신을 실현해야 하지만, 이는 자연과의 대립 자체가 아니라 종국에는 자연과의 조화와 통일을 위한 행위여야 한다. 이는 곧 정신과 자연은 서로 대립하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상호 보완적임을 의미한다. 따라서 자연의 위기는 곧 정신의 위기요 인간 자신의 위기와 동일한 존재론적 의미를 갖는다. 절대 정신이라는 거시적 관점에서 보면, 인간과 자연의 조화와 통일이란 인간 정신을 통한 우주적 자연과 우주적 정신과의 그것이어야 한다. 결국 인간과 자연의 대립과 불화란 이념 자신의 시초(Anfang)의 추상적 통일이 구체적으로 실현되는 과정에서 야기된 불가피한 것이며, 나아가 정신의 자기 실현으로서의 절대 이념에서 다시금 시초의 추상적 통일이 복구되고 화해에 도달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 가능성은 전적으로 그 자신이 정신이기도 한 인간이 그러한 대립과 갈등의 근원을 철저히 사유할 경우에만, 다시 말해 스스로가 직면한 위기를 극복하고자 전력을 다할 경우에만 헤겔적 의미에서의 화해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그러한 사유는 어떠한 사유여야 하는가?
헤겔 존재론의 논리에 따르면, 인간과 자연의 분열은 필연적이고 분열이야말로 화해를 위한 필연적 전제다. 정신의 자기 실현을 위해 분열이 불가피한 것처럼 화해 역시 필연적이다. 그렇다면 인간과 자연, 나아가 정신과 자연의 화해는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그 과정에서 절대 정신의 한 계기인 유한한 정신으로서의 인간은 어떤 의미에서의 주인공인가?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이러한 분열과 화해를 이룩하는 주인공은 유한한 정신으로서의 인간 자신, 더 정확하게는 인간의 사유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를 통해 먼저 인간은 자기 자신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은 인간 자체가 갖는 “개념과 실재”의 존재론적 규정에서 볼 때 당위적인 요구가 된다. 그리고 “인간이 자기 자신이 되기 위한 유일한 기회는 자신의 개념을 실재로 도야시키는 것이며, 그런 후에야 인간은 절대 정신 자신의 모습으로서 절대자에 참여하게 된다.” 그때만 진정으로 인간 자신의 위기인 자연의 위기도 극복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인간의 자기 이해로서의 사유에서 그 화해의 가능성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은 곧 우리가 원시적인 자연으로 돌아간다거나 막연한 자연 보호의 차원이 아니라 작게는 인간에게 크게는 정신에게 자연이란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사유해 내야만 하며, 그럴 경우에만 생태학적 위기의 극복도 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이 미래의 생존이 문제시되고 있는 인류에게 헤겔이 들려주는 지혜다.
4.맺음말 : 어떤 자연윤리학이어야 하는가?
필자는 생태학적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인간의 자연과의 연관성(혹은 동일성)만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근본적인 차이점을 우선적으로 고려한 것이 아니면 안 된다는 입장으로부터 출발했다. 칸트와 헤겔은 방법과 원리상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모두 오성적 합리성, 즉 근대의 자연과학적 합리성의 일면성과 데카르트와 뉴턴의 실체론적 자연관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면서도 그 한계를 사유한 인물들이다. 그리고 그들은 그러한 일면성과 한계 너머에 있는 보다 중요한 세계의 존재를 인정했다. 칸트는 자연의 메커니즘을 통해서만 역설적이게도 자연의 진정한 의미와 목적에 도달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고, 헤겔은 자연의 메커니즘을 역동적인 자연 자체의 한 존재 방식으로 파악했다. 이와 같이 자연이 인간에 대해서 갖는 근원적 의미를 칸트는 (자연)과학적 인식을 넘어서 인간과 자연의 근원적 관계에 근거한 도덕의 세계에서, 헤겔은 인간과 자연 모두를 포괄하는 정신의 세계에서 찾았다. 그들에 따르면 자연이 인간에게 부여하는 진정한 가치는 각각 도덕 및 정신을 통한 자유의 실현에 있다. 칸트는 인간이 진정한 도덕적 자유를 성취하려면, 제한적으로나마 자연 생명체들에 대한 고려가 필요하며, 그것은 자연에 대한 인간의 의무임을 강조한다. 헤겔은 자연의 위기가 곧 인간의 위기며, 또 위기를 초래한 책임은 다름 아닌 인간 자신에게 있음을 말하고 있다.
칸트는 인간을 자연의 피조물이면서 동시에 창조의 궁극 목적으로 파악함으로써 인간(도덕성)과 자연의 근본적인 차이를 인정한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서 그것은 자연 자체가 아닌 자연 산물과 인간의 차이다. 인간을 창조한 근원적 존재로서의 칸트의 자연 개념 속에는 인간의 도덕화라는 목적과 그에 따른 자연 산물들의 적절한 사용과 도덕적 배려가 공존한다. 인간성의 황폐화를 막기 위한 자연물과 생명체에 대한 인간의 의무가 그것이다.
헤겔 또한 인간을 매개로 한 자연과 정신의 동일성 및 그 차이를 말한다. 더욱이 인간은 자연의 한 부분이자 자연과 대립하는 존재라는 점을 인정하면서 동시에 우주적 정신의 두 계기인 인간과 자연의 상보성을 강조한다. 그리고 인간을 전체의 한 부분이며, 전체와의 조화 없이는 아직 자신의 본질에 이르지 못한 존재며, 인간의 생명은 거대한 우주적 생명의 일부라는 것을 가르쳐준다. 따라서 자연의 위기가 정신으로서의 인간의 책임인 만큼 화해 또한 인간의 몫임을 일깨워준다.
칸트와 헤겔 모두 자연을 인간에 대해서 수단적 가치를 갖는 존재로 인정하면서도, 칸트는 도덕적 목적에 의거해서, 그리고 헤겔은 정신의 자기 목적에 의거해서, 그 같은 태도의 일면성을 비판한다. 이들은 직접적으로든 간접적으로든 인간의 이기적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한 수단으로서가 아니라 인간이 진정으로 자기 자신의 주인이 되기 위한 목적에서 자연의 가치를 인정하고 있다. 그러므로 칸트와 헤겔의 자연 개념에 근거한 자연 윤리는 인간 자신을 위한 자연에 대한 고려에 입각한 규범들로 이루어지게 된다.
칸트의 경우에 자연은 직접적인 도덕적 고려의 대상이 아니다. 그러나 동물에 대한 학대나 잔혹한 행위를 포함한 자연 환경의 황폐화는 인간의 도덕적 심성에 악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이들에 대한 적절한 고려는 인간의 자기 자신에 대한 의무가 된다. 따라서 생태계 혹은 개별 자연물들의 아름다움이나 개별 생명체들의 보존과 보호는 인간의 도덕적 관심에 따라 상대적인 가치를 갖는다. 즉, 인간의 도덕성에 기여하는 정도에 따라 그들에 대한 대우가 결정된다.
헤겔 또한 자연 환경의 위기는 곧 인간(정신)의 위기로 파악한다. 그리고 정신의 자기 실현을 위해서 자연은 적절히 변용되지 않으면 안 된다. 따라서 이로부터 도출되는 귀결은 생태학적 위기의 극복이란 인간이나 자연 어느 한쪽만을 위한 일방적인 것이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결론적으로 칸트의 자연윤리학은 원칙적으로는 단순히 인간중심주의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차라리 도덕중심주의라 부를 만한 그런 성격의 것이다. 그리고 방법론적으로는 기본적으로 개체론적(individualistic)이다. 반면에 헤겔의 그것은 정신과 자연의 조화가 인간(정신)에 의한 매개를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는 점에서 역시 인간중심주의면서, 방법론적으로는 전체론적(holistic) 성격을 띤다. 오늘날 인류가 처한 생태학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대안 윤리로서 우리는 칸트적 해결책과 헤겔적 해결책 둘 중에 어느 것을 선택할 것인가? 극단적인 인간중심주의 아니면 극단적인 생태중심주의적인 대안들도 있다. 문제는 어떤 것이 환경 문제를 극복하기 위한 현실적 대안인가가 아니라 어떤 것이 사태의 본질을 정확하게 사유했는가에 있다. 그것이 바로 자연윤리학의 철학적 기초로서 요구되는 평가의 척도가 되어야 한다. 칸트인가 헤겔인가? 아니면? 어느 것이든 인간은 자연에서 나서 자연으로 돌아간다는 단순한 사실보다는 인간은 자연에서 나서 자연과는 다르게 살아왔으며, 또 살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이 간과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때문에 인간과 자연의 근본적인 차이를 고려하고 반영하지 않는 자연윤리학은 거부되어야 한다. 진정으로 “인간은 자기 자신의 주인이 될 때까지 자연의 주인이 되지 못한다.” 이것이야말로 칸트와 헤겔 모두가 우리에게 들려주는 가장 귀 기울여야 할 가르침이다
오늘날 적지 않은 환경론자들이 인류가 직면한 생태 위기의 근본 원인을 인간과 자연에 대한 이분법적 사고와 인간중심주의적인 지배적 세계관에서 찾고 있다. 그리고 이 같은 사고와 전통을 해체 및 극복하는 데서 환경 위기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동물이나 생명체 나아가 자연 자체의 가치를 근본적으로 새롭게 인식하고자 하는 노력들을 경주해왔다. 환경철학, 생태철학은 물론 환경윤리학, 생태윤리학, 자연윤리학 등의 용어들이 이 같은 상황을 대변해준다. 이제 ‘자연’ 자체가 철학의 새로운 ‘화두’로 부상한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자연이라는 주제는 철학적 탐구에서 전적으로 배제되거나 배척받은 적은 없었다. 다만 시대적 관심사에 따라 그 위상을 달리해왔을 뿐이었다.
그렇다면 어떤 점에서 상황이 달라졌는가? 이는 특히 그 바탕에 환경철학을 전제할 수밖에 없는 환경윤리학의 주제와 문제 의식에서 엿볼 수 있다. 이제 우리는 다음과 같은 환경윤리학의 쟁점들을 외면하거나 무시할 수 없게 되었으며, 보다 적극적으로 답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자연은 고유한 도덕적 가치를 갖는가? 아니면 인간만이 그러한가? 인간중심주의적인 전통 윤리는 생태학적 위기에 직면한 오늘날에도 여전히 정당화될 수 있는가? 인간은 인간에 대해서만 존중의 의무가 있는가? 아니면 자연에 대해서도 그러한가? 또 대지, 바다, 숲, 강, 식물, 동물에 대해서도 경외심을 가져야 하는가? 우리는 동물에 고통을 가하는 실험을 중지해야 하는가? 아니면 식용으로 소비하거나 살해해도 괜찮은가? 인간의 이익을 위한 것이라면 강과 바다나 동물과 식물이나 자연 경관을 어떤 식으로 처리하든 상관없는가? 아니면 이들은 고유한 도덕적 가치를 갖기 때문에 그래서는 안 되는가? 또는 자연 자체를 위한 자연 보호만이 허용되어야 하는가?
