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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 Nietzsche(1844-1900)/비극의 탄생

니체의 형이상학적 비극 해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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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의 형이상학적 비극 해석

『비극의 탄생』에 나타난 아폴론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 - 

 

이 글은 니체의 최초 저작인 『비극의 탄생』에 나타난 핵심적 메타포라고 할 수 있는 아폴론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의 해명을 목표로 한다. 니체가 사용하고 있는 이러한 메타포는 단순한 메타포가 아니라 자신의 초기 입장인 미감적 형이상학 혹은 예술가의 형이상학을 구성하는 주요 요소이다. 따라서 니체는 아폴론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으로 구성되는 자신의 미감적 형이상학을 통해 그리스 비극을 해석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또 이를 달리 표현하면 니체는 그리스 비극을 해석하는 과정에서 예술가의 형이상학을 구상했다고 할 수 있다. 아폴론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으로 구성되는 미감적 형이상학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아폴론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이라는 메타포가 직접 영향을 받은 쇼펜하우어의 표상과 의지 개념에 대한 검토가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니체가 쇼펜하우어와의 입장 차이를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었지만 의지와 표상이라는 개념을 통하지 않고서는 니체의 메타포를 이해하기는 힘들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니체와 쇼펜하우어의 전면적인 비교는 이 논문의 과제에서 벗어나기 때문에 양자 사이에 어떤 차이가 존재하는지 하는 점을 중심으로 검토가 진행 될 것이다. 간단히 말하면 양자 간의 차이는 다음과 같다. 쇼펜하우어의 표상과 의지 개념은 이 세계의 고통과 모순을 보여주고 그럼으로써 이 세계를 부정하게 만드는 역할을 한다. 이에 반해 니체의 아폴론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은 쇼펜하우어의 비관주의적 세계진단 속에서도 계속 살 수 있게 만드는 계기를 제공한다. 그리고 바로 여기서 니체가 쇼펜하우어의 표상 및 의지 개념과 비판적 거리를 두게 만드는 결정적인 것이 그리스 비극에 나타난 그리스인들의 세계를 긍정하는 세계관이다. 니체의 미감적 형이상학의 핵심적 명제는 "세계와 현존은 단지 미감적인 현상으로서만 영원히 정당화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명제는 이 세계와 현존이 생명이자 일자인 근원적 의지, 다시 말해 디오니스소적 것의 자기놀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디오니소스적인 것의 이러한 자기 놀이에 동원되는 것이 바로 아폴론적인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통상 이해되는 바와는 달리 아폴론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은 전적으로 완전히 대립된 것이 아니라 서로를 필요로 하고 요구하는 자연적 충동이라고 할 수 있다. 니체에 의하면 이와 같은 미감적 형이상학의 구체적 모습이 형상화되어 나타나는 것이 바로 그리스 비극이었다. 그리스 비극은 한마디로 디오니소스적인 것의 아폴론적 형상화이다. 다시 말해 디오니소스적인 의지의 고통과 기쁨을 포함한 자기놀이를 아폴론적인 형상을 통해 보여줌으로써 비관주의적 상태에서 행위 하기를 멈춰버린 사람들에게 계속 삶을 살면서 행위를 할 수 있게 만들었던 것이 바로 그리스 비극이었다.

 

1. 들어가는 말

 

니체의 초기 입장은 『비극의 탄생』에서 나타난 개념으로 표현하자면 "미감적 형이상학" 혹은 "예술가의 형이상학(자기비판의 시도)"으로 규정될 수 있다. 이러한 입장은 "현존과 세계는 단지 미감적인 현상으로서만 영원히 정당화된다"는 명제로 요약된다. 물론 이러한 관점은 후기로 가면서 변화를 겪게 되며, 따라서 니체의 완결된 견해라고 보기는 힘들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니체의 초기입장을 규정하고 있는 미감적 형이상학은 니체 철학 전체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근본적인 중요성을 지닌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니체 철학이 전통 형이상학과 합리성에 대한 비판이라고 할 때 그 비판의 기준이자 대안으로 제시되고 있는 것이 바로 미감적 형이상학 내지 예술가의 형이상학에서 드러나는 니체의 예술적 세계관이기 때문이다. 

