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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약용(1762-1836)/정약용

茶山 工夫論에 있어서 '德性'의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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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 공부론에 있어 덕성의 문제 

 
1. 서론

 

다산 철학은 성리학에 대한 전면적인 검토와 강한 비판으로부터 출발한다. 이기론적 해석체계에 대한 그의 매서운 비판은 당대의 모순상황에 대한 정확한 인식에 기초하고 있다는 점에서 역사적 정당성을 획득하고 있다. 그가 제기한 다양한 형태의 탈성리학적 담론은 이제 실학의 근대성을 알려 주는 주요한 징표로 인식되고 있다. 그의 성리학에 대한 주체적인 해석과 세계에 대한 전면적인 재해석은 주자학의 중세적 질서감각을 상당 부분 넘어선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다산의 경학과 경세학에서 조선적 형태의 근대성을 탐구하는 작업은 이제 한국학의 한 상식으로 자리하게 되었다.

 


그러나 다산에게 과도하게 집중된 밝은 조명은 상대적으로 성리학의 세계를 온통 중세적 어둠의 세계로 기록하게 한다. 이러한 경향은 다산의 성리학에 대한 비판이 매우 신랄하며, 자못 극적인 결별을 선언하고 있는 것에서 기인한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다산의 성리학에 대한 비판을 세밀하게 읽어 가노라면, 그의 성리학에 대한 비판이 매우 단선적인 이해 위에 기초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그는 조선조 성리학이 상당히 다양한 사상적 스펙트럼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후술할 것이나, 그는 성리학을 거의 불교의 심학적인 요소와 동일시하여 이를 혹독하게 비판하고 있다. 이로 인해 그는 조선조 성리학이 내장한 다양한 인문적 가치와 내용은 상당 부분 과소 평가되고 있다.


이와 같은 현상은 그의 성리학적 공부론에 대한 비판에서도 거의 동일하게 나타난다. 다산이 제기하는 성리학의 존덕성(尊德性) 개념에 대한 비판을 읽어 가노라면, 마치 성리학자들이 불교 수행법을 비판하던 것과 거의 동일한 맥락에서 전개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는 성리학의 공부론을 오직 주정적(主靜的)이고 사변적인 형태로 고착시킴으로 인해 퇴계와 율곡, 그리고 남명 등에 의해 제기된 공부론에 관한 다양한 논의들을 그의 공부론 속에 발전적으로 수렴할 기회를 갖지 못하고 있다. 그러한 점에서 우리는 다산의 덕(德)의 개념에 대한 文山의 항변을, 완고한 성리학자의 수구적인 논의로 가볍게 처리할 것이 아니라, 깊이 있게 재해석 해 보아야 할 것이다.


이에 본고에서는 성리학적 공부론의 질문체계를 통해 다산 공부론의 명암을 살펴보고자 한다. 다산은 성리학에서의 공부론이 본체론과 결합하여 지나치게 심학화 되어 가는 것에 대한 급격한 반동으로, 그의 공부론을 지나치게 경세론 혹은 치세론과 결합시킨 경향이 농후하다. <실천적인 행위(行事)와 관계 속에서 실현되는 덕>이라는 명제로 귀일 되는 그의 공부론은, 성리철학과 비교하여, 명백하게 근대적 징후를 지니고 있다. 실천과 실용성을 강조하는 그의 공부론은 강력한 운동성을 띄고 있음은 사실이다. 그러나 덕의 근원성과 시원성을 문제시하는 성리학의 敬 공부론과 비교할 때, 그의 공부론은 우리의 근대성안에 잠복되어 있는 문명적 '가벼움' 혹은 '엷음'의 한 단서를 제공해 주고 있다. 본고에서는 이 점을 검토하고자 한다.

 

2. 성리학의 하학공부에 대한 다산의 비판

 

다산이 유배지에서 그의 아들들에게 보내는 편지를 읽다 보면, 그의 가정 교육도 여느 평범한 유자의 그것과 그다지 커다란 차이가 없음을 볼 수 있다. 유가의 자손답게 일상의 삶을 충실하게 살 것을 강조한다. 특히 효·제·자에 힘쓸 것을 강조하고, 소학공부를 부지런히 할 것을 당부한다. 퇴계나 율곡이 그들 자손들에게 당부하는 가르침과 사실상 커다란 차이점을 발견할 수 없다. 성리학의 전 체계를 뒤흔들어 놓던 다산도 居家의 부분에서는 오히려 이들 성리학자들의 글과 행동을 본 받을 것을 곡진하게 당부하고 있다. 그는 주자의 거가사본(居家四本)을 집안을 다스리는 근본으로 삼을 것을 부탁하고, 자제들에게 정자나 주자의 책, 성리대전이나 퇴계언행록, 율곡집에서 좋은 구절을 뽑아 3.4권의 책을 만들어 齊家의 기본을 삼을 것을 부탁하고 있다.

 


관동기에 행해지는 이러한 소학공부는 유학에서는 대체로 下學에 해당한다. 이렇게 하학의 영역에 해당하는 가르침은 비록 성리학자들의 글이라도 선현들의 것이라면 전혀 구애할 것이 없다는 것이 다산의 태도이다. 다산도 소학의 가르침을 몹시 중시한다. 대학을 그토록 중시한 다산도 "소학은 대학의 뿌리요 바탕이다"라고 하여 소학에 상당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이제 우리는 여기에서 당연히 하나의 의문을 갖게된다. 과연 성리학에서의 하학의 세계와 다산이 바라보는 하학의 세계는 동질적인가 아니면 차별성을 지니고 있는가? 아니면 애초에 그 차이가 없는 것인가? 도의 세계가 다른 것이라고 한다면, 도의 세계로 진입하는 하학의 영역에 대해서도 무언가 다른 해석과 평가가 있어야 할 것이 아닌가?


다산도 공부론도 역시 下學而上達이라는 유가 일반의 공부 방법에 찬동하고 있다. 다만 그는 하학은 도문학의 영역으로 보고, 상달은 존덕성의 영역으로 두고 있다. 그는 중용의 존덕성과 도문학에 대한 논의에서 양자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공자의 도는 下學而上達에 있다. 고로 중용에서 비록 知天을 하는 것(존덕성)을 가장 으뜸가는 공부로 삼았으나, 하학의 방도는 반드시 도문학을 가장 중요한 것으로 여겼다. 도문학의 방법은 정미한 것을 극치로 삼는 것이다.

 

앞이 인용문에서 주목되는 것은 다산은 하학을 도문학의 영역으로, 상달을 존덕성의 영역으로 구분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다산의 구분법은 마치 견문지지(見聞之知)와 덕성지지(德性之知)를 구분하고자 한 송대 장횡거의 견해와 일견 유사하다. 그는 견문지지를 "物과 만나서 이루어지는 지"라고 하여 행위를 통한 후득적인 지로 파악하고, 덕성지지란 "견문에 의해 싹트지 않는 天德良知"로서 비경험적이며 초월적인 지로 파악하고 있다. 물론 송유들은 덕성지지와 견문지지를 체용의 관계로 파악하여, 선천적인 본체의 지를 우등한 것으로 후득적인 견문지지를 열등한 것을 치부하는 것 등에서는 다산의 생각과 상당한 차이를 드러낸다. 또한 여기에서 다산이 말하는 도문학의 의미는 성리학에서 이야기하는 격물궁리의 공부법과는 근본적인 차이를 드러낸다. 이 문제는 뒤에서 다시 상론할 것이나 중요한 것은, 다산이 규정하는 하학의 범주이다.

 


다산에 있어서의 하학의 범위는 객관적인 경험과 量度이 가능한 일용행사의 세계에 한정된다. 다산은 하학의 세계를 見聞知의 영역으로 한정하고, 본체론적인 심성론과 분리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성리학에서는 하학 속에서 부단히 견문지지와 덕성지지의 결합을 꿈꾸고 있다. 일상생활 어디에나 천리가 깃들어 있어, 그것을 깊이 체인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주자의 언명에 따르자면, "일상의 생활 속에서도 저 혼연한 본체는 마치 냇물이 쉬지 않고 흐르며, 하늘이 운행하는 것과 같은 것"처럼 언제나 함께 있는 것이다. 일상생활 속에서 도도히 흐르는 그 변하지 않는 덕의 실체, 그것을 찾는 노력이 성리학의 공부론에서는 굉장히 중요한 작업이다.

 


특히 주자의 저 유명한 中和新說에서는 왜 이 일상적인 하학의 세계가 움직임 없고 고요한 미발의 세계와 연결되지 않으면 안 되는가 하는 것을 공부론을 통하여 설명해 주고 있다. 요컨대 주자는 미발의 세계가 허무적멸의 불가적 세계로 떨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하학의 영역과 결합하여야 함을 다음과 같이 밝게 설명해 주고 있다. 우리는 이제 성리학에서 보여 주는 하학의 세계를 따라가 봄으로써 다산의 하학공부가 지닌 사상적 의미를 반조해 보고자 한다.

