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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데거(M. Heiddeger, 1889-1976)/Der Ursprung des Kunstwerkes

진리의 신전8 - 미학의 전복 / 진중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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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학의 전복


<근원>은 이렇게 <존재와 시간>에 개진된 현존재의 실존론적-존재론적 분석을 전제한다. 서구의 형이상학에 대한 이 급진적인 비판은 당연히 그것을 바탕으로 성립한 (근대) 미학의 전복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대지와 세계’는 내용과 형식이라는 전통적인 예술작품의 존재론을 폐기한다. 근대미학은 칸트의 형식미학과 헤겔에서 완성되는 진리미학의 대립의 역사였다. ‘대지와 세계’라는 새로운 개념으로 하이데거는 이 근대적 이항대립을 넘어선다. 먼저 예술을 진리로 바라봄으로써 예술을 한갓 ‘형식의 유희’로 보는 형식미학을 거부하고, 동시에 그 진리를 근원적 진리로 규정함으로써 반영론에 입각한 근대적 진리미학의 틀마저 기각한다.1) 예술을 존재자의 재현으로 바라보는 근대미학의 바탕에는 사유, 언어, 지식 일체를 일종의 도상적 재현으로 보는 에피스테메가 깔려 있다. 이 근대적 에피스테메는 대응설적 진리관을 요구한다. 진리란 객체와 주체, 사물과 지식, 실재와 표상의 일치라는 것이다. 예술적 진리 역시 재현의 진리, 즉 대상과 재현의 일치로 간주된다. 하지만 ‘개념적 인식’이라는 우월한 재현 수단이 있는 한, 도상적 재현인 예술은 개념적 재현의 하위에 놓일 수밖에 없고, 그 결과 예술은 인식을 향한 도정의 한 지점, 심지어 그것의 도해로 간주되곤 한다. 하이데거는 이 관계를 뒤집는다. 그에게 예술은 개념적 인식 위에 있다.

예술작품이란 ‘존재자의 진리가 자신을 작품 속에 정립하는 것“이다. 여기서 진리는 재귀대명사sich의 사용을 통해 자신을 정립하는 주체가 된다. 진리를 정립하는 주체는 예술가가 아니다. 진리 자신이 ’정립의 주체이자 객체이다”. 이 말에 이어 하이데거는 “그러나 주체와 객체는 부적절한 명칭”이라고 덧붙인다. 주체와 객체라는 구별 자체가 그가 이미 넘어선 근대철학의 개념틀이기 때문이다. 근원적 진리는 주객의 구별에 선행한다. 인간이 ‘주체’로서 구성되는 것도 이 근원적 진리가 열어준 시공간 속에서, 특정한 역사적 시기에 비로소 가능한 것이다. 예술의 진리는 예술가의 진리가 아니다. 이로써 미적 주체성은 해체된다. 그리고 요즘의 철학자들이 말하는 ‘주체의 죽음’, ‘저자의 죽음’이 시작된다.


위대한 예술에 있어서 예술가는 작품에 비하자면 단지 창작을 행하는 가운데 작품의 생성을 위해 자기 자신을 죽여야 하는 그런 통로와 거의 다를 바 없이, 상관없는 어떤 것으로 남아 있을 뿐이다.2)


예술가는 작품의 생성을 위해 자신을 죽인다. 예술은 예술가의 상상력이나 창조적 환상의 산물이 아니다. 존재자의 진리의 발생이라는 예술의 본질은 예술가의 주관적 “상상력과 구상력에서부터 충분히 사유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예술작품의 진리는 예술가, 즉 창조적 천재의 머릿속에서 나온 게 아니다. 창작schaffen이란 곧 퍼 올림schopfen이다.3) 이 진리를 예술가는 어떤 알 수 없는 근원에서 그저 퍼 올릴 뿐이다. 여기서 예술가는 일종의 영매(“통로”)와 비슷한 존재가 된다.


창작되어 있음이 작품에서부터 솟아 나옴은 작품이 한 위대한 예술가에 의해서 만들어져있다고 하는 사실을 작품에서 알아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창작된 것이 한 기량 있는 자의 활약으로 입증되고 그래서 활약하는 자가 공공적인 명성에로 부각되어서는 안 된다. ‘아무개가 만들었음’ 이 널리 알려져야 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단순한 사실이 있다factum est가 작품 속에서 열린 장 안으로 견지되어야 한다.4)


여기서 하이데거의 예술철학은 근대의 예술가 미학Kunstlerrasthetik이 아니라 탈근대적 작품미학Werkasthetik의 성격을 띠게 된다.5) 예술작품은 존재자의 진리가 작품 속에 정립되는 것Sich-ins-Werk-Setzen der Warheit des Seienden이다. 여기서 Werk라는 낱말의 중의성(작품/작동)을 발동시키면, 그것은 이제 “존재자의 진리가 자신을 작동시키는 것”이라는 뜻을 갖게 된다. 여기서 진리는 역동성을 띤 사건Ereigins, 즉 일어남geschehen이 된다. 예술작품 속에 진리가 일어난다. 작품은 미적으로 관조해야 할 아름다운 대상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존재자의 진리가 발생하는 사건이다.