 

니체는 그리스 비극을 기초로 예술가의 형이상학이라는 자신의 예술적 세계관을 형성한다. 이를 달리 표현하면 그리스 비극은 니체에 의해서 예술가의 형이상학이라는 관점에서 해석된다고 할 수 있다. 니체의 이러한 해석의 특징은 여러 가지로 살펴볼 수 있다. 우선 『비극의 탄생』에는 그리스 비극 작가들과 작품에 대한 구체적인 해석이 등장하지 않는다. 그리고 니체의 해석은 그 이전의 거의 모든 비극해석이 기초하고 있던 아리스토텔레스 비극이론과 비판적 거리를 두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한가지 예를 들면 아리스토텔레스 비극이론과의 가장 두드러진 차이 가운데 하나는 바로 아리스토텔레스가 비극에서 나타나는 음악을 비극의 단순한 양념 정도로 여기고 행위나 말에 집중했다면 니체는 오히려 음악에 주목했다는 점이다. 끝으로 니체의 비극 해석은 비극이라는 특정한 예술 작품에 대한 이론을 제시하려는 시도라기보다는 비극 작가로서 예술가가 비극을 산출공연함으로써 대중들로 하여금 그것을 향유하게 만든 동기에 관한 이론을 구성해보려는 작업으로 규정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니체에게 비극은 단순히 하나의 예술장르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문화단계를 특징짓는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니체의 형이상학적 비극 해석의 이와 같은 특징들을 가장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결정적인 두 요소가 바로 아폴론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이다. 따라서 니체의 형이상학적 비극 해석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이 두 메타포에 대한 검토가 필요할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두 가지 요소는 제한적이기는 하지만 쇼펜하우어의 표상과 의지라는 개념의 영향 아래서만 이해될 수 있다. 물론 니체는 이미 초기에 쇼펜하우어와 의식적으로 거리를 두고 자신의 입장이 쇼펜하우어와 뚜렷하게 구분될 수밖에 없음을 분명하게 인식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사실로부터 아폴론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이라는 니체의 메타포가 쇼펜하우어 철학에 대한 선행적 이해 없이 파악될 수 있을 것이라는 점이 귀결되지는 않는다.

 

쇼펜하우어는 이 세계를 의지와 표상으로 파악한다. 물론 두 가지 가운데 더 근본적인 역할을 하는 것은 의지이다. 의지가 스스로 생존하기 위해 만들어 낸 것이 표상이고 그러한 표상으로 구성된 세계가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다. 쇼펜하우어의 이러한 입장은 개별적 의지들의 생존투쟁이 끊임없이 지속되고 고통을 가져온다는 점에서 비관주의라고 규정될 수 있다. 니체는 쇼펜하우어의 비관주의 혹은 의지의 형이상학을 비판적으로 수용한다. 이러한 비판적 수용에서 결정적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그리스 비극에 나타난 세계를 긍정하는 그리스인들의 세계관이다. 니체는 그리스 비극에 나타난 비극적, 긍정적 세계관을 적극적으로 수용함으로써 쇼펜하우어의 비관주의에서 벗어난다. 

 

요컨대 니체는 의지와 표상이라는 쇼펜하우어의 개념에서 영감을 받았으나 그러한 것들을 자신의 예술가의 형이상학을 구성하는 디오니소스적인 것과 아폴론적인 것으로 변형시킴으로써 그리스 비극에 대한 형이상학적 해석을 수행한다. 의지와 표상은 그리스 비극에 대한 니체의 해석 과정에서 아폴론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으로 변형된다. 따라서 니체의 형이상학적 비극 해석을 구성하는 아폴론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쇼펜하우어의 의지 및 표상 개념과의 차이를 부각시키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 방법 가운데 하나가 될 수 있다. 따라서 아래에서는 우선 니체에게 아폴론적인 것 및 디오니소스적인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살펴본 다음 그 각각이 쇼펜하우어의 표상 및 의지 개념과 어떤 차이가 있는지를 검토할 것이다. 그런 다음 이러한 차이의 배경이 되는 니체와 쇼펜하우어의 비극관을 부각시키고, 끝으로 니체가 말하는 그리스 비극 개념, 다시 말해 디오니소스적인 것의 아폴론적 형상화라는 것의 의미를 분석할 것이다. 