 

가) 성리학의 미발 공부와 하학처의 문제

 

성리학의 미발설에 대한 다산의 공격은 혹독하다. 미발설은 기본적으로 불가의 明鏡止水說에서 나온 것임을 주장한다. 미발설에 禪의 기미가 있다는 주장이다. 주자의 미발설에 대한 다산의 이러한 공격은 조선조 성리학의 공부론에 대한 비판과 함께 맞닿아 있다. 퇴계의 敬의 공부론도 성리학의 미발설 위에 성립하기 때문이다. 다산은 주자가 "성인의 마음이 미발인 때에는 水鏡의 體이며, 발하여서는 水鏡의 用이 된다"는 주장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비판한다.

 

이제 살펴보니 명경지수설은 불가에서 나온 것이다. 이는 심체의 허명적멸이 마치 水鏡과 같다는 말이다. 그러나 이는 아무런 사려도 없으며 계신공구의 공부도 하지 않은 채 조금치도 전혀 동요가 없는 후에야 이러한 경지의 형상이 있다는 것이다 … (중략) … 만약 한결같이 虛明靜寂으로 주장하여 한 생각이 겨우 싹트자 마자 선악을 묻지도 아니하고 已發에 영속시킨다면 이것은 수경의 본체가 아니고 좌선일 뿐이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남송대의 공부론은 이 미발설을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에 대한 치열한 논쟁으로부터 발전되었다. 마음의 본체를 어디에 둘 것인가에 대한 논변이었고, 이 논쟁의 중심에는 불교와의 차별성이 언제나 문제시되었다. 특히 이들 성리학자들은, 뒤에서 좀 더 자세하게 논의하겠으나, 미발시의 공부를 인정함으로써 禪의 수행법과 그 차이를 드러내고자 하였다. 그러나 다산은 끝내 성리학에서의 미발시의 공부와 좌선입정의 수행법과의 차이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그는 말하기를, "미발이란 희로애락의 정이 발하지 않았음을 의미할 뿐이지 심이 마침내 아무런 사려도 없게 되어 마치 禪家에서 입정한 것처럼 된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희로애락은 비록 발하지 않았더라도 계신공구 할 수도 있고 궁리할 수도 있을 것이며, 의를 생각하고 천하의 사변을 생각할 수도 있으니, 미발시에 공부가 없었다고 말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라고 하여 마치 성리학에서 미발시에 공부가 없다는 것으로 주장하는 것처럼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다산의 이러한 평가는 미발 공부를 둘러싼 성리학의 그 치열한 논쟁을 사실상 사상하고, 일방적으로 불교와 동일시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된다. 이 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주자의 중화신설에 대한 약간의 설명이 요구된다. 잘 알고 있는 바와 같이, 마음을 다스려 도의 세계로 진입하고자 하는 유자들의 열망은 남송대에 주자에 의해 공부론으로 완성된다. 본체론적인 공부론을 중시하던 도남학(道南學)과, 현상론적인 공부론을 강조하던 호상학(湖湘學)의 두 흐름을 주자는 이른바 그의 中和新說을 통하여 종합하였다. 도남학이 유가 도통론의 정립을 통해서 덕성의 배양을 강조하고, 현상세계 속에 숨어 있는 근원적 실체 즉 理一의 의미를 찾고자 하는 흐름이라고 한다면, 호상학은 현실로서의 역사를 중시하고, 窮理 공부를 통해 가치의 객관성과 보편성을 얻고자 하는 흐름이다. 도남학이 心得을 강조한다면, 호상학은 보다 현실과 역사를 중시한다. 이렇게 心 공부를 강조하는 입장과, 事 공부를 중시하는 서로 상이한 공부론을 지닌 두 학파의 사상을 주자의 성리학은 통합하고 있는 것이다.

 


주자는 延平 李 을 통해 楊時로부터 시작된 도남학의 맥을 내려 받았다. 양시는 그의 사상을 특징짓는 理一分殊論에서, 理一과 分殊를 체용관계로 놓고 이일을 체로 분수를 용으로 정의하고 있다. 이것은 공부론에서 用으로서의 구체적인 현상이나 사실보다는, 체로서의 理一을 우선시 함을 의미한다. 일상의 세계 어디에나 존재하는 分殊로서의 삶의 이치보다는, 默坐澄心하여 미발시에 드러나는 理一의 세계를 체인 하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미발의 세계를 강조하는 것은 불교의 坐禪入定의 세계와 그 수양법에 있어서 과연 어떠한 차이점이 있는가 하는 것이 가장 커다란 문제점으로 지적되었다. 주자가 이른바 中和舊說과 中和新說을 구상할 시기에 가장 골몰했던 문제는 이 未發의 성격을 어떻게 정리할 것인가의 문제였다.

 


주자의 중화구설은 張南軒을 통해 받아들인 湖湘學으로부터 비롯되었다. 호상학의 주장으로는 사람의 마음이란 언제나 이발의 상태에 있고, 미발은 이발의 마음속에 내재해 있는 본체로서의 性인 것이다. 따라서 마음속에는 미발의 때란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에 별도의 공부가 필요 없는 것이다. 이에 주자의 중화구설에서는 이 미발은 사실상 공부가 불가능한 암흑의 세계로 이해되었다. 아직 인간의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 순수 본연의 상태, 즉 性의 상태에서 공부란 가능하지도 않고, 또한 애써 필요하지도 않는 영역인 것이다. 사람들의 일상적 삶이란 언제나 이발의 상태에 있는 것이고, 오직 "이발에 근거해서 미발을 볼 수 있을 뿐"인 것이다. 주자는 미발시 공부의 어려움을 다음과 같이 토로하고 있다. 그는 "泯然하여 아무런 지각이 일어나지 않는 상태에서는(미발의 상태에서는), 삿된 어두움이 첩첩이 꽉 막혀 있으니 텅비고 밝게 외물에 응하는 본체는 아닌 것입니다. 또한 은미하게 싹 트는 그 기미의 순간에서는 홀연 지각이 나타남으로 문득 이발의 상태가 됨으로 인해 寂然의 상태라고 할 수 없습니다"라고 고백하고 있다. 이러한 상태에서 주자는 묵좌하여 마음을 밝히는 공부보다는 외부세계에 대한 관심과 독서궁리에 더욱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자의 견해는 중화신설에 이르면 완전히 바뀌게 된다. 미발시에 공부가 필요 없다는 중화구설에서 커다란 결함을 발견한다. 그는 미발의 상태란 결코 캄캄하여 어두워 살필 수 없는 상태가 아니라고 단언한다. 그는 性을 미발의 상태로 인정하는 心統性情의 심성론에 의거해 모든 사람들의 마음에는 未發之時과 已發之時가 함께 자리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는 호상학자들이 불교적인 경향에 빠져 미발에 대해 전적으로 잘못된 인식을 하고 있는 것으로 비판한다. 그는 "미발지전은 오로지 언제나 이처럼 깨어 있으니 어두워 살필 수 없는 것이 아니다. 만약 어두워 살 필 수 없다면 도리가 어떻게 거기에 존재하겠는가? 또한 어떻게 대본이 될 수 있겠는가? … 지각은 비록 동하지만 그 미동을 해치지 않으니, 희로애락과는 또한 구별되는 것이다."라고 하여 미발 상태가 결코 어두움이 아니고 知覺이 살아 움직이는 상태임을 말한다. 주자는 "만약 견문이 아직 없는 상태를 미발처로 본다면 이는 다만 정신이 혼미한 사람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주자의 이러한 견해는 지금까지 어둠 속에 묻어 두었던 미발에 대한 존양공부를 다시 회복하게 하는 것이다. 특히 주자는 장남헌과의 토론과정에서 미발시기 존양공부를 쇄소응대진퇴의 소학공부로 보면서 動靜에 각각 공부를 두어야 한다는 입장을 개진한다. 이러한 그의 변화는 놀라운 해석상의 차이를 드러낸다. 이제 미발은 평범한 현실 일상의 세계로 내려온다. 즉 구설 시기에는 미발과 이발을 형이상하의 구분과 동일시하였고, 따라서 형이하의 이발의 상태에서 공부함으로써 형이상의 경지를 아우를 수 있는 방법으로 불교의 고원한 추상성을 극복하고자 하였다. 반면 신설시기에는 미발과 이발을 모두 형이하의 세계로 보고 양자가 맡은 공부의 영역에 차이를 두고자 한 것이다. 이것은 이제 공부 방법에 있어서도 엄청난 차이를 가져온다. 그는 미발시 일용공부의 중요성을 다음과 같이 논하고 있다.