이전의 서양철학의 지배적 전통 속에서는 단 한 번도 진지하게 자연 또는 자연 속의 생명체들이 고통받고 있다거나 비도덕적인 대우를 받는다거나 하는 문제 의식을 적극적으로 가져본 적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러한 자연윤리학적 물음들에 답할 수 있는 가능성을, 비록 다른 문제 의식 속에서 이루어지긴 했지만, 인간과 자연의 관계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사유했던 독일이상주의, 특히 독일 관념론자들에게서 발견하게 된다.
독일이상주의(Deutscher Idealismus)란 대체로 정신의 보편적인 원리에 따라 이념적 실재를 추구함으로써 낙후된 민족의 현실과 역사의 이성적 발전 그리고 형이상학의 체계적 완결을 지향하는 일련의 사상 체계를 이른다. 특히 주로 인식론, 존재론, 역사철학 등을 중심으로 한 철학적 체계와 방법론을 강조할 경우에는 독일 관념론이라 부른다. 그리고 세계관, 인생관, 윤리 사상, 가치관 등 의식의 태도나 정신 운동의 측면을 광범하게 고려할 경우에는 독일 이상주의라 부르기도 한다. 이러한 경향은 또 문학 예술 방면에서 ‘독일 낭만주의’로 발전했다.
독일 관념론은 크게 보면 피히테(Fichte, J. G.)와 셸링(F. W. J. Schelling), 헤겔(G. W. F. Hegel)에 이르는 사변적 관념론, 훔볼트(K. W. von Humboldt), 슐라이어마하(F. E. D. Schleiermacher)의 휴머니즘적 관념론, 노발리스(F. von H. Novalis) 등에 의한 낭만주의적 마술적 관념론, 프리이스(J. F. Fries), 헤르바르트(J. F. Herbart) 등의 실증주의적 관념론, 쇼펜하우어(A. Schopenhauer)의 비합리주의적 주의주의적 관념론 등을 모두 포함한다. 그러나 관념론은 통례적으로 좁은 의미의 것, 즉 사변적 관념론만을 지칭한다. 관념론의 융성기는 19세기 후반(1980년대)부터 20세기 중반(1930년대)까지의 약 50년 내외며, 학문적 성과의 핵심 노작들의 출현은 19세기의 첫 10년대에 집중되어 있다. 관념론자들의 사고 형성의 근거지가 되었던 예나(Jena)대학은 이 무렵 독일 정신 문화의 중심을 이루었고, 뒷날 피히테, 셸링, 헤겔, 슐라이어마하, 쇼펜하우어 등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또는 동시에 강단에 서면서 사회적 실천쪽에 더욱 골몰했던 신설 베를린(Berlin)대학은 관념론 철학의 야외 실습장 격이었다.
관념론이 19세기 전반기의 가장 유력한 철학 사조로 결집될 수 있었던 것은 오직 공통의 문제 의식과 상황 설정의 동질성 때문이다. 18세기 서구 사회를 지배했던 ‘계몽 사상’은 르네상스 이래의 휴머니즘과 합리주의 그리고 자유주의를 근간으로 하여 인간의 근대적 자기 해방을 고취했으며, 이를 위해 전근대적 신앙 태도나 비과학적 사고 방식에 대한 소위 과학적 의식 개혁, 즉 계몽이 요구되었다. 그러나 계몽 운동의 전개와 함께 점차 합리주의적 실증적 방법론, 자연주의적 경험적 세계관 또는 유물론적 기계론적 세계관 그리고 세속적 쾌락주의나 공리주의적 윤리관 등이 보편화 추세에 들어가는 한편, 그 반작용으로 전래의 ‘형이상학’과 그 존립 가능성에 대한 회의가 더욱 심화되어갔다. 당초 관념론은 계몽주의의 이상과 목표에 전적으로 공감할 뿐 아니라 그 진로에 동참한 바 있으나, 결국 계몽주의가 지닌 자체의 한계, 즉 과학지상주의와 보편적 형식주의 그리고 실증주의적 단순 사고에 의한 ‘근원성의 포기’에까지 이르자, 이에 실망한 나머지 반계몽주의적 경향을 취하게 되었다. 이러한 사상적 갈등은 칸트와 관념론자들 사이에서도 나타났다. 주지하다시피 칸트는 관념론자들의 철학적 사유를 가능하게 했던 원천이었다. 그런 점에서 칸트의 철학에는 독일 관념론과의 동질성과 이질성이 공존하고 있다.
그러나 독일 관념론자들은 대체로 그들 스스로 칸트에게서 미해결의 과제로 남아 있다고 생각했던 문제들, 즉 자연과 자유, 현상과 물 자체, 유한과 무한, 이념과 실재, 이성과 감성, 이론과 실천 등의 조화와 통일을 꾀하고자 했다. 그들은 정도의 차이는 있었지만 칸트철학의 두 중심 축이자 칸트 자신도 충분히 해결하지 못했다고 생각했던 자유 또는 인간과 자연의 통일을 정초하려는 열망을 갖고 있었다. 특히 그들은 이 같은 열망을 철학적 체계 속에 담아내면서 한결같이 칸트가 멈추어 서 있던 경계를 넘어서 직관과 사변(이성)을 통해서 사물의 본질 속에서 신적인 것을 통찰할 수 있다고 생각했으며, 다만 이 신적인 것을 어떻게 규정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만 견해를 달리 했다.
근대의 시작과 더불어 일기 시작한 인간과 자연 그리고 자유에 대한 점증하는 관심은 칸트와 독일 관념론에 이르러 최고점에 도달했다. 오늘날 우리가 목도하고 있는 ‘제2의 르네상스’라 일컬을 만한 자연에 대한 관심을 제외한다면 우리는 역사상 그 어떤 시기도 이들만큼, 비록 인간의 자유가 그들에게는 더 큰 매력이요 관심사요 과제이긴 했지만, 자연에 대한 철학적 사유를 진척시킨 경우도 없었다. 그들은 한결같이 당시 자연과학적 성과들에 대한 충분한 지식과 식견을 갖고 있었으면서도 오늘날의 과학적 세계관을 확립한 당대의 과학적 경향에 완전히 매료당하지도 않았다. 특히 칸트와 헤겔은 자연을 경험적 탐구의 결과에 의존하는 협소한 시각에서만 보려 하지 않고 그 궁극적인 개념적 구조라는 보다 포괄적이고 근원적인 관점에서 보려고 노력했다. 이들의 자연철학은, 비교적으로 말하자면 그 성격상 근대적 의미의 자연과학보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학에 더 가깝다.
필자가 보기에 오늘날의 생태학적 위기에 직면하여 우리의 행위를 인도할 수 있고, 통제할 수 있는 자연윤리학의 정초가 가능하려면, 그 이론적 토대로서의 자연철학 혹은 환경철학은 어떤 방식으로든 다른 생명체들과 그 존재론적 지위에서 구별되는 인간을 매개로 한 것이 아니면 안 된다. 인간과 동물을 포함한 인간 이외의 존재들과의 차별성이 무시되거나 확보되지 않는 자연철학 내지 존재론은 우리에게 인류가 생존을 위해서 분투해왔던 숱한 행위를 조금도 설명해줄 수 없으며, 또 어떻게 오늘날 인류가 직면한 환경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지에 대한 어떠한 구체적 지침도 제시해줄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설사 인간을 수단으로 삼아야 하는 자연의 감추어진 원대한 목표가 있어 인류에게 장차 어떤 희생이나 봉사가 요구된다 하더라도, 그것은 반드시 인간 존재를 매개로 한 것이 아니면 안 될 것이다.
당시에 피히테의 자아 철학과 셸링의 동일 철학은 다같이 칸트의 사상을 일면적으로 계승하고 있으면서도, 또한 무엇보다도 방법론상 오성주의적 분석적 사고의 고착성에 따른 역사적 변화의 상황 무시, 체계상 물 자체 개념의 존재론적 실패와 도덕형이상학적 변질 등과 같은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정신 활동의 모든 역량을 경주했다. 특히 “피히테는 윤리적 종교적 행위의 능동성에 기반하여 인간을 그의 주체적 실재에 정초시키려 했으며, 셸링은 칸트가 거부한 지적 직관에 의거하여 인간을 자연의 창조적 근원에 더욱 근접시키려는 노력을 경주했다.” 그러나 사고와 존재의 원리적 통일과 전체성의 회복을 꾀하는 과정에서 피히테는 극단적인 주관주의로 또 셸링은 추상적 심미적 객관주의로 양극화되기에 이르렀다. 그 결과 피히테는 주체와 객체, 인간과 자연의 객관적 통합을 산출해낼 수 있는 자연철학을 정립하는 데 실패했다. 반면 셸링은 자연에 관한 관심과 통찰에서 헤겔을 능가하는 사변적 자연철학을 개척했다. 그러나 헤겔의 선구자로서 근대적 자연관의 한계를 뛰어넘는 탁월한 안목을 갖고 있었음에도, 셸링은 인간과 자연의 연관성을 넘어서 그 차이를 철저하게 사유하는 데 성공하지 못했다.
필자가 보기에, 인간적 자유의 본질과 근원에 대한 그의 집요한 사유와 추구에도 불구하고, “자아와 대상 세계를 자연이란 동일 지평에서 관조”함으로써 셸링에게서 동일성을 넘어선 인간과 자연의 차이는 점점 시야에서 사라져버리는 결과가 되고 만다. 근원에의 동경이나 충동 그리고 예술적 천재의 지적 직관에 호소하기에 이르는 절대자의 무차별적 동일성 이론에 강하게 작용하고 있는 신비주의와 범신론의 경향이 그러하듯이, 자연과 정신의 동일성을 사유하는 셸링의 자연철학에서 우리는 오늘날 인류가 왜 이런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는지, 또 어떻게 난관을 극복할 것인지 등에 대한 구체적인 지침을 구하기 힘들다. 반면에 피히테와 셸링을 그들 자신의 철학적 사유로 인도한 선구자인 칸트의 철학에는 자연 속에서의 인간의 지위에 대한 치밀한 사유와 또 인간이 자연과 어떻게, 어느 정도 그리고 왜 조화를 이루어야 하는지에 대한 방도가 예시되어 있다. 그리고 헤겔 역시 인간과 자연의 불화의 불가피성과 함께 정신으로서의 인간을 매개로 한 자연과의 화해를 강조하고 있다.
심층생태론(deep ecology)을 필두로 한 일련의 생태주의자들이 서구적 합리성과 인간과 자연을 대립적으로 파악하는 이원적 세계관을 환경 위기의 원인으로 주목하고 있지만, 어떤 방식으로든 인간과 자연의 차별성을 고려하지 않는 방식은 원칙적으로 설득력을 갖기 어렵다. 그런데 이 점에서 칸트와 헤겔은 이 두 가지를 모두 갖추고 있다. 왜냐 하면 “칸트의 선험철학과 헤겔의 사변철학은 인간이 합리성의 한계를 인식하면서 동시에 합리적으로 세계를 이해할 수 있는 탁월한 두 가지 대안들이기 때문이다.” 이 글은 바로 이러한 인간의 차별성과 합리성의 한계를 간파하면서 자연과의 대화를 시도하고 있는 칸트와 헤겔의 자연 개념을 살펴봄으로써 자연윤리학의 정초가능성을 모색해보려는 데 그 목적이 있다.