 

2. 형이상학적 비극 해석의 첫 번째 구성요소 - 아폴론적인 것

 

니체가 그리스 비극 예술이 모방함으로써 탄생한 요소로서 주목하고 있는 자연의 두 가지 예술충동 가운데 하나가 바로 아폴론적인 것이다. 아폴론적인 것은 이중적 의미를 지닌다. 우선 아폴론적인 것은 현실을 구성하는 충동이다. 인간이 살아가는 이러한 현실은 개별성으로 구성된 세계이다. 그리고 이러한 개별적 현실의 구성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은 인간의 주관 안에 있는 시간과 공간, 인과성이다. 아폴론적인 충동은 이러한 시간과 공간, 인과성을 통해 현실을 구분된 개별적 현실로서 구성한다. 그래서 니체는 쇼펜하우어를 따라 시간, 공간, 인과성을 개별화 원리(principium individuationis)라고 부르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아폴론적 충동에 의해 현상세계로서의 현실이 구성되는 것은 고통과 모순에 가득 찬 근원적 일자가 자신을 구원하기 위해서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은 "고통에 가득 찬 근원적 일자가 자신을 구제하기 위해 만들어 낸 일종의 가상일 수 있다는 가정을 해 볼 수 있다" 니체는 이러한 점을 꿈이라는 생리적 현상을 통해 설명한다. 꿈을 꾸는 인간이 스스로 꿈이라는 것을 의식하면서 꿈을 꿀 수 있는 것처럼 이 현실도 그 배후에 다른 현실을 숨기고 있는 하나의 꿈처럼 생각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구원은 근원적 일자의 첫 번째 구원이라고 이름 붙여 볼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미 아폴론적 충동이라는 말에 나타나 있듯이, 현실의 구성은 철저히 필요에 대한 응답이라는 점이다. 자신을 구원하려는 근원적 일자의 필요가 아폴론적 충동이며, 그러한 충동에 의해 현상으로서의 현실세계가 구성된다. 이러한 현실은 "최고의 환각(Verzuckung)의 수단으로서의 표상"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런 의미에서 인간을 포함한 현실은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근원적 일자의 "순수한 직관"이자 "표상된 것"이다. 그리고 개별화 원리가 주관 속에 존재하는 원리라는 의미에서 이 개별화된 현실은 근원적 일자의 수단인 인간의 필요에 의해 꾸며진 일종의 가상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로써 가상은 단순히 진리와 대립되고 부정되어야 할 것이 아니라 삶에 필수적인 가상이라는 긍정적 의미를 얻게 된다.

 

그러나 동시에 아폴론적인 것은 예술 창조의 충동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충동은 조형적 예술 창조의 충동이며, 현실과는 또 다른 가상세계를 만들어내려는 의지이다. 꿈에서 나타나는 자연적 충동의 모방이 바로 조형예술가의 예술창조충동이다. "현실을 대상으로 한 개개인의 유희가 꿈이라고 한다면, 조형가의 예술은 이러한 꿈과의 유희이다." 이러한 아폴론적인 충동을 통해 찬란한 가상의 세계인 올림포스 세계가 잉태된다. 그런데 이러한 충동이 발휘되었던 것은 그리스인들이 '인간에게 최선은 태어나지 않는 것이고 차선은 즉시 죽는 것'이라는 실레노스의 지혜를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세계의 삶을 계속 살기 위한 목적에서였다. "고통에 대한 남다른 감수성을 지닌 그리스인들은 그와 같은 환상의 세계가 없이는 삶을 유지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래서 이러한 두 번째 의미의 아폴론적인 충동은 첫 번째 의미의 아폴론적인 충동에 의해 구성된 현실세계가 한계 및 거기서 나오는 고통과 마주치는데서 비롯된다. "새로운 고통은 구원을 요구한다... 이것은 예술을 통해, 인간의 도움으로 이루어진다... 인간은 근원적 일자의 두 번째 구원의 매체이자 도구이다."