 

 
앞서의 강론과 사색은 오로지 마음을 이발로 간주하고 이에 따라 일용공부도 다만 察識端倪를 최초의 공부할 곳으로 여겼다. 이로 인해서 평일에 함양하는 일단의 공부를 놓쳤다. 그리하여 마음이 언제나 산만하고 어지러워 깊이 침잠하고 純一한 맛이 없게 되니 드러나는 말과 행동이 또한 언제나 급박하고 들떠서 다시는 온후하고 심후한 모습이 없게 되었다.

 

위에서 '찰식단예'의 공부법은 호상학의 공부법이다. 즉 마음이 외물과 접촉할 때 고요하게 그 단서의 선악 여부를 스스로 반성하여 존양하는 이른바 '先察識後存養'의 공부법이다. 주자는 이러한 공부법이 오히려 마음을 병들게 하고, 공부가 일상적인 삶과 분리된다는 사실을 통절하게 느끼게 되었다. 여기에서부터 그는 미발에 대한 새로운 정의를 시도한다. 이제 미발은 특별한 일이 없고 사려할 필요가 없는 한가한 때("日用間空閑時") 정도를 가르킨다. 그래서 미발은 이발의 "臨事時"와 상대적인 차이 밖에 없는 "無事時" 혹은 "平時"나 "평일"과 상호교환이 가능한 말이 된다.

 


그러면 이제 다시 미발설에 대한 다산의 비판으로 눈을 되돌려 보자. 미발이 좌선입정의 상태와 구별이 되지 않고, 공부론이 없다는 다산의 비판은 중화구설 시기의 주자설에 대해서는 성립될 수 있다. 미발의 상태를 이렇게 인간의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 순수 본연의 상태, 즉 性의 상태로 파악하고, 미발시의 공부란 가능하지도 않고 필요하지도 않다고 하는 것이 중화구설에서의 입장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시기 구설의 성립배경도 종래의 미발설이 지닌 불교적 요소에 대한 극복에 있었음을 감안 할 때, 다산의 비판은 상당히 급진적인 부분이 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특히 미발을 형이하학의 영역으로 끌어내린 중화신설에 대해서는 다산의 비판이 상당 부분 혼선을 보여 주고 있다. 다산은 미발설에 대한 정조와의 문답에서 "주자는 '사람은 반드시 미발시에 공부를 해야 한다'라고 하니 신이 따르는 설은 그것입니다"라고 하여 주자 공부론의 정론인 중화신설에 대해서 이해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정조와의 문답과정에서 이렇게 주자의 정론에 대한 이해를 드러낸 다산도, 다른 대목에서는 성리학의 공부론이 지닌 불교적 요소만을 집중적으로 비판하고 있다. 예로 그는, "주자는 未發을 성이라 보기도 하고, 또 체라고도 하고 미발을 언급할 때마다 혼연이니 湛然이니 말하여 명경지수와 같다고 주장한다."라고 하여 그 선학적 요소를 강조하고 있다. 또한 "미발이란 희로애락의 정이 발하지 않았음을 의미할 뿐이지 심이 마침내 아무런 사려도 없게 되어 마치 禪家에서 입정한 것처럼 된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희로애락은 비록 발하지 않았더라도 계신공구 할 수도 있고 궁리할 수도 있을 것이며, 의를 생각하고 천하의 사변을 생각할 수도 있으니, 미발시에 공부가 없었다고 말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라고 하여 마치 성리학에서 미발시에 공부가 없다는 것으로 주장하는 것처럼 설명하고 있다.


주자가 미발시의 공부를 강조한 것은 결코 본체와 현상. 정과 동. 내와 외를 엄격히 구분하자는 이원론적 태도로부터 연유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공부의 이러한 이원론적 구분을 극복하고, 양자를 통합하고자 하는 적극적인 의지가 담겨져 있는 것이다. 주자가 소학으로 지칭되는 하학의 영역을 미발의 세계와 연결시키고자 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러한 논의들을 감안해 볼 때, 미발 공부에 대한 다산의 주장에는 다소간의 혼란이 드러난다. 미발이란 결코 다산의 주장처럼 좌선과 같은 적연부동의 상태로 되어 일용행사의 공부가 사실상 이루어지지 않는 상태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은 다산의 개념적 혼란에서 연유되었다기 보다는 오히려 성리학과 다산의 공부론 사이에 놓여 있는 근본적인 차이에서 연유된 것으로 파악하여야 할 것이다.


그러면 이제 우리는 다시금 처음 제기했던 질문으로 되돌아가 보자. 성리학자나 다산이나 모두 함께 日用行事와 일상적인 삶을 중시하는 것은 명백한 사실인진데, 그렇다면 양자 사이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그들의 공부론에서는 어떤 차이점이 있는가?

 

나) 성리학의 공부론을 통해서 본 다산의 '行事' 개념

 

다산의 학문이 행위와 실천을 중시하고 있음은 이미 공지의 사실이다. 그리고 뒤에서 자세히 논의될 것이나 그의 덕의 개념은 행사와 실천의 개념과 맞물려 있다. 그의 미발설에 대한 비판도 기실 이 실천의 문제와 함께 하고 있다. 우선 다산의 말을 들어보자.
{中庸}의 '희로애락의 未發'도 다만 '희로애락의 미발'이라고 말했을 뿐인데 이에 가로되 '思慮知覺의 未發'이라고 말했다. {孟子}의 측은·수오·사양·시비 등은 마음속에서 動했으나 행위에는 미치지 못하므로 다만 인·의·예·지의 단서가 될 뿐이며, 인·의·예·지가 바로 '行事'에 나타나 仁으로 되고 義로 되고 禮로 되며 智가 된 것이다. 그런데 인·의·예·지를 내부에 있는 性이라고 인식하고 반대로 측은·수오·사양·시비를 인·의·예·지에서 발현하는 것이라고 하니 이는 모두 심성을 너무 중요하게 본 데서 비롯된 것으로 공자가 仁의 뜻을 질문한 顔淵에게 四勿로 답변하는 뜻과는 동일하지 않다.

 

위의 글에서 다산은 미발의 상태란 情이 드러나지 않은 상태를 의미하는 것일 뿐, 思慮知覺은 활동하는 상태임을 간접적으로 말하고 있다. 주자의 경우에는 미발의 상태란 '지각은 살아 있으나 思慮가 아직 일어나기 이전의 상태를 의미한다. 주자는 "心에 知가 있는 것은 귀에 聞이 있고 눈에 見이 있는 것과 같이 마찬가지의 (미발의) 때가 되니 비록 미발이라도 그것들이 없지 않다. 마음에 思가 있는 것은 귀에 聽이 있고 눈에 視가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발이 되니, 하나라도 있으면 미발일 수 없다"라고 하여 미발이란 대상 세계에 대한 판단과 의지가 개입되기 이전의 상태를 의미하고 있다.

 


여기에서 다산이 미발에 대하여 희로애락의 미발을 의미할 뿐 결코 '사려지각'의 미발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은 미발에 대한 본체론적 해석을 적극적으로 걷어 내고자 하는 의미로 해석된다. 즉 미발을 심의 體의 상태로 둠으로 인해, 그 운동성이 급격하게 약화되는 것을 막고자 하는 노력으로 볼 수 있다. 다산이 볼 때, 미발을 性으로 혹은 體로 규정하는 것은 유학의 존립이유인 실천적인 가치 실현을 방해하는 것으로 행위로 인식한 것이다. 다산이 "옛날의 학문은 실천적인 행위(行事)에 힘을 쓰고 행사로서 마음을 다스렸으나, 오늘날의 학문은 마음을 다스리는 것에 마음을 써서, 이 마음 다스리는 일로 인하여 일을 폐하게 된다."라고 말하는 것이나, 앞이 인용문에서 이야기하는 바와 같이 仁義란 모두 구체적인 실천행위(行事) 이후에야 비로소 성립되는 것이라는 주장들은 모두 미발에 대한 다산의 적극적인 해석과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이러한 다산의 견해가 성리학적 해석과 가장 극명하게 충돌되고 있는 것이 文山 李載毅와의 인성 논쟁이다. 茶山은 文山과 주고받은 서신을 통해 '行事'로서만 드러나는 德의 의미를 분명하게 강조한다. 이 문제는 다음 장에서 좀 더 자세하게 분석될 것이나, 文山은 仁義禮智의 '이름'은 밖에서 이루어지지만, 인의예지의 '이치'는 안에 갖추어져 있다고 본다. 반면 茶山은 인의예지의 '이름'은 밖에서 이루어지고, 仁義禮智가 '될 수 있는 이치'만이 안에 갖추어져 있다고 하였다. 즉 다산은 德이 될 수 있는 '可能性'이 마음 속에 있다고 본 것이지, 이미 정해진 '이치'가 안에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문제는 德이 과연 행사를 통해서만 들어 날 수 있는가 하는 점에서는 성리론자들은 의문을 표한다. 그들은 '行事(日用行事)'로 지칭되는 이 <일상적인 세계의 삶과 행위>에 대하여 좀 더 본질적인 성찰이 있어야 할 것을 주장한다. 다산의 행사의 개념은 성리학의 맥락에서는 형이하자의 영역이다. 이 형이하자의 영역을 어떻게 형이상자의 세계와 연결할 것인가의 문제가 공부론의 중심을 이루었다. 다산에 있어서의 행사의 개념은 下學의 개념과 사실상 크게 차이가 나지 않는다. 성리학자들의 눈으로 보면 현상적인 개개의 행사에 집착하는 것은 자칫 세계에 대한 통합적인 이해에 장애가 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퇴계는 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우려하고 있다.

