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르메니데스와 멜리소스의 일자
엘레아학파의 창시자는 크세노파네스다. 그러나 그가 이탈리아 남부 엘레아에 간 적이 있다는 증거가 없기 때문에 역사에서는 후견인적 창시자쯤으로 여기고 있다. 크세노파네스는 인간과 동형인 그리스 신들을 공격하며. “만일 소나 말, 사자가 손을 가지고 있어 그림을 그릴 수 있고 예술작품을 만들 수 있다면 말은 신들의 형상을 말처럼, 소는 소처럼 그릴 것이며 몇몇 신들의 몸을 족속과 닮게 그릴 것이다. 또한 자신들을 지상에서 가장 위대한 자로 여길 것이다. 여기 저기 돌아다니지 않는 단 하나의 신”일 것이라고 말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크세노파네스의 이런 발언을 들어 일자는 신이라고 해석하고 그를 일원론자로 평가했다. 현재 엘레아학파의 실제 창시자는 파르메니데스(이하 Pa)로 여겨지고 있다. 그는 기원전 6세기말 태어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대략 451-449년인 그가 65세 때 소크라테스와 대화를 나눈 것이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는 엘레아시의 법을 작성했다고 한다. Pa는 운문으로 저술했으며 우리가 보유하고 있는 대부분의 단편들은 심플리키우스의 논평 속에 보존되어 있다. 그의 이론은 간단히 말해 일자는 존재하며 전화, 변화는 환상이라는 것이다. 만약 어떤 것이 생성된다면 그것은 존재로부터 생성되거나 비존재에서 생성될 것이다. 그런데 존재로부터 생성된다면 그것은 이미 존재하는 것이 되어 생성이란 말과는 어울리지 않는다. 만약 비존재로부터 생성된다면 그것은 무(無)다. 무에서는 무가 나오기 때문이다. 따라서 변화는 환상이다. 다수성 역시 환상이다. 그러므로 존재는 단순히 있을 뿐이고 일자다. Pa는 변화와 운동을 거부함으로써 감각-현상의 길을 거부했다. 그의 눈에는 일자가 감성적이고 물질적으로 보인 것이다. 그것은 일원적 유물론을 수립하기 위해서였다. 일원적 유물론에서는 변화와 운동이 환상적인 것으로 추방된다. 단지 이성만이 실재를 이해할 수 있고 그 실재는 물질적이다. 따라서 관념론이 아니라 유물론이다. Pa의 첫 번째 주장은 “그것은 있다”다. ‘그것’, 즉 실재, 존재는 그것의 본성이 어떠하듯 존재하면서 존재하지 않을 수는 없다. 즉 있으면서 있지 않기란 불가능하다. 존재는 말해질 수 있고 내 사유의 대상이다. 그런데 내가 생각할 수 있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존재할 수 있다. “왜냐하면 생각될 수 있는 것과 존재할 수 있는 것은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그 것’이 존재할 수 있다면 그것은 존재한다. 만약 그것이 존재할 수 있는데 아직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무일 것이다. 무는 사유의 대상일 수 없다. 무에 관해 말하는 것은 전혀 말하지 않는 것이며 무에 관해 생각하는 것은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왜 “그것은 있다”라고 말하는가. 만약 어떤 것이 생성된다면 그것은 존재로부터 생기거나 또는 비존재에서 생길 수밖에 없다. 만약 그것이 존재로부터 생긴다면 진정한 생김, 생성이란 없다. 왜냐 하면 그것이 존재로부터 나온다면 그것은 이미 존재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만약 비존재로부터 생긴다해도 모순이다. 존재가 생겨나기 위해 이미 어떤 것이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그것”은 존재로부터 생기지도 않고 비존재로부터 생기지도 않는다. 그것은 생성되는 것이 아니라 그냥 단순히 존재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모든 존재에 통용되므로 어떤 것도 변화한다고 볼 수 없다. 