 

요컨대 현실이라는 가상세계를 통한 근원적 일자의 첫 번째 구원의 한계와 좌절은 두 번째 아폴론적 충동인 예술 창조의 충동에 의한 예술 세계의 창조로 이어진다. 이러한 예술세계는 근원적 일자의 첫번째 구원으로 나타난 현실 자체가 하나의 가상이라는 의미에서 볼 때 그러한 "가상의 가상"이라고 표현될 수 있다. 달리 표현하면 "모든 현존하는 것은 이중적 방식으로 표상이다. 즉 한 번은 (근원적 일자가 자신을 구원하기 위해 투사한) 상(Bild)으로 그 다음은 그러한 상의 상으로 말이다." 이 후자는 근원적 일자에 의해 표상된 것으로서의 인간이 예술을 통해 원래의 상을 모방함으로써 산출하는 상을 의미한다. "의지는 예술가를 필요로 하며, 그 예술가에게서 근원적 과정이 반복된다. 예술가에게서 의지는 직관의 황홀(Entzuckung)에 이른다.

 

3. 아폴론적인 것과 표상의 세계의 차이

 

아폴론적인 것이 그리스 식으로 표현된 표상이라는 점에는 거의 이견이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이러한 표면적인 유사성 아래 좀 더 근본적인 차이들이 존재하며 이러한 차이들이 오히려 니체의 형이상학적 비극 해석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위에서 살펴본 아폴론적인 것과 표상의 세계의 차이는 무엇인가?

 

우선 아폴론적인 충동이 그에 따라 현실(표상)세계를 구성하는 개별화 원리를 바라보는 관점의 차이가 존재한다. 쇼편하우어에게 개별화의 원리란 고통의 원인이다. 의지는 원래 하나지만 의지가 현상들로 나타나고 따라서 개별적인 의지가 됨으로써 개별적 의지들 사이에 서로 투쟁이 생겨나고 거기서 고통이 생긴다. "무기적 자연과 유기적 자연의 모든 형태 속에 구현되어 객관성의 형태를 취하는 것은 하나의 동일한 의지이다. 그래서 의지의 단일성은 의지의 모든 현상 사이의 내적인 유사성에 의해 인정되어야 한다... 높은 이념 혹은 의지의 객관화는 낮은 이념을 압도함으로써만 나타날 수 있기 때문에 낮은 이념의 저항을 받는 이들 이념은 높은 이념에 봉사하면서도 여전히 자기의 본질을 독립하여 표출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자연에서 항쟁, 투쟁 및 승리의 교체를 본다. 그리고 또한 거기서 의지의 자기분열을 본다. 따라서 개별화가 고통의 원인이기 때문에 그러한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개별화의 원리의 실상을 간파하고 원래 하나로 존재하는 의지의 본 모습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쇼펜하우어는 개별화에 의해 야기된 이러한 고통의 극복 가능성을 예술적 관조에서 찾고 있다. 예술적 관조 속에서 개별적 주체로서의 의지는 사라지고 의지의 고통 역시 사라진다. "자연의 아름다움이 일단 우리 눈앞에 전개되면 우리는 아무리 짧은 순간이라 해도 주관성이나 의지의 고역으로부터 벗어나 순수한 인식상태로 들어갈 수있다... 행복과 불평은 사라져버리고 우리들은 이미 개체가 아니게 되며 개체는 잊혀지고 우리들은 오직 하나의 세계의 눈으로만 존재할 뿐이다."

 