2.칸트의 선험적 자연철학
1)칸트철학에서 자연 개념의 변천사
칸트는 과연 자연에 대해서 확고하면서도 분명한 하나의 일관된 생각을 갖고 있었을까? 아마 이에 대한 대답을 칸트 자신으로부터 직접 듣기는 힘들 것 같다. 왜냐 하면 이성의 한계 안에서 고찰된 자연 개념에는 이성 자신의 능력 너머에 위치하고 있는 자연의 고유한 모습이 항상 미지의 영역처럼 남아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이런 제약으로 인해 칸트의 철학 안에는 그 각각에서는 분명한 듯해도 서로간에는 상당한 편차가 있어보이는 세 가지 자연 개념이 가로놓여 있다. 칸트가 이성의 한계 안에서 우리에게 제시해주고 있는 자연 개념은 자연과학적 자연, 도덕적이성적 존재자의 예지적 자연, 역사적․합목적적 자연 세 가지다. 이는 순수이성비판, 실천이성비판, 판단력비판에서 주제적으로 다루어지고 있는 자연 개념에 각각 대응한다. 특히 처음 두 가지는 이론 이성과 실천 이성에 의해서 제각기 파악된 자연이다. 즉, 브루노와 스피노자 및 라이프니츠의 소산적 자연과 능산적 자연에 기인된 사상이라 볼 수 있는 현상체와 가상체 혹은 감성적 기체와 초감성적 기체, 단적으로 감성적 자연과 초감성적 자연이 그것이다. 그러나 이 서로 분리되어 있는 자연은 그 자체로는 불완전한 것들이다. 왜냐 하면 자연과학적 자연은 현상으로서의 자연이므로 이미 그 기저에 세계(물) 그 자체로서의 자연을 전제하고 있으며, 또한 이성적 도덕적 존재자의 자유 또한 오직 현상 중에서만 실현될 수 있으며 또 실현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떻게든 이 둘은 하나로 통일되지 않으면 안 된다. 바로 이 양자를 통일시켜주는 매개가 되는 것이 세 번째 확장된 의미에서의 자연 개념이다.
칸트가 이러한 제3의 자연 개념에 도달하게 되는 실마리는 그의 유기체에 대한 사고다. 엄밀한 의미에서 본다면, 넓은 의미의 자연 개념 중에 예지적 자연은 자연이라기보다는 자유라 불러야 한다는 점에서 칸트의 자연 개념은 이를 제외한 한정적 의미만 갖는 기계적 자연과 확장적 의미를 갖는 합목적적 자연 두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다만 문제가 되는 것은 예지적 자연으로서의 자유와 물 자체로서의 자연 자체의 근원적 동일성에 관한 칸트의 분명한 사고가 무엇인지 여부다. 우리는 이런 문제들에 대한 해명을 통해서 비로소 칸트의 자연관의 본령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우선 자신의 철학적 목표의 대강을 시적인 표현으로 웅변하고 있는 다음과 같은 칸트의 말에 귀기울여 보자.
내가 두 가지 사물을 거듭 또 오랫동안 생각하면 할수록 그것은 더욱 새롭고 더욱 드높아지는 감탄과 경이로 나의 마음을 가득히 채워놓는다. 이 두 가지 사물이란 내 머리 위의 반짝이는 하늘과 내 마음속의 도덕 법칙이다.
이 구절에서 알 수 있듯이 칸트는 하늘(자연)과 도덕 법칙을 ‘나’라는 인간을 중심으로 이해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칸트의 철학은 인간 자체를 중심으로 하여 양극으로 뻗어나가는 대칭적 구조의 건축술적 체계를 이루고 있다. 여기서 비가시적인 예지적 자아를 통해 도덕 법칙으로 나아간다. 그리고 이때의 예지적 자아의 실재성은 도덕 법칙을 통해 우리에게 알려진다. 반면에 『순수이성비판』에서 보여주고 있듯이 선험적 자연 이해는 가시적인 감성적 경험적 자아를 통해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에, 수학적 정밀성을 모범으로 하는 과학적 인식은 감성적 직관의 상관 영역에 한정될 수밖에 없었으며, 따라서 이러한 한계에서 정립된 자연 개념은 엄밀한 의미에서 자연 그 자체에 대한 이해에는 이르지 못한다. 즉, 자연의 입법자로서의 인간(오성)에 의해 규정된 자연에 불과하다. 이 같은 자연 이해의 한계를 극복하려는 노력은 『판단력 비판』을 통해 칸트 자신에 의해 수행된다. 그러나 이런 시도는 무엇보다도 다양한 자연 현상들 중에 오성적 인식으로 포착되지 않는 나머지 현상들을 포함한 총체적 규정의 일환에서 기인하는 것이지 자연 그 자체에 대한 근본적 이해를 위한 것은 아니라는 것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이를 염두에 두고서 자연 개념의 변모 과정을 좀더 추적해보자.
칸트철학의 근본 원리이자 궁극 목표는 아니었지만, 칸트가 자신의 지적 성장의 전과정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지속적으로 관심을 갖고 숙고를 거듭한 주제가 바로 자연철학(자연형이상학)이었다. 18세기 중엽의 독일철학의 일반적 경향에 따라서 1746년 칸트의 최초의 발표 논문인 「활력의 참된 측정에 관한 견해들」로부터 시작해서 그 이후에 계속 이어진 저술들의 테마도 자연철학에 관한 것들이었다.
이 시기의 칸트는 자연형이상학을 경험적 물리학과 구분함으로써 여전히 자연 현상의 근원적 원리와 기초를 확립하고자 하는 열망을 내비치고 있다. 관찰을 통해 물체의 운동의 법칙 등 자연의 기계적 법칙을 탐구하는 경험적 물리학과 달리 자연형이상학은 이성에 의해서 물체 운동의 내부 힘의 법칙과 같은 자연의 동력학적 법칙을 탐구하는 데 열중했다. 종래의 형이상학이 확고한 토대를 갖추지 못한 것에 대한 불만을 토로함으로써 자신의 목표가 무엇인지 강조하던 태도는 보편적 자연사를 포함한 이후의 일련의 저술에서도 한동안 그대로 유지된다. 특히 『보편적 자연사』와 같은 해인 1755년에 발표된 『형이상학적 인식의 제1원칙들에 대한 새로운 해명』에는 자연형이상학의 확고한 토대를 마련하고자 했던 칸트의 관심이 가장 잘 나타나 있다. 다시 말해서 비판철학을 상징하는 별칭이기도 한 칸트 사고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회” 또는 “선험적 전회”는 물론, 이에 앞서 “1760년대의 혁명”이라 일컬을 “루소적 전회(Rousseauian turn)”의 국면이 감지되던 시기 이전까지 칸트의 주된 관심은 자연 현상의 근거를 물체의 내부적 힘 개념에 대한 고찰을 통해 설명해내려는 데 집중되어 있다. 이는 곧 자연에 대한 실재론적 태도를 견지하면서 자연의 본질에 대한 규정을 시도하는 것이며, 또 칸트가 라이프니츠를 따라 그러한 가능성을 믿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 시기의 칸트가 독단적 형이상학자였다는 것은 아니다. 비록 칸트가 라이프니츠의 추종자로서 자연 현상과 자연 운동의 내부에서 작용하는 힘의 실체를 파악하려 시도했지만, 이는 무엇보다도 당시의 경건주의 자연철학의 신비주의를 물리치고, 수학적 방법에 의거한 데카르트적 물리학의 기계론의 한계를 지적함으로써 자연 현상에 대한 설명을 보다 완전하게 하려고 한 것이었다. 이런 점은 칸트가 라이프니츠와 데카르트학파간의 쟁점은 “사실 자체의 문제가 아닌 인식 방식에 관한 문제에 지나지 않는다”고 중재함으로써 쌍방간의 결실을 모두 인정하고 있는 데서도 엿볼 수 있다. 그러나 자연에 대한 데카르트식의 수학적 접근법과 라이프니츠식의 형이상학적 접근법의 역할을 모두 인정한 것은 오히려 칸트가 보편적인 기계적 법칙에 따라 작용하는 자연 내부의 고유한 힘은 수학적 접근만으로는 완전한 해명에 이를 수 없다는 것을 지적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시기의 칸트는 유기체든 비유기체든 기본적으로 기계론에 의거하여 일체의 자연 현상을 설명하려는 태도를 견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칸트는 기계적 법칙을 단순한 기계적 작용이 아니라 사물들의 내부적 힘들의 작동에 근거하여 이해하고 있다. 때문에 칸트는 자연의 역사를 자연의 내면적 법칙에 따라 발생․소멸하는 과정으로 설명하기도 한다. 신의 존재와 자연 법칙의 양립 가능성에 대한 관심을 보여주고 있는 보편적 자연사에서 칸트는 자연을 뉴턴처럼 “신의 직접적인 손”, “신의 직접적인 의지의 통솔” 또는 “신의 선택”에 의해서 조정되고 간섭받고 지배되는 그런 존재가 아니라 자연 자체의 자족적인 운동 법칙에 따라서 움직이는 하나의 거대한 건축물로 이해한다. 이러한 자연 법칙의 필연성이 곧 물질에 내재되어 있는 힘을 움직이고 지배하는 원리로 파악되고 있다. 그리고 신을 바로 기계론적 운동 법칙 및 이에 따라서 스스로 발전해가는 물질을 창조한 자로 상정함으로써 신 존재와 자연 법칙의 양립 가능성을 옹호하고 있다. 그러므로 자연 개념을 오성의 입법 능력 밑에 두게 되는 『순수이성비판』의 세례를 받지 않은 이러한 자연 개념에는 자연 사물들이 갖는 내재적 힘들이 자연 법칙이라는 자족적인 원리에 따라서 지배되는 “끊임없는 창조와 우주적 진보”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어떤 점에서 비유기체보다도 유기체가 갖는 특성이 오히려 이에 더 부합한다. 왜냐 하면 칸트가 이해하는 유기체는 단지 움직이는 힘만을 갖는 것이 아니라 자신 속에 물질을 유기화하는 힘, 즉 자신을 번식시키고 형성하는 힘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칸트의 자연 이해 방식과 관련하여 무엇보다도 주목해야 할 것은 자연에 대한 최초의 확정적인 개념 규정이 등장하는 『순수이성비판』에서의 입장과 비교할 때, 전비판기, 특히 1740년대 중반부터 1750년대 중반까지 칸트가 견지하고 있던 자연에 대한 그의 사고의 가장 중요한 측면은 순수이성비판은 물론이고 그의 말년에까지 완전히 사라지지 않고 보존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다름 아닌 자연은 그에 대한 체계적 인식 이상의 것이라는 생각이다. 선험철학적 토대 위에서 그리고 인간 이성의 한계에서 발견하고 또 근거 짓고자 했음에도 불구하고 칸트에게 자연은 항상 그 이상의 무엇이었다.
