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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 Nietzsche(1844-1900)/비극의 탄생

비극의 탄생 -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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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격려와 고무의 어조를 멈추고 관조자에 어울리는 기분으로 되돌아가기로 하자. 반복해서 말하지만 그렇게 기적같이 갑작스럽게 비극이 깨어났다는 사실이 어떤 민족의 가장 내적인생의 토대에 대해서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오로지 그리스인들로부터만 배울 수 있다. 비극적 비밀제의의 이 민족이야말로 페르시아 전쟁을 수행했던 민족이다. 페르시아 전쟁을 수행한 이 민족은 또한 비극을 필수적인 건강 회복의 음료로서 필요로 했다. 이 민족이 몇 세대에 걸쳐서 디오니소스적 다이몬의 극심한 경련에 의해서 가장 깊은 내부까지 뒤흔들려진 후에도 이 민족에게서 가장 단순한 정치적 감정, 가장 자연스런 애향심, 근원적이고 남성적인 투쟁심이 아직도 그처럼 한결같이 강력하게 발휘될 것이라고 누가 추측했을 것인가? 그러나 디오니소스적 흥분상태가 심각하게 번질 때마다 언제나 다음과 같은 사실이 관찰된다. 즉 (디오니소스적 흥분상태가 번지면서) 개인의 사슬에서 풀려나 디오니소스적 해방이 일어나게 되면 정치에 대한 무관심 아니 정치에 대한 적개심으로까지 발전하는, 정치적 본능의 침해가 무엇보다도 먼저 감지된다는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국가를 형성하는 아폴론이 개별화 원리의 수호신이며 국가와 향토에는 개인적인 인격을 인정하지 않고서는 존재할 수 없다는 것도 확실하다. 어떤 민족이든 디오니소스적 황홀상태에서 출발하면 귀착점은 하나밖에 없다. 이 귀착점은 인도의 불교이다. 불교는 무에의 동경을 견뎌내기 위해서 시간과 공간과 개체를 초월한 저 희귀한 황홀경을 필요로 한다. 이러한 황홀경은 다시금 중간상태의 형언할 수 없는 불쾌감을 어떤 관념에 의해서 극복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는 하나의 철학을 요구한다. 이와는 반대로 정치적 충동의 무조건적 긍정으로부터 출발한 민족은 필연적으로 극단적인 세속화의 길로 빠져든다. 이 길의 가장 대규모적이고 가장 가공할 표현이 바로 로마제국이다.

 

인도와 로마 사이에 세워져 유혹적인 선택을 강요받던 그리스인들은 고전적으로 순수하게 제3의 형식을 고안해 내는 데 성공했다. 이 형식은 그리스인들 자신에 의해서는 오랫동안 사용되지 않았지만 바로 그 때문에 불멸의 것이 되었다. 신들의 총아가 요절한다는 것은 모든 사물에도 일반적으로 타당하다. 그러나 신들의 총아가 신들과 함께 사후에 영생하는 것 또한 확실한 사실이다. 어떻든 더할 나위 없이 고귀한 것에 대해서는 가죽처럼 질기고 오래가는 특성을 요구해서는 안 된다. 질긴 지속성은 예를 들면 로마의 국민적 충동에 고유한 것이지만, 그것은 완전성이 갖는 필연적인 특성은 아니다. 그리스인들은 그들의 위대한 시기 동안에 디오니소스적 충동과 정치적 충동이 유난히 강력했음에도 불구하고 황홀한 명상에 탐닉하거나 세속적인 권력과 세속적인 명예에 대한 불타는 갈망에 사로잡혀서 자신을 소진하지 않고, 활기를 불어넣어 주면서도 동시에 관조적인 기분으로 이끄는 기가 막힌 포도주가 갖는 것과 같은 저 훌륭한 혼합을 성취하였다. 도대체 어떠한 약제를 사용했기에 그리스인들은 그렇게 할 수 있었을까? 이 경우 우리는 민족생활 전체를 자극하고 정화하고 내면을 발산시키는 비극의 거대한 힘을 상기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비극이 모든 예방적인 치료제의 정수로서, 즉 가장 강력하고 그 자체로서는 극히 커다란 화를 잉태하고 있는 두 가지 민족성을 매개하는 자로서 그리스인들에게 나타난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면전에 나타날 때 비로소 비극이 갖는 최고의 가치를 감지하게 될 것이다. 

