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
고흐의 구두에 관한 저 파토스에 가득 찬 구절을, 하이데거는 한갓 자기 자신의 주관적 견해의 투사로 보기를 거부한다. 그것을 그저 관찰자의 주관적 견해로 치부한다면, 그것은 “가장 극심한 자기기만”이리라. 하이데거는 저 농민적 파토스로 가득 찬 말을 발화한 주체는 자신이 아니라 고흐의 그림이라고 잘라 말한다. “이것(그림)이 말을 했다Dieses hat gesprochen.” 저 작품의 진리를 우리에게 알려준 것은 하이데거의 주관적 해석이 아니다. “이것”이, 즉 고흐의 작품이 말을 하여 우리에게 도구존재가 진정으로 무엇인지 열어 보여주었던 것이다. 여기서 자연스레 작품존재의 본질도 밝혀진다.
도구의 도구존재는 발견되었다. 그런데 어떻게? 현실적으로 눈앞에 놓여 있는 하나의 신발 도구를 서술하거나 설명함으로써 그랬던 것은 아니며, 신발 제작과정을 보고함으로써도 아니며, 또한 이곳저곳에서 눈앞에 발견되는 그런 신발 도구가 현실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것을 관찰함으로써도 아니라 단지 우리가 반 고흐의 회화 앞으로 데려와짐으로써 그랬다. 반 고흐의 회화가 말해준 것은 이것이다. 즉 작품 가까이에서 우리는 갑자기 통상 우리가 있던 곳이 아닌 어떤 다른 데에 있게 된다.1)
우리는 그저 고흐의 그림 앞에 섬으로써 구두라는 존재자가 진정으로 무엇인지를 깨닫게 되었다. 그의 그림 속에서 구두라는 존재자가 그 존재의 비은폐성 안으로 튀어나온 것이다. 이 존재자의 비은폐성을 그리스인들은 알레테이아(진리)라 불렀다. 고흐의 작품 속에서는 im Werk 무슨 일이 벌어지고am Werk 있는가? 그의 작품에서는 이렇게 존재자의 진리가 발생Geschehen하고 있다. 그 진리는 저 그림이 구두라는 존재자의 외관을 정확히 모방하고 있다는 데에서 비롯된 게 아니다. 예술의 진리란 근대철학에서 말하는 일치로서의 진리나 근대미학에서 말하는 재현으로서의 진리를 의미하는 게 아니다.
존재자와의 일치가 오랫동안 진리의 본질로서 간주되어왔다. 그러나 과연 우리는 저 반 고흐의 회화가 눈앞에 놓여 있는 한 켤레의 농부의 신발을 그대로 묘사한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그리고 그와 같은 일이 그 회화에서 성공했다는 이유 때문에 우리는 그 회화가 하나의 작품이라고 생각하는가? 우리는 그 회화가 현실적인 것에서부터 하나의 모상을 끄집어내어와 이것을 예술가가 생산하는 하나의 생산물 속으로 옮겨놓은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2)
재현의 진리는 묘사대상이 되는 존재자와의 일치adequatio에 있다. 하지만 고흐의 구두 속에서 일어나는 진리는 재현의 진리, 모방의 진리, 모델과의 일치로서의 진리가 아니다. 이렇게 새로운 존재론적 진리관이 도입되면서 이제 19세기까지 서구의 주요 예술론으로 행세했던 모방론의 패러다임은 포기된다. 작품 속에 정립되는 진리는 재현의 진리가 아니라 현시現示의 지리, 개시開示의 진리다.
작품에서는 그때마다 눈앞에 놓여 있는 개개의 존재자를 재현해내는 일이 문제되고 있기 보다는, 오히려 이와는 반대로 사물의 일반적인 본질을 재생해내는 일이 어쩌면 문제되고 있는지 모른다.3)
작품의 상관자는 존재자가 아니라 존재자의 존재다. 작품의 진리는 존재자에 관한 진리가 아니라 그것의 존재에 관한 진리다. 작품이 보여주어야 할 것은 재현모델이 되는 존재자의 외관이 아니다. 작품의 진리는 존재와 존재자의 존재론적 차이Ontologische Differenz에 관한 진리다.
도대체 우리는 개개의 모든 눈앞의 것Vorhandenes에서 그것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릴 수 있다. 그러나 (……) 그렇게 되자마자 그것은 통상적인 것의 양식에 따라 망각된 채로 남는다. 사실 존재자가 있다는 사실보다 더 통상적인 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이에 반해 예술작품에서는 존재자 그 자체가 있다는 이 사실이 바로 놀라운 것이다.4)
작품은 존재자를 비은폐성으로 이끌어내어, 그것이 진정으로 어떤 존재인지를 열어 보여주어야 한다. 작품은 존재자의 존재를 열어 보인다. “작품 속에서는 이러한 열어 보임이, 다시 말해 탈은폐함이, 다시 말해서 존재자의 진리가 발생한다.” 존재자의 진리는 자신을 작품 속에 정립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술이란 존재자의 진리가 작품 속에 정립되는 것Sich-ins-Werk-Setzen der Wahrheit des Seienden이라 할 수 있다.
1) <근원>, <예술철학>, 575쪽
2) <근원>, <예술철학>, 577쪽
3) <근원>, <예술철학>, 577쪽
4) <근원>, <예술철학>, 611쪽
진중권의 현대미학 강의 / 숭고와 시뮬라크르의 이중주 / 진중권 / 아트북스 / 20030915 /
'하이데거(M. Heiddeger, 1889-1976) > Der Ursprung des Kunstwerkes' 카테고리의 다른 글
진리의 신전7 - 세계의 세계화 / 진중권 (0) | 2011.04.02 |
---|---|
진리의 신전6 - 세계와 대지 / 진중권 (0) | 2011.04.02 |
진리의 신전4 - 도구 / 진중권 (0) | 2011.04.02 |
진리의 신전3 - 사물 / 진중권 (0) | 2011.04.02 |
진리의 신전2 - 근원 / 진중권 (0) | 2011.04.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