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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 Nietzsche(1844-1900)/비극의 탄생

비극의 탄생 - 1 꿈과 도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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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예술의 발전은 아폴론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의 이중성과 결부되어 있다. 이러한 사실은 생식이 지속적으로 투쟁하면서 단지 화합하는 남녀 양성에 의존하는 것과 유사하다. 우리가 이러한 사실을 논리적으로 통찰할 뿐 아니라 직접적으로 확실하게 직관하게 된다면 미학에 큰 소득이 될 것이다. 아폴론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이라는 위의 명칭들은 우리는 그리스인들에게서 빌렸다. 그리스인들은 자신들의 예술관의 심오하고 비밀스런 가르침을 개념을 통해서는 아니더라도 자신들이 신봉하는 신들의 세계에 대한 극히 명료한 형상들을 통해서 통찰력 있는 사람들에게 알려주고 있다. 그리스 세계에서는 조형 예술가의 예술인 아폴론적인 예술과 디오니소스의 예술인 비조형적인 음악예술이 기원과 목적이란 점에서 크게 대립하고 있다는 우리의 인식은 그리스인들이 신봉했던 두 예술신인 아폴론과 디오니소스에 결부되어 있다. 서로 성격을 전혀 달리하는 이 두 종의 충동들은 대체로 공공연히 대립하면서 서로가 항상 새롭고 보다 힘 있는 탄생물들을 낳도록 자극하면서 평행선을 이루며 나아간다. 이러한 탄생물들 속에서 저 대립의 투쟁은 영원히 계속되며, '예술'이라는 공통의 단어가 이러한 대립을 단지 외견상으로만 연결시켜 줄 뿐이다. 그 두 충동들은 그리스적인 '의지'의 어떤 형이상학적인 기적을 통해서 결국에는 서로 짝을 맺게 되며, 이러한 결혼을 통해서 최종적으로 아폴론적이면서도 디오니소스적이기도 한 아티카 비극 작품이 산출되는 것이다. 

 

그 두 충동을 보다 잘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그것들을 우선 과 도취라는 서로 분리된 예술세계로서 생각해 보자. 이 두 생리학적 현상들 사이에는 아폴론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 사이의 대립과 같은 대립이 발견된다. 루크레티우스(Lucretius)의 생각에 의하면, 인간의 영혼 앞에 신들의 장엄한 형상이 나타났던 것은 꿈 속에서였다. 위대한 조형 예술가는 꿈 속에서 초인적인 존재들의 매혹적인 몸을 보았다. 그리고 그리스 시인은 시적인 창조의 비밀에 대한 질문을 받는다면 마찬가지로 꿈을 상기하면서 한스 작스(Hans Sachs)가 Meister singer란 노래에서 읊고 있는 것과 유사한 가르침을 주었을 것이다. 

 

친구여, 자신의 꿈을 해석하여 기록하는 것,

바로 그것이 시인의 일이다.

맹세코 말하지만, 인간의 가장 참된 생각은

꿈 속에서 나타난다.

모든 문학과 시는

참된 꿈의 해석에 지나지 않는다. 

 