 

 
이른바 널리 행해지는 일상생활의 일이란 그 범위가 천 가닥 만 갈래여서 진실로 끝이 없습니다. 어버이를 섬기는 일로부터 만사 만물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多端하니 이렇게 끝없는 곳의 다단한 것을 낱낱이 만족하게 하려면 窮理와 居敬의 지극한 경력이 없으면 끝내 이룩하기 어렵습니다.

 

퇴계에 따르면 일상의 일이란 진실로 끝이 없다. 따라서 이 세계에서의 구체적인 행사와 실천이 유의미함을 지니기 위해서는, 그것이 종국적으로는 理一의 세계와 만나야 하는 것이다. 퇴계가 소학을 중시한 이유는, 소학의 체계는 이 일상의 마디마디를 서로 이어주고 연결해 주는 이음새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퇴계에 따르면, 소학의 가르침을 잠시라도 잊지 않는다면, 일상적인 생활을 하는 사이에 天理가 유행해서, 마디마디 부분 부분이 서로 일치해서 들어맞지 않는 것이 없을 것이라고 당부하고 있다. 소학은 끝없이 계속되는 막막한 일상 속에서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 것인 가를 알려 주는 하나의 지표로서 작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그러기 위해서는 마음이 언제나 敬의 상태로 남아 있어야 한다. 敬은 '마음에 아무 것도 용납하지 않는다(心中不容一物)'는 것을 의미한다. 퇴계는 이를 程門의 旨訣이라고 단정한다. 심지어는 선한 행위까지도 털끝만큼도 집착해서는 안될 것임을 주장한다. 延平에 따르자면, "만약에 항상 가슴속에 남겨 둔다면 이것이 도로 쌓여 한덩이의 사사로운 생각을 불러일으키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심지어는 道를 행하고자 한다던가, 격물을 하고자 한다는 생각까지 가슴속에서 다 버려야 한다. 다만 경의 상태가 불교의 무념무상의 상태와 구별되는 것은 "마음이 사물에 대해서, 오기 전에는 맞이하지 않고, 바야흐로 오게 되면 다 照應하고, 이미 조응하고는 남아 있지 않아, 그 본체의 맑음이 밝은 거울이나 고요한 물과 같아서 비록 매일 같이 일을 응접하더라도 마음속에는 한 물건도 남아 있지 않는" '物來而順應'의 상태에 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일상 속에서 행해지는 敬 공부의 요체이다.

 


그러면 다산의 경우에는 이 다단하게 벌어지는 '행사'의 세계를 과연 어떻게 체계적으로 이해하고자 하였는가? 다음에 보이는 다산의 발언은 그가 비록 퇴계와 동일한 문제의식을 지니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해법에는 상당한 편차를 지니고 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그 답의 일단은 '物'에 대한 다산의 인식에서 나타난다.

 

 
천하의 물은 많고 많아서 교력도 그 수를 다 헤아리지 못할 것이고, 박물도 그 이치에 다 통하지 못할 것이요, 비록 요순 같은 성인에게 팽전의 수명을 갖도록 해 준다 하더라도 반드시 그 까닭을 알아내지는 못할 것이다.

 

다산의 이러한 주장은, 만약 앎의 이룸이 셀 수 없는 많은 物에 대해 낱낱의 理를 탐구한 이후에 가능하다고 한다면, 궁리는 반드시 무한한 理의 심연에 빠져 理의 전체적인 파악을 할 수 없음을 말한 것이다. 성리학의 궁리론에 대한 다산의 이러한 비판은 그의 독특한 格物說의 내용과 함께 맞물려 있다. 그는 격을 '量度'으로 정의하여 격물이란 '물에 본말이 있음을 헤아리고 재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이에 따라 앎을 이룬다(致知)는 것은 "먼저하고 뒤에 할 바를 지극히 아는 것"이 된다. 다산의 격물에 대한 이러한 견해는 그의 '행사'의 개념을 이해하는 데에 상당한 도움을 준다.

 


다산은 덕을 '효제'라고 가장 구체적이고 명시적으로 드러낸다. 덕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덕의 실천에서 "먼저하고 뒤에 할 바를 지극히 아는 것"이 중요하다. 다산은 그런 의미에서 인륜의 기초가 되는 효제를 곧 덕이라고 이름하였다. 그가 파악하기에 당시의 성리학자들은 德을 형이상학적 실체로 가두어 둠으로써 그 실천력을 급격히 상실하고, 종국적으로는 사회적인 통합력도 잃어버린 것으로 이해하였다. 다산은 개인적인 차원의 선이나 극기의 윤리에서 한정될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사람사이의 관계를 맺어 주는 공동체의 윤리질서로 발전될 수 있기를 갈망하였다.


덕에 관한 다산의 이러한 실천적이고 실사적인 태도는 구체적인 일상을 바라보는 시각에서도 성리학자들과 많은 편차를 드러낸다. 그 한 예를 우리는 <숙흥야매잠>을 둘러싼 다산과 퇴계와의 차이에서 엿볼 수 있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다산의 퇴계에 대한 존숭은 각별하다. 다산의 <陶山私淑錄>에는 퇴계의 학문과 인격에 대한 그의 존숭의 마음이 잘 드러나 있다. 그는 퇴계의 글을 읽은 소회를, "그 깊은 뜻과 넓은 폭을 후생말류로서는 감히 엿보거나 헤아릴 수 없는데, 이상스럽게도 마음이 편안해지고 생각이 가라앉아 혈육과 근맥이 모두 안정되어 안도감이 들면서 예전의 조급하고 거칠고 發越하던 기운이 점점 사라지니, 이 한 부의 책이 저의 병증에 맞는 藥이 아닌가 싶습니다."라고 술회하고 있다. 이렇게 33장으로 구성된 <도산사숙록>은 다산의 퇴계에 극진한 존경과 흠모의 내용이 담겨 있다. 그러나 이 사숙록의 행간에는 간혹 동일한 주제에 대해 다산특유의 실학적 해석이 깃들어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퇴계는 <夙興夜寐箴>을 철저히 성리학적 공부론의 관점에서 재구성하였다. 그러나 다산이 경우에는 그 의미가 전혀 다르다. 다산은 숙흥야매잠을 진백이 작성한 이유를 우리들이 날마다 하는 일에 程限을 정하기 위하여 만든 것으로 찾고 있다. 다산이 숙흥야매잠을 이렇게 단순한 하루의 일정표나 시간표로 이해하는 것은, 퇴계가 이것을 그의 敬論의 가장 중심적인 해설서로 잡았던 것과는 엄청난 차이를 드러낸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숙흥야매잠도>는 퇴계의 성학십도의 제 10도로서 그의 공부론이 가장 집약적으로 드러나 있다. 또한 이 숙흥야매잠의 해석을 둘러싸고 퇴계와 노소재는 치열한 이단 논쟁을 전개한 바 있다. 우선 퇴계가 왜 숙흥야매잠도를 만들었는지를 들어보도록 하자.

 

 
이 잠에는 여러 가지 공부하는 시간적 상황이 (時分) 있으므로 그 時分에 따라 배열하여 그림을 만들었습니다. 대저 도가 日用 사이에 流行하여 간데 마다 있지 않는 곳이 없으므로 理가 없는 곳이란 한 군데도 없는 것이니 어느 곳에선들 공부를 그만 둘 수 있겠습니까? 잠깐 사이에도 정지할 수 없으므로 순식간도 理가 없는 때가 없으니 어느 땐 들 공부를 하지 않아서야 되겠습니까?

