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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데거(M. Heiddeger, 1889-1976)/Der Ursprung des Kunstwerkes

하이데거의 예술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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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에 앞서

하이데거 예술철학을 강의할 발칸의장미입니다. 강의를 시작하기 전에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 하나 말씀드리자면, 하이데거가 아리스토텔레스 강의를 시작하면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생애에 대해서 언급했던 말이 딱 세마디였다고 합니다. 그는 태어났고, 살았으며, 죽었다. 여기에서 하이데거가 하고 싶었던 말은 철학자의 생애에 관한 지식은 부차적인 사항이라는 거겠죠. 하지만 하이데거 연구자들이 하나같이 지적하는 부분이 있는데 그게 뭐냐면, 하이데거의 사상이 그의 고향 메스키르히라는 동네에 대한 향수와 관련이 있다는 부분입니다. 컨츄리보이였죠, 하이데거가. 대도시를 굉장히 싫어했구요. 하이데거 철학의 전반적인 부분도 그렇지만, 예술철학도 그런 토착적이면서 자연친화적인 감성이 느껴집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어서 보시겠습니다.

 

 

반고흐의 <구두>와 플라톤의 모방이론

반고흐의 <구두>라는 그림입니다. 반고흐가 구두 그림을 즐겨 그렸다고 합니다. 구두 그림만 9점인가 남겼다고 그러죠. 모두 제목없이 그린 그림인데 나중에 사람들이 구두에 제목을 붙였죠. 자, 여기 앞에 계신 분...성함이,,,? 만약 플라톤이 이 구두 그림을 본다면 무슨 이야기를 할까요. 네, 이 그림은 구두의 이데아를 모방한 구두를 또다시 모방한 이중모방이 되고, 따라서 진리에서 세 번째가 되니까 진리와는 너무나 멀어져버린 환영이 되죠. 실제로 국가편 10권에서 플라톤이 이러한 논지를 펴기 위해서 예로 들고 있는 것 중 하나가 구두그림입니다. 그런데 하이데거가 다시 이 그림을 시작으로 예술론을 전개하죠. 물론 이 그림은 진리와 상관없다고 하는 플라톤과는 정반대의 방향에서, 그러니까, 이 그림은 진리와 상관이 있다, 아니 이 그림에서 비로소 구두의 진리가 드러난다고 합니다. 일종의 도발이겠죠. 이 그림을 하이데거가 어떤 식으로 해석하는지는 잠시 후에 보시구요, 본격적으로 하이데거 예술철학의 큰 그림들을 살펴보시겠습니다.


하이데거 예술철학의 기획

하이데거 예술철학이 가지고 있는 방향성을 먼저 짚고 넘어가겠습니다.

크게 세 가지인데요, 첫째는 존재물음이라는 하이데거 철학의 가장 커다란 밑그림의 연장으로 볼 수 있습니다. 아주 간단히 소개하자면, 하이데거에게 가장 중요했던 문제는 존재는 무엇인가 하는 물음이었습니다. 그런데 하이데거가 보기에 유럽 형이상학의 역사는 존재의 의미를 물어온듯 보이지만 실상은 존재를 존재자로 대치시켜 이해한 존재망각의 역사입니다. 그래서 하이데거는 존재와 존재자의 존재론적 차이를 강조하면서 존재의 의미를 새롭게 묻죠. 하이데거에게 있어서 진리란 이 존재의 드러남을 뜻하는데, 아까 그림에서처럼 예술작품에서 진리가 드러난다는 겁니다. 따라서 존재물음의 기획은 예술작품의 해명을 통해서 계속되는거죠.

둘째는 예술에 대한 미학적 접근의 한계 극복입니다. 이것은 첫 번째 방향과 연결됩니다. 왜냐하면 하이데거가 보기에 작품을 하나의 미적 관조의 대상으로 간주하는 미학은 철저히 형이상학에 토대를 둔 학문이기 때문입니다.

