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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menides(기515-445)/파르메니데스

존재론과 논리학 / Graes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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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론과 논리학

 

엘레아의 파르메니데스(Parmenides)는 서양의 존재론과 형이상학의 창시자로 간주된다. 그는 스스로 변화하는 세계라는 생각을 논리학의 법칙들과 대결시키고, 이런 생각이 모순적이요 기만적이며 생각할 수조차 없는 것이라고 비판한다. 즉 어떤 변화도 없다. 왜냐하면 어떤 변화도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헤라클레이토스가 직관의 방법으로 경험 세계를 이 현실세계의 배후에 감추어져 있는 본이 드러난 것으로 새롭게 해석한 반면에, 파르메니데스는 경험세계의 존재를 부인한다. 그는 경험세계를 정신 나간 환상이 만들어 낸 것으로 평가절하하고, 고정적이며 변화를 겪지 않는 실재가 있다고 주장한다. 다시 말해서 오로지 하나의 존재자가 있다는 것이다. 즉 여럿이나 변화는 없으며 오직 하나의 동질적인 실재가 있는데, 이 실재는 사유를 통해서만 파악된다는 것이다.

 

파르메니데스의 이 테제는 주목할 만한 철학적 노력의 결과이다. 파르메니데스는 ‘생성’이나 ‘소멸’과 같은 개념들이 지니는 철학적 함축에 관심을 기울였으며, 분명히 이 문제를 본격적으로 탐구한 최초의 사상가이다. 마치 아낙시만드로스가 ‘아르케’라는 용어를 세밀하게 검토한 것처럼, 파르메니데스는 ‘생성’이나 ‘소멸’이라는 생각의 밑바닥에 놓여 있는 전제들에 대해서 물음을 제기한다. 그의 대답은 충분히 놀랍다. 즉 ‘생성’이란 명백히 무엇인가가 ‘존재하지 않는 어떤 것’으로부터 생겨나는 것을 말하고, ‘소멸’이란 존재하는 어떤 것이 존재하지 않는 어떤 것으로 되는 것을 말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생성’이나 ‘소멸’에 대해서 말할 경우에 공통적으로 우리는 ‘존재하지 않는 어떤 것’을 전제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존재하지 않는 것’을 우리는 인식할 수도 없고 가리킬 수도 없다.”

 

파르메니데스가 무엇을 염두에 두고 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확실한 것은 다만 다음과 같은 점이다. 즉 파르메니데스는 ‘존재를 나타내는 be 동사’와 ‘술어화의 기호로서의 be 동사’를 전혀 구별할 수 없었다는 사실이다. 어쨌든 그는 다음과 같이 추론한다. ‘생성’이나 ‘소멸’과 같은 표현들은 그것들이 관계를 맺는 대상이 없을 뿐만 아니라, 실제 세계를 벗어나서 허구적인 존재론을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파르메니데스는 오류를 범한 셈이다. 그렇지만 그의 ‘생성’과 ‘소멸’에 대한 고찰은 결코 사소한 것이 아니다. 실제로 ‘생성’이나 ‘소멸’이라는 개념들은 ‘존재’나 ‘비존재’라는 개념들을 포함한다. 이 개념적인 관계맺음의 방식은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해서 비로소 만족스럽게 해명된다. 또 한 가지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파르메니데스가 ‘있다/이다’라거나 또는 ‘있지 않다/이지 않다’와 같은 표현들을 그 당시의 언어관이 그랬던 것처럼 주로 ‘이름’으로 이해했다는 점이다. 이런 언어관에 따르면 이름은 그 대상에 적중하든지 아니면 전적으로 대상을 빗나간다는 것이다. ‘be동사’는 명명(命名)의 기능 같은 것을 갖고 있다.

 

분명히 파르메니데스에게서 영향을 받은 무수한 소피스테스적인 주장들 가운데 하나의 예가 이 점을 잘 말해준다. 이에 의하면 모순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부정된 문장으로서의 모순은 모두 ‘비존재’를 포함할 것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여하튼 파르메니데스는 오로지 있는 것만 있을 수 있다고 하는 사실에 어떤 의심도 허용하지 않는다. ‘있는/...... 인 것’, 다시 말해 ‘존재’라는 명칭을 지니기에 합당한 것에는 모든 종류의 파괴적 부정(否定)들에 대해 면역을 갖게 해 주는 특정한 조건들이 부과되어야만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조건들은 부분적으로 간접증명의 방식으로 기술된다. 파르메니데스는 ‘있는 것/..... 인 것’이 필연적으로 첫째, 생성된 것이 아니요, 둘 째, 소멸되지 않으며, 셋째, 그 자체로 전체요 동질적이고, 넷째, 운동하지 않고, 다섯째, 종말이 없으며, 여섯째, 과거와 미래가 없고, 일곱째, 하나이며, 여덟째, 지속적이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애썼다. ‘없는 것은 없다’거나 ‘있는 것만 있다’는 근본 구별을 일단 전제하면, 증명의 내적 논리가 투명해진다.