 

<숙흥야매잠도>에 나타난 퇴계의 가장 큰 관심사의 하나는 이 평범한 일상의 삶을 어떻게 하면 道의 세계와 연결시킬 수 있을까 하는 점이었다. 일상의 소소한 이치를 배우는 下學의 세계가 필경 上達의 세계로 진입하는 관문의 구실을 한다는 믿음을 그는 <숙흥야매잠도>에 실어 두고 있다. 敬이 그 고리역할을 담당하는 것이다. 퇴계에 따르면 道는 일상생활에서 양양하게 흘러 넘치고 있다. 그 道 와 理는 動止語默 어떠한 순간에서 쉼 없이 흘러 넘치는 것이다. 일상 생활의 마디마디에서 그 도는 쉼 없이 유행하여, 일상이 파편 화되고 분절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퇴계는 下學而上達의 유학적 공부론에 깊은 신뢰를 갖고 있다. 그는 성학십도에서 이 과정을 "처음에는 각각 한 가지 일마다 노력하였지만 언젠가는 '하나의 근원에서 만나게 될 것'(始者各專其一 今乃克 于一)"이라고 풀어서 설명하였다. 이 말은 일견 사소하고 미미하게 보이는 일상에 대한 공부가 쌓이고 쌓이면 어느 순간에는 融會貫通하여 道의 세계에 다다르게 됨을 표현하고 있다. 퇴계가 숙흥야매잠을 주목한 것은, 일상에 깃들어 있는 개체적 원리(分殊之理)와, 그 개별적 원리의 근원적 모태인 통합적 원리(理一)를 여하히 일치시킬 수 있을 가를 모색하고자 함에 있었다.

 


또한 퇴계가 지닌 고민은 이 일상의 세계 전체가 결코 모두 道의 세계가 아니라는 점이다. 그의 가장 커다란 고민의 하나는 배움의 주무대인 일상의 세계가 곧 바로 至善의 세계, 진리의 세계가 될 수 없다는 점에 있었다. 퇴계가 임금에게 올린 차자를 보면 그는 일상의 세계와 道의 세계를 연결하는 것이 얼마나 지난한 어려움이 있는 지를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퇴계의 표현에 따르면, 처음 下學의 공부에서는 하고자 하는 노력과 일이 서로 분리되어, 타인의 간섭에 좌지우지되는 이른바 '철주'(  )의 고통과 나와 세계가 분리되는 모순의 과정을 경험하고, 때때로 극도의 辛苦와 괴로움의 순간들을 경험하게 된다는 것이다.


퇴계 공부론의 요체는 理와 氣의 차별성을 명확하게 인식하는 것에 있다. 퇴계가 바라보는 우리의 일상은 천지의 질서와 선험적 가치를 존중하고자 하는 純善의 理적 요구와, 개인의 이해와 욕망 속에서 번뇌하는 氣적 욕구사이에서 갈등하는 세계이다. 오히려 일상의 세계는 氣의 요소가 더욱 힘을 발휘하여 理의 밝은 빛이 잘 드러나지 않는 세계이다. 이 理의 獨尊을 드러내는 공부가 곧 敬이다. 현상의 세계에 결코 매몰되지 않는, 그렇다고 하여 완전히 분리되지도 않는 존재의 밝은 빛이 곧 理이다. 퇴계에 따르면 이 理氣 양자의 존재론적 차이를 명확하게 이해하는 것이, 理의 진정한 의미를 이해하는 첫 출발점이 된다. 그가 율곡에 대하여 學과 道의 세계가 명확히 구분되지 않는 것은 理와 氣를 混同하는 것만큼이나 위태로운 것이라고 지적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그러나 이 양자의 관계를 밝게 구별하는 것은, 형기를 지닌 인간으로서는 엄청난 어려움이 따른다. 육신을 가진 인간으로서의 현실적 욕망을 완전히 포기해야 하는 극도의 절제가 요구된다. 숙흥야매잠은 이러한 형기의 욕망을 절제하는 가장 좋은 수양서로서의 의미를 지니다.
이러한 성리학적 공부론의 관점에서 볼 때, 다산이 숙흥야매잠을 날마다 하는 일에 程限을 정하기 위하여 만든 것으로 파악하는 것은 매우 충격적인 일임에 틀림없다. 다산이 숙흥야매잠을 이렇게 하루의 일정표나 시간표 정도로 이해하는 것은 퇴계가 <숙흥야매잠도>을 그의 敬學의 구도로 환치시켜 놓은 것을 완전히 해체하는 작업과 같다. 또한 다산은 진백이 이 잠을 통해 日常을 심성론적 차원으로 환원시킨 것을 '行事'의 무대로서의 일상으로 돌려놓은 것으로 볼 수 있다. 다산이 이기론의 해체를 통하여 성리학의 본체론을 근저에서부터 뒤흔들어 놓았다면, 그는 '下學'과 '日用行事'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통해 성리학적 공부론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기론적 체계를 걷어 버린 다산의 이러한 '行事' 개념은 성리학자들로서는 매우 불안정하고, 자칫 주체로서의 마음을 잃어버리는 위험성을 발견하게 된다. 文山이 다산에 대하여 경계한 것도 바로 다산 사상이 지닌 이러한 점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다산의 '行事' 개념은 物과 인간과의 관계에서 자칫 사물을 부리는 것(役物)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사물의 부림을 받는(役於物) 관계로 진전될 위험성이 있는 것이다. 정이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사람들이 사려가 많고 편안할 수 없는 것은 그의 마음의 주체가 안정되지 않았기 때문이니 마음의 주체를 안정시켜야 한다… 사람이 어떤 일을 행함에 있어 스스로 그쳐야 할 바에 그치지 못하는 것은, 또 다른 일에 구애되어 각각의 물에 있는 그 물의 고유한 이치를 모르기 때문이다. 물마다 물에는 고유한 법칙이 있어(物各付物) 그대로 따른다면 오히려 물을 부리는 일이 되지만, 그러나 물에 구애되면 물에 사역 당하게 되는 것이다. (맹자가 말했듯이) 물이 있다고 한다면 물에는 반드시 고유한 법칙이 있게 마련이라고 하였는데, 우리들은 반드시 사물의 법칙에 따라 사리의 당연한 極에 멈추어야 한다.

 

물론 위의 글에서 物各付物을 강조하는 것은 바깥의 외물을 부정하고, 마음이 안으로만 침잠하는 불교적 정적주의를 극복하고자 하는 것에 그 의미를 두고 있다. 즉 바깥 외물에도 그 나름의 고유한 존재법, 즉 分殊之理가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이것이 내 마음의 理와 조응하도록 하는 것이 窮理를 통한 공부인 것이다. 物各付物은 "물이 와서 응하나(物來而應) 물의 고유한 법칙을 벗어나지 않고, 물이 감에 化하나(物往而和) 결코 그 자취를 남기지 않는" 상태를 말한다. 그러나 성리 공부론을 통해 보건대, 다산이 각각의 물 속에 있는 분수지리를 부정하고, 모든 물의 세계를 그 스스로의 실천 속에서 이해하고자 한다면 그의 행사 철학은 종국적으로 물에 구애되어 물에 사역 당하는 또 다른 한 좌단이 될 위험성이 있는 것이다.

 

4. 성리 공부론에서 본 다산의 성기호론과 '덕성'의 문제

 

다산의 성기호론이나 덕의 개념에 대한 상세한 논의는 이미 그의 경학사상에 대한 선행연구들을 통하여 자세히 밝혀진 바 있다. 이에 본고에서는 이 문제에 관한 개념적 차원의 분석이나 설명은 잠시 접어 두고, 다산의 성기호론과 덕성의 개념을 연결시키고자 할 때 나타나는 몇 가지 이론적인 딜레마를 성리학적 공부론의 입장에서 논의해 보고자 한다. 이 말은 다산이 '性은 嗜好다'라고 정의할 때. 그 '嗜好'의 의미가 중첩되어 있어 그렇게 선명하게 정리되지 않고 있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일종의 '경향성'으로 이해되는 다산의 '嗜好'개념은, 필자가 보기에, 道와 欲望의 세계 사이에 매우 어중간하게 걸쳐 있다. 이 점은 이미 다산의 사상은 철학적으로 초점이 일치하지 않는 양면성의 구조 위에 서 있다고 주장하는 김형효 교수의 주장 속에 함축되어 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다산의 일원론적 심신론은 자연주의적인 성론과 관련을 시키고, 그의 심신이원론의 관점은 도덕주의적인 성론과 연계시켜 이해할 수 있다. 이에 그의 실학 사상은 심신일원론에 바탕한 지성적인 실학의 실용적인 이념과 그 이념에 연관되어 있는 對 물질적인 관리와, 심신이원론 위에 서 있는 의지적인 실학의 실천적인 이념과 그 이념과 상반된 대 인간관계의 관리라는 두 가지의 면모를 띄고 있다고 이해된다.


