칸트가 물자체의 세계와 현상계를 구분해 물자체를 미지의 세계로 남겨 버림으로써 후대 철학자들은 물자체의 세계를 뚫고 나갈 방법을 궁리하기 시작했다. 헤겔(Georg Wilhelm Friedrich Hegel, 17700827~18311114)도 그들 중 하나로 세상을 인식할 수 있는 12개의 범주보다 더 많은 의식의 형식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세상을 바라보는 형식은 우리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사는 시대가 결정하는 것이라 주장했다. 또한 우리의 의식 형식은 변증법을 통해 진화하고 그 과정 상에서 세상을 해석하는 것이다.
우리 의식의 변화는 우선 감각적 확신으로 시작한다. 처음에는 이것만이 확실하다고 믿는다. 하지만 감각은 그냥 느낄뿐이다. 의사소통을 위해서는 이것을 보편적인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이것을 지각이라 한다. 또한 그것은 다른 것과의 관계와 구별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결국 지성이라 말하는 과학적 지식은 관계에 관한 지식임을 알게 된다. 이는 인과관계를 포함한 사물의 법칙을 찾아낼 수 있다. 이제 우리는 현상보다는 그 안에 숨어있는 본질적인 힘의 관계를 파악하고자 한다. 이것은 다양한 현상을 단순화한 것이고 단순한 원리로 환원할 수 있음을 뜻한다. 하지만 이로 인해 법칙의 세계는 불변하지만 추상적이고 생명이 없는 고정된 세계인 반면 현상의 세계는 스스로 움직이며 법칙을 만들어내는 살아있는 세계라는 것 또한 알게 된다.
헤겔은 이제 사물의 법칙을 넘어 인간만이 갖는 의식을 통해 세계의 발전과 변화를 설명하려고 한다. 의식은 인간을 대상으로 하며 상대방이 자신을 바라보듯 자신을 바라본다. 그로 인해 자기의식이 생긴다. 자기의식은 타인을 자기의식이 없는 생명으로 취급한다. 그리고 자기의식만 인정받기를 바라는 인간들의 자기의식들끼리 싸움이 일어난다.
투쟁에서 승리한 자는 주인이 되고 반대는 노예가 된다. 노예는 주인의 수발을 들으며 명령을 받는다. 하지만 이때 노예는 노동을 통해 자연의 원상태를 부정하고 자신의 뜻대로 자연을 변형할 수 있는 힘을 기른다. 노예는 노동을 통해 자신의 생각을 투영하고 자연은 노예의 뜻대로 변해간다. 노동으로 인해 인간의 본질인 자기의식이 자연 속에서 실현된다. 노예는 스스로 자기의식을 인정받고 주인의식을 갖는다. 반면 주인은 그동안 노예의 노동에 의존해 살아왔기에 독자성을 잃고 노예가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라는 인식에 도달한다. 노예가 주인이 되고 주인이 노예가 되는 변증법적 반전이 일어나는 것이다. 노예는 자유가 있어야함을 그리고 누구에게나 자기의식이 있음을 깨닫는다. 이제 인간은 보편적 자유의 이념을 얻는다.
역사는 왕이라는 한 사람의 자유에서 시민사회라는 모두의 자유로 확대되어 가는 역사다. 이는 노예가 주인이 되는 역사와 다르지 않다. 이제 시민사회에서는 각 구성원이 타자에게 상품을 공급하기에 노예이면서 타자가 생산한 상품을 향유한다는 측면에서 주인이 된다. 노동은 인간의 본질이며 의식이 발전해가는 원동력이다. 이것은 마르크스(Karl Heinrich Marx)에게 강력한 영향을 끼친다.
이제 인간은 감각적 확신, 지각, 과학적 지식을 통해 자기의식의 단계로 진화했다. 이것은 칸트의 12가지 규범이 보지 못하는 세계이다. 이 보편적 자기의식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갖는 공통된 의식이다. 또한 개인적 주관에 머물러 있는 칸트의 주관적 의식을 절대정신이라는 개관적 세계로 갖고 나온다. 이 정신은 객관적 도덕 또는 공동체의 도덕이다. 의식은 대상과 대립하여 존재하지만 정신은 더 이상 자기 외부에 대상을 갖지 않는다. 정신이 대상으로 삼는 것은 오로지 정신 자신이 표출한 세계일 뿐이다. 정신은 그 자체가 진리가 된다. 그러므로 칸트의 실천이성이 객관적인 현실의 도덕법칙으로 거듭나려면 세상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관습, 풍습, 법, 문화, 제도와 같은 것들을 수용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헤겔의 윤리는 개인의 도덕보다는 공동체의 도덕이 더 우위가 되는 세상으로 확대된다.
눈에비친햇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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