여기서 근대적 예술 수용의 모델 역시 붕괴한다. 예술 감상의 본질은 작품에서 정보를 끄집어내거나, 거기서 정서적 감동을 받거나, 혹은 작품의 외관을 미적으로 향유하는 데에 있는 게 아니다. 수용자는 작품을 작품이게 해야 한다. 작품 속에 발생하는 진리에 참여해야 한다. 하이데거는 예술적 수용의 본질을 기술하기 위해 보존bewahren이라는 동사를 사용한다. 보존be/wahr/en이란 진리를 진리wahr이게끔 하는 것을 의미한다. 수용은 작품이 완성된 후에 시작되는 사후적 과정이 아니라 작품을 작품으로, 진리를 진리로 성립시키는 행위다. 그런 의미에서 예술은 “작품 속에서 진리를 창작하는 보존”이다.


작품의 창작만이 시작적詩作的인 것이 아니라 그 고유한 방식에 있어서만큼 작품의 보존도 마찬가지로 시작적이다. 왜냐하면 하나의 작품이 작품으로서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경우란 오직 우리가 우리 자신을 우리의 통상성으로부터 밀어뜨려 작품에 의해 열려 보여진 것 안으로 밀어냄으로써 우리의 본질 자체를 존재자의 진리 안에 서 있음에로 데려오는 때이기 때문이다.6)


인간주의적 진리관은 이렇게 근대의 미적 주체성을 해체한다. 예술은 예술가의 주관에 있는 것도, 수용자의 머릿속에 환기되는 감정이나 관념에 있는 것도 아니다. 이로써 근대의 예술가 미학(천재론)과 근대의 수용미학(향수미학)은 모두 기각된다. 그에게 작품은 정보전달과정의 한 통과지점에 불과한 게 아니다. 예술은 근원적 진리의 일어남이기에 작품이 외려 예술가와 향수자의 주인이 된다. 여기서 그의 미학은 거의 신학적 뉘앙스를 띠게 된다. 그의 예술가는 경건한 마음으로 신상을 만드는 페이디아스를, 그리고 향수자는 신전에 이 신상을 봉헌하는 그리스인들을 연상시킨다. 그에게 예술작품은 글자 그대로 신전이다.

인간이 근원적 진리의 주체임을 부정하는 하이데거의 반인간주의는 전통적인 미적 범주론에도 변화를 가져온다. 근대미학에서 미와 숭고를 구별하는 척도는 인간 주체의 인식능력이었다. 즉 인간의 인식능력의 크기와 조화를 이루는 것은 ‘미’이고, 그것을 압도적으로 초월하는 대상이나 힘은 ‘숭고’라는 것이다. 하지만 미적 주체성이 파괴되면서 이 구분의 척도도 사라진다. 그리하여 그가 ‘미’를 “작품 속에서 진리의 빛남”이라 규정했을 때, 이 규정은 외려 ‘미’라기보다는 전통적인 숭고의 감정, 즉 종교적 외경의 감정에 더 가깝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아직 ‘미’라는 낱말을 사용하고 있지만, 그의 예술론은 사실상 숭고의 미학이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그가 작품을 통한 진리체험을 기술하기 위해 사용하는 “적막한 충격”, “섬뜩함에로의 충격”과 같은 표현은 전형적인 숭고체험을 가리키고 있다.7)


1) 예술을 존재자의 재현으로 바라보는 근대미학의 바탕에는 사유, 언어, 지식 일체를 일종의 도상적 재현으로 보는 에피스테메가 깔려 있다. 이 근대적 에피스테메는 대응설적 진리관을 요구한다. 진리란 객체와 주체, 사물과 지식, 실재와 표상의 일치라는 것이다. 예술적 진리 역시 재현의 진리, 즉 대상과 재현의 일치로 간주된다. 하지만 '개념적 인식'이라는 우월한 재현수단이 있는 한, 도상적 재현인 예술은 개념적 재현의 하위에 놓일 수밖에 없고, 그 결과 예술은 인식을 향한 도정의 한 지점, 심지어 그것의 도해로 간주되곤 한다. 하이데거는 이 관계를 뒤집는다. 그에게 예술은 개념적 인식 위에 있다.

2) <근원>, <예술철학>, 581쪽

3) 독일어에서 'schopfen'은 '창조하다', '퍼 올리다' 라는 두 가지 의미를 갖고 있다.

4) <근원>, <예술철학>, 610 - 611쪽

5) 중세에 예술의 진리는 예술가의 주관적 진리가 아닌 신이 계시하는 객관적 진리였고, 그 효과는 수용자의 개인적 감동이 아니라 모든 인간이 동일하게 느끼는 어떤 보편적 감동이었다. 르네상스 이후 근대의 예술문화는 예술가 개인의 미적 주체성을 상찬하는 문화였다. 중세의 장인들이 무명으로 남았다면, 르네상스 이후 예술가들은 예외적 개인, 즉 천재로 끌어울려지고, 그 이름은 불후의 명성에 도달했다. 하이데거는 근대의 이 주관주의와 인간중심주의를 무너뜨리려 한다.

6) <근원>, <예술철학>, 621 - 622쪽

7) "작품의 보존이란 작품 속에서 발생하고 있는 진리의 섬뜩함 안에 냉철하게 서 있음이다." (<근원>, <예술철학>, 614쪽) "이러한 '창작되어 있음의 사실"(S.611) "저 사실의 적막한 충격"(612쪽)과 같은 표현을 리오타르의 숭고 미학과 비교해보라.

 

 

진중권의 현대미학 강의 / 숭고와 시뮬라크르의 이중주 / 진중권 / 아트북스 / 200309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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