다산의 성 기호론이 지닌 중첩적인 성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잠시 그의 논의의 흐름을 정리할 필요성이 있다. 우선 다산은 그의 성기호론을 주장하기 위해 이른바 人物性同論을 근본적으로 비판하였다. 그는 성리학에서 말하는 만물일체설은 옛 경전에 없었던 것이며, '인간과 사물의 성이 같다'라는 것은 불가의 l말이라 하여 인물성동론을 전면적으로 부정한다. 그는 또한, "사람은 새를 뒤쫓고 도둑을 향해 짖을 수 없으며, 소는 책을 읽고 이치를 궁구할 수 없는 것이니, 사람과 사물이 性을 같이 할 수 없음이 명백하다."고 하여 양자간에는 완전히 천명의 성이 다름을 주장한다. 이에 다산은 이른바 性三品說을 제시한다. 즉 性에는 3등급이 있는데, 초목의 性은 생명만 있고, 금수의 性은 생명과 지각이 있고, 인간의 性은 생명과 지각이 있으며 또 신령하면서 善하다는 것이다. 이처럼 上·中·下 등급이 분명히 다른 까닭에, 그 性을 극진히 하는 방법도 전혀 다르다. 초목은 그 생명을 이루게 할뿐이고, 금수는 자신들의 타고난 지각적 특성을 이루게 할뿐이다 또한 다산에 따르면, "天命之性은 인간의 性이며, 率性之道는 인간의 道이며, 修道之敎는 인간의 敎育이다. 인간의 性이 이미 순하면 만물의 性이 모두 순하게 되고, 인간의 道가 밝아지면 천지의 화육을 도울 수 있는 것이다. 어떻게 처음 性을 닦고 道를 배우면서 금수의 본성마저 함께 다스릴 수 있으며, 초목의 道마저 함께 닦아 모두 같이 무성하고 다같이 화육될 수 있겠는가?"라고 하여 인간만이 교육을 통해 덕을 닦을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이다.


그런데 다산이 따르면, 이렇게 인간이 고유하게 품부받은 인성은 기본적으로 선을 행하고자 하는 경향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다산은 말하기를, "오늘날 人性을 말하면, 사람은 善을 좋아하고 惡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는 이가 없다. 그러므로 하나의 善이라도 하면 마음이 흔연히 흐뭇해하고, 하나의 惡이라도 저지르면 마음이 굶주린 듯 허전해 한다. 또 그 자신은 일찍이 조그만 선행도 없었는데 남들이 나를 善한 사람이라고 칭찬하면 이를 좋아하며, 그 자신은 조금도 惡한 일을 저지르지 않았는데 남들이 惡한 놈이라고 헐뜯으면 화를 내게 된다. 이 같은 사람은 善이 기뻐할 만하고 惡은 부끄러워할 만하다는 것임을 안다. 남의 善함을 보고 따라서 그를 善하게 여기고, 남의 惡함을 보고 따라서 그를 惡하다고 여긴다. 이 같은 사람은 善이 사모할 만한 것이고 惡은 증오할 만하다는 것을 안다. 이 모든 것이 '嗜好'가 우리 눈앞에 분명히 드러난다는 것을 밝혀 준다."고 주장하고 있다. 즉, 天이 인간에게 생명을 부여할 때, 이 性을 주어 惡한 일은 하지 않고 善으로 나아가게 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이 본성에 의지하고 이 길을 따라갈 수 있었다. 子思가 말한 性命이나 孟子가 말한 性善은 모두 이런 뜻이다. 지금 孟子(告子, 盡心篇)가 말한 性을 살펴보면 모두 嗜好로써 비유하고 있는데, 이 때문이다."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 주목해 보아야 할 점은 다산의 성기호론이 그의 인간에 대한 양면적 이해에 매우 애매하게 함께 근거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즉 인간이 지닌 선의지와 도심을 지향하는 경향성과, 이와는 상반되게 인간의 욕망에 대한 긍정과 몸의 요구에 대한 부분적인 승인을 허락하는 형기적인 경향성의 양 요소를 함께 지니고 있다는 점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김형효 교수가, 그의 心論은 三性(生性+覺性+靈性)의 일체성으로서의 대체개념과 같고, 또 다른 한 편에 있어서 그것은 소체와 구분되는 대체로서의 도심의 靈性과 동일하여 이른바 형기적인 소체에서 나오는 인심과 전혀 다를 뿐만이 아니라 서로 투쟁하는 그런 양상을 띄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매우 적절한 주장으로 이해된다.


그가 기호가 지닌 이러한 두 가지의 경향성을 밝게 드러내어 이야기한 것은 쉽게 찾을 수 있다. 예로, "내가 일찍이 性을 마음의 기호라고 하니 사람들이 모두 그것을 의심하였는데 지금 그 증거가 여기에 있다. 欲, 樂, 性 세 글자를 孟子가 삼층으로 나누었는데, 가장 얕은 것이 欲이고 그 다음이 樂이며 가장 깊어서 드디어 본인이 각별히 좋아하게 되는 것이 性이다 … 欲, 樂, 性 세 글자가 같은 類이다."라고 하여 欲의 요소와 性의 요소가 함께 들어 있음을 이야기하고 있다. 또한 그는, "기호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눈앞의 탐락이 기호가 되는 것인데, 이를테면 꿩의 성이 산을 좋아하고, 사슴의 성이 들을 좋아하고, 원숭이의 성이 술을 좋아하는 것과 같은 것이니 이런 것이 하나의 기호다. 또 다른 하나의 기호는 지내놓고 보면 생명의 형성에 도움이 되는 기호인데, 이를테면 벼의 성이 물을 좋아하고, 기장의 성이 건조한 것을 좋아하고, 파와 달래의 성이 닭똥을 좋아하는 것과 같은 것이니 이런 것이 다른 하나의 기호다."라고 하여 기호의 이중적 성격을 이야기하고 있다.


한편 이러한 인간에게 하늘은 '自主之權'을 부여해 줌으로써 그로 하여금 선을 행하고 싶으면 선을 행하고, 악을 행하고 싶으면 악을 행하게 하는 재량권을 주었다는 것이다. 이에, 그는 "선할 수도 있고 악할 수도 있는 權衡을 부여하여 사람의 자주적인 마음에 따라서 선을 행하려면 그를 따라주고, 악을 따르려 해도 그를 따라주기 때문에 공과 죄가 일어나는 것이다. 하늘은 이미 덕을 좋아하고 악을 부끄럽게 여기는 인성을 부여하니, 그가 선을 행하든지 악을 행하든지 그로 하여금 유동성 있게 행위에 맡게두니 이를 떨며 두려워해야 할 神權妙旨이다."라고 주장한다.


다산의 이러한 자주지권의 강조는 스스로 주체적이고 도덕적인 판단을 가능하게 하는 새로운 근대적 인간개념을 창출한 것으로 평가된다. 명백한 사실이다. 그러나 공부론의 맥락에서는 이 부분에서 약간의 논의가 요구된다. 자세한 논의는 추후 좀 더 진전시키고자 하며, 이 자리에서는 몇 가지 문제제기에 그치고자 한다.

 

가) 공부론을 통해서 본 다산 '嗜好'論의 의미
- 욕망의 문제와 관련하여 -

 

앞에서 이미 살펴보았듯이 다산의 기호의 개념은 도심을 지향하는 경향성과 형기가 지닌 피할 수 없는 욕망을 향한 경향성으로 나뉘어져 있다. 다산은 자주 인간을 神形妙合의 존재로 설명한다. 인간의 욕신과 거기에서 연유하는 욕망에 대해 소극적인 평가를 하였던 전대 성리학자들에 대한 불만을 드러내고 있다. 그는 말하기를, "본디 몸과 마음은 미묘하게 하나로 합쳐져 있으니 둘로 나누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특히 身자를 써서 몸과 마음이 하나임을 확고히 못박은 쇠못을 삼은 것인데 이제 이 못을 빼버리면 대학에서 수신(修身)은 없어질 것이리라."라고 하여 공부에 있어서 몸의 중요성을 말하고 있다.

 


다산이 몸의 실체를 적극적으로 긍정하는 이러한 주장은 조선조의 성리론에서는 쉽게 찾아 볼 수 없는 진전된 논의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몸과 마음의 통합적인 이해를 하고자 하는 그의 의도가 논리적으로 과연 얼마나 만족스럽게 관철되고 있는가 하는 점은 좀 더 구명되어져야 할 과제이다. 性을 대변하는 도심과, 몸을 대신하는 인욕간의 관계에 대한 치열한 논쟁은 성리철학의 가장 오래된 논쟁이었고, 유학사 속에서는 다산보다 더욱 적극적으로 인욕을 긍정하는 흐름들을 수 없이 찾아 볼 수 있다.


