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데거(1889~1976)는 철학의 역사에서 형이상학을 존재론으로 바꾸어 놓은 사람이다. 이와 같은 혁명적이고 계시적인 작업을 예술 철학에 적용한 성과가 그의 '예술 작품의 근원'이다. 그는 이 저서에서 예술은 미를 느끼고 표현하는 활동이란 전통적 생각을 뒤집고, 예술은 진리를 표현하는, 또는 그 자신의 말투에 따른다면 진리가 스스로를 드러내는 일이라 주장한다. 그가 말하는 진리는 세계와의 관계에 있어서의 진술의 정확성이 아니라, 세계의 사물들이 드러나는 사건 또는 그 과정을 말한다. 하이데거는 그리스어의 '알레테이아'의 원뜻을 바탕으로 진리는 '비-비장성(非-秘藏性·존재가 자기를 드러내는 일)'이란 개념을 확립한 것이다.
예술 작품은 정감적인 경험과 무관한 자리에서 한 세계를 펼치고 바로 세우는 일이란 주장을 펴기 위하여 이 저서에서 그는 고흐의 그림 '한 켤레 구두', 마이어의 시 '로마의 우물', 그리스 아크로폴리스의 파르테논 신전을 예로 들고 있다. 이 가운데서 고흐의 구두에 관한 기술은 하이데거가 본질적인 시인임을 말해준다. 임의의 몇 구절을 옮기면 다음과 같다. "구두라는 도구의 야무진 무게 안에는 사나운 바람이 달리는 들녘 멀리까지 뻗어 있는 가지런한 밭고랑을 더듬는 느린 발걸음의 끈질김이 쌓여 있다… 구두 밑바닥에는 해거름을 헤치며 굽이치는 들길의 쓸쓸함이 배어 있다… 신이란 도구 안에서 출렁이고 있는 것은 대지의 부름이고…." 고흐의 '한 켤레 구두'에 대한 하이데거의 사유는 아름다움이 아니라, 낡은 구두가 숨기고 있는 '진리'를 드러내는 것이다. 하이데거는 존재의 진리를 '존재의 밝음'이라 부른다. 존재는 자기라는 빛을 가지고 자신을 환하게 하면서 '비-비장성'에 이르는 것이다.
'예술작품의 근원' 읽기에서 내가 속았던 것은 이 '근원'이라는 말 때문이었다. 나는 이를 단순히 '근원'이라 생각했었다. 명지의 낙동강 하구 물빛을 바라보면서 이 강의 발원지인 강원도 태백 황지를 떠올렸던 나로서는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가 말하는 근원은 바로 존재였다. 그는 실레지우스의 시를 인용하며 그렇게 말한다. "장미는 이유없이 있다." 존재 그 자신에게는 벌써 자기를 기초지을 근거가 없는 것이다. 존재는 심연(무)인 것이다. 이 저서는 나의 예상을 배신했다. 이 저서는 사실 그의 주저 '존재와 시간'의 속편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저서가 그의 '전회' 이후의 사유 성과라는 사실은 다음 몇 가지로 짐작할 수 있었다. 첫째로 표현이 시적이라는 사실, 그리고 언어의 어원을 거슬러 그 단어에 새로운 의미를 떠맡기는 버릇, 끝으로 발생기의 철학에 사유의 뿌리를 뻗치고 있는 일들이 그것이었다.
"여태까지 예술은 아름다운 것과 미와 관계해 오고, 진리와는 관계해오지 않았다." 이 저서에서 가려 뽑은 이 한 마디가 '예술작품의 근원'의 성격을 대변한다 할 수 있다. 그가 비판하는 주관주의 미학이란 존재를 망각한 형이상학에 바탕을 둔 미학을 말한다, 이 저서가 연구의 대상이 되는 것은 그의 '대지(Erde)'의 사상이 처음으로 이 '예술작품의 근원'에서 제기되고 자세하게 논의되고 있기 때문이다.
끝으로, 하이데거가 주장하는 진리와 대극에 있는 사상을 소개하는 것이 도리일 것 같다. 언젠가 고성의 옥천사 탐진당 주련에서 읽었던 '진망원래총부진(眞妄元來總不眞·참도 거짓도 모두 원래 참이 아니니)'이라는 한 마디가 그것이다.
부산일보 / 20071027 / 허만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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