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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약용(1762-1836)/정약용

다산 정약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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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 정약용

 

 

1762(영조 38)-1836(헌종2).조선후기의 문신, 실학자, 소자는 귀농(歸農), 자는 미용(美庸), 호는 사암, 탁옹, 태수, 자하도인, 철마산인, 다산, 당호는 여유(與猶), 경기도 광주(지금의 양주군 조안면 능내리 소내 마재)출신. 아버지는 진주목사 재원이며, 어머니는 해남윤씨로 두서의 손녀이다. 4남 2녀 중 4남으로, 1836년 2월 22일 향리에서 죽었다. 13세 때 풍천홍씨를 취하여 6남 3녀를 두었으나 4남2녀는 요절하고 학연 학유와 서랑 윤참모가 있을 뿐이다. 그의 일생은 대체로 3기로 나눌 수 있는데, 제1기는 벼슬살이하는 던 득의의 시절이요, 제2기는 귀양살이 하던 환난시절이요, 제3기는 향리로 돌아와 유유자적하던 시절이다.

 

<제1기>제1기는 22세 때 경의진사가 되어 줄곧 정조의 총애를 한몸에 받던 시절로서 암행어사, 참의, 좌우승부지 등을 거쳤으나, 한때 금정찰방, 곡산부사 등 외직으로 좌천되기도 하였다. 정조의 지극한 총애는 도리어 화를 자초하기도 하였는데 정조의 죽음과 때를 같이 하여 야기된 신유교육에 연좌된 까닭도 여기에 있다. 왜냐하면, 신유교육사건은 표면적인 이유와는 달리 벽파가 남인계의 시파를 제거하는 위하여 일으킨 사건으로 평가되기 때문이다. 이 시기에 그의 학문적 업적은 그리 대단한 것은 없으나 16세 때 이미 서울에서 이가환, 이승훈, 등으로부터 이익의 학에 접하였고,23세 때에는 마재와 서울을 잇는 두미협 뱃길에서 이벽을 통하여 서양서적을 얻어 읽기도 하였다. 유학경전에 관한 연구로는 내강중용강의 내강모시강의 희정당대학강의 등이 있으며, 기술적 업적으로는 1789년 배다리의 준공과 1793년 수원성의 설계를 손꼽는다. 1791년 진산의 윤치충, 권상연의 옥 이후 천주교로 인하여 세정이 소연하던 중 1795년 주문모 신부의 변복잠입사건이 터지자, 정조는 수세에 몰린 다산을 일시 피신시키기 위하여 병조참의에게 금정찰방으로 강등 좌천시켰다. 불과 반년도 채 못되는 짧은 기간이기는 하지만 천주교에 깊이 젖은 금정역주민들을 회유하여 개종시킨 허물 때문에 후일 배교자로 낙인을 찍히기도 하였다. 그러나 소연한 세정이 가라않지 않고 더욱 거세지자 정조는 다시금 그를 1797년에 황해도 곡산부사로 내보내 1799년까지 약 2년간 봉직하게 하였다. 이 시절에 마과회통, 사기찬주와 같은 잡저를 남겼다. 내직으로 다시 돌아온지, 채 1년도 못되어 1800년 6월에 정조가 죽자, 그를 둘러싼 화기가 무르익어 1801년 2월 책통사건으로 체포, 투옥되니 , 이로서 그의 득의시절은 막을 내리고 말았다.

 

<제2기>

1801년 2월 27일 출옥과 동시에 경상북도 포항 장기로 유배되니 이로써 그의 제2기인 유배생활이 시작되었다. 그해 11월에 전라남도 강진에서 이배될 때까지 9개월간 머무르면서 고삼창고훈, 이아술, 기해방례변등의 잡저를 저술하였으나 서울로 옮기던 중 일실하여 지금은 남아 있지 않다. 강진에 도착하자 첫발을 디딘 곳이 동문 밖 주가이다. 이공세서는 1805년 겨울까지 약 4년간 거처하였고, 자기가 묵던 협실을 사의재라 명명하기도 하였다. 이시절은 유배초기가 되어서 파문괴장 불허안접할 정도로 고적하던 시절로 기록되어 있으나 이 시기에 주가의 한 늙은 주모의 도움이 있었고, 1803년 봄에 때마침 만덕사 소풍길에 혜장선사를 만나 유불상교의 기연을 맺기도 하였다. 1805년 겨울에는 주역연구자료가 담긴 경함을 고성사로 옮겼으니. 여기에는 그를 위한 혜장선사의 깊은 배려가 스며 있었고 이로부터 두 사람의 인연은 날로 깊어 갔다. 한편, 9개월 만에 다시금 목리 이학래 집으로 옮겨 1808년 봄 다산초당으로 옮기게 될 때까지 약 1년 반동안 머물렀으니, 이때에 이학래로 하여금 다산역의 준공을 맞게 한 것을 보면 경함을 다시금 목리로 옮긴 사연을 짐작 할 수 있다. 이로부터 다산초당은 11년간에 걸쳐서 다산학의 산실이 되었다.

