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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약용(1762-1836)/정약용

형구(形軀)의 기호와 영지(靈知)의 기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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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茶山) 정약용은 인간의 본성을 자연의 경향성으로서 인간의 고유한 욕구에서 읽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그는 성을 형구(形軀)의 기호와 영지(靈知)의 기호에서 나오는 두 개의 경향이 있음을 전제하고 있으며, 그 중의 도덕적 선의 경향을 띤 말이 후자인 것이다. 즉 사람의 본성은 선을 즐기는 경향성(기호)이라고 한다. '영지'와 '형구'의 성향은 인간의 마음속에서 서로 대립되는 양상으로 나타나 그것의 결과에 의해서 인간 행위의 방향이 구체적으로 결정된다.

 

그는 성기호설에서 두 가지 기호 즉 형구의 기호와 영지의 기호의 두 가지 상태가 있음을 주장한다. 영지의 기호는 '선을 좋아하고 욕을 부끄러워'(樂善而恥汚)하는 사람의 본심인 동시에 '무형한 영명의 체'(靈明無形之體)로서의 성이다. 맹자의 표현으로는 이것을 대체(大體)라 하고 무형한 대체가 발현하는 바를 가리켜 말할 때는 '도심'(道心)이라고 한다고 하였다. 이와 상대적으로 유형한 형구의 기호로서 발현할 때는 소체(小體)라고 하며, 도심에 상대적인 의미로서 '인심'(人心)이라고 한다. 즉 형구의 기호에서 말하는 물욕은 사악의 근원이 된다고 한다.

 

다산에게서 심체(心體)는 허령(虛靈)하며 만물과 신묘하게 감응하기 때문에 이름지어 말할 수 없다. 또 허령한 본체로서 말하면 '대체'라 하고, 대체가 드러남으로 말하면 '도심'이라 하지만, 대체가 좋아하고 싫어함으로 말하면 性이라고 한다. 마음은 대체, 도심, 성과 같이 여러 가지 이름으로 말하지만, 마음의 본체는 대체이고 마음의 작용이 도심이고 마음의 속성이 성이라 할 수 있다. 대체의 기호(嗜好)인 선을 따르는 사람을 군자요 대인이라고 생각한다.

 

인간의 성은 도의와 기질의 두 가지 성이 있다. 그것들이 발현하여 마음의 작용으로 나타날 때, 우리는 앞에 것으로부터 발현하는 것을 일러 도의를 위한 까닭에 도심이라 하고, 뒤에 것으로부터 발현하는 것을 일러 구체(口體)를 위한 까닭에 인심이라 한다. 그는 인간의 심성을 형구의 기호에서 비롯되는 것을 인심이라 하여 이는 기질의 성을 촉(觸)한 감성적 측면을 의미하고, 영지의 기호에서 비롯되는 것을 도심이라 하여 이는 도의의 성을 감(感)한 이성적 측면을 의미하고 있다.

 

이러한 점은 주자학의 구별과 크게 다른 것이 없다. 퇴계(退溪 李滉 1501-70)는 영지(靈知)로부터 피어나는 마음은 이발(理發)이 되고, 형구로부터 피어나는 마음은 기발(氣發)이 되어, 그의 '이기호발론'(理氣互發論)이 되어버린다. 그러나 다산은 이기론상의 理의 주재기능을 강력하게 부정하는 입장에 있으므로 여기에서도 理의 발현으로써 도심을 인정치 않는 점은 물론이다. 그러나 그가 말하는 도심은 '본연의 성'인 천리의 발현이 아니고, 하느님(상제)의 명령(천명)인 '도의의 성'이 인간의 마음으로 전화(轉化)되어 나타난 '인성에 부여된 명'(性命)이다.

 

주자학에서는 마음(心)자체를 '理氣의 合'으로 보는 만큼 理와 관련된 '도심'과 함께 氣와 관련된 '인심'을 말하고 있다. 또 한편 성의 경우에도 '본연의 성'과 함께 '기질의 성'을 말한다. 말하자면 본원유학(맹자)에서의 '식색의 성'을 주자학에서는 '기질의 성'이라 부르게 된다. 그러면 茶山은 과연 사람의 심성을 어떻게 보았을까? 茶山은 맹자의 성선설의 원의(原義)에 충실하여 도의의 성이란 우리 인간의 선험적 경향성일 뿐이라고 보고 있다. 여기서 맹자의 학설을 주자와는 매우 다른 각도에서 풀이한 점에서 독특한 다산의 견지가 엿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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