자연 개념을 이성의 한계 안에서 근거 짓고자 한 순수이성비판에서의 칸트는 유기체를 포함한 자연의 모든 사물들은 선험적 관념론에 입각하여 이해된 합법칙성으로서의 기계론적 법칙에 따른다고 말하고 있다. 따라서 이러한 대전제에 의하면, 유기적 자연에 대한 어떠한 설명도 기계론과 상호 모순되어서는 안 된다. 그런데 문제는 유기체가 보여주는 합목적적 특성은 이에 대한 기계론적 설명만으로는 만족스럽지 못하다는 데에 있다. 즉, 생명 현상은 비유기체와 판이한 특성을 갖고 있으며, 또 인간이 이러한 유기체들 내부에서 일어나는 복잡한 기계적 관계를 통찰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유기체에 대한 논의를 전개하는 『판단력 비판』에서의 칸트의 시각은 간접적으로 그의 생물학적 지식에 의존한다. 심지어 『순수이성비판』의 핵심적 논의에 해당하는 ‘직관과 개념의 종합이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하는 문제에서도 이러한 유기체에 대한 그의 기본 시각이 전제되어 있다. 이 문제를 칸트는 인식의 두 이질적인 형식이 선험적 구상력의 매개를 통해 실제적인 결합을 가능케 한다는 설명을 통해 해결한다. 칸트에 의하면 “구상력은 지적 종합의 통일성을 위해 오성에 의존하고, 그 각자의 다양성을 위해 감성에 의존한다.” 그러면서도 이 구상력은 양자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심성의 독립적인 근본 능력이다. 구상력을 통해서 감성과 오성이 서로 동화되어감으로써 소위 종합이 이루어진다고 볼 수 있다. 바로 이런 일이 가능한 것도 이성 자신의 유기적 성격에 기인한다. 칸트는 이성의 이런 성격을 “순수 이성의 후생(後生. Epigenesis) 체계”라 부른다. 오성의 범주가 모든 경험 일반의 가능성의 근거를 가지고 있는 것도 이성의 이러한 성격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유기체가 갖는 독특한 지위에 대한 물음은 이미 17세기의 기계론적 체계 안에서 제시되고 있었다. 더욱이 생물학의 역사는 생명체를 물리적-화학적 과정으로 환원하려는 입장(기계론 또는 환원주의)과 여러 가지 이유에서 그러한 환원을 불가능한 것으로 보려는 입장(물활론, 생기론, 신생기론, 전체론 등) 양자의 원칙적인 갈등을 조정․중재하려고 시도한 역사이기도 하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18세기의 칸트 역시 이러한 배경과 전망 아래에서 유기체에 대한 입장들 사이를 중재하려는 하나의 해결책을 『판단력 비판』에서 제시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칸트가 『순수이성비판』에서 분명하게 정립한 형식적 자연 개념은 유기적 존재나 창조적 존재가 아니라 인식론적 관심에서 출발한 현상의 합법칙성 자체와 관계한다. 여기서 자연은 물 자체가 아닌 현상에 대한 오성적 규정에 의해 파악된 감성적 자연이며, 이는 인과 법칙의 지배를 받게 된다. 그러나 『실천이성비판』에서 자연을 이성만이 인식하는 초감성적 자연으로서의 “원형적 자연(die urbildliche Natur;natura archetypa)”과 원형적 자연을 의지의 규정 근거로 삼았을 때 나타날 가능한 결과인 감성적 자연으로서의 “모형적 자연(die nachgebildete Natur;natura ectypa)”으로 구분하는 지점에 이르게 되면, 자연은 기계적 법칙만의 지배를 받는 존재가 아니라 기계론적 설명으로는 불충분한 목적적 자연이 된다. 이러한 자연 설명에 적합한 목적론은 사물의 생성 변화나 질서를 목적의 실현이라는 관점에서 고찰하는 방식이므로 사물을 단지 맹목적인 원인과 결과의 연결에 의해 설명하는 기계론과 대립된다. 또한 한편으로 유기체를 포함한 자연을 기계론적 원리와 목적론적 원리로 설명하는 것은 다 같이 반성적 원리들이다. 기계론적 원리는 보편적인 인과성의 법칙으로부터 도출된다. 이 인과성의 법칙은 오성의 산물이다. 이 때문에 모든 실질적인 경험에 앞서서 우리는 자연 속의 모든 사건은 기계적 원인에 의해서 결정된다고 인식한다. 따라서 기계론적 원리는 경험적 사실과 관계하는 오성이 주관한다. 반면에 목적론적 원리는 경험적인 사실과는 직접적으로 관계하지 않는 이성이 주관한다. 이는 곧 칸트의 목적론은 유기체를 포함한 생물학적 사실에 관계하는 것이 아니라 생물학에 대한 하나의 설명 원리라는 것을 의미한다.
칸트는 이처럼 자연 사물들 중에서 기계적 법칙에 의해서는 설명이 불충분한 유기체의 문제를 바로 목적의 개념을 자연에 투입함으로써 해결한다. 물론 유기체 자체가 실제로 자연 목적을 갖느냐 하는 것은 인간의 인식 능력을 초월한 것으로서 불가능한 일이다. 따라서 칸트의 목적론은 과학적 인식이 아니며, 당연히 이성의 규제적 원리로서만 의미를 갖는다. 이처럼 유기체에 대한 설명에 라이프니츠의 조화(Harmonie) 개념에 비견되는 합목적성 개념을 적용한다는 것은 곧 칸트가 “유기체의 설명에 대한 과학적 탐구로부터 과학 이론적 분석으로의 전향”을 통하여 이 문제에 접근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다시 말해 칸트가 순수이성비판에서 일차적으로 정립한 자연 개념은 오성적 자연이다. 즉, 오성에 의해서 구성된 자연이요 따라서 과학의 대상으로서의 자연이다. 이러한 자연은 기계적인 법칙에 따라 작용하는 세계로서 인과 법칙적 필연성의 지배를 받는다. 그러나 동시에 칸트에 의하면, 이러한 오성적 자연으로는 자연의 모든 사물과 그 산물들에 대한 총체적인 조망에는 도달할 수가 없다. 이 때문에 자연에 대한 포괄적이고 확장된 개념이 『판단력 비판』을 중심으로 해서 마련된 것이다. 이것은 목적론의 문제가 반성적 판단력의 문제와 관련하여 제기되는 시점과 일치한다. 그러나 이 같은 자연 개념의 확장은 이미 『도덕형이상학 정초』에서 예시되어 있으며, 『판단력 비판』을 통해서 체계적인 해명이 이루어지고 있다. 동시에 이는 칸트철학 체계의 대단원에 속하는 자연과 자유의 통일의 근거를 발견하려는 시도와 맞물려 있다.
2)인간의 궁극 목적과 자연의 최종 목적
이상의 고찰을 요약하면, 생물학적 합목적성까지도 포괄하는 확장된 자연은 단순히 오성 개념(Begriff)으로서의 자연을 넘어서 이성의 이념(Idee)으로까지 고양되고 있다. 이 같은 변화는 칸트의 자연철학의 면모를 이해하는 중요한 관건이 된다. 왜냐 하면 다름 아닌 이 대목에서 우리는 칸트철학에서의 인간과 자연의 연관성과 차이, 그리고 자연과 역사에서의 인간의 지위와 역할이 무엇인지를 읽어낼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실마리를 이끌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칸트에 의하면 인간은 이성적, 자율적, 도덕적 존재며, 이는 자연의 여타의 존재자들과 근본적으로 구별되는 징표다. 그리고 인간은 또한 자연의 최종 목적(letzter Zweck)이자 역사의 궁극 목적(Endzweck)이라는 점에서 다른 자연 존재자들과도 확연히 구별된다. 그런데 우리는 이러한 구별이 인간과 자연 자체의 차이가 아니라 인간과 여타의 자연 산물들과의 차이임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칸트는 근본적으로 기계론적 자연관처럼 자연을 일면적으로 규정하는 태도를 경계한다.
그렇다면 인간만이 자연의 최종 목적이요 또 궁극 목적일 수 있으며, 또 인간이 자기 스스로를 이렇게 규정할 수 있는 정당성은 무엇인가? 칸트는 이를 옹호하는 몇 가지 논증 방식을 제시하고 있다. 먼저 가장 강력하게 옹호되고 있는 방식은 『실천이성비판』에서 등장하는 인간이 도덕적(이성적) 존재자라는, 오직 그 때문에 인간이 인간일 수 있다는 사실에 의존한다. 이 근거는 달리 정당화될 수 없는 “이성의 사실(Faktum der Vernunft)”, 즉 우리 자신에게 직접적으로 통찰되는 사실이다. 칸트에게서 인간에게 이성이 부여되어 있다는 것은 곧 인간에게 도덕성이 선천적으로 부여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인간의 선의지(도덕성)는 그 실현을 요구하는 실천 이성의 고유하고 본래적인 관심에 기초하여 인간을 근본적으로 규정짓는 특징이다. 그것은 동시에 인간의 목적을 근거 짓는 행위의 원리이자 목적 자체다. 이러한 자기 정당성을 옹호하는 도덕적 필연성 논증 방식과는 달리 『판단력 비판』에서 뿐만 아니라 이에 앞서 『도덕형이상학 정초』와 『순수이성비판』에서는 이성 내지는 도덕성이 인간에게 주어진 이유는 자연이 의도한 그 자체의 고유한 목적이 있기 때문이라는 논증에 의거한 우회적인 시도가 이루어진다.
그러면 우회적인 방식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가? 그것은 인간이 궁극 목적이 되기 위하여 스스로 해야만 하는 일을 준비시키도록 자연이 어떠한 일을 수행할 수 있는가를 탐구해야 하며, 그것을 우리가 오로지 자연에게만 기대할 수 있는 일들에서 기인하는 가능한 일체의 목적들로부터 분리하는 방식이다. 이는 곧 자연에 의존해서만 시종 가능한 일과―그 근본 소질을 자연이 부여했다는 점에서는 자연에 의존하고 있다 해도― 인간이 자력으로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을 구분하여 후자만이 자연의 최종 목적으로서 인간에게 부여된 궁극 목적임을 논증하는 방식이다. 이를 입증하기 위해서 칸트는 『판단력 비판』에서 “인간의 행복”과 “인간의 문화”라는 두 가지 목적을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다.
그러나 칸트에게서 행복은 항상 자연적 경향성(본성)의 만족과 관계한다. 그리고 이러한 “인간의 자연적 본성은 소유와 향락에서는 어디에선가 멈추어서 만족하도록 되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행복은 인간에 의해서는 결코 명령되지도 도달되지도 않는 것이다. 더욱이 자연은 인간에게 다른 동물들보다 더 큰 은혜를 베풀어준 것도 아니며, 그들과 마찬가지로 보호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자기 고뇌나 인류 파멸에까지 몰아넣는 자연적 소질마저 부여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외부의 자연이 아무리 자비롭다 할지라도 그리고 자연의 목적이 우리 인류의 행복에 향해 있어 은혜로운 자연에 의해서 설사 만족을 얻을 수 있다 하더라도―만일 그렇다면 한 존재자가 행복이라는 목적을 수행하기 위해서 이성과 의지를 소유하고 발휘하도록 계획되었다는 것은 자연이 그 준비 면에서 대단히 서툴렀다는 얘기가 된다―우리의 내부의 자연적 본성이 이러한 자비로운 자연을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에, 자연의 목적은 지상에서의 자연의 체계 안에서는 달성되지 못한다. 이럴 경우 인간은 언제나 자연 목적의 연쇄 중의 한 항에 불과하게 된다.