 

"주역사전"은 1808년에 탈고하였고 "상례사전"은 읍거시절에 기고하였으나 초당으로 옮긴 직후 1811년에 완성하였다. "시경"(1810), "춘추"(1812) "논어"(1813), "맹자"(1814), "대학"(1814), "중용"(1814), "악경"(1816), "경세유표"(1817), "목민심서"(1818)등을 차례로 저술하였고, 1818년 귀양이 풀리자 고향으로 돌아와서 "흠흠신서"와 "상서고훈"등을 저술하여 그의 6경 4서와 1표 2서를 완결지었다.

 

<제3기>귀양에서 풀린 그의 제3기에는 회갑 때 "자찬묘지명"을 저술하여 자서전적 기록으로 정리하였다. 총 500여권을 헤아리는 그의 "여유당전서"는 대체로 6경4서 1표2서 시문잡저 등 3부로 분류할 수 있다. 먼저 6경 4서의 대강을 살펴보면, 첫째, 시에는 "모시강의" 12권 외에"시경강의보" 3권이 있다. 시는 풍림이라하여 권선징악의 윤리적 기능을 중요시한다. 악사들로 하여금 조석으로 연주하게 하여 왕자가 그 선함을 듣고 감동하여, 그 악함을 듣고 깨우치게 하니 그 엄함이 춘추보다도 더하다고 하였다. 둘째, 서에는 "매씨상서평" 9권 "상서교훈" 6권, "상서지원록" 7권이 있다. "선기옥형"은 상천의 의기가 아니요 "홍범구주"도 정전형을 본뜬 정치이념일 따름이라고 하였다. 셋째, 예에는 "상례사전" 50권, "상례외편"12권, "사례가식" 9권이 있다. 관혼상제등 사례 중에서도 상례에 치중한 까닭은, 전주교와의 상대적 입장에서 유교의 본령을 밝히려는 깊은 뜻이 있는 것으로 간주된다. 태로, 소로, 특생, 특돈의 예에서 그의 변도나 궤형의 수에는 일정한 법도가 있다. 군왕, 대부, 사의 계급에 따라 차등이 있으므로 멋대로 증감해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넷째, 악(樂)에는 <악서고존>3권이 있다. 5성(聲) 6률(律)은 본래 같은 것이 아니다. 6률로써 制樂하므로 악가의 선천이요 5성으로써 分調하므로 악가의 후천이 되기 때문이다. 鄒衍, 呂不韋, 劉安등의 취률정성의 그릇된 학설을 따지는 한편 삼분손익, 취처생자의 설이나 괘기월기, 정반변반 등의 설은 모두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하였다. 다섯째, 易에는 <주역사전>24권, <역학서언>12권이 있다. 역에는 4법이 있는데 推移, 물상, 효변, 호체로서 십이벽쾌는 4시를 상징하고 중부, 소과 두괘는 오세재윤를 상징한다. 역에는 역수만 있고 순수는 없으므로 선천괘위의 설은 이치에 합당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여섯째, <춘추>에는 <춘추고징>12권이 있다. 좌씨의 책서는 춘추의 전이 아니요 그의 책서는 춘추의 전이 아니요 그의 경의는 해석도 한나라 학자들이 저지른 지나친 잘못이다. 체는 오제의 제사이다. 그런데 주례에서 체제를 말하지 않은 까닭은 그들이 오제를 제사지낸다고 한것이 바로 체제이기 때문이다. 춘추시대에도 상기에는 변함이 없으므로 두예(杜預)의 설은 준수할 필요가 없다고 하였다. 일곱째, <논어>에는 <논어고금주>40권이 있다. <논어>는 다른 경전에 비하여 이의가 너무나도 많다. 총520여장중 170여장의 이의를 하나로 묶어서 <원의총괄>이라 하였다. 그중의 한 예를 들자면, 효제가 곧 인(仁)이니 인이란 총체적으로 붙인 이름이요 효제란 부목으로서 주자의 심덕, 애리(愛理)의 설은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하였다. 여덟째, <맹자>에는 <맹자요의>9권이 있다. 성(性)이란 기호(嗜好)인데 형구(形鷗)의 기호와 영지(靈知)의기호가 있다고 한다. 본연지성은 본래 불가의 책에서 나왔으며 우리유가의 천명지성과는 서로 빙탄(氷炭)과도 같아서 상호간의 비교할 길이 없다고 하였다. 아홉째, <중용>에는 <중용자잠(中庸自箴)>3권, <중용강의보>6권이 있다. 용(庸)이란 항상 끊임없이 오래감을 의미한다. 보이지 않는 것은 내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요 들리지 않는 것은 내 눈에 들리지 않는 것이니 그 것은 곧 하늘의 모습이요 하늘의 소리이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열째, <대학>에는 <대학공의(大學公議)> 3권, <희정답대학강의> 1권, <소학보전> 1권 <심경밀험> 1권이 있다. 명덕이란 효, 제, 자 삼덕으로서 사람의 영명(靈明)이 아니다. 격물의 물은 물유본말(物有本末)의 물(物)이요 치지(致知)의 지는 지소선후(知所善後)의 지다.

