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플라톤은 처음부터 지식은 획득될 수 있으며, 지식은 반드시 비가류적(非可謬的)이고 실재하는 것에 관한 것이어야 한다고 가정했다. 참된 지식은 이 특징들을 소유해야만 하며, 이 두 특징들 모두 자신의 것이라고 주장할 수 없는 어떠한 마음 상태도 참된 지식일 수 없다. 『테아이테토스』에서 플라톤은 감관 지각도 옳은 신념도 이 두 특징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따라서 양자가 모두 참된 지식과 동일해질 수 없다. 플라톤은 프로타고라스로부터 감관과 감관 지각은 상대적이라는 신념을 받아들이지만, 보편의 상대주의는 받아들이지 않으려 한다. 반대로 지식, 즉, 절대적이며 비가류적인 지식은 획득될 수 있으나 그것은 감관 지각과 같을 수 없는데, 왜냐 하면 감관 지각은 상대적이라 파악하기 어렵고 주체와 객체 양쪽의 온갖 종류의 순간적인 영향들에 의해 지배받기 때문이다. 플라톤은 또한 헤라클레이토스로부터도 감관 지각의 대상들은 개별적이고 감각적인 특수한 대상들이며 언제나 전화나 변전의 상태에 있어서 참된 지식의 대상이 되기에 적합하지 않다는 견해를 받아들인다. 감관 지각의 대상들은 생성되고 소멸되며, 수적으로 무한하고 정의로 분명하게 파악되지 않으므로 학문적 지식의 대상이 될 수 없다. 그러나 플라톤은 참된 지식의 대상으로 적합한 대상은 없다는 결론을 내린 것이 아니라, 감각적 특수자는 우리가 찾는 대상이 아니라는 결론만을 내렸다. 참된 지식의 대상은 불변적이고 항구적이며 고정되어 있고, 명백하고 학문적인 정의로 파악될 수 있어야 하는데, 명백하고 학문적인 정의는 소크라테스가 보여준 것처럼 보편자를 대상으로 한다. 그러므로 마음의 상이한 상태들에 대한 고려는 마음의 그 상태들의 상이한 대상들에 대한 고려와 불가분하게 결합된다.
만약 우리가 그 안에서 본질적으로 불변이고 항구적인 것에 대한 지식을 획득했다고 생각하는 판단을 검토해보면, 우리는 그것이 보편자들에 관한 판단임을 알게 된다. 만약 예를 들어 우리가 판단한 "아테네 헌법은 좋다"를 검토한다면, 우리는 이 판단 안에서 본질적으로 변치 않는 요소는 선의 개념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결국 아테네의 헌법은 우리가 그것을 더 이상은 좋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나쁘다고 말하게 되도록 변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선의 개념은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함의하는데, 애냐하면 만약 우리가 바뀐 헌법을 나쁘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단지 우리가 그 헌법을 선의 고정된 개념에 관련해서 판단하기 때문에, 그럴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뿐만 아니라 비록 아테네의 헌법이 경험적이고 역사적인 사실로서 바뀔 수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한 때 좋다고 평했던 그 특수한 헌법 형태를 의미한다면 (비록 그것이 사실상 그때 이후로 변했다손 치더라도), 우리는 여전히 "아테네 헌법은 좋다"고 말할 수 있다는 반론이 제기되더라도, 우리는 그에 대한 대답으로, 이 경우 우리의 판단은 하나의 주어진 경험적 사실로서의 아테네 헌법에 관련된다기보다는, 헌법의 어떤 한 유형에 관련된다는 것을 지적할 수 있다. 헌법의 이런 유형이 어느 주어진 역사적 순간에 우연히 아테네의 헌법 안에서 구현된다는 사실은 다소 부적절하다. 우리가 실제로 의미하는 것은 헌법의 이러한 보편적 형태는(그것이 아테네에서 발견되든 다른 곳에서 발견되든간에) 선의 보편적 속성을 담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의 판단은, 그것이 항구적이고 불변적인 것에 도달하는 한 실재로 보편자에 관계한다.
다시 말하지만 학문적 지식은, 소크라테스가(주로 윤리적 평가와 관련하여)보여주었듯이, 정의를 목표로 한다. 즉, 분명하고 명료한 정의 안에다 지식을 구체화하고 고정시키는 것을 목표로 한다. 선에 대한 학문적 지식은, 예를 들어 "선이란...."이라는 정의 안에 간직되어야 하는데, 이 때 마음은 선의 본질을 표현한다. 그러나 정의는 보편자에 관한 것이다. 그러므로 참된 지식은 보편자에 대한 지식이다. 특수한 헌법들은 변하지만 선의 개념은 변하지 않으며, 우리가 특수한 헌법들을 선에 관해서 판단하는 것은 바로 이 불변하는 개념에 관련해서다. 그러므로 지식의 대상이 될 수 있는 요건을 만족시키는 것은 보편자라는 결론이 나온다. 최고의 보편자에 대한 지식은 최고 종류의 지식일 것이며 반면에 특수자에 대한 "지식"은 최하위 종류의 "지식"일 것이다.