어떤 것의 변화를 설명하기 위해선 위의 어려움이 똑같이 반복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것은 있다고 말하는 한 가지 길만이 남아 있다. 이 길에 존재하는 것은 완전하고 부동이며 무한하기 때문에 창조되지도 않고 파괴되지도 않는다. 그것은 완전한 하나의 실재다. 만약 그것이 일(一)이 아니고 나눠 질 수 있다면 그것은 그 자신과는 다른 어떤 것으로 되어야만 한다. 그러나 존재는 그것 자신과는 다른 어떤 것이 될 수 없다. 존재 이외에 다른 것은 없기 때문이다. 어떤 것이 그것에 더해질 수도 없다. 더해진 그것도 존재일 것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부동이며 영속적인 이유는 모든 운동과 변화가 배제되기 때문이다. 존재는 실재이므로 무한정적이거나 불확정적일 수 없으며 변화할 수 없고 빈 공간 속으로 뻗어가는 것으로 생각될 수 없다. 그것은 한정적이고 확정적이며 완전하다. 시간적으로 무한하지만 공간적으로 유한하다. 모든 방향에서 실재적이므로 형체가 구형이다. 이것으로 보아 Pa는 관념론보다 유물론이 그의 실재관에 의존한다. Pa를 비롯해 멜리소스, 엘레아학파는 존재를 일반적으로 물질적으로 간주했다. 하지만 Pa는 한편으로 이 세계는 절대적 실재의 표현이고 절대적 실재는 사고, 즉 개념에 있다고 함으로서 관념론자의 입장에 한 발을 딛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는 ‘사유 속에서 파악됨’과 ‘사유됨’을 혼동하고 있다. 따라서 그는 유물론자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Pa는 한편으로 존재의 불변성, 물체의 파괴 불가능성을 주장함으로 엠페도클레스와 데모크리토스는 이 이론을 원자설에 이용했다. 플라톤은 존재의 변화 불가능성에 사로잡혀 항존의 존재를 현존의 객관적 관념과 동일시했다. 거기에 Pa가 주창한 이성의 세계와 감각 세계 사이의 구별을 자신의 이론에 이용했다. 플라톤은 Pa와 헤라클레이토스의 철학을 종합하려 했다. 사유와 감각의 구별이라는 Pa의 견해를 받아들였고 감각 세계는 유전 변화하므로 안정성을 결여하고 있기 때문에 참된 지식이 못된다고 선언했다. 이 두 경향은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해 더욱 발전된다. 그는 물질적 존재들에 대해서는 그것들이 변화 속에 있다는 헤라클레이토스의 견해에 동조하고 Pa의 입장을 물리친다. 그러나 플라톤의 형상을 이 세계의 대상들 속에 있는 구체적이고 형식적인 원리들로 만듦으로써 사물의 상대적 안정성을 파르메니데스보다 더 잘 설명한다. 그뿐만 아니라 잠재성(가능태)라는 개념을 만들어 한 사물이 실제로는 X이고 잠재적으로는 Y라고 말하는 것은 모순이 아니라는 점을 지적한다. 지금은 X지만 미래에는 잠재성 덕분으로 Y가 될 것인데 잠재성은 단순하게 무(無)가 아니지만 현실의 존재도 아니다. 그러므로 존재는 비존재로부터 생기거나 정확하게 실제적 존재로서의 존재로부터 생기하는 것이 아니라 잠재적인 존재라고 생각되는 존재로부터 생기한다. 멜리소스는 Pa가 존재는 일자, 일자는 공간적으로 유한하다고 선언한 것을 수용하지 않으려 했다. 그는 존재가 유한하다면 존재 저편에 무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존재가 무에 묶이거나 제한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존재가 무에 제한된다면 그것은 무한하지 유한하지 않을 것이라고 보았다. 존재밖에는 진공이 있을 수 없다. 빈 것은 무이므로 무인 것은 존재할 수 없다. 또한 만약 그것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일(一)일 것이다. 그러나 만약 그것이 일이라면 그것은 신체를 가질 수 없다. 신체를 가진다면 부분들이 있을 것이고 더 이상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스로마철학사 / 코플스톤 / 김보현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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