이에 비해 니체는 개별화 원리가 고통을 야기하는 원천이라고 보지 않는다. 오히려 니체에 의하면 고통은 근원적 일자에 내재한다. 모순과 투쟁으로 가득 찬 근원적 일자는 자신의 상태를 구원하기 위해 개별화 원리에 의해 구성되는 현실을 창조한다. 따라서 니체에게서 "개별화는 고통의 원인이 아니라 고통의 결과"이며 고통을 극복하기 위해 근원적 일자 스스로 사용하는 수단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여기서 개별화 원리는 현실구성의 원리로서 역할을 한다. 두 번째로 이런 의미에서 쇼펜하우어에게 개별화 원리는 극복 대상이며, 그러한 개별화 원리에 의해 구성된 현실 역시 부정의 대상이 된다. 그러나 니체에게 개별화 원리 및 그러한 원리에 의해 구성된 현실세계는 극복과 부정의 대상이 결코 아니다. 오히려 그러한 현실은 긍정의 대상이다. 그리고 그러한 현실의 긍정을 위해 다시 한 번 필요한 것이 개별화 원리를 예술적으로 모방하는 아폴론적인 예술 창조충동이다. 여기서 현실의 고통을 치유하는 예술의 힘이 발휘된다. 니체가 아폴론적인 것을 "개별화 원리의 찬란한 신상(Gotterbild)이라고 부르는 것은 바로 이런 의미에서이다. 

 

4. 형이상학적 비극 해석의 두 번째 구성 요소 - 디오니소스적인 것

 

아폴론적인 것과 마찬가지로 디오니소스적인 것은 니체에 의하면 자연이 지닌 예술충동이다. 아폴론적인 것이 개별화 원리를 구현하려는 자연충동이라면 디오니소스적인 것은 그러한 개별화 원리가 파괴될 때 엿보인다. 그리고 아폴론적인 것이 꿈이라는 생리학적 현상과의 비유를 통해 설명될 수 있다면, 디오니소스적인 것은 도취라는 생리학적 현상과의 유비를 통해 설명될 수 있다. 

 

이와 같은 디오니소스적인 것은 근원적 일자로서의 의지이다. 근원적 일자는 모순과 고통에 가득 찬 일자이다. 근원적 일자는 이러한 모순과 고통을 벗어나기 위해 개별화 원리에 의해 현실세계를 구성한다. 현실 세계의 구성을 통해 근원적 일자는 고통에서 구원된다. 여기서 디오니소스적인 것은 구원을 위해 현실구성의 충동으로서 아폴론적인 것을 필요로 한다. 이러한 고통과 구원은 위에서 언급된 근원적 일자의 첫 번째 고통과 구원이다. 그런데 이러한 개별화 원리에 의해 구성된 현실세계는 이론적 인식의 한계와 운명의 힘 앞에서 붕괴된다. 이러한 붕괴에 의해 그때까지 자명하게 여겨지던 세계는 가상이라는 사실이 드러나고, 디오니소스적인 것이 보이게 된다. 그러나 여기서 다시 디오니소스적인 근원적 일자로서의 의지는 이 두 번째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예술세계를 창조한다. 예술세계의 창조에는 자연의 아폴론적 충동을 모방하는 인간 예술가의 개입이 필요하다. 이러한 예술 세계의 창조는 근원적 일자의 두 번째 구원이다. 이 두 번째 구원의 산물이 바로 그리스의 올림포스 예술세계인 것이다. 그러나 이 단계에서는 아직 디오니소스적인 것이 아폴론적으로 형상화되지는 못하고 있다.

 

디오니소스적인 것의 아폴론적 형상화는 서정시에서 비로소 그 싹이 나타난다. 니체는 그리스인들이 호머와 함께 아르킬로쿠스라는 서정시인을 함께 추앙했다는 점에 주목한다. 그리고 이와 같은 현상은 니체에 의하면 서정시인이 근대인들이 생각하듯이 단순히 주관적인 예술가이기 때문이 아니라 근원적 일자의 고통을 그대로 반영하는 예술가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이러한 서정시인은 디오니소스적 예술가로서 근원적 일자의 모상인 음악을 산출하며, 음악은 다시 그에게 시적인 언어로 형상화되어 나타난다. "서정시인은 무엇보다 디오니소스적인 예술가로서 근원적 유일자와 일체가 되어 근원적 일자의 고통과 모순에도 완전히 일치 되어 있다. 서정시인은 유일자의 모상인 음악을 산출하며, 그리고 이제 이 음악이 아폴론적인 꿈의 작용에 의해서 마차 하나의 비유적인 꿈의 형상과 같은 모습으로 그에게 나타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음악이 형상화되어 나타난다는 것이다. 이로써 이미 여기서 디오니소스적인 근원적 의지의 형상화가 가능하게 된다. 그래서 서정시의 시대에 비극의 단초를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잠자코 있던 자의 디오니소스적, 음악적 마력은 이제 형상의 불꽃을 주위에 뿌린다. 이것이 서정시이며, 서정시가 최고로 발전하였을 때 비극 혹은 극적 디튀람부스라고 불린다." 이러한 서정시에서는 비극에서와 마찬가지로 음악이 주가 되며, 따라서 언어가 음악을 모방하는 현상이 벌어진다. "서정시는 언어가 음악을 모방하는 것이며, 따라서 언어가 갖는 상징적 비유나 개념을 통해서 음악이 섬광처럼 비치는 것"이다. 