 

비극은 음악의 최고의 황홀경을 자신 속에 흡수하여 그리스인들의 경우에서뿐 아니라 우리의 경우에도 음악을 완성시킨다. 그러나 비극은 이때 비극적 신화와 비극적 주인공을 음악 곁에 세운다. 이 비극적 주인공은 강력한 거인처럼 디오니소스적 세계 전체를 그 등 뒤에 짊어지고 우리를 디오니소스적 세계라는 무거운 짐으로부터 해방시킨다. 다른 한편으로 비극은 그와 동일한 비극적 신화를 통하여 비극적 주인공이라는 인물의 형태로 개별적인 생존에 대한 탐욕스런 충동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하며, 경고하는 손으로 다른 삶과 보다 높은 기쁨을 상기시킨다. 투쟁하는 주인공은 자신의 승리에 의해서가 아니라 몰락에 의해서 이러한 기쁨을 예감하고 준비한다. 비극은 음악의 보편적인 효력과 디오니소스적인 감수성을 지닌 청중 사이에 고귀한 비유인 신화를 놓고, 청중들에게 음악이 신화라는 조형적인 세계에 생기를 불어넣는 최고의 표현 수단에 불과한 것 같은 착각을 불러 일으킨다. 이러한 고귀한 착각의 도움으로 비극은 이제 팔다리를 놀려서 주신찬가에 맞추어 춤을 추게 되고, 아무런 두려움 없이 광란도취의 자유로운 느낌에 자신을 내맡길 수 있게 된다. 비극이 만일 이러한 착각의 도움을 빌리지 않는다면, 음악 그 자체만으로는 감히 이 광란도취의 자유로운 느낌에 젖을 수 없을 것이다. 신화는 우리를 음악으로부터 보호해 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음악에 최고의 자유를 준다. 음악은 이렇게 최고의 자유를 부여받은 것에 대한 답례로 비극적 신화에게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면서 강한 설득력을 갖는 형이상학적 의미를 제공한다. 음악만이 이러한 도움을 줄 수 있는 것이며, 음악의 도움 없이 말과 형상은 이러한 형이상학적 의미를 획득할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특히 몰락과 부정을 통해서 도달하는 최고의 환희에 대한 저 확실한 예감이 음악을 통해서 관객을 엄습하게 된다. 그 결과 관객은 사물의 가장 깊은 심연이 마치 자신에게 분명하게 말을 걸어오고 자신은 그 말을 듣고 있는 것처럼 생각하게 된다.

 

이상의 서술에 의해서 아마도 나는 이러한 어려운 관념을 소수의 독자만이 이해할 수 있는 잠정적인 방식으로 표현했을 뿐이다. 따라서 여기서 나는 독자 여러분에게 이러한 관념을 이해하도록 다시 한 번 시도할 것을 부탁하지 않을 수 없으며, 나와 독자에게 공통된 경험의 한 실례에 의거해서 그러한 보편적인 명제를 인식시키기 위한 준비를 하도록 간청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예를 고찰함에 있어 나는 음악을 더욱 가깝게 느끼기 위해서 무대에 전개되는 사건의 형상, 등장인물의 말과 정열의 도움을 받는 사람들을 상대로 하고 싶지는 않다. 왜냐하면 이런 사람들은 모두 음악을 모국어로 갖지 않으며, 형상과 말과 정열의 도움을 받는다고 해도 음악 이해의 입구 이상으로 들어갈 수 없으며 더군다나 음악의 가장 내밀한 성소는 손을 대는 것조차 허용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들 중의 많은 사람들이 게르비누스처럼 음악 이해의 길에서 입구에조차 들어가지 못하는 형편이다.  내가 상대로 하는 사람들은 음악과 직접적인 혈연관계를 갖고 있고 말하자면 음악 속에서 어머니의 품을 발견하며, 음악과의 무의식적인 관계를 통해서만 사물들과 관계를 맺는 사람들이다. 이러한 진정한 음악가들에게 나는 묻고 싶다.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제3막을 형상과 말의 도움을 빌리지 않고 오직 거대한 교향곡의 악장으로서만 지각하며 영혼의 모든 날개를 경련하며 펼치면서도 숨을 거두지 않는 사람이 있다고 상상할 수 있는가라고. 여기서처럼 세계의지의 심장에 자기의 귀를 대고서, 이 심장으로부터 광포한 생존욕이 때로는 격렬한 흐름이 되고 때로는 잔잔히 흐르는 시냇물이 되면서 세계의 모든 혈관 속으로 흘러들어가는 것을 느끼는 사람, 이 사람은 순식간에 산산이 부서지지 않을까? 그는 인간이라는 개체의 깨지기 쉬운 유리 껍데기를 둘러쓰고서 '세계의 밤의 광활한 공간'에서 들려오는 수많은 환호성과 한탄의 메아리를 견뎌내야 한다. 그는 형이상학이라는 목자들의 윤무를 보면서 자신의 근원적 고향으로 도피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트리스탄과 이졸데>라는 작품을 전체로서 개체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고서 감상할 수 있다면, 그리고 그러한 음악의 창조를 창조자를 파괴하지 않고서 이룰 수 있다면, 우리는 이러한 모순의 해결을 어디서 얻을 수 있는가?