인간은 꿈의 세계를 산출한다는 점에서 완전한 예술가이다. 그리고 이러한 꿈의 세계의 아름다운 가상이야말로 모든 조형예술의 전제이며, 우리가 나중에 보게 될 것처럼 시문학의 중요한 절반을 차지하는 것(서사시)의 전제조건이기도 하다. (꿈 속에서) 우리는 형상을 직접적으로 이해하면서 즐기며 모든 형태들이 우리에게 말을 걸어온다. 거기에는 중요하지 않은 것과 필요하지 않은 것은 하나도 없다. 그러나 이러한 꿈의 현실에서 나타나는 최고의 삶에서도 우리는 그것이 가상이라고 어렴풋하게 느낀다. 적어도 나의 경험은 그렇다. 이러한 경험이 자주 일어난다는 것, 아니 그것이 정상이라는 사실을 입증하기 위해서 나는 많은 증거와 시인들의 말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심지어 철학적인 인간은 우리가 그 안에서 살아가고 존재하는 이 현실의 이면에는 또 하나의 완전히 다른 제2의 현실이 숨겨져 있으며, 따라서 우리가 그 속에서 살고 있는 이 현실조차도 하나의 가상이라는 예감을 갖고 있다. 그리고 쇼펜하우어는 때때로 인간과 사물들을 한갓 환영이나 꿈 속의 형상으로 볼 수 있는 재능을 철학적 능력의 특징으로 간주하고 있다. 예술적으로 예민한 감각을 갖는 사람은 철학자가 실제의 현실을 대하는 것과 동일한 방식으로 꿈의 현실을 대한다. 그는 꿈의 현실을 면밀하게 그리고 즐거운 마음으로 주시한다. (꿈 속의) 이러한 사건들에 의거해서 삶의 훈련을 하기 때문이다. 그가 완전한 분별력을 지니고 자신의 꿈 속에서 경험하는 것은 결코 유쾌하고 즐거운 형상들만은 아니다. 심각한 것, 음울한 것, 암담한 것, 슬픈 것, 뜻밖의 장애, 우연의 조롱, 불안한 기대, 간단히 말해서 삶의 '신곡(神曲)' 전체가 지옥편과 함께 그의 곁을 스쳐 지나가는 것이다. 물론 그것은 그림자처럼 스쳐지나가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는 이러한 장면들 속에서 함께 살고 함께 괴로워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가상이라는 어렴풋한 느낌이 존재한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은 나처럼 꿈 속에서 위험이나 공포에 직면했을 때 용기를 내어 '이것은 꿈이다! 이 꿈을 더 꾸어보자!"라고 외치면서 위험과 공포를 이겨낸 적이 있음을 기억할 것이다. 나는 사흘 밤 동안, 아니 그 이상 동안 하나의 꿈을 그 줄거리를 계속 이어 가면서 꿀 수 있었던 사람들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도 있다. 이와 같은 사실은 우리의 가장 깊은 본질, 우리 모두의 공통된 기반이 꿈을 꿀 때 필연적으로 깊은 쾌감과 기쁨을 느낀다는 것을 입중하는 것이다. 

 

꿈의 경험에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기쁨을 그리스인들도 아폴론 신이라는 형상 속에 표현했다. 모든 조형력의 신인 아폴론은 예언의 신이기도 하다. 어원에 따르면 '빛나는 자', 빛의 신을 의미하는 그는 내면의 환상세계의 아름다운 가상까지도 지배한다. 대낮의 현실이 불완전하게만 이해되는 것에 반해 내면의 환상세계는 보다 높은 진리와 완전성을 갖는다. (내면의 환상세계가 갖는) 이러한 진리와 완전성 그리고 잠과 꿈을 통해 치유하고 도와주는 자연에 대한 깊은 의식은 예언의 능력에 대한 상징적 유사물(das symbolische Analogon)이자 삶을 가능하게 하고 가치 있게 만드는 예술에 대한 상징적 유사물이기도 하다. 그러나 꿈 속의 형상이 병적으로 나타나지 않기 위해서는 넘어서는 안 되는 저 섬세하고 미묘한 선도 아폴론의 형상에 결여되어서는 안 된다. 그렇지 않고 꿈 속의 형상이 저 섬세한 선을 넘을 경우에 가상은 조야한 현실로 나타나면서 우리를 실망시킬 것이다. 저 절도 있는 한정, 광포한 격정으로부터의 자유, 조형의 신의 저 지혜에 넘치는 평정이 아폴론의 형상에서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의 눈은 자신의 기원에 걸맞게 '태양과 같아야만 한다'. 아폴론이 성난 눈으로 불쾌하게 바라볼 경우에도 신성한 아름다운 가상이 그에게 서리어 있는 것이다. 따라서 약간 벗어나긴 하지만, 쇼펜하우어가 마야의 베일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들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이 아폴론에 대해서도 타당할 것이다. "태산 같은 파도를 올렸다 내리면서 사방으로 끝없이 펼쳐진 채 포효하는 광란의 바다 위에 뱃사람 하나가 자신이 탄 보잘 것 없는 조각배를 믿고 의지하면서 그것 안에 앉아 있는 것처럼, 고통의 세계 한 가운데에 인간 개개인은 개별화의 원리를 믿고 의지하면서 고요히 앉아 있다." 그 원리에 사로잡혀 있는 자가 그것을 굳건히 신뢰하면서 고요히 앉아 있는 자세가 아폴론의 형상에 가장 숭고하게 표현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들은 아폴론을 개별화의 원리를 상징하는 장려한 신상이라고까지 불러도 좋을 것이다. '가상'의 쾌감과 지혜 전체가 그것의 아름다움과 함께 그의 태도와 시선을 통해 우리에게 말을 거는 것이다. 