 

다음으로 1표 2서의 대강을 살펴보면, 첫째<경세유표> <흠흠신서> 30권이 있다. 인명에 관한 옥사를 다스리는 책이 적었기 때문에 경사(經史)에 근본하였거나 공안(公案)에 증거가 있는 것들을 모아 옥리들로 하여금 참고하게 함으로써 원한의 소지를 없애도록 하였다. 이로서 6경 4서로써 수기하고 1표 2서로써 치인하게 하여 수기치인의 본말을 갖추도록 하였다. 다음으로 시문잡저를 살펴보면, 시문집 18권을 간추려도 6권은 되고 잡문은 전편이 16권, 후편이 24편이다. 또한, 잡찬목록을 보면<아방비억고>30권(미완성)이 있고<아방강역고> 10권, <전례고> 2권 <대동수경> 2권, <소학주관> 3권, <아언각비> 3권 <마과회통> 12권, <의령> 1권 등이 있다. 1762년(영조 38) 6월16일 사시(巳時:오전 9-11시)에 태어나 1836년(헌종 2) 2월 22일 진시(辰時:오전 7-9시) 에 세상을 떠났다. 일흔다섯 해를 살다 간 다산은 그의 생애 절반을 18세기에 살고, 나머지 절반은 19세기에 살았다.이 시기는 조선 왕조 몰락 100여 년 전으 로서, 구시대의 폐단이 점차 드러나면서 새로운 시대로의 전환의 움직임이 싹트고 있던 때이기도 했다. 그가 살다 간 시대에는 국내외적으로 수많은 역사적 사건들이 일어났다. 그가 태어난 해에는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었다. 이 죽음은 시파(時派)와 벽파(僻派)의 싸움을 가져왔으며 당시 정치에 파란을 일으켰다. 1783년에는 이승훈(李承薰)이 우리 나라 최초로 세례를 받 고 천주교 신자가 되었다. 이는 서양 문물의 유입을 알리는 신호탄으로, 이후 조선은 서양 종교와 문물의 도입을 둘러싸고 진통을 겪어야 했다. 1800년 정조의 죽음은 조선 왕조뿐 아니라 다산 개인에게도 획을 긋는 사건이었다. 조선으로서는 영조 때부터 이어온 문예부흥이 종말 을 고하게 되었다. 이와 함께 세도 정치가 시작되고 봉건 사회의 내부 모순이 격화하여 홍경래(洪景來)의 난을 비롯한 민란(民亂)이 줄을 잇게 되었다. 한편 정조의 총애를 한몸에 받았던 다산은 정조의 죽음을 고비로 18년에 걸친 벼슬살이와 또다른 18년 동안의 귀양살이로 생애가 나뉘게 되었다. 세계사적으로도 이 시기는 근세 봉건시대에서 근대로의 이행기였다. 다산이 태어난 해에는 프랑스혁명의 사상적 뿌리라고 일컬어지는 루소의 "사회계약론"이 세상에 선보였으며, 1776년에는 미국이 영국으로부터 독립되었다. 그런가 하면 1789년에는 프랑스혁명이 일어나 수백 년 동안 지속되어 온 봉건시대의 구체제를 무너뜨리기도 하였다. 다산 정약용은 당시 시대의 모순과 질곡에 온몸으로 맞닥뜨리며 치열한 삶을 살다 갔다. 그는 19세기 초 조선 사회가 절박하게 요구하는 변혁의 방법과 방향을 제시하려 하였으며 잔혹한 봉건적 지배로부터 민중을 해방시키려 하였다. 또한 중화주의에 빠져 있던 당시 조선 사 회의 낡은 관념과 고정관념을 깨뜨리고 새로운 시야를 제시한 선각자이기도 하였다.

 

-민족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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