 

여기에서 우리는 최고의 음악적 흥분과 저 음악 사이에 비극적 신화와 비극적 영웅이 끼어들게 된다. 이들은 근본적으로, 음악만이 직접적으로 말해 줄 수 있는 가장 보편적인 사실들에 대한 비유일 뿐이다. 그러나 이제 우리가 순수한 디오니소스적 존재로서 느낄 경우에 신화는 우리의 주의를 끌지 못한 채 아무런 영향력 없이 우리 옆에 서 있을 뿐이며, 우리가 '사물 이전의 보편'의 메아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을 한순간에 방해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 아폴론적 힘이 환희에 찬 착각이라는 향유를 들고 나타나 거의 산산이 해체된 개체를 재건하고자 한다. 갑자기 우리는, 꼼짝도 않고 서서 자신에게 "옛 노래, 왜 이것이 나를 깨울까?"라고 중얼거리는 트리스탄만을 보고 있다고 믿게 된다. 그리고 이전에는 우리에게 존재의 중심에서 울려 나오는 허무한 탄식처럼 들리던 소리들이 이제는 얼마나 "바다가 황량하고 공허한가"만을 우리에게 알려주려고 할 뿐이다. 그리고 우리가 그 전에는 모든 감정이 발작적으로 팽창하면서 자신이 숨도 못 쉬고 소멸되어 간다고 생각했고 우리를 현세의 삶에 묶어 두는 것도 그리 많지 않았다고 한다면, 이제 우리는 치명적인 상처를 입었지만 죽지는 않는 영웅이 절망에 찬 목소리로 "그리워라! 그리워라! 죽음에 임해서도 그리워라! 그리워서 죽을 수 없네"라고 소리치는 것을 보게 된다. 그리고 전에는 너무도 크고 너무도 많은 격렬한 고통이 지나간 후에 들려오는 호른의 소리가 마치 최고의 고통처럼 우리의 가슴을 갈기갈기 찢어 놓았는데, 이제는 우리와 이 (호른 소리의) '개가 자체' 사이에 이졸데가 타고 오는 배를 바라보면서 환호하는 쿠르베날이 끼어든다. (영웅에 대한) 동정심이 아무리 강력하게 우리의 폐부를 파고들더라도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우리를 세계의 근원적 고통에서 구해 준다. 이는 신화의 비유적 형상이 우리를 최고의 세계이념에 대한 직접적 관조로부터 구해주고, 우리를 무의식적 의지의 막힘없는 분출로부터 구원해 주는 것과 같다. 저 장려한 아폴론적 착각에 의해서 우리에게는 소리의 나라가 조형의 나라처럼 우리에게 걸어오는 것으로 여겨지고, 그 중에서도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운명만이 마치 가장 섬세하고 표현력 있는 소재로 형성되고 조형적으로 새겨진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이렇게 아폴론적인 것은 우리를 디오니소스적인 보편성으로부터 떼어 놓고 여러 개체들을 매료시킨다. 아폴론적인 것을 통해서 우리는 불가피하게 이 개체들에 동정심을 갖게 된다. 그리고 아폴론적인 것은 이러한 개체들을 통해서 위대하고 숭고한 형식을 맛보고자 하는 우리의 미의식을 만족시킨다. 그것은 삶의 형상들을 이끌면서 우리 옆을 지나가고 이것들 속에 포함되어 있는 삶의 핵심을 사상적으로 파악하도록 우리를 자극한다.

 

 

눈에비친햇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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