 

같은 곳에서 쇼펜하우어는 근거율이 자신의 여러 형성물들 중 어느 하나에게 어쩔 수 없이 예외를 허용해야 하는 것처럼 보여서 사람들이 갑자기 현상의 인식 형식에 대한 신뢰를 상실할 때 그들을 엄습하게 되는 엄청난 전율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개별화의 원리가 이런 식으로 부서지면, 인간의, 아니 자연의 가장 깊은 근저로부터의 환희에 찬 황홀감이 용솟음친다. 앞에서 언급한 전율에 이러한 황홀감을 덧붙일 경우에 우리는 디오니소스적인 것의 본질을 엿볼 수 있다. 이러한 디오니소스적인 것의 본질은 도취라는 현상을 실마리로 하여 가장 쉽게 설명할 수 있다. 모든 원시인이나 원시 민족이 자신들의 찬가에서 말하는 마취성 음료의 작용을 통해서 혹은 자연 전체를 환희로 채우면서 스며드는 강력한 봄기운을 통해서 저 디오니소스적인 흥분을 일깨운다. 이 흥분이 고조되면서 주체적인 것은 완전한 자기망각 속으로 사라져 버린다. 중세 시대의 독일에서도 동일한 디오니소스적인 강렬한 힘에 사로잡혀서 갈수록 늘어나는 군중들이 노래하고 춤추면서 이 마을에서 저 마을로 휩쓸려 다녔다. 성요한제나 성화이트제의 난무하는 이 군중에서 우리는 그리스인의 바쿠스제 합창단의 옛 모습을 엿볼 수 있지만, 이것은 소아시아에 이미 앞선 역사가 있으며 바빌론과 광란 상태에 빠졌던(orgastisch) 사카이엔 족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다. 경험의 결여나 둔감 때문에 자신은 건강하다고 생각하면서 그러한 현상들을 '민중들의 병'으로 치부하고 조소하고 경멸하면서 그것들을 외면하는 사람들이 있다. 물론 이 불쌍한 사람들은 디오니소스적인 열광자들의 벌겋게 불타는 생명이 그들 곁을 요란하게 지나갈 때 자신들이 자랑하는 '건강성'이 얼마나 시체처럼 보이고 유령처럼 보이는지를 느끼지 못한다. 

 