 

이제 비극이 탄생하는 단계에서 디오니소스적인 것의 모습을 살펴보자. 개별화 원리가 파괴된 상태는 도취와의 유비를 통해 생각해 볼 수 있으며, 환희와 고통이라는 이중적 감정을 유발한다. 개별화 원리의 파괴에 의해 일체감을 느끼고 환희를 느끼던 인간은 그러한 도취에서 깨어나자마자 현실의 경악과 부조리에 구토를 느낄 수밖에 없다. "도취에서 깨어나는 의식상태에서 그는 곳곳에 널려 있는 인간 존재의 경악스러운 면과 부조리한 면을 본다. 그것이 그를 구역질나게 만드는 것이다." 여기서 디오니소스적인 것은 다시 한 번 자신을 구원하기 위해 아폴론적 충동을 요구한다. 물론 여기서 아폴론적인 충동은 올림포스적인 단계와는 달리 단순히 아름다운 가상을 창조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디오니소스적인 환상을 창조하기 위해 발휘된다. 즉 계속 살기 위해 인간 예술가가 개입하여 예술적 가상을 창조하며, 이 상태는 도취에의 탐닉이 아니라 도취와의 유희이다. "도취가 자연이 인간과 행하는 유희라고 한다면, 디오니소스적 예술가의 창조는 도취와의 유희이다." 이로써 근원적 일자는 이제 자신의 두 번째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한 두 번째 구원행위를 수행한다. "디오니소스는 파괴와 결합된 환희가 아폴론의 아름다움, 고통받는 영웅의 아름다움에 의해 환기된다는 사실을 사람들이 믿게끔 기만하기 위해 아폴론의 가면을 발산한다." 요컨대 현실에 대한 구토라는 부정적 정서를 살 수 있는 정서로 다시 전환시키기 위해 그리스인의 의지는 "자연적 치유력"을 발휘한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 자연적 치유력의 "수단이 비극적 예술작품이고 비극적 이념이다." 결국 디오니소스적인 것은 개별화의 고통을 스스로 체험하고 벗어나는 근원적 일자로서의 의지이며 근원적 일자로서의 디오니소스적인 것은 고통으로부터의 자신의 구원을 위하여 아폴론적인 것을 항상 요구하고 필요로 하는 충동이다.

 

5. 디오니소스적인 것과 의지의 차이

 

우선 니체는 쇼펜하우어의 의지를 "가장 보편적인 현상형태 즉 고통과 쾌의 교체"라고 보고 있다. 그리고 이런 의미에서 "의지는 가상에 속한다." 그리고 "의지가 가상일뿐이기 때문에 의지의 자기지양, 부활 등이 가능하다." 이에 비해 디오니소스적인 것은 "전적으로 해독 불가능한 것"이며 물자체와 같은 것이다. 둘째로 쇼펜하우어의 의지 개념은 단일한 방식으로 규정될 수 있다. 즉 개별화 원리로 인해 분열된 의지는 고통을 당하며, 그러한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의지는 자신을 부정한다. 이러한 의지의 자기부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예술적 관조의 행위와 의지의 본질에 대한 분명한 인식이다. 그렇지만 이러한 의지부정에서 나타나는 상태는 곧장 기쁨으로 이어지지 못한다. 거기서 비롯되는 것은 단지 조용한 안식과 같은 것일 뿐이다. 

