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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데거(M. Heiddeger, 1889-1976)/Der Ursprung des Kunstwerkes

진리의 신전4 - 도구 / 진중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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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구


이어서 하이데거는 사물에 대한 또 다른 정의를 도입한다. 사물=질료+형상, 즉 사물이란 “형상화된 질료”라는 것이다. 미학 이론에서 이는 작품=소재+형식, 또는 내용+형식이라는 공식으로 구체화된다. 아직까지 널리 사용되는 이 정의의 바탕에는 사물은 곧 제작의 산물이라는 의인법이 깔려 있다. 질료+형상이란 곧 재료+설계도를 의미한다. 따라서 이 정의는 순수한 사물보다는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사물, 즉 도구의 성격을 파악하는 데에 더 적합하다. 따라서 이 규정 역시 사물성을 설명하는 틀로서는 거부되고, 이로써 논의는 자연스레 도구존재에 이르게 된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도구는 인간에 의해 제작된다는 점에서 작품과 비슷하다. 하지만 작품은 “목적 없는 합목적성의 형식”이라는 점에서, 말하자면 도구와 달리 이렇다 할 용도 없이 자족성을 갖는다는 점에서, 단순한 사물과 비슷하다. 인간은 사물을 가지고 도구를 만들고, 거기서 실용적 목적을 제거함으로써 작품존재에 도달한다. 그런 의미에서 도구는 사물과 작품의 사이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매개적인 위치에 있기에 도구의 도구적 성격을 탐구해보면 “그곳으로부터 사물의 사물적 성격과 작품의 작품적 성격에 대한 암시가 우리에게 나타날지도 모른다”. 이 언급에 이어서 그 유명한 고흐의 구두이야기가 시작된다.


닮아 빠져나온 신발 도구의 안쪽 어두운 틈새로부터 노동을 하는 발걸음의 힘겨움이 굳어있다. 신발 도구의 옹골찬 무게 속에는, 거친 바람이 부는 가운데 한결같은 모양으로 계속해서 뻗어 있는 밭고랑 사이를 통과해 나아가는 느릿느릿한 걸음걸이의 끈질김이 차곡차곡 채워져 있다. 가죽 표면에는 땅의 축축함과 풍족함이 어려 있다. 해가 저물어감에 따라 들길의 정적감이 신발 밑창 아래로 밟혀 들어간다. 대지의 침묵하는 부름, 무르익은 곡식을 대지가 조용히 선사함 그리고 겨울들판의 황량한 휴경지에서의 대지의 설명할 수 없는 거절이 신발 도구 속에서 울리고 있다. 빵을 안전하게 확보하는 데에 대한 불평 없는 근심, 궁핍을 다시 넘어선 데에 대한 말없는 기쁨, 출산이 임박함에 따른 초조함 그리고 죽음의 위협 속에서의 전율이 이러한 신발 도구를 통해 스며들어 있다. 대지에 이러한 도구가 귀속해 있고 농촌 아낙네의 세계 안에 이 도구가 보호되어 있다.1)


일상생활에서 구두는 그저 구두일 뿐이다. 우리는 별 생각 없이 그것을 신고 벗으며, 구석에 밀어두었다가 해지면 그냥 버린다. 구두란 밑창+가죽일 뿐이다. 하지만 고흐의 작품 속의 구두는 다르다. 거기서 우리는 농민의 삶의 터전이 되는 들과 밭고랑, 즉 습기와 풍요로움을 머금은 대지를 본다. 나아가 빵의 확보, 고난을 극복한 기쁨, 아기의 출산, 죽음의 위협 등 농민의 삶이 그 위에서 꾸려지는 세계를 본다. “도구의 신뢰성에 힘입어 농촌 아낙네는 도구를 통해 대지의 침묵하는 부름에 내맡겨져 있고, 도구의 신뢰성에 힘입어 그녀는 그녀의 세계를 확신한다.” 이렇게 고흐의 작품은 구두의 도구존재를, 그 모든 삶의 연관성들 속에서 비로소 드러내준다. 우리는 진정으로 구두라는 존재자가 무엇인지 비로소 깨닫게 된다.

저 그림 한 장으로 이렇게 구두가 대지에 속하면서 동시에 촌 아낙네의 세계 안에 보존되어 있음이 비로소 밝혀진다. 대지란 인간의 삶을 가능케 하는 자연physis, 그리고 세계란 그 위에 세워지는 인간적 삶의 세계nomos라 할 수 있다. 도구란 자연에서 사회로 이행하는 통과점, 양자를 연결하는 결절점 위에 서 있는 존재다. 도구란 그저 쓰고 버리는 물건이 아니라, 대지에 속하고 세계 속에 보존되면서 그 대지 위에서 세계가, 말하자면 자연의 터전 위에서 인간적 삶이 솟아오르게 해주는 그런 존재다. 이 예사롭지 않은 사실을 우리는 고흐의 그림을 통해 비로소 알게 되었다.

 

5) <근원>, <예술철학>, 573쪽

 

 

 

진중권의 현대미학 강의 / 숭고와 시뮬라크르의 이중주 / 진중권 / 아트북스 / 200309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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