그러나 이 견해는 한편으로 진정한 지식과 다른 한편으로 "실재" 세계, 즉 특수자들로 이루어진 세계 사이의 건널 수 없는 간격을 의미하는 것은 아닌가? 그리고 만약 참된 지식이 보편자들에 대한 지식이라면, 이것은 결국 참된 지식은 추상적이며 "비실재적"인 것에 대한 지식이라는 말이 아닌가? 두 번째 질문과 관련해서 본 저자는 형상 또는 이데아에 대한 플라톤의 이설은 간단히 말해서 이렇다는 것을 지적하고자 한다. 보편적 개념은 객관적 내용이나 지시물을 결여한 추상적 형식이라는 것이 아니라, 참된 보편적 개념 하나 하나에 객관적인 실재가 상응한다는 것이다. 플라톤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비판이(플라톤은 개념들의 객관적인 실재를 실체로 생각했다는 것) 얼마나 정당화되는가는 그 자체로서 논의되어야 할 문제다. 그것이 정당화되든 그렇지 않든, 이데아들에 대한 플라톤 이론의 본질은 보편적 실재들이 "분리"되어 존재한다는 생각 속에서가 아니라, 보편적 실재들은 객관적인 지시물을 가지고 있다는 신념과, 보편적 개념들에 상응하는 실재들은 감관 지각 그 자체보다 더 상위라는 신념 속에서 찾아야 한다. 첫 번째 질문(진정한 지식과 "실재" 세계 사이의 간격)에 관해서, 우리는 특수자와 보편자 사이의 정확한 관계를 결정하는 것은 플라톤의 영속적인 난제들 가운데 하나였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우리가 이데아론을 존재론적 관점에서 다룰 때는, 이 질문으로 되돌아가야 한다.
2
플라톤의 긍정적인 인식설에서는 지식의 등급 또는 수준이 대상에 따라서 구별되고 있는데, 그 설은 『국가』에 나오는 유명한 글귀 속에 설명되어 있다. 그 글귀는 우리에게 선의 비유를 제공한다. 인간의 마음이 무지로부터 지식으로 발전해나가는 데는 두 개의 주요 영역이 있는데, 그것은 견해(doxa)의 영역과 지식(episteme)의 영역이다. 마음은 이 두 기능을 어떻게 구별하는가? 그 구별은 대상의 구별에 기초해 있다.견해는 영상에 관계하며 지식은 적어도 지적 직관의 형태로, 원물 혹은 원형 원질에 관계한다. 어떤 사람이 정의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받고 절대적 정의의 원리와 규범과 규준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정의의 불완전한 구현체들, 즉 보편적 이데아에 못 미치는 특수한 사례들, 예를 들어 특수한 한 사람의 행위나 특수한 한 헌법을 가리킨다면, 그의 마음 상태는 견해의 상태다. 그는 영상이나 복사물을 보고 그것을 원물로 오해하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 그가 정의 그 자체를 파악한다면, 즉 그가 영상으로부터 모든 특수한 사례들을 판단하는 준거인 형상, 이데아, 보편자로 뛰어오를 수 있다면, 그의 마음 상태는 지식의 상태며, 앎 도는 인식의 상태다. 그뿐아니라 마음의 한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 진보하는 것, 말하자면 개종하는 것도 가능하다. 그리고 어떤 사람이 전에 원물로 생각했던 것들이 실재로는 단지 영상들이나 복사물로, 즉 이데아적인 것의 불완전한 구현체들, 규범이나 표준의 불완전한 실현물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게 될 때, 즉 그가 어떤 방식으로 원물 그 자체를 파악하게 될 때, 그의 마음 상태는 더 이상 견해의 상태가 아니다. 즉, 그는 지식의 상태로 바뀌고 만 것이다.
그러나 도표상의 선이 단순하게 두 구역으로만 나뉘어지지는 않는다. 각 구역은 더 세분된다. 두 등급의 지식과 두 등급의 견해가 있다. 플라톤은 최하의 등급인 억측은 첫째로는 영상들이나 그림자들 그리고 둘째로는 물 속과 딱딱하고 부드럽고 밝은 물건 속에 반사된 것들과 유사한 모든 것들을 대상으로 한다고 말한다. 최소한 어떤 사람은 그림자나 물 속의 반사체를 원물로 오해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테네의 헌법이나 어떤 특수한 사람의 불완전한 정의 밖에 모르는 어떤 사람은 일반적으로 견해의 상태에 있다고 말한다. 만약 어떤 사람이 그럴 듯한 말과 추론의 세상이 정의롭고 올바르게 돌아가고 있다고 누군가를 설득한다면 그건 억측의 상태다. 그가 정의라고 생각하는 것은, 보편적형상에 비유한다면 그 자체가 영상에 불과한 것에 대한 그림자이거나 모방일 뿐이다. 그러나 아테네 법률의 정의나 정의로운 특수한 한 사람의 정의를 정의로 생각하는 사람의 마음 상태는 신념이다.
