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물
하이데거에 따르면 역사적으로 사물을 바라보는 세 가지 관점이 있었다. 그 하나는 사물=실체라는 규정이다. 여기서 실체란 자기 안에 색, 모양, 냄새 등 우연적 속성들을 모아서 가지고 있는 담지체라는 것이다. 하지만 지각 가능한 이 속성들의 바탕에 깔려 있다는 그 담지체란 무엇인가? 제 안에 감각을 모아서 갖고 있다는 그 실체는 정작 감각의 대상일 수 없다. 그것은 볼 수도, 만질 수도, 맛볼 수도 없는 것, 한마디로 감각을 초월한 물 자체일 것이다. 하지만 그게 우리가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 사물이란 말인가? 그럴 리 없다.
이어서 또 다른 견해가 등장한다. 사물이란 감각에 주어진 다양성의 통합체라는 것이다. 이는 로크 (제1/2 성질의 구별)에서 시작하여 버클리의 “존재하는 것은 지각되는 것이다esse est percipi”에서 정점에 도달하는 견해다. 하지만 이 정의 역시 기각된다. 사물 그 자체가 모든 감각적인 것들보다 오히려 우리에게 훨씬 가깝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가령 우리는 어떤 소음을 듣고, 어떤 모습을 보고, 어떤 냄새를 맡고, 이 감각자료들을 종합해 ‘아, 저것은 메르세데스다’라는 결론을 내리는 게 아니다. 우리는 처음부터 비행기의 엔진 소리, 바람이 부는 소리, 폭스바겐과 구별되는 메르세데스의 소리를 듣는다. 그런 의미에서 사물은 감각보다 우리에게 훨씬 더 가깝다.
여기서 첫째 견해, 즉 사물=실체라는 객관주의적 관점은 근대합리주의의 존재론을 가리킨다. 둘째 견해, 즉 사물=다양성의 통일이라는 주관주의적 규정은 경험주의의 존재론과 일치한다. 그러므로 하이데거가 이 두 사물관을 기각할 때, 이로써 그는 근대 형이상학의 두 흐름을 모두 물리치고 있는 셈이다. 그렇다고 그가 경험론과 합리론을 종합한 칸트처럼 사물에 대한 구성주의적 관점을 주장하는 것도 아니다. 가령 처음부터 비행기의 모터 소리를 듣는다는 존재 해석의 직접성은, 감관을 통해 받아들인 감각자료를 오성의 범주라는 서랍에 집어넣어 비로소 판단을 생산한다는 칸트의 구성주의와는 대립되는 것이다.
합리주의적 사물관은 “사물을 신체(감각)로부터 분리시켜 너무 먼 곳에 둔다.” 미학에서 이 존재론은 고전주의, 특히 화가 레이놀즈 경의 회화론 속에 가장 급진적인 형태로 나타났다. “시각은 그것(미)을 보지 못한다.” 왜? 감각적 수단으로써 물자체(이상미)를 모방하기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반면 사물에 대한 경험주의자들의 견해는 “사물을 지나치게 우리 신체 쪽으로 밀어”붙여 감각자료의 덩어리로 만들어버린다. 이는 미를 “다양성의 통일”로 보는 허치슨 류의 경험주의 미학으로 귀결된다. 따라서 비록 명시적인 언급은 없으나, 이 두 가지 존재론을 비판할 때 하이데거는 그로써 근대미학의 두 가지 주요 흐름을 비판하고 있는 셈이다.
진중권의 현대미학 강의 / 숭고와 시뮬라크르의 이중주 / 진중권 / 아트북스 / 20030915 /
'하이데거(M. Heiddeger, 1889-1976) > Der Ursprung des Kunstwerkes' 카테고리의 다른 글
진리의 신전5 - 작품 / 진중권 (0) | 2011.04.02 |
---|---|
진리의 신전4 - 도구 / 진중권 (0) | 2011.04.02 |
진리의 신전2 - 근원 / 진중권 (0) | 2011.04.02 |
진리의 신전 1 / 진중권 (0) | 2011.04.02 |
하이데거의 예술철학 (0) | 2011.04.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