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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데거(M. Heiddeger, 1889-1976)/Der Ursprung des Kunstwerkes

진리의 신전7 - 세계의 세계화 / 진중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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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세계화


그리스 신전에서 세계와 대지내용과 형식이라는 전통적 개념을 대체하는 새로운 예술작품의 존재론을 이룬다. 고흐의 구두에서 세계와 대지는 작품이 우리에게 열어 보여주는 진리의 내용을 이룬다. 세계와 대지라는 은유의 바탕에는 근대의 주객이원론을 해체하는 새로운 현존재의 해석학이 깔려 있다. 데카르트에게 세계란 연장실체res exensa, 즉 길이와 부피를 가진 사물들의 총체이다. 여기에 생각하는 정신ego cogito로서 사유실체res cogitans가 마주선다. 세계는 존재자들의 총체, 인간은 사유하는 정신, 인간과 세계의 관계는 정신(주체)이 세계 속의 사물(객체)을 인식하는 그런 관계다. <존재와 시간>에서 하이데거는 이 데카르트적 세계관을 전복한다.1) 주체와 객체의 인식론적 관계는 이제 세계와 현존재 사이의 실존적 관계로 대체된다.

흔히 세계를 존재자의 총체라고 한다. 세계는 텅 빈 공간이며, 그 안에 사물, 동식물, 인간이 들어 있다고 믿는다. 하이데거는 이 근대적 세계관을 물구나무 세운다. 인간이 세계 속에서 사물과 마주칠 때, 인간은 과학자의 가치중립성을 갖고 사물을 대하는 게 아니다. 인간에게 나무는 무엇보다 집을 지을 재료, 시원한 그늘을 제공하는 어떤 것이다. 이렇게 인간은 모든 사물을 실천적 관점에서 해석하며 살아간다. 이런 존재방식을 현존재Dasein라 부른다.2) 현존재의 세계체험에는 언제나 이미 실천적 해석이 개재되어 있다. 그에게 사물은 그저 눈앞에 있는 것Vorhandenes이 아니라 무언가를 위한 것Zuhandenes으로 다가온다. 인간의 세계는 바로 이 무언가를 위한 것들의 복잡한 연관으로 짜여 진 망이고, 그 속에서 모든 사물은 무엇을 위한um zu의 복잡한 지시연관을 맺는다. 그 안에서 가령 나무는 기둥을, 기둥은 건물을, 건물은 학교를, 학교는 다시 교육을 지시한다.

자연과학의 세계는 이 복잡한 실천적 지시연관을 의도적으로 사상함으로써 사후적으로 구성된다. 가령 나무의 보편적 효용을 연구하려면 그것을 그때그때의 구체적 효용에서 떼어내 그저 눈앞에 있는 것으로 다루어야 한다. 이렇게 보편적 적용을 위해 구체적 연관들을 사상함으로써 비로소 구성되는 추상물, 그것이 바로 자연과학의 세계다. 이 세계는 세계를 탈세계화하여 얻은 세계이며, 인간적 삶의 세계에 선행하는 게 아니라 외려 거기에서 나온 파생적 세계일뿐이다. 근원적인 것은 현da이라는 존재방식이며, 주체와 객체의 관계란 이 현존재의 현da을 추상하여 구성한 파생적 관계에 불과하다.3) 파생적 세계에 관한 진리는 파생적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자연과학의 명제는 파생적 진리에 불과하며 오직 작품만이 근원적 진리를 열어준다. 작품은 세계를 건립함으로써 진리를 정립한다.

동물이나 식물은 진정한 의미의 세계를 갖지 못한다. 그런 세계는 오직 현존재만이 가질 수 있다. 오로지 인간의 세계만이 세계화한다. 세계 속에서 인간은 인식하는 정신으로 존재하는 게 아니다. 인식은 현존재가 세계를 대하는 태도 중의 하나에 불과하다. 인간은 존재자들을 배려besorgen하는 태도로 세계와 관계를 맺는다.4) 가령 고흐의 구두는 농촌여인이 주위 세계 속에서 갖는 배려적 관심의 여러 양상을 그 근본 기분들 속에서 열어 보여준다. “빵을 안전하게 확보하는 데 대한 불평 없는 근심”, “궁핍을 다시 넘어선 데 대한 말없는 기쁨”, “출산이 임박함에 따른 초조함”, “죽음의 위협 속에서의 전율.”5) 이렇게 탄생과 죽음 사이에 실존하며 빵을 확보하고 궁핍을 극복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바로 농민의 ‘세계’다. 작품은 우리에게 이 진리를 열어 보여준다.

 

 

 

1) Martin Heidegger, Sein und Zeit(Tubingen, 1993), S. 19(이하S&Z)

2) S&Z, S. 12-13

3) S&Z, 제5장

4) "본질적인 세계 내적 존재가 현존재에 속하므로 세계에 대한 그의 존재는 본질적으로 배려(Besorgen)다." (S&Z, S. 57)

5) S&Z, 제6장

 

 

 

진중권의 현대미학 강의 / 숭고와 시뮬라크르의 이중주 / 진중권 / 아트북스 / 200309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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