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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데거(M. Heiddeger, 1889-1976)/Der Ursprung des Kunstwerkes

진리의 신전6 - 세계와 대지 / 진중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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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와 대지


사실 고흐의 그림은 구두의 재현이다. 그 안에서 우리는 분명히 재현된 구두의 모습을 본다. 그렇다면 혹시 그 작품 속에 정립된 그 진리라는 것도 실은 모방의 진리, 재현의 진리에 불과한 것은 아닐까? “진리의 발생사건을 새로이 드러내 보일 필요”가 있다며 하이데거는 이번에는 의도적으로 시각적 재현으로 볼 수 없는 건축, 즉 그리스 신전을 예로 든다. 여기에도 세계가 있다.


일종의 건축 작품, 즉 하나의 그리스 신전은 아무런 것도 모사하는 것이 없다. 그것은 갈라진 바위 계곡 한가운데에 단순히 서 있을 뿐이다. 그 건축 작품은 신의 형상을 에워싸서, 그것을 은닉된 채로 열린 주량들을 통해 성스러운 구역으로 내보낸다. 신전을 통해 신이 그 신전 안에 현전한다. 신이 이렇게 현전함 그 자체가 곧 구역을 하나의 성스러운 구역으로 확장함이자 경계 지음이다. (……) 신적작품은, 그 안에서 탄생과 죽음, 재난과 축복, 승리와 굴욕, 존속과 쇠망이 인간존재에게 그의 역운의 행태를 얻어내는 그런 제 궤도들과 연관들의 통일을 비로소 짜 맞추면서 동시에 자기 주위로 모은다. 이렇게 열린 연관들이 전개되면서 확장된 범위가 곧 이러한 역사적 민족의 세계다.1)


여기서 “세계”란 신전이 있음으로 해서 비로소 가능했던 그리스 민족의 생활세계를 가리킨다. 그들의 삶은 신전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신전은 그들의 세계관이자, 종교이자, 문화이자, “삶의 모든 도정과 관계들”, 즉 사회적 교통의 중심이었다. 한마디로 그것은 한 역사적 민족이 자기의 삶을 조직하는 원리였다. 가령 올림포스의 신을 떠난 그리스 문화를 생각할 수 있겠는가? 그들이 신전을 세웠을 때, 그것은 그저 빈 공간에 건물을 하나 세운 것에 불과한 게 아니다. 신전을 세움으로써 그들은 신을 비로소 존재케 하고, 그것을 통해 한 역사적 민족이 거주하는 세계를 열었던 것이다. 신전이라는 작품은 이렇게 ‘세계’를 건립aufstellen한다.


건축 작품은 바위 지반 위에 머물러 서 있다. (……) 건축작품은 그것 위로 휘몰아치는 폭풍을 견뎌내며 서 있고 그렇게 폭풍 자체를 그 위력에 있어 내보인다. 석조의 광채와 빛남은, 비록 태양의 은총에 의해서만 빛나기는 하나 그것은 대낮의 빛과 하늘의 아득함, 밤의 캄캄함을 비로소 나타나게 한다. 건축 작품의 확실히 솟아오름은 허공의 보이지 않는 공간을 보이게 해준다. 그 작품의 확고부동함은 밀어닥치는 바다의 파도를 막고 서서 자기의 그 고요함에서부터 파도의 광란을 나타나게 해준다. (……) 이러한 솟아나옴과 피어오름을 초기의 그리스인들은 그 자체와 전체에 있어서 퓌지스physis라 불렀다. 동시에 퓌지스는 인간이 그 위에다 그리고 그 안에다 자신의 거주의 기초로 삼는 그것을 밝힌다. 우리는 그것을 대지라 부른다.2)


신전이 바위 위에 우뚝 솟아 있음으로써 비로소 거센 바람이 제 존재를 드러내고, 대낮의 빛과 밤의 캄캄함이 나타나고, 허공의 보이지 않는 공간이 비로소 눈에 보이게 되고, 광란하는 파도의 존재를 느낄 수 있게 된다. 신전은 대지가 대지답게 나타나게 해준다. 그리스 민족의 삶의 세계의 터전이 솟아나고 피어오르게 해준다. 신전이라는 작품은 이렇게 대지를 설립herstellen, 그 대지 위에auf 민족적 삶의 세계를 세운다stellen.3)


서 있는 가운데 비로소 신전은 사물들에 그것들의 모습을, 그리고 인간들에게는 비로소 그들 자신에 대한 전망을 내준다.4)


작품의 진리는 존재자를 재현하는 인식론적 진리가 아니라 이제까지 없었던 것을 있게 하는 존재론적 진리다.


