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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 Nietzsche(1844-1900)/비극의 탄생

비극의 탄생과 쇼펜하우어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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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의 신비와 비밀에 대한 탐구로서의 『비극의 탄생』- 『비극의 탄생』과 쇼펜하우어 사상

 

니체는 『비극의 탄생』재판에 붙인 서문  「자기비판의 시도」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이 책은 음악의 비밀에 참여하는 사람들을 위한 책으로서, 음악의 세례를 받고 공통의 드문 예술경험에 의해서 처음부터 맺어져 있는 사람들을 위한 '음악'이며 또한 예술에서 피를 함께 나눈 사람들을 식별하기 위한 인식표이다. 

 

이러한 인용문에서 암시되는 것처럼 니체의 『비극의 탄생』을 지배하고 있는 정조는 음악의 신비와 비밀에 대한 경이와 경탄이다. 니체는 그러한 신비와 비밀에 대한 철학적 반성을 통해서 인간과 세계의 본질을 파악하려고 한다. 인간은 도대체 어떠한 존재이기에 음악에 그렇게 감동할 수 있으며, 세계는 도대체 어떠한 것이기에 그렇게 음악에 감동할 수 있는 인간을 낳았는가? 니체는 『비극의 탄생』에서 쇼펜하우어의 사상과 개념도식에 크게 의거하면서 음악의 신비와 인간과 세계의 본질을 해명하려고 한다.

 

누구든  음악을 들으면서 그 신비로운 힘에 경이를 느낀 적이 있을 것이다. 음악은 어떤 때는 우리를 슬픔에, 어떤 때는 기쁨에, 어떤 때는 분노에, 어떤 때는 공포에, 어떤 때는 한없는 감사와 평온에 사로잡히게 한다. 슬픈 일이 없어도 슬픈 음악을 들으면 우리는 슬퍼지고, 경쾌한 음악을 들으면 마음이 가벼워진다. 그러나 음악은 슬픔이나 분노와 같은 부정적인 기분조차도 황홀한 것으로 변용하면서 우리를 도취시키는 힘을 갖는다. 예를 들어 차이콥스키 비창을 들을 때 우리는 슬픔도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을 느끼며 그 아름다움이 빚어내는 황홀경 속으로 빠져들게 된다. '슬픈 황홀경' 혹은 '슬픈 도취'라는 것은 논리적으로 해명하기 어려운 역설적인 것이지만 음악은 그러한 역설을 가능하게 한다. 

 

이러한 황홀경에 빠질 때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망각하면서 하나로 융합된다. 슬픈 음악이 흐를 때 사람들은 모두 슬픔에 사로잡히고, 경쾌한 음악이 흐를 때 사람들은 모두 함께 밝은 기분이 되는 것이다. 우리가 사는 일반적인 현실은 고위직 인사와 하위직 인간, 부자와 빈곤한 자, 사장과 노동자, 여성과 남성, 어른과 어린이, 백인과 흑인 등 수 많은 차이와 차별로 이루어진 세계이다. 사람들은 이러한 현실에서는 자신을 다른 사람들로부터 분리된 하나의 개체로 느끼며 자신의 생존과 우월한 지위의 확보를 위해서 투쟁한다. 쇼펜하우어에 따르면 이러한 세계에는 '개별화의 원리'가 지배하는 것이다. 이러한 개별화의 원리를 쇼펜하우어는 시간과 공간 그리고 근거율이라고 본다. 모든 것은 특정한 시간과 공간 속에 자리함으로써 다른 것과 구별되는 개체가 되고, 이러한 개체들은 근거와 근거지어진 것으로서 서로 연관되어 있다. 즉 그러한 개체들은 근거율에 의해서 지배되고 있다. 