그런데 인간은 다른 목적에 더 이상 의존하지 않는 궁극 목적으로서의 규정 근거를 스스로 갖고 있다. 이 경우에 인간은 “자연과 자기 자신 사이에 하나의 목적 관계를 부여할 줄도 알고 또 그럴 의지도 갖고 있다는 조건 하에서만” 여러 가지 목적들에 관한 원리면서 동시에 다른 항들의 메커니즘에서 그 합목적성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서는 자연의 최종 목적일 수 있다. 이러한 자기 목적성, 자기 규정 근거의 소유자는 인간의 이성이요 도덕성이어야 한다. 자연에 대해서는 단적으로 무조건적 원리요, 우리의 행위를 규정하는 초감성적 원리요, 목적들의 서열에서 유일한 가능 원리인 도덕성과 이 도덕성에 종속되는 인과성, 즉 목적에 따르는 인과성은 자연 원인에 의해서는 절대로 불가능하다. 따라서 “목적 관계에서는 자기 자신에게 지고한 법칙일 수 있는 그와 같은 이성의 현존만이 세계의 현 존재의 궁극 목적이라고 생각될 수 있다. 이러한 조건을 갖추고 있기 때문에 인간은 더 이상 다른 것에 종속하지 않는 자연의 최종 목적이 된다.
이어서 칸트는 더욱 중요한 또 하나의 가능성을 인간의 문화에서 찾는다. 칸트가 말하는 인간의 문화는 인간이 자신 속에 갖고 있는 “자연을 (외적으로도 내적으로도) 사용할 수 있는 온갖 목적에 대한 유능성(Tauglichkeit)과 숙련성(Geschicklichkeit)”에 의해 산출되는 자연의 목적을 의미한다. 여기서 숙련성을 칸트는 유능성의 가장 중요한 조건으로 보기도 하므로 인간의 문화란 곧 자유로운 이성적 존재자로서의 인간의 유능성의 발휘를 뜻한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유능성이란 “자기 스스로 목적을 세우고 또 (자기의 목적 규정에서는 자연에 의존하지 않고) 자연을 자기의 자유로운 목적 일반의 준칙에 알맞도록 수단으로 사용하는” 능력과 소질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칸트는 자연이 그런 유능성을 인간에게 부여했다는 점에서, 인간으로 하여금 “자연이 자연의 밖에 있는 궁극 목적에 관하여 수행할 수 있는 일이며, 따라서 이것이 자연의 최종 목적으로 간주될 수 있다. ……그러므로 문화만이 인류에 관한 한 자연에 귀속시켜야 할 이유가 있는 최종 목적일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칸트는 여기서 더 나아가 그렇다고 모든 문화가 자연의 최종 목적이 되기에 충분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칸트에 따르면, 문화에는 진보의 단계들이 존재한다. 목적의 촉진과 달성을 위한 유능성의 가장 중요한 주관적 조건인 숙련성의 도야 그리고 이 목적 달성을 위해서는 유능성에 본질적으로 포함되어야 할 목적의 규정과 선택의 조건인 훈육(Zucht) 또는 훈련(Disziplin)의 도야가 있을 수 있으나, 이것은 그 기능상 소극적인 것이며, 의지를 욕망의 지배로부터 해방하는 데에 그 본질이 있다. 즉, 이러한 단계는 단지 어떤 자연물에 집착하여 충동의 질곡에 몸을 내맡기게 하는 욕망 때문에 인간이 스스로 선택을 할 수 없는 상태에서 벗어나게 하는 역할만을 한다. 물론 칸트는 이 같은 욕망과 충동이 갖는 긍정적인 기능을 인정한다. 왜냐 하면 인간의 내부의 동물성이 맡고 있는 역할을 등한히 하거나 훼손하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하여 자연이 우리에게 부여한 고삐 같은 것이며, 또 이러한 동물성이나 경향성의 상호 충돌이나 갈등으로부터, 마치 자연(이성)의 간계처럼 인간이 자신을 무의도적으로 발전시키게 만드는 계기가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욕망과 충동의 합리적 조정을 통하여 이성의 목적이 요구하는 데에 따르는 문화의 진보의 최종 단계는 더 이상 자연 안에서 발견되는 그런 것의 촉진과 실현이 아니며, 따라서 최종 목적도 더욱이 궁극 목적도 아니다. 왜냐 하면 궁극 목적은 무조건적 목적이며, 이는 곧 자연이 충분히 실현할 수 있고 그 이념에 따라 산출할 수 있는 목적이 아니기 때문에, 그리고 그 어떤 것도 그것의 규정 근거가 자연 속에서 발견되는 것이면 그 규정 근거는 언제나 다시 제약되어 있는 법이요, 자연 (감각적 존재자로서의) 가운데에는 그렇지 않은 것이란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최고의 목적 그 자체를 자신 속에 가지고 있어서, 가능한 한 이 최고의 목적에 전 자연을 예속시킬 수 있으며, 적어도 이 최고의 목적에 반해서는 자연의 어떠한 영향에도 복종해서는 안 되며, 의존적 존재자들이 세계 안의 사물의 상호 의존적․종속적인 목적들의 연쇄를 완결시킬 수 있는, 이상의 조건에 부합하는 자가 바로 “가상체(Noumenon)로서 고찰된 인간”, “도덕적 존재자로서의 인간”, “도덕성의 주체로서의 인간”이다.
칸트는 창조의 궁극 목적을 “세계의 성질, 즉 우리가 오직 [도덕] 법칙에 따라서만 명확하게 지시할 수 있는 것에 합치하는, 다시 말하면 우리의 순수 실천 이성의 궁극 목적[최고선]에 합치하는, 그것도 이성이 실천적인 한에서 합치하는 성질이다”고 정의한다. 한마디로 도덕적 근거에서만 창조의 궁극 목적에 대해서 말할 수가 있다는 것이다. 동시에 자연의 최종 목적으로서의 “도덕 법칙 아래에 있는 인간”, 즉 “모든 이성적 세계 존재자”로서의 도덕적 존재자만이 창조의 궁극 목적일 수 있는 것이다. 결국 인간의 도덕적 본질에 근거를 둔 자연의 최종 목적과 실천 이성의 궁극 목적은 창조의 궁극 목적에서 일치한다.
3)인간(도덕성)과 자연
선험철학적 지평에서 정초된 칸트의 자연관은 인간중심주의에 기초해 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서 칸트에게 자연은 알 수 있는 그 무엇이면서 동시에 알 수 없는 그 무엇이다. 즉, 대상화된 현상이자 인식 대상으로 우리와 마주하고 있는 자연이면서 또 인간의 사유를 넘어선 대상화될 수 없는 자연이기도 하다. 칸트는 알 수 있는 길로부터 시작해서 알 수 없는 길로 나아가는 방도를 선택했다. 이 두 길이 한 길에서 만날 수 있는 연결점을 인간의 도덕성과 자유에서 찾았다. 이는 곧 인간만이 목적이요, 인간 이외의 것들은 수단적 가치만을 갖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러한 표현은 상당한 주의를 요한다. 목적적 가치를 갖는 것은 인간 자체가 아니라 인격, 정확히는 인격성이요 도덕성이다. 또 수단적 가치만을 갖는 것은 자연 자체가 아니라 생명체들을 포함한 자연의 산물들이다. 나아가 인간의 도덕화를 위해서는 때로는 자연의 생명체들은 단순한 수단적, 도구적 가치 이상의 존재로서 격상되기도 한다. 왜 그런가?
칸트에게서 자연이란 한편으로는 인간의 이성을 수단으로 하여 최고선을 향해 점진적으로 자신의 의도를 달성해가는 과정이요, 다른 한편으로는 “플라톤의 에로스에 버금가는” 인간 이성이 자연과 투쟁하고 조화를 이루면서 자신의 욕구를 실현해가는 과정이다. 따라서 역사적 맥락에서 사용되고 있는 칸트의 자연 개념은 카울바하가 지적하고 있듯이 두 가지 분명히 구분되는 의미를 갖는다고 할 수 있다. 기계론적 인과성의 지배를 받는 오성적 역사로서의 자연 개념과 목적론적 인과성의 지배를 받는 이성적 역사로서의 자연 개념이 그것이다. 이는 동일한 하나의 대상을 언급하는 상이한 방식에 불과한 것으로서 도덕적 목적론에 의해서 하나로 연계되어 있으면서도 오성적 역사관이 이성적 역사관에 종속하는 구조를 갖는다. 이러한 의미의 자연은 인간의 자유를 제한하는 역할과 그 자유를 실현해가는 역할을 동시에 수행한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인간 자신의 도덕적 자유가 실현되어간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칸트는 실제로 자연을 때로는 역사의 의미와 동일시하기도 하고, 또 역사 속에서 작용하는 신의 섭리라는 의미까지도 부여한다. 이러한 의미의 자연은 심지어 “도덕이요 문화요 역사”라고까지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역사를 인간의 자연적 욕구를 실현해가는 과정으로만 보면 자연의 산물들은 이를 위한 수단적 가치만을 갖는다. 그러나 도덕적 인간 이성의 궁극적이자 최종적인 목적이 도덕적 문화의 성취에 있게 되면, 자연의 산물들은 간접적이며 소극적이긴 해도 도덕적 고려의 대상으로 격상된다. 칸트는 심지어 그것을 자연이 인간에 이성을 부여한 이유이자 목적으로까지 해석한다. 그리고 자율적 이성은 이러한 목적을 스스로 성취해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 점에서 칸트에게서 역사는 한편으로는 원초적 자연으로서의 신의 섭리의 작용사며, 다른 한편으로는 단순히 섭리만의 작용사가 아니라 동시에 그것은 인간의 자유가 도덕과 문화 나아가 자연과 상호 작용하는 가운데 점진적으로 자연의 합목적성과 조화를 이루어가는 과정이 된다. 그러므로 역사의 목적은 “도덕으로부터 생기며”, 이러한 도덕적 목적은 “실천 이성이 자신의 도덕성에 기초하여 상정하는 하나의 이념이며, 역사의 진보는 자연의 숨겨진 계획에서만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실천 이성의 의식적 노력에서 기인하기도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칸트의 관점에서 볼 때, 자연은 도덕적 측면에서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가? 기본적으로 칸트의 인간중심주의적 자연관에 따를 경우, 우리가 자연 속에서 마주치는 생명체를 포함한 사물들은 수단으로서의 상대적 가치만을 갖는, 즉 전혀 도덕적 고려의 대상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가 칸트의 논리를 따라 “자연”과 “자연 산물”을 구분하게 되면 사정은 달라진다. 인간의 도덕화가 자연의 최종 목적이자 역사의 궁극 목적이며, 그에 따른 인간의 의무를 고려할 때 가치 중립적인 자연 산물들은 인간적 관점에서는 단순한 수단이나 도구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도덕적 가치도 함께 갖는다. 비록 고려의 정도가 소극적이고 간접적일지라도, 칸트는 자연 사물들이 인간의 도덕적 행위와 깊은 관련이 있음에 주목하고 있다. 칸트에 의하면, 생명이 없는 아름다운 수정이나 식물계 등을 파괴하려는 성향은 “도덕성을 촉진하는 감성”에 나쁜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인간의 자기 자신에 대한 의무에 위배된다.” 또 이성을 갖지 않은 동물일지라도 그들을 난폭하고 잔인하게 다루는 것은 “도덕성에 도움을 주는 자연적 소질을 약화시켜 차츰 사라지게 하기 때문에” 그 같은 행위를 삼가야 할 의무는 “인간의 자기 자신에 대한 의무에 보다 더 근접해 있다.” 이러한 이유에서 칸트는 “동물이 고통을 느끼지 않도록 신속하게 죽이는 것”, “동물에게 그 능력을 넘어서지 않는 범위에서 일을 시키는 것” 등을 인간의 권한이라는 관점에서, 그리고 “목적 성취를 위한 다른 방도가 없는 불가피한 경우가 아니라면 동물에 대한 가혹한 생체 실험은 피해야 한다”, “오랫동안 마치 한 가족처럼 헌신해왔던 늙은 말이나 개에 대한 감사는 간접적으로 인간의 의무다”, “동물과 관련한 감사는 직접적으로 언제나 인간의 자기 자신에 대한 의무다” 등을 인간의 의무라는 관점에서 강조하고 있다.
