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원
예술작품과 예술가가 존재하는 것은 예술이 양자의 근원으로서 존재하는 한에서가 아닐까?1)
<근원>은 이 물음에서 출발한다.2) 여기서 예술은 작품과 예술가의 동同근원으로 격상된다. 예술을 실체화하는 이 어법에 벌써 급진적인 근대 비판이 엿보인다. 근대미학의 기획은 미적 주체성asthetische subjektivitat의 확립에 있었다. 거기에서 예술가의 주관은 모든 설명의 출발점이었고, 예술의 근원은 어디까지나 예술가의 머리에, 즉 그의 아이디어(고전주의)나 상상력(낭만주의)에 있었다. 하이데거는 예술을 예술가와 예술작품의 공동 근원으로 삼는다. 그리고 이로써 인간을 아르키메데스의 점archimedean point으로 삼은 근대미학의 인간주의에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일으킨다. 예술은 예술가의 주관성의 표현이 아니다. 예술의 본질은 좀 더 깊은 근원에서 흘러나오는 것이다.3)
예술이 예술가와 작품의 공동 근원이라면, 해명되어야 할 것은 예술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리라. “예술은 예술작품 속에 현성하고 있다.” 따라서 “예술이 무엇인가 하는 것은 작품에서 끄집어”내야 한다. 반면 “작품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우리는 오로지 예술의 본질에서 경험할 수 있을 뿐”이다. 그리하여 “작품에서 예술로 향하는 발걸음”과 “예술에서 작품으로 향하는 발걸음”은 원환을 이룬다. 통상의 사유는 이를 순환논법, 즉 논리학의 위반으로 볼 것이다. 하지만 하이데거는 이를 외려 “사유의 강건함”이라 부른다. 이렇게 작품과 예술 사이의 해석학적 순환을 통해 예술의 본질을 해명함으로써 하이데거의 미학은 자연스레 - 예술가 미학kunstlerasthetik이 아닌 - 작품미학werkasthetik의 성격을 띠게 된다.
예술작품은 사물적 측면을 갖고 있다. 다른 무엇이기 이전에 작품은 우선 돌이며 나무이며 물감이며 소리다. 하지만 작품은 동시에 이런 “사물적 차원을 넘어서는 또 다른 어떤 것”이다. 그리고 이 “다른 어떤 것”이 바로 예술의 본질을 이룬다. 그런 의미에서 작품은 자기가 아닌 다른 것을 말하는 것, 즉 알레고리allegorie이자 다른 반쪽을 함께 데려오는 것, 즉 심볼symbol이라 할 수 있다.4) 예술작품 속의 사물적 측면은 마치 그 속으로 혹은 그 위로 다른 어떤 것, 본래적인 것이 구축되어 이는 하부구조처럼 보인다. 그러므로 예술의 본질을 해명하려면 먼저 이 사물의 차원을 시야에 넣지 않으면 안 된다.
1) 마르틴 하이데거, <예술작품의 근원>, <하이데거의 예술학>, 폰 헤르만 지음, 이기상 옮김, 문예출판사, 1997, 553쪽(이하 <근원>, <예술철학>)
2) 이렇게 예술철학을 "근원"에 대한 물음으로 시작하는 하이데거의 접근방법은 예술과 예술작품들과의 관계를 "근원관계"로 규정한 벤야민의 비평을 연상시킨다.
3) 예술과 예술작품을 구별하여 전자를 실체화하는 어법은 초기 낭만주의자들에게서 비롯된 것이다.
4) 이 어법은 벤야민을 연상시킨다. 상징과 알레고리를 같은 것으로 보는 하이데거와 달리, 벤야민은 '유기적 전체'를 이루는 고전주의 예술을 '상징'이라 부르며, 여기에 파편적인 형태를 띠는 바로크의 알레고리를 대립시킨다.
진중권의 현대미학 강의 / 숭고와 시뮬라크르의 이중주 / 진중권 / 아트북스 / 200309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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