셋째는, 현대 기술시대가 가지고 있는 위기상황을 기술이 가지고 있는 본래적 의미를 회복함으로써 이 난국을 헤쳐나갈 수 있느냐 없느냐를 진단해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 때 예술은 본래 기술이 가지고 있던 본질을 탁월하게 보존하고 있는 영역으로서 검토가 됩니다

 

예술의 본질해명과 해석학적 순환

하이데거는 예술이란 무엇인가를 묻기 위해서는 그것이 예술작품으로부터 해명이 되어야 하고, 또 그렇다면 예술작품이란 무엇인가를 묻기 위해서는 다시 그것의 근거인 예술의 본질을 물음으로써 알 수 있다고 합니다. 해결해야할 문제를 해결의 전제로 삼는다는 점에서 이것은 <존재와 시간>에서 보이는 존재론적 순환의 반복으로 보이죠. 또 하이데거의 예술철학이 존재론적 성격을 띠고 있다는 결정적인 암시가 되겠구요 어쨌든 하이데거는 이런 순환 속으로 뛰어들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논의는, 구체적인 예술작품을 통해서 예술의 본질을 물어가는 쪽으로 방향이 잡힙니다.



 

 

작품의 사물성 해명

자, 이렇게 해서 예술작품이란 무엇인가 하고 봤더니 이런 도식이 나옵니다. 예술작품은 작품이기 이전에 하나의 사물이지만 사물적인 성격만 가지면 그건 예술작품이 아니죠. 예술작품이 알레고리적인 면이나 상징적인 면을 가지는 건 이런 사물적인 성격을 넘어서는 무언가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작품 그 자체 이외의 것을 보여주는 요소는 사물적인 특징이죠. 그래서 다시 사물성의 해명이 문제가 됩니다.

그랬더니 사물을 이해하는 세 가지 전통적인 방식이 이렇게 나옵니다. 첫 번째는 말하자면 실체개념입니다. 뭔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어떤 밑바탕이 이렇게 있고 거기에 어떤 특성들이 덧붙여집니다. 그 밑바탕은 변하지 않지만 특성들은 가변적이죠. 하지만 하이데거는 이러한 도식은 사물뿐만이 아니라 모든 존재(있음)에 타당하다는 이유로 기각합니다. 두 번째는 사물이란 우리 감관에 주어진 여러겹의 감각적 통일체라는 겁니다. 하지만 이것도 기각되는데, 예를 들어서 여기 화이트 보드라는 사물이 제 앞에 나타날 때, 제가 이 화이트보드가 가지고 있는 하양이라는 감각적 특성을 따로 떼어서 감지하는 게 아니거든요. 사물에 대한 세 번째 해석은 사물이 질료와 형식의 결합이라는 겁니다. 하이데거는 이 개념이야말로 예술작품의 사물적인 측면을 해명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하이데거가 보기에 전통적으로 이 도식은 오히려 도구의 도구적 성격을 해명하면서 도출되었다는 것을 지적합니다. 이를 위해서 하이데거는 사물-도구-작품의 특성을 비교하면서 도구는 사물과 작품의 중간적 성격을 띠고 있으며 따라서 단순사물과 예술작품, 나아가서는 모든 존재자를 파악할 수 있으리라고 기대합니다. 여기에서 도구의 도구적 성격, 즉 도구성이 문제가 되면서 하이데거는 한 켤레의 구두가 그려진 그림을 분석합니다.

“닳아빠진 구두 내부의 어둠 속에서부터 노동자의 고단한 발걸음이 밖을 응시하고 있다. 딱딱하고 울퉁불퉁한 구두 안에는 황량한 바람이 휩쓸고 지나간 한없이 멀고 한없이 단조로운 밭고랑을 수도 없이 밟고 지나갔을 그녀의 강인한 발걸음이 응축되어 있다. 가죽 위에는 흙의 축축함과 비옥함이 누워있다. 구두창 밑에는 땅거미 질 무렵의 들판길의 고독이 납작하게 눌려 있다. 구두 안에서는 대지의 말없는 부름, 익어가는 곡식의 고요한 선사함, 바람 부는 텅 빈 밭의 황량함이 보여주는 알 수 없는 거부가 가늘게 떨리고 있다. 빵을 안전하게 얻는 데에 따른 불평없는 근심, 궁핍을 다시 넘어선 데 대한 말없는 기쁨, 출산이 임박함에 따른 초조함, 죽음 앞에서의 떨림이 스며들어 있다. 이 도구는 대지에 속해있고, 농부 아내의 세계 가운데서 보존되고 있다.”