경기에서 이긴 승리자가 신에게 바치는 신의 조각상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그것은 인간이 그것에서 신이 어떻게 보여 지는지를 보다 쉽게 알기 위한 모상이 결코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신 자신을 현존케 해주어 신 자신이 존재하게 되는 하나의 작품이다.5)


신상은 그 모델이 된 인체의 모방이 아니다. 신상이 열려주는 진리가 기껏 어느 잘생긴 인간의 재현이라는 데에 있겠는가. 신의 모방이라 할 수도 없다. 신을 본 사람이 어디에 있겠는가. 신화에서 신을 본 인간은 목숨을 잃게 되어 있다. 그러므로 신상은 그 모델이 된 인간의 모방도, 눈으로 볼 수 없는 신의 재현도 아니다. 그들은 먼저 존재하는 신을 본 떠 신상을 만든 게 아니라, 신상을 만듦으로써 신을 비로소 존재하게 하고, 그로써 자신들의 민족적 삶의 세계를 세웠던 것이다. 이렇게 작품의 존재란 “하나의 세계를 건립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동시에 작품은 도구존재와는 달리 하나의 세계를 건립하면서 질료를 소멸시키지 않고 처음으로 질료를 그것 자체로 나타나게 한다. 가령 신전 작품은 세계를 설립하기 위해 질료를 예술적으로 가공하는데, 이를 통해 자연 상태의 거친 대리석이 비로소 대리석 본연의 매끈한 결을 뽐낼 수 있게 된다. 이렇게 작품 속에서 비로소 대지가 대지답게 되는 것이다. 즉 작품 속에서 금속은 강하게 또는 희미하게 빛나며, 색채는 빛남에 이르고, 음향은 울림에 이르고, 단어는 말함에 이르는 것이다. 이렇게 작품은 세계를 건립하는 가운데 비로소 “대지를 대지로 존재하게” 해준다. 이처럼 작품 속에 들어올 경우 사물은 뭔가 다른 것으로 변용變容된다.6)

예술은 세계를 건립aufstellen하고 대지를 설립herstellen한다. 세계의 건립과 대지의 설립. 이 두 과정을 하이데거는 투쟁안식이라는 모순적 용어로 포착한다. 작품 속에서는 세계와 대지가 서로 투쟁을 하고, 이 동학動學 속에 작품의 정학靜學이 있다. 여기서 진리는 사건의 성격을 띠게 된다. 세계와 대지는 왜 투쟁을 하는가? 그것은 무언가를 개시하는 세계의 건립과 반대로 대지의 설립은 무언가를 은폐하기 때문이다. 가령 돌을 저울에 달면, 그 추상적 수치 속에서 돌의 육중함은 달아나고, 색채의 파동수를 분해하면 색채 자체는 사라지고 만다. 이렇게 대지는 개량적인 주제넘음을 파괴한다.

색채와 음향, 육중함, 감촉과 같은 현상학적 질을 안에 품은 대지는 “기술적 과학적 대상화”를 거부하고, 합리적 계량 앞에서 자신의 모습을 감춘다. 하지만 이 대지의 은폐성에도 불구하고 그 위에 세워지는 세계는 무언가를 열어 보이려 한다. 사실 자연의 계량화(“기술적 과학적 대상화”)도 세계가 열어 보여주는 문화사적 공간 속에서 비로소 가능한 것이다. 그리하여 세계는 대지에 근거하면서도 대지를 극복하고자 한다. 세계는 스스로 개시하는 존재로서 어떤 폐쇄도 용납하지 않는다. 그러나 대지는 언제나 은폐하는 것으로서 이 세계를 자신 가운데로 끌어들여 자신 가운데 묶어두고자 한다.7)


1) <근원>, <예술철학>, 583쪽

2) <근원>, <예술철학>, 583 - 584쪽

3) 이기상은 'herstellen'을 '이리로 세움'이라 번역하고 있으나 여기서 'her'는 '이리로(hier)'가 아니라 '유래, 근원(Herkunft)'을 가리키는 말로 봐야 한다.

4) <근원>, <예술철학>, 584쪽

5) <근원>, <예술철학>, 584 - 585쪽

6) 이로써 우리는 하이데거의 다음과 같은 언급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작품에서의(……) 사물적 차원은, 그것이 이미 작품의 작품존재에 속하는 한, 작품적 차원에서 사유되어야 한다. (……)이때 작품의 사물적 현실성에 대한 규정에 이르는 길은 사물을 거쳐 작품으로가 아니라 작품을 거쳐 사물로 인도한다." (<근원>, <예술철학>, 581쪽)

7) 이 "투쟁"의 의미를 기호학의 용어로 풀어보자. 우리가 한 편의 시를 들으며 그 의미에만 주목하면, 이때 기호매체는 투명해지면서 사라진다. 반면 기호매체에만 주목하면 의미는 사라지고 음향만 들릴 것이다. 하나의 그림을 보면서 묘사된 장면에만 몰입하면 작품의 대지, 즉 색채효과와 색면배열은 뒷자리로 물러나게 된다. 반면 색채에만 감탄을 할 경우에는 그것이 여는 세계를 놓치게된다. 이처럼 작품 속에서는 세계와 대지가 길항 작용을 하고, 이 역동적 투쟁을 우리는 예술체험에서 실제로 확인할 수 있다.

 

 

진중권의 현대미학 강의 / 숭고와 시뮬라크르의 이중주 / 진중권 / 아트북스 / 200309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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