 

그러나 이에 비해 니체가 말하는 디오니소스적인 것은 그렇게 단일한 방식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니체가 말하는 근원적 일자로서의 디오니소스적인 것은 고통과 모순으로 가득 찬 의지이다. 따라서 이러한 일자는 일차적으로 고통의 의미를 갖는다. 이러한 원초적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디오니소스적인 것은 스스로 현상세계를 창조한다. 이것은 첫 번째 구원행위이다. 그러나 고통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현상세계의 안락함은 지속적이지 못하고, 다시 무의미하고 경악스러운 디오니소스적인 것이 드러난다. 다시 말해 인간의 이론적 인식과 합리성은 운명의 심연 앞에서 좌초한다. 그러나 디오니소스적인 것은 이러한 상태에 머물러 있지 않고 다시 한 번 자신의 구원을 위한 예술적 창조행위를 수행한다. 디오니소스적인 것의 두 번째 구원행위는 고통에서 벗어나는 행위이다. 따라서 니체에게 디오니소스적인 것은 고통의 원천인 동시에 스스로 그 고통의 치유를 제공한다. 디오니소스적인 것은 고통과 치유(기쁨)라는 이중적 의미를 갖는다. "우리가 개별화 원리의 파괴에서 나오는 두려움에다가 개별화 원리가 파괴될 때 똑같이 인간의 가장 내적인 근거, 바로 자연으로부터 솟아 나오는 기쁨에 넘친 환희를 덧붙인다면, 우리는 디오니소스적인 것의 본질을 보게 된다."

 

두 번째로 쇼펜하우어의 의지 개념은 전체적으로 볼 때 맹목적인 충동을 의미한다. "어떤 사람도 언제나 자기 행동을 인도하는 목적과 동기를 갖고 있으며, 언제나 자기의 개별적인 행위에 대해 해명할 수 있다. 그러나 그가 무엇 때문에 의지를 작용시키는가 혹은 무엇 때문에 존재하려고 의지하는가라고 물으면 대답이 궁할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 점이야말로 정말 그 자신이 의지 이외의 아무 것도 아니라는 의식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아무 목표와 한계가 없다는 것이 무한한 노력인 의지 자체의 본질이다. 개개의 행위는 목적을 갖고 있지만 의지 작용 전체에는 목적이 없다." 쇼펜하우어에게 표상개념과 의지의 차이도 바로 이러한 사실에 있다. 그러나 니체의 디오니소스적인 것은 그렇게 맹목적이지 않다. 니체의 디오니소스적인 것은 자신의 구원을 목적으로 현실세계와 예술세계를 창조하는 지적이고 의식적인 충동이다.

 

그리고 끝으로 쇼펜하우어에게 의지의 맹목성과 고통의 극복은 의지의 자기부정을 통해 수행된다. 이러한 의지의 자기부정을 위해서는 의지의 본질에 대한 분명한 인식이 필요하다. "전체에 대한 인식, 물자체의 본질에 대한 인식은 모든 의욕의 진정제로 된다. 이렇게 되면 의지는 생을 떠난다. 이제 의지는 자기긍정이라고 생각하는 생의 쾌락들이 무서워진다. 이렇게 사람은 무의지의 상태에 도달하게 된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쇼펜하우어가 말하는 의지 개념은 고통 및 결핍과 항상 결부되어 있으며 따라서 극복과 지양의 대상이다. 이에 비해 니체의 디오니소스적인 것은 단순히 극복되고 지양되는 것이 아니라 아폴론적인 충동을 요구함으로써 자신을 긍정한다. 이런 의미에서 니체에게 디오니소스적인 것은 단순히 쇼펜하우어에게서처럼 표상세계의 한계에서 나타나서 특수한 종류의 표상(예술) 혹은 인식에 의해 다시 극복되는 것이 아니라 아폴론적인 것을 다시 항상 요구함으로써 자신을 긍정한다. 이런 의미에서 니체에게 디오니소스적인 것과 아폴론적인 것의 관계는 쇼펜하우어의 표상과 의지의 관계처럼 극복과 지양의 관계가 아니라 서로 분리될 수 없고 서로를 요구하는 하나의 근원적 충동의 이면이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니체는 아폴론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을 동일한 "의지의 두 현상 형식들"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사실상 아폴론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은 같은 충동이 지닌 단순히 상이한 측면들일 뿐이다."

