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분법의 가상적 성격을 말한 이후 생성과 존재의 일치를 말하는 일원론을 가지고 생성의 무죄를 입증하기 전까지 걸었던 '기묘한' 길들 중의 하나로 니체는 현존재에 대한 에술적 정당화를 든다. 현존재에 대한 예술적 정당화는 니체가 처녀작인 『비극의탄생』에서 실천적 염세주의를 거부하기 위해 수행하는 프로그램으로, 삶을 비도적적으로 근거짓고자 하는 데에 중점을 둔다. 생성의 세계를 고통스럽고, 추하고, 불합리한 것으로, 따라서 무의미한 것으로 여기는 인간들은 그들을 구제해 줄 어떤 것을 필요로 한다. 젊은 시절의 니체는 이 어떤 것이 인간의 예술적 능력이라고 이야기한다. 예술적 능력을 가지고 인간은 변화하는 세계를 고정시켜서, 부정적으로 다가오는 세계를 '아름답게' 만든다. 인간의 삶은 바로 이러한 인간의 예술적 능력 덕분에 감당할 수 있게 된다. 예술적 능력은 인간을 삶의 부정적인 면에서 눈을 돌리게 만들고, 절망에서 야기되는 죽음의 가능성으로부터 구출하며, 더불어 인간에게 삶의 기쁨을 느끼게 한다. 그래서 인간 삶과 세계는 단지 예술적 현상으로서만 정당화될 수 있다. 여기서 예술가로서의 인간은 스스로를 의미의 창조자로 인정한다. 하지만 이러한 인간은 여전히 생성과 고통에 대해 부정적 시각을 갖고 있다.
니체는 늦어도 1881년, 즉 그에게 '영원 회귀'라는 사유가 떠오르는 때에 인간 삶과 세계에 대한 예술적 정당화 프로그램을 포기한다. 그의 철학적 주제는 삶과 세계에 대한 정당화가 아니라, 오히려 삶과 세계를 긍정할 수 있는 가능성 제시가 된다. 왜 니체가 자신의 옛 사유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는지는 그의 작품에 단편적으로만 서술되어 있는데, 그 내용들은 다음과 같은 하나의 이유로 종합해 볼 수 있다. 즉 인간의 '예술적 능력'이란 사실 '거짓에 의해 실체를 폭행'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주장은 다음과 같은 숨겨진 사유에 힘입고 있다. 즉 어떤 것에 대한 정당화나 근거지음이 요구될 경우, 필연적으로 그 정당화나 근거지음은 일반적으로 인정되는 개념이나 하나의 원리를 필요로 한다. 그렇다면 더 이상 예술적 체험은 필요하지 않고, 사변적 태도가 필요하게 된다. 사변적 태도는 더 이상 예술적 행위가 아니라, 모든 것을 예술로 설명하고자 하는 우리들의 형이상학적 태도인 것이다. 달리 말하면 예술은, 모든 것을 포괄하는 실재에 관한 어떤 한 가지 해석을 제시하려는 형이상학적 태도에서 어떤 마지막 근거나 마지막 원리로 상정되는 것이다. 이 마지막 원리는 더 이상은 경험적인 접근 방식으로는 도달 할 수 없는 어떤 것이기에, 만일 예술이 이 원리의 자격을 누린다면 활동으로서의 예술은 관념으로서의 예술로 바뀌어버린다. 니체가 세계와 인간에 대한 예술적 정당화를 '에술가 - 형이상학'이라고 부르는 이유를 바로 여기서 찾을 수 있다. 여기서 인간이 예술적 능력을 가지고 누리는 성공은 단지 '예술가적 승리'이고 그것을 통한 구제는 진정한 의미로서의 구제가 아니라, 단지 '가상적 구제'일 뿐이다. 진정한 의미의 구제는, 니체가 생성으로서의 실재에 대한 무조건적인 긍정 가능성 제시를 목표로 하는 후기 철학에서, 예술적 능력이 우리를 속이는, 아름다운 환상으로서의 가상의 산출을 넘어서는 개념적인 해석 작용으로 이해될 때에 비로소 이루어진다. 니체 자신은 위의 내용을 짤막하게 다음처럼 표현한다.
단지 예술적으로만 세계가 정당화된다. ... 삶의 행복은 삶의 실재성을 파괴하는 데에서, 아름답게 드러나는 현상에서, 환상의 염세주의적 파괴에서만 가능하다. (그러나) 저 아름다운 가상의 파괴에서 (비로소) 디오니소스적 행복이 절정에 이르게 된다.
눈에비친햇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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