 

그러나 음악이 흐를 때 우리는 이러한 개별화의 원리를 초극하면서 서로 간의 차이와 차별을 망각하고 하나가 된다. 월드컵의 응원가가 울려 퍼질 때 사람들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혼연일체가 되며, 응원가가 빚어 내는 격렬한 황홀경 속에 빠져든다. 심지어 사람들은 군악대의 음악소리를 들으면서 죽음의 공포를 극복하고 전우들과 하나가 되어 전쟁터로 달려갈 수도 있다. 우리는 보통 개별자들로 이루어진 이 현실 세계야말로 유일한 세계라고 생각하지만, 이러한 세계는 음악이 만들어 내는 이러한 혼융일체의 황홀경 속에서 덧없이 사라진다. 

 

따라서 우리는 개별화의 원리가 지배하는 경험적인 세계의 근저에 보다 근원적이고 심원한 어떤 것이 존재하는 것은 아닌가라고 추측해볼 수 있다. 쇼펜하우어는 그것을 개별화의 원리에 의해서 분열되기 이전의 세계의지라고 부른다. 쇼펜하우어는 개별화의 원리에 의해서 지배되는 경험적인 세계의 근저에는 오직 하나의 혼융일체의 세계의지만이 존재한다고 보았다. 이는 개별화의 원리인 시간과 공간 안에 있을 때만 어떤 것이 다른 것과 다를 수 있지만, 세계의지 자체는 시간과 공간 밖에 존재하기 때문에 단일하고 무차별적인 혼돈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음악이란 이러한 세계의지의 표현이다. 음악을 이렇게 세계의지의 표현으로 보는 쇼펜하우어의 생각은 음악을 우주의 언어로 보는 피타고라스와 상통하는 면이 있다.

 

이에 대해 개별화의 원리는 개념적인 언어와 연관되어 있다. 우리는 개념적인 언어를 통해서 사람들과 사물들을 분류하고 등급을 매긴다. 음악은 이러한 개념적인 언어로 번역될 수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역과 시대를 뛰어넘어 모든 사람들에게 이해될 수 있다. 일반적인 개념의 언어를 우리가 이해하기 위해서는 장기간에 걸친 언어훈련이 필요하지만 음악은 설령 다른 나라의 음악일지라도 우리를 순식간에 매료시킬 수 있다. 이점에서 음악은 우리가 본래는 하나로 연결되어 있음을 증명해 준다. 개념적인 언어가 서로 분리되어 있는 인간들의 두뇌에 호소할 뿐인 반면에, 음악은 근저에서는 서로 통일되어 있는 사람들의 가슴과 내면 전체를 파고든다. 개념적인 언어에 대해서 음악의 이러한 힘을 가질 수 있는 것은 개별화의 원리에 입각한 개념적인 언어가 존재의 핵심을 표현할 수 없는 반면에, 음악은 그러한 존재의 핵심인 세계의지를 표현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세계의 본질을 드러내는 것은 논리적인 지성에 입각한 학문이 아니고 음악의 리듬과 멜로디이다. 우리는 흔히 어떤 이론이 갖는 정교한 논리에 압도되어 그러한 논리적인 지성을 통해서만 진리에 도달할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이러한 사고방식은 세계가 논리적인 구조로 이미 구성되어 있다고 전제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과연 세계의 구조 자체가 그렇게 논리적인 성격을 갖고 있는지에 대해서 회의해 볼 수 있다. 외관상으로는 정치한 논리적 구조를 갖는 학문적 논의가 사실은 세계에 논리의 틀을 강요하는 것은 아닌지라고 우리는 회의할 수 있는 것이다. 