물론 이런 요구들은 “도덕적 의무”에 부여했던 “행위의 필연성”과 동일한 자격을 갖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인간을 위한 자연(산물)과의 관계에서 요구되는 의무일 뿐이다. 심지어 칸트는 아름다운 것들과 아름답지 않는 것들, 인간에게 중요한 동물들과 그렇지 않은 동물들을 차별적으로 대우하는 것을 허용함으로써 역으로 자연 생명체들의 가치를 상대화시키는 것뿐만 아니라 그 기준의 임의성으로 말미암아 어떤 행위도 정당화될 수 있는 논리적 약점을 안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생태학적 위기를 경험해보지 못한 칸트에게 모든 문제에 대한 만족할 만한 답변을 기대할 수는 없다. 분명 자연에 대한 칸트의 윤리적 관점은 인간의 욕구 충족을 위한 수단적 가치만을 자연에 허용하는 인간중심주의적 환경 윤리와는 다르다. 근본적으로 칸트의 자연 개념에는 과학적 자연관을 넘어서 인류의 도덕화를 위한 형이상학적 의미가 담겨 있다. 자연에 대해서 인간이 저지른 행위는 인간 자신의 도덕성에 나쁜 영향을 미치고 결과적으로 자연의 피조물로서 인간의 사명을 거역하는 것이며, 이는 결국 자연의 황폐화는 곧 인간성의 황폐화를 초래하게 될 것이라는 칸트적 경고에 다름 아니다.
3.헤겔의 사변적 자연철학
1)자연학적 자연 개념
자연이란 무엇인가? 이에 대한 헤겔의 답변은 무엇일까? 과연 헤겔은 분명한 답을 제시하고 있는가? 헤겔이 자연을 주제로 삼고 있는 글들은 예나 시대에 씌어진 몇몇 단편들을 포함하여 『정신현상학』의 「이성」 부분의 “자연의 고찰”과 그의 전철학 체계를 집대성해놓은 『엔치클로패디』 제2부 「자연철학」 등이다. 특히 헤겔의 자연 개념은 『엔치클로패디』의 제2부 「자연철학」에 체계적으로 기술되어 있다. 헤겔철학의 다른 주제들과 달리 그의 자연철학은 역사적으로 엥겔스의 자연변증법의 영향 아래서 주목받은 경우를 제외하면 “헤겔철학의 서자”로 평가절하될 만큼 상당히 소홀하게 취급받아왔다.
그러나 헤겔은 오히려 자신의 특유한 언어로 그 이전에 그 누구도 자연의 정체에 대해서 명료하게 해명하지 못한 한계를 극복하려 한다. 일단 헤겔의 언어와 사고 그리고 논리를 따라가보자. 이를 위해서는 우선 자연철학의 원리와 체계를 담고 있는 『엔치클로패디』의 구성 방식에 따라 그의 자연학(Physik)과 자연철학(Naturphilosophie)의 구분 및 그 관계에 대한 고찰로부터 접근하는 것이 좋다. 넓은 의미에서 자연은 인간의 본성에 속하며, 또 인간은 자연의 일부분이다. 그런 점에서 자연은 어떤 방식으로든 인간과 관계한다. 그렇다면 그것은 어떤 방식으로 관계하는가? 헤겔적 사유에 의하면, 여기에는 ‘인간에게 자연이란 무엇인가?’와 ‘자연에게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두 가지 종류의 물음이 공속해 있다. 과연 헤겔은 자연이라는 거대한 미로에 어떻게 접근하면서 우리의 궁금증을 풀어줄 것인가?
우선 자연학과 자연철학에 대한 헤겔의 입장이 첫 번째 실마리가 된다. 헤겔은 전통적 의미의 자연철학을 자연학에 속하는 탐구로 평가절하한다. 성격상의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칸트의 자연철학 또한 예외가 아니다. 그러나 헤겔은 전통적 자연철학의 사유 방식과 역사적 전개 및 그 한계를 부정적으로 보는 데만 그치지 않고, 자신의 사변적 자연철학과의 발전적 연관 속에서 파악한다. 결국 헤겔은 자연학과 자연철학의 근본적인 연관성과 차이점을 규명하는 일로부터 자연에 대한 탐구를 시작한다.
헤겔은 자연학과 자연철학을 엄격하게 구분한다. 자연학 또는 전통적 의미의 자연철학을 오성적 사유에 의해 자연을 고찰하는 방식(학문) 또는 “자연에 대한 사유적(denkend) 고찰”로 규정한다. 그리고 이를 자연에 대한 개념적(begreifend) 고찰로서의 자신의 사변적 자연철학과 대비시키고 있다. 오성적 사유와 사변적(이성적) 사유로도 표현되는 이들 양자의 관계는 헤겔철학에서 이들 용어가 차지하는 고유한 의미를 고려할 때, 완전히 질적으로 차원이 다른 자연 고찰 방식이다. 그러나 헤겔은 자연학 자체가 그 무엇을 보편적 규정에 따라 고찰할 줄 아는 존재의 능력으로서의 사유의 자연스러운 성과이기도 하기 때문에, 자연학에 대한 정당한 평가를 통하여 자연의 개념에 접근해나간다.
그렇다면 우선 오성적 사유에서 파악되는 자연학이 우리에게 제시해주는 자연 개념은 어떤 것인가? 자연학적 자연 고찰은 한마디로 과학적 내지는 오성적 자연 인식 방식이다. 이러한 자연 고찰은 인간 본성의 자연스런 경향이다. 그런데 사유의 본성 자체를 변증법적인 것으로 파악하는 헤겔에게서 “오성으로서의 사유는 자기 자신의 부정, 즉 모순에 빠질 수밖에 없다.” 즉, 오성적 사유는 결국 자연 자체의 내면적 본질이 아니라 주관적 원리 위에서 표상적 사유에 의해서 대상화, 객관화된 자연, 즉 다양성으로서 외면화된 개별적이고 특수한 사물로서의 자연 대상들 일반에 대한 규정에 불과한 것이기 때문에 자연학은 이러한 오성의 한계를 올바로 통찰하지 못하는 모순에 봉착한다. 이러한 규정 속에서 이들 자연 안의 생명체들은 각자 타자와 관계를 맺으면서 자신을 목적으로 타자를 수단으로 하여 존재하는 것으로 경험된다. 특히 대자적으로(für sich) 자기의 목적을 인식한다는 점에서 동물과 구별되는 인간은 스스로 모든 자연 대상들에 우선하는 목적적 존재로서 행동하게 된다. 이 같은 방식의 자연 고찰은 “유한적-목적론적(endlich- teleologisch) 입장”을 낳는다. 헤겔에 따르면 이는 인간과 자연 상호간의 본질적인 내적 연관을 보지 못하고, 다만 상호 외면적으로만 파악하기 때문에 자연에 대한 지배와 도구화를 정당화시켜준다.
유한적-목적론적 입장은 자연 대상으로서의 타자를 수단으로, 그것도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는 데 적합하도록 규정한다. 주관에 대한 객체로서 정립되는 자연 대상들은 인간의 목적 실현을 위해서 도구적으로 변형되며, 이를 보다 수월하게 하도록 분량 또는 측정 가능한 방식을 도입하며, 이를 학문성의 규준으로까지 정립한다. 자연이란 결국 이 같은 개별적이고 특수한 자연 대상들의 총체에 불과한 것이 된다. 여기에는 인간을 포함한 자연 대상들간에는 수단과 목적이라는 상호 관계의 형식적 규정만이 존재한다. 그런 자연은 수단적 가치만을 갖는 존재로 전락하게 된다.
이렇게 자연(과)학적으로 그리고 오성적으로 파악된 자연 개념은 자연 가운데 내재하는 갖가지 힘, 법칙, 유 등의 보편성을 주관적 규정에 따라 인식하여 체계적으로 정리, 분류, 조직하려 든다. 근대의 과학적 세계관이 보여주듯이 이 같은 작업의 성공은 자연에 대한 합리적 지배를 보장한다. 그러나 헤겔에 따르면 이런 자연 고찰은 자연에 고유한 내재적 필연성을 통찰하지 못하는 일면적 고찰이다. 왜냐 하면 오성적 자연학은 힘, 법칙, 유 등의 개념으로 자연 그 자체인 자연의 보편자를 파악하려 하지만 이들 개념들은 단순히 자연학의 근본 개념들로서의 보편성에 불과한 것이어서 스스로 작용하는 자연 그 자체의 내면적 본질과 운동의 근원을 파악할 수가 없다. 때문에 자연학은 다수의 힘들, 법칙들, 유들의 형식적 통일에 그치고 만다. 이들 보편적 개념들은 자연 자체가 아니라 대상화된 자연 대상들의 규정 방식일 뿐이다. 여기에는 자연이 이미 주관에 대하여(für) 객관으로 전제되어 있다. 따라서 개별적인 자연 대상들은 자연 일반의 목적에 대해서 답할 수 없으며, 여기에 오성적 사유에 의한 자연학적 자연 고찰의 한계가 있다. 헤겔에 의하면, 오성은 기본적으로 주관적이며, 객관과 대립하며, 그 제한성으로 말미암아 규정된 것들이 상호 대립하는, 즉 “유한한 규정만을 산출하는 사유”이기 때문에 그 같은 자연 규정은 일면적이다.
