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상실
하이데거의 미학비판Kritik der Asthetik은 동시에 근대의 미적asthetische 예술문화에 대한 비판이기도 하다.
정말 그렇게 작품들이 미술관과 전시관에 세워져 있고 내걸려 있다. (……)공공기관은 작품들을 관리하고 보호하는 일을 맡는다. 미술 전문가와 미술 비평가는 작품들을 놓고 분주히 씨름한다. 미술품 거래상은 시세를 따진다. 미술사 연구는 작품들을 한 학문의 대상으로 삼는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러한 다중적인 분주함 속에서 작품들 그 자체와 만나고 있는가?1)
모던의 예술문화는 미술관과 박물관을 통한 수집과 진열의 문화다. 여기서 작품들은 그것이 가졌던 진리를 잃어버리고 한갓 미적 관조의 대상으로 전락한다. 이것을 하이데거는 “세계의 박탈”, “세계의 붕괴”라 부른다.
뮌헨 박물관에 전시돼 있는 「애기나 사원의 입상들」, 가장 훌륭한 교정본에 수록돼 있는 소포클레스의 「안티고네」는 작품으로 존재하는 작품들로서 그것들이 원래 속해 있던 본래의 공간에서부터 벗어나와 있는 것들이다. 설령 그것들이 지닌 품격과 그것들이 불러일으키는 감명이 여전히 매우 위대하며 그것들의 보존 상태가 매우 훌륭하고 그것들에 대한 해석이 여전히 아주 믿을 만하다 할지라도, 그렇게 박물관으로 옮겨놓는 일은 작품들을 그것들의 세계로부터 빼앗아간 셈이 된다.2)
이것은 단지 그 작품들이 그것이 원래 속하던 콘테스트에서 공간적으로 분리되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더 큰 문제는 작품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가 과거와 달라졌다는 데에 있다. 그리하여
설령 우리가 예컨대 파에스툼 신전을 찾기 위해 그 신전이 세워져 있는 장소를 방문한다거나, 밤베르크 성당을 찾기 위해 그 성당이 있는 광장을 방문함으로써 작품들의 이식을 지양 또는 삼가려고 애쓴다고 할지라도, 지금 앞에 놓인 작품들이 원래 속해 있던 세계는 붕괴되어 있는 것이다.3)
<근원>을 쓴 하이데거의 최종 목표는 “예술을 대하는 현존재의 근본 태도의 변화”를 준비하는 데에 있었다. 그 변화된 태도의 요체는 작품이 세계를 돌려주는 것, 즉 예술을 한갓 미적 대상이 아니라 진리가 발생하는 방식으로 대하는 데에 있다. 작품을 작품이게 하고, 진리를 진리이게 하는 이런 태도를 하이데거는 앞에서 보존이라 불렀다.
창작됨 없이 도대체 하나의 작품이 존재할 수 없고 그래서 본질적으로 작품은 창작하는 자를 필요로 하듯이 보존하는 자 없이는 창작된 것 자체 또한 존재적이 될 수 없다.4)
하나의 작품은 박물관 안으로 옮겨져 보관되거나 전시장 안에 배치된다. 사람들은 이를 두고 흔히 작품이 진열 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러한 진열Aufstellen은 하나의 건축 작품을 세운다든가, 하나의 입상을 건조한다든가, 축제 때 비극을 무대에 올린다고 하는 의미에서의 건립Aufstellung과는 본질적으로 구별된다.
건립은 봉헌하고 찬송한다는 의미에서의 ‘건립’이다. 봉헌한다 함이란, 작품적으로 세워내는 가운데 성스러움이 성스러움으로서 열려 보여 지고 신이 그의 헌전성의 열린 장 안으로 불리워 들여진다고 하는 의미에서의 ‘성스럽게 함’을 뜻한다.5)
여기서 작품은 거의 종교적 숭고의 아우라를 뒤집어쓰게 된다. 작품에서 세계를 박탈하여 그것을 미적 대상으로 전락시키는 현대의 예술문화에 대한 하이데거의 반감은 정확히 벤야민의 태도와 대립된다. 벤야민 역시 현대인의 지각이 아우라를 파괴하여 예술작품이 갖고 있던 제의적 가치를 전시적 가치로 바꿔놓고 있음을 지적한 바 있다. 하지만 벤야민은 하이데거와 달리 이를 한탄하지 않는다. 그는 이 변화를 필연적인 것으로 보아 굳이 되돌리려 하지 않고 외려 거기서 긍정적인 현상을 본다. 여기서 모던을 부정하는 하이데거의 보수주의와 그것을 긍정하는 벤야민의 진보적 태도가 극적으로 충돌한다.
