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하이데거(M. Heiddeger, 1889-1976)/Der Ursprung des Kunstwerkes

진리의 신전 1 / 진중권

반응형

 

진리의 신전


하이데거에 따르면 서구 형이상학의 역사는 존재 망각의 역사이다. 서구 철학, 특히 서구의 근대철학은 그 옛날 그리스인들이 가졌던 존재 체험을 완전히 망각해버렸다. 망각은 이미 그리스 철학 내부에서 시작되나, 결정적인 변질은 그리스 철학이 로마인들에게 전달되는 과정에서 일어난다. 그리스어 개념을 라틴어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원래 그 낱말에 담긴 그리스인들의 근원적 존재 체험이 완전히 상실되어 버린 것이다. 그리하여 존재의 망각이 시작되고, 그 위에 바로 서구의 근대철학이 들어선 것이다. 그리고 이 망각lethe에서 벗어나 한때 그리스인들에게 열렸던 근원적인 존재의 체험을 상기하는 것aletheia, 그것이 하이데거의 철학적 기획이며, <예술작품의 근원>(이하 <근원>)은 이 기획을 미학으로 확장시키려는 시도다.

때문에 <근원>에서는 <존재와 시간>에서 그가 개진했던 형이상학비판이 미학적 변용을 거쳐 다시 한 번 전개된다. 가령 존재자의 공간적 병존으로 이루어진 자연이 아니라 복잡한 사용연관의 망으로 이루어진 ‘세계Welt'의 개념. 의식이라는 주체가 아니라 사물의 의미를 실천적으로 해석하는 실존적 주체로서 ’현존재Dasein'라는 규정. 언표와 사태의 일치에서 성립하는 파생적인 진리가 아니라 새로운 세계를 열어 보여주는 근원적 진리로서의 개시ErschlieBung. 이른바 존재론적 차이의 사상을 이루는 이 요소들이 <근원>에서는 “진리가 발생하는 탁월한 방식 중의 하나”라는 예술작품 - 특히 고흐의 구두와 그리스의 신전 - 의 예를 통해 미학적으로 다시 한 번 확증된다.

근대 형이상학의 전복은 동시에 그것을 바탕으로 성립한 미학의 존속에도 의문을 던진다. 실제로 <근원>은 서구 형이상학에 대한 비판을, 그것을 토대로 성립한 근대 미학에 대한 비판으로 연장하기 위해 씌어 진 것이다. 18세기에 성립한 미학은 창작을 예술가 주체로 환원시키고, 예술의 진리를 재현의 진리로 규정하며, 작품을 한갓 향유의 대상으로 간주한다. <근원>에서 하이데거는 근대미학을 지탱해온 이 모든 전제들을 비판적으로 검토한다. 그의 비판은 전복적이라고 할 정도로 철저하다. 이 철저한 전복의 결과로 얻어지는 것은 물론 근대의 미학과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탈 근대적 패러다임이다.

하이데거의 미학비판은 동시에 근대의 예술문화에 대한 비판이기도 하다. 근대의 문화는 박물관과 미술관을 통한 수집과 진열의 문화다. 여기서 작품은 원래 그것이 속하던 세계에서 떨어져 나와 아무 관계가 없는 다른 조각이나 신상들과 나란히 전시된다. 이로써 ‘세계’는 붕괴하고, 작품은 한갓 미적 관조의 대상으로 전락한다. 세계를 잃어버린 작품은 관광객의 눈요깃감에 지나지 않게 된다. 이에 맞서 하이데거는 근원으로, 즉 작품의 진리를 보존했던 과거로 돌아가려 한다. <근원>은 한마디로 “예술을 대하는 현존재의 근본 태도의 변화”를 주비하기 위한 것이다. 그 변화된 태도란 예술을 한갓 미적 관조의 대상이 아니라 진리가 발생하는 방식으로 대하는 것을 말한다.

 

 

 

진중권의 현대미학 강의 / 마르틴 하이데거 / 진중권 / 아트북스 / 20030915 /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