2)사변적 자연 개념
헤겔이 경험적 자연과학들의 성과를 비판적으로 수용하면서 최종적으로 도달한 자연 개념은 이성 내지 사변(Spekulation)에 의해서만 파악될 수 있는 그런 것이다. 어떤 사태를 근원으로부터 통찰하는 사변은 개념적 사유의 능력이며, 칸트와 비교하자면 반성의 반성 능력이다. 헤겔은 “반성을 반성할 줄 아는 철학”을 “사변적”이라 말한다. 그런 점에서 이 같은 이성의 반성 능력으로서의 사변은 개념으로서의 절대자의 인식 가능성을 보장한다. 그러나 헤겔이 말하는 개념은 오성적 사유에 의해 파악되는 것, 즉 개별자로 주어진 다양들로부터 추상된 형식적 보편자가 아니라 내용과 형식의 규정이 함께 하는 구체적 보편자다. 헤겔의 사변적 자연 개념도 이러한 의미에서 자연을 개념적으로 파악할 것을 요구한다. 그렇다면 자연을 개념적으로 파악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를 위해서는 개념 자체의 성격에 대한 이해가 요구된다. 이 때문에 헤겔의 사변적 자연철학은 전적으로 그 자신의 필연성으로부터 유래하는 “개념의 자기 규정”의 해명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다면 자연학의 사유적 고찰이 아닌 사변철학의 개념적 고찰, 즉 개념적으로 파악함의 필연성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러한 사유의 필연적 수행은 사태 자체의 본질을 개념으로 파악하도록 인도한다. 칸트와 비교해보자. 칸트는 자연 현상들의 과학적 원리들을 근원적 통각에 근거하여 정초하였지만, 칸트의 자아는, 비록 이 또한 개념이긴 하지만, 다만 형식적 의미만을 갖는 선험적 원리 그 이상의 것에는 이르지 못한다. 헤겔에 의하면 표상적 사유의 형식에만 관계하는 개념이 아니라 표상으로서의 현상 규정들을 가능하게 하는 개념 자체의 본성이 해명되어야 한다. 헤겔철학을 구축하고 있는 본령에 속하는 이 ‘개념의 논리’에 따르면, 칸트식의 자아가 대상을 규정하려면 그 자아는 이미 확실히 먼저 개념이지 않으면 안 된다. 왜냐 하면 칸트가 ‘연역’으로 정당화시켜놓은 범주의 근저에는 이미 그러한 개념적 이해가 전제되어 있지만, 칸트 자신은 단순히 “자아의 근원적 활동성”으로 전제할 뿐이다. 그러나 자아가 그러한 근거지음의 원천이라면 자아 자체 또한 사유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지 않을 경우 대상 인식의 필연성은 정당화되지 못한다. 칸트에 의하면 그것은 인식의 한계를 넘어서는 일이었지만, 헤겔은 자기 자신 및 대상과 관계하는 개념으로서의 자아가 선행적으로 파악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본 것이다. 이는 ‘파악한다’, ‘붙잡는다’는 의미의 ‘greifen’으로부터 온 ‘개념(Begriff)’이란 말 자체의 어원적 의미와도 상통한다. 이 같은 헤겔의 논리는 자연 고찰의 경우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헤겔에 따르면, 주-객 대립의 이원적 자연 고찰은 대상화된 개별적이고 특수한 대상들만을 탐구한다. 따라서 자연의 보편자, 자연 자체는 추상화된 형식적 규정이자 통일에 불과한 것이 되고 만다. 가령 대상들의 공통된 표상만을 의미하는 추상적이고 형식적인 규정, 즉 대상성(Gegenständlichkeit)의 규정이 칸트적 의미에서의 개념이다. 반면 헤겔의 개념은 대상 규정만이 아니라 자기 자신과 관계하는 본질 규정의 원천이요, 자기 규정의 원리이자 단적으로 이성(정신)의 자기 인식이다. 따라서 헤겔에게서 이 같은 “이성의 최고의 힘(Kraft), 아니 이성의 유일한 절대적 힘”으로서의 개념은 이성 자신이며, “이성의 가장 내적인 본질로부터 나오는 힘이다.” 그리고 이러한 힘으로서의 개념은 “자신을 실재화하는 능력을 갖고 있으며, 그러한 능력 자체다.”
헤겔은 이런 의미의 개념에 또 하나의 중요한 성격을 부여한다. 그것이 곧 개념 자신의 “내재적 필연성”이다. 따라서 개념적으로 파악한다는 것은 그 내적 필연성의 파악을 뜻한다. 헤겔에게서 모든 것은 근본적으로 개념 자신의 내적 운동이요 활동이다. 또 이 필연성의 고찰은 근원적으로는 정신의 자기 파악이며, 어떤 사태의 모순과 대립도 개념의 내적 필연성이 전개되고 실현되는 자기 귀환의 운동 과정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러한 “개념의 필연성”과 그 과정을 인식할 수 있는 것은 그러한 능력을 소유하고 있는 정신이기도 한 인간을 매개로 해서다. 따라서 인간의 이성은 이러한 필연성을 파악할 수 있는 절대적 입장의 소유자인 것이다. 헤겔은 인간의 정신을 매개로 한 개념의 파악과 그 같은 개념 파악을 허용하는 절대적 입장을 전제로 해서 자연 또한 개념으로 파악한다.
『엔치클로패디』의 구성이 보여주듯이 헤겔의 철학 체계는 논리의 학, 자연철학, 정신철학으로 구성된다. 자연의 개념적 규정을 시도하는 자연철학은 논리의 학이 일단락 된 후에 전개된다. 또 논리의 학은 논리적으로 자연철학을 포괄한다. 이는 곧 자연 개념이 개념으로부터 이념, 자연, 정신에 이르는 절대 이념의 자기 귀환이라는 일련의 과정 속에 위치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헤겔은 자신의 사변적 자연 개념을 다음과 같이 규정한다.
자연은 타재(Anderssein)의 형식에서의 이념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이념은 자기 자신의 부정으로 또는 스스로 외적으로 존재하기 때문에 자연은 이 이념(및 이념의 주관적 실존인 정신)에 대해서 상대적으로만 외적인 것이 아니라, 외면성이 그 안에서 자연으로서 존재하는 규정을 형성한다.
이 구절이 보여주듯이 자연과 이념의 관계를 통해서 개념으로서의 자연의 본질이 규정되고 있다. 헤겔의 존재론적 논리학에 의하면 개념은 최초에 추상적 존재로부터 시작하여 자신의 내용과 최고로 부합하는 개념인 절대 이념, 즉 “충만된 존재, 스스로를 파악하는 개념”으로 끝맺는데, 이 이념이란 “개념과 사실성의 통일”을 의미한다. 또 이념은 자기 속에서 자기 스스로를 현상시키고 스스로를 전개시키면서 자신을 실현해나간다. 자연 역시 직접적으로는 정신의 타자면서 이념의 한 존재 방식이다.
이러한 자연은 한편으로 이념과 구별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이념 자신의 내적 규정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다. 그렇게 규정되어 드러난 이념의 외면성 자체가 곧 자연이다. 여기서 외면성이란 따로 내면이 있고 또 속과 다르다는 의미의 밖이 아니다. 아직은 완전한 통일(또는 자기)에 이르지 못한 이념의 자기 모습이다. 또 자연은 이런 외면적 대상들의 세계이기도 하다. 따라서 두 개의 자연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즉, 우리가 목도하는 자연 현상 이외의 또 다른 본질적 자연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전통적 존재론은 본질과 현상, 필연과 우연, 영원과 시간, 존재와 생성 등 존재하는 것 일체를 상호 대립적인 두 규정을 통해서 존재자의 본질을 탐구해왔기 때문에, 자연은 항상 본질적 자연과 비본질적 자연으로 대비되어 왔다. 넓은 의미에서 칸트도 예외는 아니다. 반면 헤겔에게 자연은 다른 그 무엇이 됨으로써 비로소 자기 자신이 되는 것, 즉 그 자체가 이념의 타재다.
이처럼 헤겔은 자연을 이념으로 소급시킨다. 그리고 이념이 자연으로 외화하는 것을 밖을 향한 것이 아니라 안을 향한 것으로 파악함으로써 하나의 자연만이 존재하며, 자연을 곧 이념의 외면성으로 규정한다. 그리고 이 이념 내부에서 이루어지는 이념의 외면성 자체가 유일한 자연의 모습이다. 단순히 어떤 본질이 있고 그것의 현상이 따로 있다는 의미에서의 외면성이 아니다. 이념 내부에서 이념이 자신을 개념의 원리에 따라 규정한 이념 자신의 자기 부정의 모습이 자연 그것인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자연이 개념으로 파악되기 위해서는 먼저 절대자로서의 이념 자체가 개념으로 파악되지 않으면 안 된다. 또한 이러한 개념 파악을 수행하는 그 본질에서 정신인 인간 또한 개념이지 않으면 안 된다. 그래야만 이념으로서의 자연은 비로소 개념으로 파악될 수가 있다. 역으로 이 말은 이념이 자신을 스스로 (자연으로) 개시하기 위해서는 정신인 인간을 중재자로 삼아야만 한다는 것을, 다시 말해 (주관적) 개념으로서의 인간은 자신을 매개로 하여 이념으로서의 자연이 그 자신이면서 또 자신과 다른 존재라는 것을 비로소 알게 된다. 결국 헤겔에게서 자연 그 자체가 무엇인가 하는 것은 이념을 넘어서 정신이란 무엇인지에 대한 이해로 귀착된다. 자연을 포함하여 우리가 마주치는 “현실을 개념적으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사변적인 자연철학 이외에도 사변적인 정신철학이 불가결한 것”도 이 때문이다.
3)인간(정신)과 자연
헤겔철학에서의 대전제이자 대원칙은 정신은 반드시 구체화되어 나타나지 않으면 안 되며, 이런 구체화 없이 정신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헤겔에게서 이념은 본래 그 자신으로 되어가는 정신이다. 이념이 자연으로 외화하는 것은 자연의 최고 형태인 생명(체), 그리고 생명 형태들 중에서 궁극적으로 인간의 생명에서 (영혼과 의식의 단계를 거쳐) 정신으로 발현하기 위해서다. 결국 이념의 일시적인 타재의 형태가 자연이며, 자신으로 되어가는 정신이 자연이며, 또 그런 점에서 자연은 생성하는 정신(der werdende Geist)이다.
헤겔은 『엔치클로패디』의 「논리의 학」을 유론, 본질론, 개념론으로, 개념론의 마지막 절을 ‘절대 이념’으로 마치고 있다. 그리고 이념의 외화로서의 자연을 고찰하는 「자연철학」은 공간과 시간, 유한 역학(물질과 운동론), 절대 역학(천문학)을 다루는 “역학(Mechanik)”, 빛, 원소, 밀도, 응집력, 음향, 열, 자기, 전기, 화학적 과정 등 무기적 대상들을 다루는 “자연학(Physik)”, 물체의 참된 통일체인 생명을 다루는 “유기체적 자연학”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마지막 유기체학에서 비로소 등장한 생명은 지질적 자연, 식물적 자연, 동물적 유기체의 단계를 거친다. 그리고 이 동물적 생명 다음에 육체적 생명을 가진 인간적 정신에로 이행한다. 이처럼 무기적 자연에서 유기적 자연으로, 생명과 정신으로 진행되는 과정에는 연속성과 계층성이 함께 한다. 즉, 다음 단계는 이전 단계에 연속해서 일어나지만 그 전단계와는 질적으로 완전히 다른 계층성을 갖는다. 따라서 헤겔에게서 같은 생명체면서 동물과 인간은 전혀 다른 원리에 입각해서 이해되어야 하는 존재들이다.