한 편의 시 같지 않습니까. 이 분석은 이 구두가 그냥 단순한 사물이 아니라 농부 아내의 세계(빵의 확보, 고난을 극복한 기쁨, 아기의 출산, 죽음의 위협 등)가 여기에 의지해 드러나게 됨을 보여줍니다. 나아가서 이 세계가 유지되는 터전인 대지가 드러나게 됨을 보여줍니다. 여기에서 도구의 도구존재가 밝혀집니다. 농부의 아내가 대지에 발을 딛고 그녀의 세계에 참여할 수 있게 해주는 구두의 쓰임새야 말로 구두의 구두존재입니다. 그런데 그 쓰임새를 가능하게 해주는 것은 다름 아니라 구두에 대한 그녀의 믿음입니다. 이것을 하이데거는 신뢰성이라고 부릅니다. 정리하자면, 작품을 통해서 우리는 도구를 도구로 만드는 신뢰성을 경험하게 됩니다.

도구를 도구로서 존재하게 하는 이 신뢰성은 그 자체로서는 드러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인간(현존재)에게 도구는 항상 친숙하게 일치되어 있기 때문에 굳이 의식되지 않죠. 그런데 이런 도구의 사용맥락에 장애가 발생하면 이때 도구가 대상화됩니다. 도구는 신뢰성 속에서 존재하기 때문에, 따라서 도구를 이론적으로 고찰한다고 해서 도구의 도구존재가 밝혀지지는 않습니다. 고흐의 작품은 구두 즉 도구의 도구존재를 밝혀줍니다. 이러한 예에서 보듯이, 예술작품은 사물이 진실로 어떻게 존재하는지 열어 보여줄 때 예술작품으로 존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때 작품 내부에서 진리가 일어난다고 표현합니다.


진리의 일어남 - 개시로서의 진리

이렇게 고흐의 작품에서는 존재자의 진리가 발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진리가 발생하게 된 이유는 단순히 구두를 정확히 모사해서 재현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 이유는 작품이 구두의 존재자가 아닌 그것의 본질인 존재를 드러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작품의 진리는 존재자를 비은폐성으로 이끌어내어 그것이 진정으로 어떠한 것인지를 열어 보여주어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하이데거는 예술을, 존재자의 진리가 작품 속에 스스로를 정립시키는 것으로 정의합니다.

 

세계와 대지

방금 이야기된 예술작품의 본질로부터 또다른 결론이 하나 도출되게 되는데, 그게 뭐냐면, 만약 예술작품이 사물성을 그 본질로 하지 않고 사물의 사물됨을 드러내 보여주는 것을 그 본질로 한다면, 이 예술작품은 다른 사물이 세계와 맺고 있는 방식과 다른 방식으로 세계와 관계할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다른 사물들은 세계 안에 단지 안주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예술작품은 세계에 안주하는 것이 아니라 예술작품이 간직하고 있는 세계의 모습을 혹은 그 세계의 열림 자체를 보여줘야 합니다. 이것을 보여줄 수 있는 예술작품으로 하이데거가 드는 예가 바로 파르테논 신전입니다. 하이데거의 말입니다.

“신전은 가파른 골짜기 한가운데 서 있다. 신전은 신의 모습을 어렴풋이 에워싸고 있다. 신전은 기둥 틈새로 감춰지면서 열려 보이는 실내를 통해 신의 모습을 신성한 영역으로 드러낸다. 신전을 통해 신이 현전하는 것이다. 신이 그렇게 현현한다면 그 찬란한 빛 속에서 세계는 비추어진다. 신전은 비로소 돌과 동물, 인간과 신이 그들 본연의 모습으로 존재할 수 있는 세계를 일으켜 세운다. … … 신전은 그 안에서 탄생과 죽음, 재난과 축복, 승리와 치욕, 인내와 타락 등 인간이 자기 운명의 형태를 얻게 되는 여러 관계와 길들, 그러한 것들을 자기 주위로 모은다. 이렇게 열린 연관관계들이 전개되면서 확장된 범위가 곧 이러한 역사적 민족의 세계다.”