 

니체는 세계의 본질은 오히려 음악적인 선율에 가깝다고 보는 것이며, 따라서 세계의 본질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우리의 두뇌만이 아니라 우리의 온몸과 정서 전체를 동원해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 인간은 음악이 전달하는 세계이해를 개념적인 언어를 통해서 분명히 언표할 수는 없지만, 이러한 사태는 음악을 통해서 우리가 갖게 되는 세계 이해가 어떤 결함을 갖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세계이해를 담을 수 없는 우리의 개념적인 언어의 근본적인 한계를 시사하는 것이다. 논리적인 지성에 입각한 학문이 드러내는 세계가 차별과 구별이 지배하는 낮의 세계라면 음악이 드러내는 세계는 모든 것이 혼융일체가 된 밤과 심연의 세계이다. 인간은 다른 동물과 달리 개별화의 원리를 넘어서 이러한 세계의지와 하나가 될 수 있고, 그러한 세계의지의 소리를 음악을 통해서 들을 수 있다는 점에서 탁월한 존재이다. 이런 의미에서 레비스트로스는 자신의 저서 『신화학』에서 니체와 마찬가지로 이렇게 주장하고 있다. 

 

음악에는, 무엇보다도 멜로디의 본질에는 인간의 궁극적인 비밀을 풀 수 있는 열쇠가 들어 있다.

 

예술 중에서 오직 음악만이 개별화된 사물들의 근저에 있는 세계의지 자체를 표현한다. 음악은 형이상학적 의지의 음성이다. 그리고 이러한 세계의지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음악가나 서정시인이야말로 세계의 본질을 이해하는 진정한 형이상학자이다. 『비극의 탄생』을 쓸 당시의 니체는 음악의 신비에 빠져 있었으며 우리가 나중에 볼 것이지만 바그너의 음악이 개시한 세계와 인생의 깊이에 매료되어 있었다. 『비극의 탄생』을 쓰기 1년전인 1871년 니체는 친구 에르빈 로데(Erwin Rohde)에게 이렇게 편지를 쓰고 있다. 

 

음악으로 표현할 수 없는 모든 것에 대해서.... 나는 구열질과 혐오를 느기네, (바그너가 지휘한) 만하임 공연을 다녀온 후, 나는 밤새도록 이상스러울 정도로 일상적 현실에 대한 고양된 전율을 느끼네. 왜냐하면 현실적인 모든 것이 더 이상 사실로 느껴지지 않고 허깨비처럼 보이기 때문이네.

 

니체는 단순히 음악을 듣고 감상하는 것을 넘어서 그 자신이 자신과 세상을 잊어버리고 몇 시간이든 피아노를 즉흥적으로 연주할 수 있었다. 니체는 이렇게 끊임없이 계속되는 멜로디의 흐름이야말로 개별화의 원리에 지배되는 경험적인 세계의 근저에서 요동치고 물결치는 세계의지의 흐름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는 이미 시작된 것처럼 슬그머니 시작해 아직 끝나지 않은 것처럼 끝나는 바그너의 음악의 끊임없는 멜로디가 바로 이러한 세계의지의 진정한 반영이라고 보았다. 음악의 입장에서 볼 때 개별적인 사물들이 끊임없이 부침하는 세상사는 세계의지의 물결침이다. 음악은 우리를 세계의 심장부로 인도하면서 현상세계를 이러한 심장부로부터 경험하고 보게 한다. 이러한 음악 속에서 죽음이 극복된다. 이러한 도취경을 니체는 디오니소스적 황홀경이라고 부른다. 

 

우리는 이상에서 음악과 예술에 대한 니체의 견해에 쇼펜하우어의 형이상학과 미학이 얼마나 크게 녹아들어가 있는지를 보았다. 니체는 무엇보다도 삶의 본질은 논리적으로 해명될 수 없고 도덕적인 것으로도 이해할 수 없는 의지라는 쇼펜하우어의 사상을 받아들인다. 1874년에 쓴 글에서 니체는 쇼펜하우어를 천재라고 부른다. 천재의 특징은 삶에 새로운 가치와 척도를 부여하는 사람이다. 쇼펜하우어는 낙관주의적인 계몽주의가 지배하는 당시의 시대사조와 기독교에 대해서 영웅적으로 항거했다. 그는 천박한 낙관주의 대신에 염세주의를 설파했으며, 세계는 인격신에 의해서 지배된다는 기독교의 주장에 대해서 세계를 지배하는 것은 맹목적인 의지라고 주장했다. 무엇보다도 니체는 인간과 세계의 심연을 드러내려고 하는 쇼펜하우어의 철학이, 기계적으로 노동하면서 노동이 끝난 후에는 찰나적인 쾌락과 안일만을 추구하는 그 시대 인간들의 천박하고 동물적인 삶을 극복하는 데 기여할 수 있는 새로운 인간상을 제시한다고 보았다.