가령 특수한 실제의 말들이 보편자에 대한 불완전한 모방품들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신념의 상태에 있다. 그 사람은 말에 대한 지식은 가지고 있지 못하고 단지 견해만 가지고 있을 뿐이다. 외부의 자연을 진정한 실재라고 판단하고 비가시적 세계에 대한 비실재적 복사물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오로지 신념만을 가지고 있다. 그는 자신이 보고 있는 영상들이 실제 세계라고 생각(억측)하는 몽상가만큼 비참하지는 않지만 지식을 획득하지는 못했다. 실재적인 학문적 지식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국가』10권에서 플라톤은 예술가들은 진리로부터 3단계나 떨어져 있다고 말한다. 예를 들면, 인간에 대한 종적형상, 즉 그 종의 모든 개인들이 실현하고자 애쓴 이데아적인 전형이 있으며, 그 종적인 전형에 대한 복사물들이거나 모방품들이거나 또는 불완전한 실현물들인 특수한 개인들이 있다. 이제 화가가 와서 한 사람을 그리면, 그 그려진 사람은 모방의 모방이다. 그 그려진 사람을 실재의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억측의 상태에 있을 것이며 반면에 종적인 전형은 실재로 이해하지 못하고 자신이 보았거나 들었거나 읽었던 특수한 사람들만을 아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라도 신념의 상태에 있다. 그러나 이데아적인 사람, 즉 이데아적인 전형, 특수한 사람들이 그에 대한 불완전한 실현물들인 종적 현상을 이해하는 사람은 지성을 가지고 있다. 다시 말해 어떤 정의로운 사람은, 비록 불완전하게 하는 것이지만, 그가 행동하는 가운데 정의의 이데아를 모방하거나 구현할 수 있다. 그런데 비극 배우는 이 정의로운 사람을 무대 위에서 모방하기 시작하지만, 정의 그 자체에 대해서는 어떤 것도 알지 못한다. 그는 단순히 모방품을 모방하고 있다.
대상에 관해서는 지성의 대상들에 상응하며, 마음 상태에 대해서는 지식에 상응하는 도표의 선상 고위 구역은 일반적으로 눈에 보이는 것들이나 감각의 대상들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 즉 비가시계인 지성의 대상들과 연결된다. 지적 직관과 추론적 사고는 어떻게 다른가? 추론적 사고의 대상은 영혼이 이전 부분들의 모방품들의 도움을 받아 연구하도록 강요 받는 것인데, 영혼은 그 모방품을 영상으로 사용하여 가설들에서 출발하여 제1원리로 나아가지 않고 어느 한 결론으로 나아간다. 플라톤은 수학을 염두에 두고 있다. 엘르 들면, 기하학에서 마음은 가시적인 도형을 사용하여 가설들로부터 하나의 결론으로 나아간다. 기하학자는 삼각형 등을 알고 있는 것으로 가정하고 이 "자료들"을 전제들로서 받아들이고나서 한 가시적인 도형을 사용하여 결론으로 논증하는데, 그러나 이때 도형 자체에는 관심을 갖지 않는다고 플라톤은 말한다. 그러므로 기하학자들은 도형을 사용하기는 하지만, "그들은 실제로 사고의 눈으로만 볼 수 있는 대상들을 보려고 노력하고 있다."
혹자는 이런 종류의 수학적 대상들은 형상이나 원질의 하나로 헤아려질 것이며, 플라톤이 기하학자의 학문적 지식을 지적 직관 그 자체와 동일시했을거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다. 플라톤은 이를 분명히 거절했다. 플라톤은 중간자들, 즉 지식의 대상이지만 원질보다는 열등한 것, 따라서 추론적 사유의 대상이지만 지적 직관의 대상은 아닌 집합이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국가』의 6권 끝을 보면, 기하학자는 자신들의 대상에 관하여 이성이나 지적 직관을 획득하지 못했음이 매우 분명해진다. 그런데 그 이유는 그들이 자신들의 가설적 전제들 - "비록 이 대상들은 그것들을 제1원리와 관련하여 취하면, 순수 이성의 영역 안으로 들어오기는 하지만 - 위로 뛰어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 마지막 말들은 도표 선 상부의 두 부분들 사이의 구별이 대상의 구별뿐만 아니라 마음 상태의 구별로 간주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리고 오성이나 추론적 사고는 의견과 순수이성의 중간자임이 명백하게 진술되어 있다.
눈에비친햇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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