디오니소스적인 것의 마력 아래서는 인간과 인간의 결합만이 다시 회복되는 것은 아니다. 소외되고 적대시되어 왔거나 억압되어 온 자연도 자신의 잃어버린 탕아인 인간과 다시 화해의 축제를 벌이게 된다. 대지는 자신의 선물들을 보내고 암벽과 사막의 맹수들은 온순하게 다가온다. 디오니소스의 수레는 꽃과 화환으로 뒤덮이고 그 멍에를 지고 표범과 호랑이가 걸어간다. 베토벤의 환희의 송가(An die Freude)를 한폭의 그림으로 바꾸어 보라. 수백만의 사람들이 전율하면서 먼지 속에 엎드릴 때 위축되지 말고 자신의 상상력을 펼쳐 보라. 그러면 디오니소스적인 것의 본질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이제 노예는 자유민이다. 이제 곤궁과 자의, '뻔뻔스런 작태', 인간들 사이에 심어놓은 완강하고 적대적인 모든 제한이 파괴된다. 세계의 조화라는 복음 속에서 사람들은 이제 이웃과 결합하고 화해하며 융합하고 있다고 느낄 뿐 아니라, 마야의 베일이 갈기갈기 찢어져 신비로운 근원적 일자(das Ur-Eine) 앞에 펄럭이고 있는 것처럼 이웃과 하나고 되고 있다고 느끼는 것이다. 노래하고 춤추면서 인간은 자신이 보다 높은 공동체의 일원임을 표명한다. 그는 걷는 것도 말하는 것도 잊어버리고 춤을 추면서 허공으로 날아오르려 한다. 그가 마법에 걸려 있음이 몸짓에서 나타난다. 이제 동물들도 말을 하고 대지에는 젖과 꿀이 흐르는 것처럼 인간에게도 초자연적인 것이 울려 퍼진다. 인간은 자신을 신으로 느끼며, 그가 꿈 속에서 신들이 거니는 것을 본 것처럼 이제는 그 자신이 황홀해지고 고양되어 거니는 것이다. 인간은 더 이상 예술가가 아니며 그는 예술작품이 되어 버린다. 근원적 일자가 환희에 찬 최고의 만족을 누리기 위해서 자연 전체의 예술적 힘이 도취의 전율 속에서 자신을 계시한다. 가장 귀한 점토이자 가장 값진 대리석인 인간이 이제 반죽되고 조각된다. 그리고 디오니소스적 세계 예술가의 끌 소리에 맞추어 엘레우시스의 비밀 종교의식의 외침이 울려 퍼진다. "그대들은 무릎을 꿇는가? 세계여, 그대는 창조주를 예감하는가?

 

 

1) 아폴론과 디오니소스

 

아폴론은 태양과 지혜의 신으로 불리며 도덕이나 법률을 주관하는 신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예언의 신이기도 하여 델포이를 중심으로 한 그의 신전에서는 무녀를 통해 신탁을 받는 일이 성행했다. 니체는 아폴론적인 것이라는 용어를 태양과 같은 밝음, 이러한 밝음 아래서 모든 사물들이 드러내는 균형, 절도, 질서, 명료한 형태, 그리고 국가의 도덕이나 법률, 아름다운 가상 및 이러한 아름다운 가상을 형성하는 예술적 능력을 상징하는 용어로 쓰고 있다.

 

디오니소스는 술과 황홀경의 신으로, 제우스와 테베 시의 창설자인 카드모스의 딸 세멜레 사이에서 태어났다. 로마 신화의 바쿠스에 해당하며 올림포스 12신 중의 하나이다. 인간에게서 태어나 올림포스 12신 안에 든 것은 디오니소스뿐이다. 물론 니체가 말하는 의미의 아폴론적인 예술의 대표인 호메로스에서는 디오니소스가 아직 올림포스 신들에 포함되어 있지 않다.

 

세멜레가 제우스의 아이를 임신하고 있을 때 제우스의 아내 헤라는 늙은 유모의 모습으로 찾아가, 세멜레에게 애인이 제우스 신인지 의심을 품게 하면서 제우스가 오면 증거로 헤라와의 결혼식 때의 모습 그대로를 보여줄 것을 요구하도록 부추켰다. 세멜레는 제우스가 찾아오자 부탁이 있으니 꼭 들어달라고 부탁을 했고 제우스는 어떤 소원이라도 들어 주기로 약속하게 된다. 세멜레의 부탁을 들은 제우스는 자신의 약속을 후회하지만 약속을 취소할 수 없었기 때문에 번개의 모습으로 나타났고 세멜레는 그 자리에서 새카맣게 타버리고 말았다. 제우스는 세멜레의 뱃속에서 아기를 꺼내어 자신의 넓적다리에 넣어 키웠고, 달이 차자 아이는 아버지의 넓적다리를 뚫고 세상에 나왔다. 이 아이가 바로 디오니소스이다.