예로 잘 알려진 주자와 胡宏과의 천리와 인욕에 관한 치열한 논쟁은 송대의 공부론을 형성하는 가장 중요한 논쟁의 하나였다. 호굉은 천리와 인욕을 "同體異用 同行異體"라고 하면서 성 자체에는 선악이 없다고 주장한 반면, 주자는 천리와 인욕이 동일한 체라고 주장하는 호굉의 입장에 반대해서, 천리를 가리는 인욕을 제거하는 공부를 강조한다. 물론 공부론의 주도권은 尊天理  人欲을 강조하는 주자계열로 넘어 갔으나, 인간의 정감과 신체를 긍정하고 욕망의 구성체계를 승인하는 적극적인 움직임도 왕용계나, 왕심재 혹은 나근계와 이지 등에 이르기까지 유학사의 흐름에서는 얼마든지 발견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에서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다산의 성 기호론이 욕망에 대해 열린 자세를 취했다는 사실뿐만 아니라, 그 설명체계가 매우 독특하다는 점에 있다. 욕망과 천리와의 관계설정이 성리학에서처럼 정치한 구조를 취하는 것이 아니라, 일견 매우 절충적이고 또한 선택적인 방식을 취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성리학의 공부론과 비교하기 위하여 일단 다산의 욕망에 대한 견해를 들어보도록 하자.

 

 
우리의 靈體안에는 본디 원하고자 하는 욕망의 일단이 있다. 만약 이런 욕망의 마음이 없다면, 천하만사의 일을 도대체 해 나갈 수가 없다. 오로지 이욕에 밝은 자의 욕망은 이욕에 쫓아서 꿰뚫어 나아가며, 의리에 밝은 자의 욕망은 도의에 따라서 꿰뚫어 나간다. 욕망의 지극함에 이르러서는 이 두 욕망은 최선을 다하되 후회하지 않는다. 이른바 탐욕의 인간은 재물을 위하여 몸을 바치고, 열사는 명예를 위하여 몸을 바친다. 내 일찍이 어떤 사람을 보았는데 그의 마음이 담박하여 욕망이 없으므로 선하지도 못하고 악하지도 못하여 학문도 이루지 못하고 산업도 하지 못한 채 곧 바로 천지간에 버린 물건이 되었다. 인간이 어찌 욕망이 없을 수 있는가?

 

이 글에서는 다산은 인간이 가진 욕망을 적극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욕망없는 인간은 아무런 '行事'도 이룰 수 없는 죽은 인간에 불과하다. "마음이 담박하여 욕망이 없는 인간은 천하에 버린 인간이다."라는 언명 속에는 담연한 본체를 회복하고자 하는 성리학의 공부론에 대한 지독한 독설이 스며 있다. 그러나 그의 욕망론은 결코 무한질주를 하지 않는다. 그의 욕망론은 결코 앞서의 現成論者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그가 몸담았던 봉건적 문화체계 전반을 야유하거나, 욕망의 철저한 자유를 요구하지는 않는다. 그는 오히려 도심이라는 대체의 욕망을 따르도록 권고한다. 즉 그는, "대체는 형체가 없는 영명한 것(無形之靈明)이며, 소체는 형체가 있는 육신(有形之軀穀)이다. 대체를 따르는 것은 性을 따르는 것(率性)이고, 소체를 따르는 것은 욕망을 따르는 것(循欲)이다. 도심은 향상 대체를 기르고자 하지만, 인심은 항상 소체를 기르고자 한다. 天命을 즐거워하고 알면 도심을 배양하게 되고, 극기(克己)하고 복례(復禮)하면 인심을 제재할 수 있으니 여기서 선과 악이 판가름난다."라고 선악의 분기점은 욕망을 조절하는 것에 있음을 밝히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도심과 욕망 사이를 왕복하는 다산의 인성론에서 욕망을 조절하고, 통제하는 논리적 메커니즘, 즉 그의 공부론이 선명하게 드러나지 않는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즉 성리학이 敬論을 대신할 충분한 설명체계가 잘 드러나지 않는다. 다산 자신도 이 문제에 대하여 나름대로의 설명은 개진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마음을 빠뜨리는 것은 形氣의 사욕 또는 습속의 오염, 외물의 유혹에 의한 것이다. 이 때문에 양심이 마음을 빠뜨려 大惡을 저지르는 데 이르게 된다."라거나, 혹은 "行事를 근거로 말하면 善할 수도 있고 惡할 수도 있으며 善을 하기란 하늘에 오르는 것처럼 어렵고 惡을 하기란 언덕이 무너지는 것처럼 쉬운 일이다. 이는 形氣의 累가 많기 때문이다."라고 육신의 욕망을 검속할 것을 말하고 있다. 또한 그는 "선할 수도 있고 악할 수도 있는 權衡을 부여하여 사람의 자주적인 마음에 따라서 선을 행하려면 그를 따라주고, 악을 따르려 해도 그를 따라주기 때문에 공과 죄가 일어나는 것이다. 하늘은 이미 덕을 좋아하고 악을 부끄럽게 여기는 인성을 부여하니, 그가 선을 행하든지 악을 행하든지 그로 하여금 유동성 있게 행위에 맡게두니 이는 떨며 두려워해야 할 神權妙旨이다."라고 하여 선악에 대한 최종적인 책임은 본인 자신에게 있음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그의 설명에도 불구하고, 그 미묘한 기미에 수시로 변화되는 욕망을 과연 어떻게 조종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자세한 설명이 부족하다. 그러나 성리학에서는 이 문제에 대한 나름대로의 설명체계가 제시되어 있다. 성리학의 공부론에서는 존양 공부를 실현할 때, 철저한 無欲性을 지향하는가 아니면 寡欲을 지향하는가의 문제는 유학사에서 상당한 논란이 있었던 부분이다. 주렴계가, "수양을 하는데는 寡欲에서는 멈추어서는 안되고, 대개 무욕에 이르러야 한다. 욕심이 없으면 誠立明通하게 된다."라고 주장한 이후 이 부분은 후일 많은 이견들을 불러 왔다. 주자도 이 부분에 대한 주석을 통해 이 구절의 주장처는 寡欲에 있음을 말하고 있다. 陳埴이 우려한 바와 같이 이 무욕은 자칫 불교의 寂滅과 같은 의미로 轉化될 우려가 있는 것이다. 주자는 극기는 무욕이 아니라 과욕의 상태를 의미함을 밝히고 있다.


무욕을 지나치게 주장하는 것은 자칫 불가의 논리와 착종될 우려가 있다. 주자도 이 점을 우려하였다. 그는 무욕에 이르는 것은 사실 성인이 아니면 이르지 못하는 상태로 이해하고 있다(到無欲 非聖人不能也). 무욕이란 현실적으론 절대 도달할 수 없는 공부의 최대치에 지나지 않는다. 無의 공부는 필경 과욕을 통해서야 도달할 수 있기에(無底工夫 則由於能寡欲) 짐짓 설정한 공부의 표적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인간은 "배가 고프면 밥을 먹고, 목마르면 물을 마시고 겨울에는 털옷을 입고 여름에는 갈 옷을 입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자연스러운 욕망이다. 문제는 여기에 개인의 사욕이 개재되어 있는가의 여부이다. 이에, 伊川도 인간은 어쩔 수 없이 욕망을 잉태하고 있을 수밖에 없으며, 단지 "욕망에 빠져 허우적거리지 않는 것(所欲不必沈溺)"이 중요한 것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문제는 中節, 不中節의 문제고, 이는 마음이 항상 敬의 상태를 유지할 때 가능한 것이다.


우리는 이제 이러한 성리학의 설명체계와 비교할 때, 다산의 성 기호론에 대한 설명은 욕망에 대한 그의 역사적이고 문화적인 해석이 더욱 고려된 것으로 보인다. 즉 그는 性에 대한 해석을 본체론적 입장에서 한 것이 아니라, 조선후기라는 특정한 시기에 가장 적합한 형식으로, 다분히 정치사회적인 맥락 속에서 새롭게 정리한 것으로 보인다.

 

 
나) 다산 공부론에 있어서의 '덕성'의 문제

 

우리는 앞에서 다산이 그의 실천적 공부론을 성립하기 위해, 성리학의 공부론을 지나치게 불교의 선과 동일시함으로써 그 발전적 지양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음을 살펴보았다. 그러면 다산은 왜 이렇게 이론적으로 다소 과격한 방법으로 지나간 성리학의 공부론을 공격하고 그의 공부론을 전개하였을까? 이제 앞절의 논의를 이어 덕에 관한 그의 논의를 추적해 보자.