헤겔은 이러한 과정을 거쳐서 결국 자연을 정신화한다. 그러나 자연은 그 본질에서 이미 정신이다. 헤겔의 말을 빌리면 “정신은 우리에 대하여 자연을 자신의 전제로 삼으며, 자연의 진리 곧 그 절대적 우선자가 정신이다.” 결국 헤겔적 의미에서 자연이란 곧 정신철학의 문제에 다름 아니며, 정신은 자연의 진리태로 정립된다. 자연에서 정신으로의 전개는, 정신의 관점에서 볼 때 자연에 대한 정신의 지배를 허용한다. 왜냐 하면 정신(생명)이 결여되어 있는 자연은 “스스로의 힘으로 완전한 자기 규정에 이를 수 없는 유한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연은 이미 그 본질에서 정신이기에 그것은 일방적인 지배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런데 헤겔이 말하는 정신은 우주적 정신이면서 또한 구체화된 주체로 파악된다. 그런 정신 또는 우주적 정신은 구체화되어 나타나려면 반드시 어떤 방식으로든 매개되어야 하고 외면화되어야 한다. 경험적 자연 대상들, 무생물, 생물, 생명 등은 다 그렇게 구체화된 것들이다. 보다 추상적인 것에서 보다 구체적인 것으로의 운동 과정은 언제나 그때마다 정신(이념)과 동일한 것이면서도 그 자신과 대립한다. 따라서 절대 정신이 구체화되어 완전한 인식에 도달할 때까지 유한한 정신이 필연적으로 존재해야 한다. 그가 인간이다. 결국 정신은 유한한 정신으로서의 인간을 매개로 해서 구체화되어 나타난다. 이런 점에서 소위 규제적 이념으로서의 칸트적 의미의 자기 형성적 유기체(자연)의 목적론이 헤겔에게서는 존재론적 의미의 (자연) 목적론으로 전화되고 있다.
이러한 존재론적 과정들은 시간적 발생이나 자연적 진화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그 본질에서 정신인 이념 안에서 일어나는 개념의 자기 운동이며 자기 규정이자 자기 실현 과정이다. 따라서 헤겔의 관점에서 보자면, 진화 자체가 정신으로서의 자연 자체의 운동의 결과인 것이다. 그런데 인간은 자연의 일부분이면서 동시에 그 본질에서는 정신이다. 인간과 더불어 자연 또한 정신의 자기 실현 및 귀환의 한 단계를 형성한다. 이 과정에서 인간을 포함한 일체의 것들은 전체의 부분으로 현존하며, 또 인간은 자연을 정신과 대립하는 것으로 정립한다. 그러나 만일 인간이 자신을 자연과 대립시키고 분리시키기만 한다면, 이는 결국 인간 자신을 분열시키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인간은 정신과 자연의 분열과 대립을 극복함으로써만 자신과 자신의 생명을 보존할 수 있다. 따라서 정신으로서의 인간은 자신의 의지에 따라 자연을 이용하고 지배함으로써 자신을 실현해야 하지만, 이는 자연과의 대립 자체가 아니라 종국에는 자연과의 조화와 통일을 위한 행위여야 한다. 이는 곧 정신과 자연은 서로 대립하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상호 보완적임을 의미한다. 따라서 자연의 위기는 곧 정신의 위기요 인간 자신의 위기와 동일한 존재론적 의미를 갖는다. 절대 정신이라는 거시적 관점에서 보면, 인간과 자연의 조화와 통일이란 인간 정신을 통한 우주적 자연과 우주적 정신과의 그것이어야 한다. 결국 인간과 자연의 대립과 불화란 이념 자신의 시초(Anfang)의 추상적 통일이 구체적으로 실현되는 과정에서 야기된 불가피한 것이며, 나아가 정신의 자기 실현으로서의 절대 이념에서 다시금 시초의 추상적 통일이 복구되고 화해에 도달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 가능성은 전적으로 그 자신이 정신이기도 한 인간이 그러한 대립과 갈등의 근원을 철저히 사유할 경우에만, 다시 말해 스스로가 직면한 위기를 극복하고자 전력을 다할 경우에만 헤겔적 의미에서의 화해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그러한 사유는 어떠한 사유여야 하는가?
헤겔 존재론의 논리에 따르면, 인간과 자연의 분열은 필연적이고 분열이야말로 화해를 위한 필연적 전제다. 정신의 자기 실현을 위해 분열이 불가피한 것처럼 화해 역시 필연적이다. 그렇다면 인간과 자연, 나아가 정신과 자연의 화해는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그 과정에서 절대 정신의 한 계기인 유한한 정신으로서의 인간은 어떤 의미에서의 주인공인가?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이러한 분열과 화해를 이룩하는 주인공은 유한한 정신으로서의 인간 자신, 더 정확하게는 인간의 사유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를 통해 먼저 인간은 자기 자신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은 인간 자체가 갖는 “개념과 실재”의 존재론적 규정에서 볼 때 당위적인 요구가 된다. 그리고 “인간이 자기 자신이 되기 위한 유일한 기회는 자신의 개념을 실재로 도야시키는 것이며, 그런 후에야 인간은 절대 정신 자신의 모습으로서 절대자에 참여하게 된다.” 그때만 진정으로 인간 자신의 위기인 자연의 위기도 극복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인간의 자기 이해로서의 사유에서 그 화해의 가능성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은 곧 우리가 원시적인 자연으로 돌아간다거나 막연한 자연 보호의 차원이 아니라 작게는 인간에게 크게는 정신에게 자연이란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사유해 내야만 하며, 그럴 경우에만 생태학적 위기의 극복도 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이 미래의 생존이 문제시되고 있는 인류에게 헤겔이 들려주는 지혜다.
4.맺음말 : 어떤 자연윤리학이어야 하는가?
필자는 생태학적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인간의 자연과의 연관성(혹은 동일성)만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근본적인 차이점을 우선적으로 고려한 것이 아니면 안 된다는 입장으로부터 출발했다. 칸트와 헤겔은 방법과 원리상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모두 오성적 합리성, 즉 근대의 자연과학적 합리성의 일면성과 데카르트와 뉴턴의 실체론적 자연관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면서도 그 한계를 사유한 인물들이다. 그리고 그들은 그러한 일면성과 한계 너머에 있는 보다 중요한 세계의 존재를 인정했다. 칸트는 자연의 메커니즘을 통해서만 역설적이게도 자연의 진정한 의미와 목적에 도달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고, 헤겔은 자연의 메커니즘을 역동적인 자연 자체의 한 존재 방식으로 파악했다. 이와 같이 자연이 인간에 대해서 갖는 근원적 의미를 칸트는 (자연)과학적 인식을 넘어서 인간과 자연의 근원적 관계에 근거한 도덕의 세계에서, 헤겔은 인간과 자연 모두를 포괄하는 정신의 세계에서 찾았다. 그들에 따르면 자연이 인간에게 부여하는 진정한 가치는 각각 도덕 및 정신을 통한 자유의 실현에 있다. 칸트는 인간이 진정한 도덕적 자유를 성취하려면, 제한적으로나마 자연 생명체들에 대한 고려가 필요하며, 그것은 자연에 대한 인간의 의무임을 강조한다. 헤겔은 자연의 위기가 곧 인간의 위기며, 또 위기를 초래한 책임은 다름 아닌 인간 자신에게 있음을 말하고 있다.
칸트는 인간을 자연의 피조물이면서 동시에 창조의 궁극 목적으로 파악함으로써 인간(도덕성)과 자연의 근본적인 차이를 인정한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서 그것은 자연 자체가 아닌 자연 산물과 인간의 차이다. 인간을 창조한 근원적 존재로서의 칸트의 자연 개념 속에는 인간의 도덕화라는 목적과 그에 따른 자연 산물들의 적절한 사용과 도덕적 배려가 공존한다. 인간성의 황폐화를 막기 위한 자연물과 생명체에 대한 인간의 의무가 그것이다.
헤겔 또한 인간을 매개로 한 자연과 정신의 동일성 및 그 차이를 말한다. 더욱이 인간은 자연의 한 부분이자 자연과 대립하는 존재라는 점을 인정하면서 동시에 우주적 정신의 두 계기인 인간과 자연의 상보성을 강조한다. 그리고 인간을 전체의 한 부분이며, 전체와의 조화 없이는 아직 자신의 본질에 이르지 못한 존재며, 인간의 생명은 거대한 우주적 생명의 일부라는 것을 가르쳐준다. 따라서 자연의 위기가 정신으로서의 인간의 책임인 만큼 화해 또한 인간의 몫임을 일깨워준다.
칸트와 헤겔 모두 자연을 인간에 대해서 수단적 가치를 갖는 존재로 인정하면서도, 칸트는 도덕적 목적에 의거해서, 그리고 헤겔은 정신의 자기 목적에 의거해서, 그 같은 태도의 일면성을 비판한다. 이들은 직접적으로든 간접적으로든 인간의 이기적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한 수단으로서가 아니라 인간이 진정으로 자기 자신의 주인이 되기 위한 목적에서 자연의 가치를 인정하고 있다. 그러므로 칸트와 헤겔의 자연 개념에 근거한 자연 윤리는 인간 자신을 위한 자연에 대한 고려에 입각한 규범들로 이루어지게 된다.
칸트의 경우에 자연은 직접적인 도덕적 고려의 대상이 아니다. 그러나 동물에 대한 학대나 잔혹한 행위를 포함한 자연 환경의 황폐화는 인간의 도덕적 심성에 악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이들에 대한 적절한 고려는 인간의 자기 자신에 대한 의무가 된다. 따라서 생태계 혹은 개별 자연물들의 아름다움이나 개별 생명체들의 보존과 보호는 인간의 도덕적 관심에 따라 상대적인 가치를 갖는다. 즉, 인간의 도덕성에 기여하는 정도에 따라 그들에 대한 대우가 결정된다.
헤겔 또한 자연 환경의 위기는 곧 인간(정신)의 위기로 파악한다. 그리고 정신의 자기 실현을 위해서 자연은 적절히 변용되지 않으면 안 된다. 따라서 이로부터 도출되는 귀결은 생태학적 위기의 극복이란 인간이나 자연 어느 한쪽만을 위한 일방적인 것이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결론적으로 칸트의 자연윤리학은 원칙적으로는 단순히 인간중심주의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차라리 도덕중심주의라 부를 만한 그런 성격의 것이다. 그리고 방법론적으로는 기본적으로 개체론적(individualistic)이다. 반면에 헤겔의 그것은 정신과 자연의 조화가 인간(정신)에 의한 매개를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는 점에서 역시 인간중심주의면서, 방법론적으로는 전체론적(holistic) 성격을 띤다. 오늘날 인류가 처한 생태학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대안 윤리로서 우리는 칸트적 해결책과 헤겔적 해결책 둘 중에 어느 것을 선택할 것인가? 극단적인 인간중심주의 아니면 극단적인 생태중심주의적인 대안들도 있다. 문제는 어떤 것이 환경 문제를 극복하기 위한 현실적 대안인가가 아니라 어떤 것이 사태의 본질을 정확하게 사유했는가에 있다. 그것이 바로 자연윤리학의 철학적 기초로서 요구되는 평가의 척도가 되어야 한다. 칸트인가 헤겔인가? 아니면? 어느 것이든 인간은 자연에서 나서 자연으로 돌아간다는 단순한 사실보다는 인간은 자연에서 나서 자연과는 다르게 살아왔으며, 또 살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이 간과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때문에 인간과 자연의 근본적인 차이를 고려하고 반영하지 않는 자연윤리학은 거부되어야 한다. 진정으로 “인간은 자기 자신의 주인이 될 때까지 자연의 주인이 되지 못한다.” 이것이야말로 칸트와 헤겔 모두가 우리에게 들려주는 가장 귀 기울여야 할 가르침이다
눈에비친햇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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