 

인용문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그 신전에 의해 그 신전을 중심으로 한 자연환경과 또 그것과 관계맺어 오면서 전개해온 인간의 역사가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올림포스 신이 없는 그리스 문화를 생각할 수 없죠. 그리스인들이 신전을 세웠을 때 그들은 그들의 신을 존재하게 한 것이고, 신전을 통해서 그리스민족이 거주하는 세계를 열었던 겁니다. 이것을 하이데거는 세계의 건립Aufstellen 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세계가 무엇인가 하는 문제는 중요합니다. 하이데거에게 있어서 세계는 개별적 존재자처럼 대상화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존재자들이 각각 존재자로서 자신을 드러낼 수 있게 해주는 터(관계, 지평)를 의미합니다. 그 세계 안에서 존재자들의 삶이 영위되고 있기 때문에 대상처럼 보여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작품을 통해서 트여 세워보여지는 게 되죠.



세계 말고도 나타나는 것은 또 있습니다.
 

“신전은 바위 지반 위에 머물러 서 있다. 신전은 폭풍을 견뎌내며 폭풍의 위력을 보여준다. 석조의 광채와 빛남은 비록 태양의 은총에 의해서만 빛나기는 하지만 그것은 대낮의 빛과 하늘의 아득함, 밤의 캄캄함을 비로소 나타나게 한다. 신전의 솟아오름은 허공의 보이지 않는 공간을 보이게 해준다. … … 이러한 솟아오름과 피어오름을 고대 그리스인들은 그 자체와 전체에 있어서 퓌지스라 불렀다. 동시에 퓌지스는 인간이 그 위에 그리고 그 안에 자신의 거주의 기초로 삼는 그것을 밝힌다. 우리는 그것을 대지라 부른다.”


 

이 인용문에서는 대지의 드러남을 알 수 있습니다. 신전이 바위 위에 우뚝 솟아오르면서 폭풍의 위력이 드러나고 낮의 빛과 밤의 캄캄함이 드러납니다. 또 허공이 허공으로서 드러납니다. 이러한 대지의 드러남을 하이데거는 대지의 설립Herstellen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또하나 눈여겨 보아야 할 부분은 여기에서 작품에서의 만듦의 문제가 새롭게 밝혀지게 되는 것입니다. 통상적으로 재료는 용도성 안에서 사라져버립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칼의 쇠는 자름이라는 행위가 순조롭게 진행되기 위해서 눈에 띄어서는 안되죠. 하지만 이를테면 쇠를 가지고 만든 동상이 있다고 합시다. 그 동상에서는 쇠의 질감이라든지 기타 쇠의 여러 속성들이 그 자체로서 나타나게 됩니다. 그런데 예술작품의 질료가 세계를 건립하는데 사용되었다면 그 질료는 사라지지 않고 그 세계 안에서 자신의 고유한 모습을 드러내게 되겠죠. 이렇게 질료가 질료 자체로서 나타나게 하는 것, 이것이 바로 작품에 있어서 세계가 건립됨과 동시에 모든 존재자가 뿌리내리고 있는 대지가 그 세계 안에 떠오른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세계와 대지의 관계를 하이데거는 투쟁관계로 묘사합니다. 왜냐하면 하이데거에게 있어서 세계는 트여있는 터를 의미하는 반면에 대지는 그 자체로 숨어드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대지는 그 안으로 침투해들어가려는 모든 시도를 거부하는데, 이것을 이를테면, 돌의 무거움을 저울로 잰다고 해서 돌의 그 육중함 자체가 파악되는게 아니라는데서 나타납니다. 그 계량적 수치 앞에서 육중함 자체는 사라지죠. 또 돌을 분해해들어간다고 해서 돌의 돌다움이 나타나는 것도 아닙니다.

자 다시 정리하자면, 예술작품에서는 세계와 대지가 투쟁하는데, 세계는 무언가를 자꾸 열어보이려고 하고, 대지는 감추는 것으로서의 대지로서 드러납니다. 예술작품을 예술작품이게끔 하는 것은 바로 이 투쟁입니다.