 

제우스는 헤라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디오니소스를 니사의 님프들에게 맡겨 키우게 했다. 디오니소스는 니사에서 자라면서 포도의 재배법과 포도주 만드는 법을 발견했다. 디오니소스라는 이름은 '니사의 제우스'를 의미한다고 한다. 헤라는 디오니소스를 찾아내어 디오니소스를 미치광이로 만들었고 미친 디오니소스는 지상의 여러 나라를 방랑했다. 제우스의 어머니인 레아가 디오니소스의 광기를 치료해 주었고, 후에 디오니소스 축제 때 행해질 종교 의식을 전수해 주었다. 정상을 회복한 디오니소스는 인도까지 여행을 하면서 포도 재배법과 포도주 만드는 법을 가르치고 자신의 신앙을 전파했다. 

 

제우스를 세멜레의 아들이 아니라 페르세포네의 아들로 보는 신화도 있다. 페르세포네는 제우스와 데메테르의 딸인데 디오니소스가 디오니소스가 페르세포네의 아들이라면 제우스는 자신의 딸을 임신시킨 것이 된다. 페르세포네와 뱀의 모습으로 둔갑한 제우스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 자그레우스였는데, 제우스는 그에게 세계의 지배를 맡기려고 했다. 그러나 자그레우스는 헤라의 사주를 받은 티탄들에 의해 8조각으로 갈갈이 찢겨 삼켜진다. 남은 건 심장뿐이었는데 제우스가 그 심장을 가져가서 삼킨다음 세멜레와 만나 그녀를 통해 자그레우스를 다시 태어나게 했다고 한다. 자그레우스는 '영혼의 사냥꾼'을 의미하며, 디오니소스의 별명 중 하나이다. 이러한 이야기는 디오니소스 신도들이 날고기를 먹는 비밀 의식을 행했던 것과 관계가 있는 것으로 알려진다. 

 

겨울에 죽었다가 봄에 소생하는 디오니소스에 관한 신화는 대지가 겨울에는 활동을 멈추었다가 봄에 소생한다는 고대인들의 생각을 반영하고 있다. 디오니소스는 풍요와 수확을 상징하는 신이며 생명력, 피, 포도주, 물, 정액 등을 상징한다. 따라서 디오니소스는 누구보다도 농부들에게 사랑받았다. 디오니소스제는 사람들을 도취와 환각상태로 이끌었으며 극도의 환희와 고통의 극단적인 긴장상태로 끌어들였다. 이 제사에는 여성들과 노예들도 참여하였다. 농부들이 성대하게 벌이던 디오니소스제를 아테네의 지배자였던 독재자 페이시스트라토스(Peisistratos)는 민중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 도시국가 아테네의 축제로 만들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 따르면 그리스 비극뿐만 아니라 희극도 디오니소스 축제에서 비롯되었다고 전한다. 배우들은 산양의 뿔, 긴 귀, 꼬리를 지닌 사티로스(Satyros)와 실레노스(Silenos)들로 분장하여, 도취한 디오니소스를 동행하는 역할을 맡았다. 비극을 뜻하는 그리스어 트라고디아(tragodia)는 산양을 찬양하는 노래를 의미하며, 니체가 주장하고 있는 것처럼 디오니소스제에서 디오니소스에게 바치는 합창찬가(디튀람보스)가 비극의 기원이라고 한다. 

 

니체는 '디오니소스적인 것'이라는 용어를 아폴론적인 밝음과 절도에 대비되는 밤의 어둠과 심연, 혼돈 그리고 아폴론적인 평정에 대비되는 끊임없이 유동하고 변화하는 생명력, 포도주가 상징하는 것처럼 모든 사물들이 아폴론적인 개성과 차별과 구별을 극복하고 혼연일체가 되는 도취와 황홀경의 상태, 사지가 갈갈이 찢겨지는 죽음을 극복하고 부활하는 강인한 생명력을 상징하는 용어로 쓰고 있다. 니체는 디오니소스적인 것이라는 개념을 자신의 사유도정의 끝까지 놓지 않았다. 후기 니체는 힘에의 의지로서의 세계를 디오니소스적인 것이라고 명명하고 있다.