 

음악의 심원한 의의에 대한 쇼펜하우어의 통찰을 받아들이면서 니체는 그리스 비극의 기원을 디오니소스 축제 당시의 디오니소스 찬가에서 찾는다. 그런데 그리스 비극도 분명히 연극의 일종인데 어떻게 그것이 음악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인가? 이렇게 의문을 갖는 것은 우리가 흔히 연극을 흥미있는 줄거리를 가지고 배우들이 무대에서 연기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연극에서 음악이 어떤 본질적인 역할을 한다고 생각하지 않으며, 역할을 하더라도 극히 부수적인 역할만을 한다고 생각한다. 연극에서 음악은 연기나 스토리를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한 '배경음악'에 지나지 않는다고 우리는 생각하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 니체는 정반대로 생각한다. 그는 음악과 멜로디가 본질이고 스토리나 연기는 그러한 멜로디가 형상화되는 하나의 방식일뿐이라고 보는 것이다. 음악이 사라진 영화나 연극을 생각해보라. 그것은 전혀 우리를 잡아끄는 힘을 갖지 못하고 우리를 화면이나 무대의 세계에 몰입하게 하는 힘을 갖지 못할 것이다. 우리를 공포에 빠뜨리는 것은 무서운 장면보다는 무서운 음악이 아닌가? 니체의 이런 생각 역시 쇼펜하우어의 다음과 같은 생각과 일맥상통하고 있다.

 

음악은 말로 표현되는 감정이나 오페라에서 수행되는 연기에 관해 지극히 심오하고 궁극적이고 비밀스런 정보를 제공한다. 음악은 자신들의 진실하고도 진정한 본성을 표현하며, 무대 위에서 그 몸둥이와 외피가 제시하고 있는 사건들의 가장 내면적인 영혼을 우리에게 소개한다.

 

무대에서는 연기자들의 몸짓과 언어가 주가 되는 것 같지만 이러한 몸짓과 언어를 지배하는 것은 음악이다. 니체에 따르면 이러한 몸짓과 언어는  음악이라는 바다가 일으키는 파도들이다. 이런 의미에서 니체는 '음악정신으로부터의 비극의 탄생'에 대해 말하고 있다. 비극은 디오니소스 축제 당시 디오니소스의 죽음을 슬퍼하고 그의 부활을 기뻐하는 합창 속에서 태어났다고 보는 것이다. 디오니소스 축제에서 사람들은 자신을 잊어버리고 도취에 빠진다. 이러한 도취와 광란이 고대 그리스의 비극을 생성시킨 원인이다.

 

이러한 그리스 비극과 자신의 시대의 예술을 비교하면서 니체는 자신의 시대의 예술은 이러한 심원한 근원에 뿌리를 내리고 있지 못하고 일상의 세계를 모방할 뿐이라고 보았다. 음악에서도 경험적인 사실을 모방하는 회화적인 음악이 지배하게 되었고, 이에 따라 음악은 사람들을 사로잡고 전율시키면서 변화시키는 힘을 상실해 버렸다. 음악은 인간과 세계를 변화시키는 창조적인 힘을 상실한 것이다. 그것은 더 이상 경험적인 세계 이면의 세계의지 자체로부터 길어내어진 것이 아니다.

 

 

눈에비친햇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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