이 투쟁은 이렇게 이해하실 수 있습니다. 하이데거는 인식과 사태의 일치를 진리로 보는 진리대응설을 비판합니다. 어떻게 비판하느냐 하면, 이 진리대응설은 사태의 드러나있음을 전제로 한다는 거죠. 다시 말해서 진리대응설은 탈은폐성으로서의 진리에서 파생된 이차적 진리에 불과합니다. 그렇다면 진리의 본질에 대한 진정한 물음은 탈은폐성에서 출발해야한다는 거죠. 이 탈은폐로서의 진리는 존재자들의 나타남을 가능하게 하는 일종의 밝혀진 터를 의미합니다. 그런데 이 존재의 진리, 존재의 드러냄은 동시에 숨겨짐을 동반하죠. 달리 말하면, 존재의 탈은폐는 그것이 은폐되어 있음을 전제로 합니다. 하이데거가 진리는 본질적으로 비진리다라는 말을 할 때 의미한 바는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하이데거가 드는 쉬운 비유로 불씨의 예가 있습니다. 불씨가 자신의 본질인 불타오름으로 드러나기 위해서는 타오름에 자신을 완전히 내어주어서는 안된다는 거죠. 오히려 자신 속에 간직되어 있어야만 지속적으로 타오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탈은폐와 은폐는 투쟁상황에 있고, 작품은 존재의 탈은폐와 은폐를 구체화함으로써, 즉 미스테리로서의 대지를 세계 안에 드러내는 형태로 구체화함으로써 이 투쟁을 선동하는거죠.

 

미학의 전복

근대미학은 예술을 존재자의 재현으로 보죠. 이때 암묵적으로 전제되는 것이 주관과 객관의 일치, 인식과 사태의 일치로서의 진리모델입니다. 하지만 하이데거의 정의에 따른다면 예술작품이란 “존재자의 진리가 스스로를 작품 안에 정립하는 것”입니다. 이 정의에서 진리는 스스로 주체이자 객체가 되죠. 물론 엄밀히 말하자면 주관-객관이라는 도식 자체는 이미 하이데거가 극복한 상태이기 때문에 그런 명칭을 사용하는 것 자체가 벌써 부적절하죠. 다시 말해서 근원적 진리는 주객의 구별에 선행합니다.

이렇게 진리개념이 새롭게 세워지면서, 기존의 미학에 대한 태도 이를테면, 창작자의 표현으로서의 예술, 존재자의 정확한 재현으로서의 예술, 혹은 감상자가 정서적인 감동을 받는 것으로서의 예술이라는 개념이 해체가 됩니다. 오히려 예술가는 작품의 생성을 위해서 쓰이는 일종의 통로가 됩니다. 또 감상자는 단순히 작품을 향유하는 것이 아니라 작품 안의 진리에 참여함으로써 진리를 진리이게끔, 진리를 진리로 성립시켜야 하는 역할을 맡게 됩니다. 진리사건에 진입하는 과정, 하이데거는 이것을 보존이라고 표현하죠.

미 개념도 마찬가지로 변할 수밖에 없죠. 전통적으로 아름다움이라는 것은 인간의 인식능력에 의해 파악된 비례, 균형, 조화 등을 의미했죠. 하지만 미적 주체성이 파괴되면서 아름다움을 규정할 수 있는 척도는 사라집니다. 아니 사라지는 게 아니라 하이데거가 이야기하는 바에 따르면, 작품 속에서 진리가 나타나는 형태, 진리의 반짝임이 바로 아름다움이라고 합니다.

기술의 본질회복

하이데거는 과학기술의 위험성을 경고하죠. 하지만 무턱대고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과학기술 자체에 이미 구원의 가능성이 있는지를 진단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기술이라는 낱말의 어원을 찾게 되죠. 고대 그리스어인 테크네의 원래 “진리를 빛나는 광채 안으로 끄집어내어 놓는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존재자의 숨겨진 모습을 드러내는 활동이 바로 테크네로 이해가 되는거죠. 실용적인 도구를 만드는 행위 뿐만이 아니라, 조각, 미술, 시짓기 심지어 웅변까지도 테크네의 하나였습니다. 테크네가 가지고 있는 본래의 의미가 무언가를 가공하여 상위 목적에 맞게끔 만들어내는 기술만을  의미하게 된 건 근대 이후죠. 테크네의 본래 의미를 잃어버린 과학기술은 존재자의 숨겨진 모습을 참되게 드러내기보다는 오히려 존재자의 본래모습을 왜곡시켜서 상위목적에 맞는 가공재료로 만들어버림으로써 왜곡이 진행되었다는 것이 하이데거의 이해입니다. 기술의 본질 회복 가능성을 예술에 물을 수 있는 이유는 이렇게 예술과 기술이 그 뿌리를 같이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narpheus.egloos.com / 20071201 /발칸의 장미를 내게 주었네 / 발칸의 장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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