 

2) 아티카 

 

아티카는 도시국가 아테네가 자리 잡았던 그리스 중부 지역을 가리킨다. 대체로 척박한 땅이었지만 과수재배에는 적합했다. 남동쪽의 라우레이온 산지에는 에게 해 최대의 은광맥이 있어서, 기원전 5세기경부터 이루어진 은광 채굴은 아테네가 부강하게 된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기원전 8세기중엽부터 아테네를 중심으로 완전한 통일이 이루어졌다. 

 

아티카에서는 신주의 술통을 따는 3월 봄의 디오니소스 대축제에서 비극작가들 사이에 경연이 열렸다. 이것은 아크로폴리스의 신전에 딸린 디오니소스 극장에서 신관(神官)의 주관하에 1만 7000명이 넘는 관중이 모여 행하는 국가적 행사였다. 5인의 심판관이 평가하여 1등을 한 작가는 커다란 명예를 얻었다. 특히, 예선을 통과한 작가에게는 각각 부유한 후원자가 딸려서 일체의 상연 비용을 부담하고, 합창대의 편성, 의상의 준비 등을 담당하였다. 작가는 합창대의 훈련, 배우의 연기지도, 가창부의 작곡 등 연출 전반을 담당하였다. 이 비극 경연에서 아이스킬로스, 소포클레스, 에우리피데스 3대 비극 시인이 탄생했다.

 

3) 루크레티우스(Lucretius Carus, Titus, B.C. 940 - 550)

 

에피쿠로스 학파의 시인으로, 유일한 저작인 『만물의 본성에 대하여(De rerum natura)라는 시적인 저서에서 신들에 대한 신앙이 꿈에서 생겼다고 말했다. 그는 에피쿠로스와 마찬가지로 진실로 실재하는 것은 원자와 공허한 공간일뿐이며 불안과 공포의 원천인 영혼이나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았다. 무신론이 팽배한 현대와는 달리 루크레티우스 시대의 사람들은 도처에 신이 존재한다고 보았고, 사후에 영혼이 천국이나 지옥에 간다고 생각하면서 신이 내린 금기를 어길까 봐 두려워했고 사후에 지옥에 갈까 봐 두려워했다. 루크레티우스의 유물론은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자연관과 17세기 프랑스의 유물론에 큰 영향을 미쳤다.

 

4) 한스 작스(Hans Sachs, 14941105 - 15760119)

 

중세 말기부터 종교개혁 시대에 걸쳐서 번영을 구가했던 독일의 자유도시들에서 출현한 시민문예인 '직장문예'의 대표자였다. 뉘른베르크에서 재봉사의 아들로 태어나 구두를 만드는 것을 직업으로 하면서 대부분이 교훈적인 종교시 6170편을 썼으며 80편 이상의 부활제극을 남겼다. 바그너가 <뉘른베르크의 직장가수>에 등장시키기도 했는데, 인용된 시는 제3막 2장에 나온다. 이 가극의 주요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16세기 중엽 뉘른베르크에서 성 요한 축제일에 노래 경연이 있었다. 이 경연에서 우승한 자는 금세공사인 포그너의 딸 에바와 결혼하게 되지만, 그녀와 서로 사랑하는 기사 발터는 실격을 당해서 에바와 함께 도망하려고 한다. 에바를 짝사랑하는 구둣방 주인 한스 작스가 발터의 노래에 감동하여 자신의 사랑을 포기하고 기지를 발휘하여 노래 경연에서 발터가 우승하게 한다. 

 

중세 이래 수공업의 가게 주인이 되기 위해서는 동업조합인 길드의 심사에 의해서 직장의 자격을 받아야만 했다. 이러한 관행은 직장문예에도 적용되어 경연에서 우승한 사람에게는 직장가수의 칭호가 주어졌다. 이러한 관습은 당시의 독일 전역에서 행해졌으며 뉘른베르크 시의 경연이 특히 성대했다고 한다.