 

첫 번째와 두 번째 테제는 각각 ‘생성’을 ‘있지 않은 것으로부터 무엇인가로 되는 것’으로, ‘소멸’을 ‘있는 것으로부터 있지 않은 것으로 되는 것’으로 분석할 때 직접적으로 도출된다. 왜냐하면 있는 것이 생성되고 소멸한다는 대립적인 두 주장은 ‘비존재’가 실재한다는 전제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비존재’가 실재한다고 전제하는 것은 위에서 언급한 근본 구별에 위배된다. 세 번째 테제와 관련해서 흥미로운 점은 파르메니데스가 동일성을 부정하는 형태의 명제를 비존재가 실재한다고 주장하는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있는 것이 그 자체로 전체가 아니요 동질적이지 않다고 보는 것, 따라서 이 있는 것이 어떤 틈새를 갖고 있으며 자기 자신과 동일하지 않다고 보는 것은 모두 비존재가 실재한다는 주장을 끌어들이는 셈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모든 것은 있는 것으로 가득 차 있다.” 이러한 생각은 계속 전개되는 일련의 추론들을 낳는다.

 

네 번째 테제는 분명히 첫 번째와 두 번째 테제를 결합시킨 것으로 보이며, 훗날 소피스테스인 고르기아스가 파르메니데스의 제자인 엘레아의 제논을 이어받아 개진하게 될 사상을 암시적으로 포함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즉 있는 것이 운동할 수 있으려면, 그 있는 것이 거기로 향해 운동할 수 있을 ‘있는 것과는 다른 어떤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다섯 번째 테제의 ‘종말이 없다’는 속성은 파르메니데스에게는 분명히 결점이 없으며 완전하다는 측면을 의미하는 것이다. 만일 있는 것이 완결적이지 못하다면, 있는 것은 그 자체로 전체요 동질적이라는 세 번째 테제에 위배된다. 다른 관점에서 보자면 안셀무스식의 존재론적 신존재증명과 유사한 생각이 여기에 나타나 있다고 할 수 있겠는데, 완전성은 비존재를 배제한다는 생각이 바로 그것이다.

 

철학적으로 흥미로운 것은 여섯 번째 테제에 나타난 특징이다. 파르메니데스는 있는 것에 대해서 시간적으로 한정되지 않은 지속을 요청하는 것일까, 아니면 무시간성을 요청하는 것일까? 이 물음은 그리 간단하게 대답되지 않을 것 같다. 그렇지만 여러 면에서 보아 두 번째 선택이 옳을 것이다. 만일 어떤 변화도 없다면, 어떤 발생도 일어나지 않는다. 그런데 시간의 조각들이 서로서로 구별되어 확정될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발생을 근거로 해서이다. 따라서 ‘있다/이다’라든가 ‘존재’는 파르메니데스에게는 실제로 무시간성의 관념을 연상시킨다. 예를 들어서 수학적 명제들에서 사용되며 문법적인 외양과는 달리 시간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저 무시간적 ‘있다/이다’에 비교될 수 있다.

 

그리스 철학에서는 명제들의 속성들을 그 명제들에서 지칭되는 사물들에 전이시키는 경향이 지배적이었기 때문에, 파르메니데스가 발전한, 논리적으로 무시간적인 ‘있다/이다’는 불가피하게 소멸하지 않는 존재자라는 개념으로 이어진다. 이 소멸하지 않는 존재자라는 개념은 플라톤의 이데아들의 세계가 생겨나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고, 아리스토텔레스의 ‘실체’개념에서도 일정한 역할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일곱 번째와 여덟 번째 테제의 특징들은 세 번째 테제를 확장해서 설명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하는 데에 별 어려움이 없다. 만일 ‘하나의’ 존재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이 ‘존재 한다’고 말해지는 것과는 다른 어떤 것이 있다는 것이 되고, 그렇다면 ‘비존재’가 있다고 주장하는 셈이 될 것이다. 또 만일 존재자가 지속적이지 않다면, 단일성과 유일성이 부정되는 것이요 이것은 다시금 근본 구별에 위배된다.

 

파르메니데스의 연역들은 경험세계와 극단적으로 대립되는 실재의 그림을 그려 보인다. 그렇기 때문에 파르메니데스는 한걸음 더 나아가

경험세계를 정신 나간 환상의 소산물로 간주한다. 그렇지만 도대체 어떻게 파르메니데스는 그 자신의 전제들에 따라 어떤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할 수 있는 것인가? 여기에서 파르메니데스는 자신의 근본 구별을 위배하고 있지는 않은가? 또 존재자의 단일성을 사유의 필연성으로 이해하는 파르메니데스가 오로지 하나의 존재자만 있다는 사실을 여러 사유 주체들이 있다는 부인할 수 없는 사실과 어떻게 조화시킬 수 있겠는가? 이런저런 물음들이 해결되지 않은 채로 남아 있다.

 

 

Andreas Graeser /  이강서(전남대학교 철학교수)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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