개시와 정초
하이데거에 따르면 예술과 시와 언어는 근원적 진리의 일어남이다.1) 반면 과학은 “진리의 근원적 개시”가 아니라 사후에 예술과 시의 언어가 열어준 “영역을 정비”하는 데에 불과하다고 한다. “진리의 근원적 개시”는 서로 관련이 있으면서도 구별되는 두 가지 것을 의미할 수 있다. 하나는 고흐의 구두처럼 예술작품이 우리로 하여금 이제까지 보지 못했던 것 - 존재자의 존재 - 을 보게 해준다sehenlassen는 것이다. 이는 어떤 면에서 파울 클레가 현대예술에 대해 이야기했던 것과 통하는 면이 있다. 클레에 따르면 현대예술의 본질은 보이는 것의 재현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의 가시화에 있다고 한다. 하지만 구두라는 존재자의 진리에 대한 하이데거의 서술은 농민적 파토스와 이데올로기로 가득 차 있어, 아방가르드의 세련된 도시 감성에 거부감을 주며 현대예술에 적응하기에는 지나치게 보수적으로 느껴진다.
“진리의 근원적 개시”라는 표현이 함축한 다른 하나의 명제는, 예술작품이 그리스의 신전처럼 이제까지 존재하지 않았던 것 - 신으로 표상되는 어떤 역사적 민족의 세계 - 을 있게 해준다anweseniassen는 것이다. 여기서 예술의 진리는 일종의 제헌적 행위, 즉 법과 제도와 담론과 문화의 기초를 만들어내는 정초의 행위Grundungsakt가 된다. 이는 물론 현대예술의 실천과 연결시키기에는 지나치게 무겁다. 예술의 창작과 수용을 봉헌과 보존으로 설명하는 것 역시 현대예술을 설명하는 데에 사용되기에는 지나치게 신학적이다. 게다가 “진리가 일어나는 다른 하나의 방식은 국가의 기초를 닦는 일”이라고 얘기할 때2), 이 예술론의 명제는 강한 정치성을 띠고 “민족유미주의”에 가까워진다.3)
하이데거의 미학비판은 그의 형이상학 비판만큼이나 급진적이다. 하지만 이 이론적 급진성이 그에게서는 미적, 정치적 보수성과 굳게 결합되어 있다. 이 지독한 보수성 때문에 하이데거의 미학은 주로 철학적 담론의 세계에서만 다루어졌을 뿐, 현대예술을 설명하는 틀로서는 그다지 의미가 없었다.4) 하지만 작품 속에 진리의 정립이라는 생각은, 바티모가 보여준 것처럼, 적절한 수정을 거쳐 현대예술을 설명하는 탁월한 틀로 기능할 수도 있다. 리오타르 역시 아방가르드 예술의 숭고미학을 특징짓기 위해 작품의 “사건성daB etwas geshieht”이라는 하이데거의 개념을 빌려다 쓰고 있다. 이는 하이데거의 예술철학이 가진 무한한 설명의 잠재성을 시사한다. 그런 의미에서 하이데거의 수용은 이제 겨우 시작되었는지도 모른다.
1) 근대의 언어관에 따르면 언어는 자기 생각을 타인에게 전달하는 도구일 뿐이다. 여기서 언어는 전달기능으로 환원되어버린다. 하이데거는 이 도구주의적 언어관이 망각한 중요한 사실을 상기시킨다. 언어의 본질은 소통이 아니라 명명에 있다. 즉 세계를 세우는 것, 세계에 질서를 주는 것, 세계를 자르는 것 자체가 벌써 언어의 일이라는 것이다. 소통의 도식 위에 서 있는 근대미학에서 예술은 예술가의 창조적 아이디어를 작품이라는 매체를 통해 수용자에게 전달하는 행위일 뿐이다. 반면 언어의 본질을 명명에서 찾는 하이데거는 예술의 본질을 그보다 더 근원적인 것, 즉 창작자와 수용자가 모두 참여하는 진리사건 내지 장소성의 체험에서 찾는다.
2) "하나의 세계가 열리면서 세계는 하나의 민족을 승리와 패배, 축복과 저주, 지배와 예속의 결정에로 몰아세운다. (……) 그러한 세계로부터 그리고 그 세계 속에서 역사의 민족이 비로소 자신의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 자기 자신에게로 되돌아온다." (<근원>, <예술철학>, 583쪽) "진리가 스스로의 지반을 놓는 또 하나의 다른 방식은 본질적인 헌신이다." (같은 책, 607쪽) 하이데거가 강의실에 앉아서 이런 말을 하고 있을 때 강의실 밖에서는 정말 괴상한 종류의 "근원적 진리"가 일어나고 있었다. 나치 운동을 진지하게 믿었노라고 고백한 그는 20세기 철학자 중에서 유일하게 홀로코스트에 대해 침묵했다.
3) P. Lacoue Labarthe, 'La fiction du politique' Heidegger in : l' art et a politique(Paris, 1987)
4) Wolfgang Ulrich, Martin Heidegger in : Asthetik and Kunstphilosophie von der Antike bis zur Gegenwart, hrsg von Nida-R melin/Betzler(Stuttgart, 1998)
진중권의 현대미학 강의 / 숭고와 시뮬라크르의 이중주 / 진중권 / 아트북스 / 20030915 /
'하이데거(M. Heiddeger, 1889-1976) > Der Ursprung des Kunstwerkes'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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