 

5) 마야

 

마야는 환영을 의미하는 산스크리트어다. 쇼펜하우어는 우리가 우리밖에 독립적으로 존재한다고 믿는 이 세계를 우리의 인식형식에 의해서 구성된 세계로 보았다. 이런 의미에서 쇼펜하우어는 우리가 경험하고 인식하는 세계를 우리의 표상이라고 보고 있다. 즉 우리가 경험하고 인식하는 세계는 세계 자체가 아니라 세계의 현상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보통 이러한 현상세계를 세계 자체라고 착각한다. 이 점에서 우리는 환영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다. 

 

쇼펜하우어에 따르면 인간은 사실은 태양이나 대지 자체를 아는 것이 아니라, 항상 단지 태양을 보는 눈과 대지를 만져 보고 느끼는 손을 알 뿐이다. 그런데 우리가 이러한 태양과 대지를 우리의 감각에서 독립해 있는 외부의 사물로 보게 되는 것은 우리의 감각 때문이 아니라 지성 때문이다. 지성은 자신의 고유한 형식인 인과성과 시간, 공간이란 형식을 매개로 하여 객관적인 외계를 만들어 낸다는 것이다. 

 

약간 더 상론하자면 어떤 형태의 감각이든 그것은 감각기관 내에서 일어나는 것이며 우리 밖에서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감각기관은 단지 조야한 감각자료를 공급하는 데 그치고, 이 자료를 가지고 시간, 공간, 인과성의 형식을 통해 규칙적으로 변화하는 물질세계로 개조하는 것은 지성이다. 내가 책상을 만져볼 때 그것으로부터 얻어지는 감각들은 존재한다. 그러나 이 때에는 아직 책상이라는 덩어리의 총체로서의 표상은 아직 없다. 이러한 감각에 지성이 작용하면서 공간과 인과성의 형식을 매개로 하여 그 책상이 외부에서 우리의 촉각기관을 자극하는 것으로 우리는 인식하게 된다.

 

현상으로서의 세계가 공간과 시간 그리고 인과율에 의해서 질서 지어진 세계라면, 이러한 세계의 근저에 있는 참된 세계는 불합리하고 맹목적인 살고자 하는 의지의 세계이다.

 

6)개별화의 원리

 

쇼펜하우어의 개별화의 원리는 시간과 공간이라는 순수직관을 의미한다. 우주의 본체인 의지는 하나이지만 우리가 경험하는 세계에는 무수한 개체로 나타난다. 이러한 개체들은 특정한 시간과 공간에 위치함으로써 개체로서의 성격을 갖게 되기 때문에 쇼펜하우어는 시간과 공간을 개별화의 원리라고 부른다. 개별화의 원리는 세계의 본체인 불합리하며 맹목적인 의지를 인간 주관에 대해서 개개의 형상으로서 나타나게 하는 원리다. 니체는 이러한 원리에 대응하는 것을 아폴론적인 것아라고 불렀고 그것의 본체에 해당하는 맹목적인 의지를 디오니소스적인 것이라고 명명하고 있다. 디오니소스적인 것과 아폴론적인 것 각각은 의지와 표상, 본질과 현상, 진리와 가상 각각에 상응한다. 

 

7) 사카이엔 족

 

사카이엔 족은 이란 고원의 동쪽에 살았던 고대 유목민족이다. 이 민족의 축제도 사카이엔이라고 불렀다. 5일간에 걸친 축제 동안 사람들은 모든 사회적 관습과 구속에서 해방되었고 주인과 노예가 서로 처지를 바꾸어 노예가 지배하고 주인이 복종하기도 했으며, 사형수도 축제기간에는 왕족이 누릴 수 있는 권리를 부여받았다고 한다. 니체는 이들이 광란상태에 빠졌다(orgiastisch)고 보았으며 orgiastisch의 어근인 orgie는 일반적으로 신에게 바치는 제사 특히 디오니소스 제사 때 신도들이 빠지는 황홀경이나 광란상태 혹은 이러한 제사 자체를 의미하기도 한다.

 

눈에비친햇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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