 


이미 잘 알려진 바와 같이, 다산의 덕에 대한 재해석은 사단에 대한 성리학적 해석을 부정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되었다. 다산은 종래 성리학자들이 '端'을 '端緖'로 읽던 것을 과감하게 '端初'로 읽어 내렸다. 이것은 덕의 개념을 근본적으로 바뀌어 놓을 일대 사건이었다. 장동우가 이미 잘 정리해 놓은 바와 같이, '단'을 '단서'로 읽는 것은 사단과 사덕을 본체와 현상으로 관계지으려는 것이다. 사단의 존재는 사단을 가능하게 하는 본체로서의 사덕이 심속에 선험적으로 내재해 있음을 증명해 주는 흔적이다. '단'을 '단초'로 읽는 것은 이와는 다른 결과를 낳는다. 사단은 실천의 근본이요, 시작이고 사덕은 실천의 결과로 형성된 덕목이 된다. 다산은 맹자의 글에 의지해 사단의 端을 불이 처음 붙듯이 샘이 처음 흘러나가듯이 시작한다는 뜻이요, 사단의 마음이 발동함은 바로 사덕을 성취하기 위한 실행의 출발점이라는 의미에서 '端始'로 쓴다는 사실을 강조하였다.


다산의 端에 대한 재해석은 물론 덕의 실천성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다산은 "仁義禮智는 行事로 얻어진 이름이지 心에 있는 이치라고 할 수 없다 것이다."라고 단정적으로 주장한다. 茶山은 "性을 논하고 心을 논하는 것도 결국은 善을 밝히고 몸을 성실히 하여 장차 實踐하려는 것이며, 孟子가 惻隱之心을 논한 것은 마음을 확충하여 仁이 天下에 덮이게 하려는 것이다. 그런데 仁義禮智 네 가지를 밀어 넣어 버리고는 性이니 心이니 體니 用이니 하고 있으니, 仁義禮智가 마음 속에만 있을 뿐이다. 그러면서 본원을 끝까지 궁구한다고 하니, 體만 있고 用이 없어지는 폐단이 있을까 염려된다"고 성리학의 관념적인 해석을 비판한다.


그에 따르면, 사람들이 仁이란 실천을 통해 비로소 획득되는 가치덕목이라는 사실을 간과하고, 마음의 이치라고 파악하는 것에서 문제가 발생한다는 것이다. 요컨대 사람들이 평소 仁을 心 속의 理로 여길지언정 부모에게 효도하고 임금에게 충성하고 벗에게 돈독히 하고 백성에게 자애롭게 하는 등, 사람과 사람이 서로 상대하는 것을 따로 德이라 하고, 仁이라고 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평소 생각할 때 惻隱·博愛 등이 마음 속에 일어나지만, 실제로는 어디로부터 시작해야 하는지 또 어떻게 해야 仁을 행하는지 모른다고 비판한다.


다산은 또한 天聖이 서로 전한 道가 仁이란 한 글자에서 벗어나지 않는데, 仁에 대해 체득하는 것이 이처럼 불분명하므로, 바른 학문이 있을 수 없다고 하여 仁을 강조하고, 실천하는 구체적인 방법으로 恕를 제시한다.


우리는 이러한 논의를 통하여 행하지 않으면 德이 있을 수 없다는 다산의 주장을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된다. 다산은 성리학의 공부로는 성인을 성취할 수 없는 이유를 우선, 천을 理라 하고, 인을 만물을 살리는 理라 하고, 중용의 庸을 平常이라고 하는 세 가지 점으로 지적한다. 반면 성인이 될 수 있는 방법은, 신독으로 하여 귀신을 섬기고, 恕에 힘써서 인을 구하며, 恒久하여 중단됨이 없을 것을 주장하였다.


우리는 성리학에 대한 다산의 이러한 혹독한 비판을 통해 두 상이한 철학체계의 화해할 수 없는 맞부딛힘을 읽어 볼 수 있다. 다산의 철학이 성리학의 공부론을 혹독하게 비판하는 이유는 그 尊德性의 공부가 지나치게 주정적인 색채를 띄고 있기 때문이다. 고요히 마음속의 천리를 체인하고자 하는 성리학의 공부법은 이제 그가 구상하는 새로운 세계에 대한 적절한 방법적 원리를 제고해 줄 수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따라서 그의 공부법은 필연적으로 그의 경세론이나 치세론과 결합하지 않을 수 없다. 그가 성리학의 공부법을 비판하면서, "요즘 사람들은 원래부터 德字에 대해서 분명한 인식이 없었기에 經典을 읽다가 德字에 마주칠 때마다 까마득하여 무엇인지 전혀 알지 못한다. 단지 淳厚하고 渾朴하여 淸濁마저 분별하지 못한 사람을 德이 있다 여기고, 또한 이 기상으로 天下를 다스리면 만물이 감화를 입게 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결국 일에 임해서는 어디서부터 시작할지조차 모르고 있으니, 이 어찌 동떨어진 말이 아니겠는가? 이 때문에 나날이 天下는 부패되고 새로워질 수 없는 것이다."라고 개탄하는 대목은 유심히 음미해야 할 부분이다. 그는 공부법이 잘못됨으로 인해 천하가 부패하게 되고 새로워질 수 없게 된 상황을 염려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그가, 인간관계 중에서 "親親이 가장 크다."하고 親親을 중시한 이유를 주목하여야 할 것이다. 다산은 德을 '孝弟'라고 직접적으로 연결한다. 孝弟慈라고 하는 유학의 가장 실천적이며 원초적인 개념을 재해석해 줌으로써 조선사회 전체의 이데올로기적 안정을 구현해 보고자 한 것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노력을 전대 성리학적 공부론과의 불화를 전제로 한 것이다. 즉 다산의 공부론은 성리학의 공부론이 본체론과의 결합을 통해 추구했던 다양한 철학적 논의들을 상당부분 유보하면서 오늘날 우리의 세계와 마주하고 있다.

 

5. 결어

 

우리는 지금까지 성리학의 공부론을 통해, 다산의 공부론의 명암을 조망해 보았다. 그 결과 다산의 공부론은 성리학의 공부론을 과도하게 불교의 선학적인 요소로 해석하였음을 알 수 있었다. 예로 그 구체적인 예를 未發에 대한 다산의 해석에서 볼 수 있었다. 또한 德은 구체적인 行事를 통해서만 비로소 들어 난다는 다산의 주장은 성리론과 상당한 불화의 요인을 안고 있는 것이다. 성리학자들의 눈으로 보면 현상적인 개개의 행사에 집착하는 것은 자칫 세계에 대한 통합적인 이해에 장애가 될 수 있고, 객체로서의 대상에게 종속될 위험성도 있다.

 


그러나 다산이 파악하기에 당시의 성리학자들은 德을 형이상학적 실체로 가두어 둠으로써 그 실천력이 급격히 상실되고, 종국적으로는 사회적인 통합력도 잃어버릴 것으로 이해하였다. 덕에 관한 다산의 이러한 실천적이며 실사적인 태도는 구체적인 일상을 바라보는 시각에서도 성리학자들과 많은 편차를 드러낸다. 성리학에서의 敬 공부론의 관점에서 볼 때, 다산이 숙흥야매잠을 날마다 하는 일에 程限을 정하기 위하여 만든 일과표 정도로 파악하는 것은 매우 충격적인 일임에 틀림없다. 다산의 이러한 이해태도는 퇴계가 <숙흥야매잠도>을 그의 敬學 구도로 환치시켜 놓은 것을 완전히 해체하는 작업과 같다.

 


이기론적 체계를 걷어 버린 다산의 이러한 '行事' 개념은 성리학자들로서는 매우 불안정하고, 자칫 주체로서의 마음을 잃어버리는 위험성을 발견하게 된다. 다산의 '行事' 개념은 物과 인간과의 관계에서 자칫 사물을 부리는 것(役物)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사물의 부림을 받는(役於物) 관계로 진전될 위험성이 있는 것이다.


또한 본고에서는 다산의 성기호론은 그의 인간에 대한 양면적 이해에 근거하고 있다는 사실을 살펴보았다. 즉 성기호론에서는 인간의 선의지나 도심을 지향하는 경향성과, 이와는 상반되게 인간의 욕망을 긍정하는 경향성, 이러한 두 요소를 함께 지니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는 도심과 욕망 사이를 왕복하는 다산의 인성론에서 욕망을 조절하고, 통제하는 논리적 메카니즘, 즉 그의 공부론이 선명하게 드러나지 않는다는 약점을 볼 수 있다. 요컨대, 다산의 공부론에서는 아직 성리학의 敬論을 대신할 충분한 설명체계가 아직 잘 드러나지 않고 않다. 이러한 사실들은 그의 공부론이 인간의 내면세계에 대한 탐구 대신, 경세론이나 치세론과 결합하면서 발생한 필연적인 결과였다.

 

정순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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