 

6. 쇼펜하우어 비극관과 니체의 비극관의 차이

 

쇼펜하우어는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에서 비극의 목적은 삶에 대한 체념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입장은 예술일반에 대한 쇼펜하우어의 이해로부터 비롯된다. 쇼펜하우어에게 예술은 특수한 표상으로서 개별적인 의지를 지닌 주체를 망각하게 함으로써 주체의 개별적인 의지 활동을 진정시키는 효과를 유발한다. 물론 이러한 효과는 일시적일 뿐이기 때문에 쇼펜하우어에게 진정한 의지의 구원이라 할 수 있는 의지의 자기부정과 그를 통한 해탈은 의지의 투쟁 및 고통으로 얼룩진 무의미한 세계에 대한 냉철한 인식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하지만 예술은 이러한 근원적인 의지의 자기부정을 통한 구원의 모습을 예증하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쇼펜하우어의 비극에 대한 견해 역시 에술에 대한 이러한 일반적 입장에 의해 규정된다. 비극에서 등장하는 영웅들의 비참한 운명은 인간이 의지를 갖고 욕구하는  삶을 살았을 때 초래되는 결과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따라서 그러한 비참한 운명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의지와 욕구를 지닌 삶을 살지 말아야 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비극은 이런 식으로 의지부정을 통한 구원과 해탈을 촉진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결국 쇼펜하우어에게 예술 혹은 예술의 한 전형으로서의 비극은 삶과 삶에의 의지의 부정을 가능하게 만드는 결정적 계기이다. "비극의 목적이 인생의 어두운 면을 묘사하는 데 있다는 것은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여기서 즉 의지의 객관화의 최고의 단계에 있어서 의지의 자기 자신과의 충돌이 가장 완전하게 일어난다. 이 충돌은 인간의 고뇌에서 나타나며, 그러한 고뇌의 일부는 우연과 운명에 의해 그리고 일부는 인간 자신에 의해 생긴다. 그러나 여기서 이러한 의지의 갈등이 동일한 의지의 작용이라는 인식이 생기게 되고 결국 개별화 원리인 현상의 형식을 간파함으로써 이 원리에 근거를 둔 이기심이 사멸해버리는 단계에 도달한다. 여기서 체념이 생기며 인생에 대한 모든 의지가 내버려진다. 결국 비극의 주인공들은 기나긴 고통 이후에 인생 자체를 폐기한다."

 

니체는 쇼펜하우어의 비극 해석에 대해 비판하고, 예술을 삶의 부정을 위한 다리라고 생각한 것이 쇼펜하우어의 오해였다고 주장한다. 니체가 바라보는 비극은 한 마디로 삶과 삶에 대한 의지를 긍정하게 만드는 핵심적인 계기이다. 디오니소스적 도취에서 깨어난 그리스인은 현존의 비참하고 경악스러운 모습에서 구토를 느낀다. 이러한 구토의 일차적 효과는 쇼펜하우어적인 상태 즉 의지의 의욕이 상실되고 삶에의 의지가 부정되는 상태이다. 이러한 상태에 빠진 인간을 니체는 햄릿과 비유한다. 진리에 대한 인식이 행동을 가로막는 상황이 벌어진다는 것이다. 여기서 삶을 계속 살 수 있게 만들어주는 것이 바로 가상세계를 창조하는 예술이며 그러한 예술의 전형으로서의 비극이다. "디튀람부스를 부르는 사튀로스 합창단은 그리스 예술의 구원행위이다. 여기서 느껴지는 것이 바로 "형이상학적 위안"이다. 이러한 위안은 기독교가 제공하는 것과 같은 피안에 의한 위안이 아니라 철저하게 이 세계 속에서 이 세계와 함께 살아갈 수 있게 만들어 주는 위안이다. 즉 "삶은 사물의 근본에 있어서 현상들의 모든 변화에도 불구하고 파괴될 수 없이 힘 있고 기쁨에 가득차 있다는 위안"이다. 이런 의미에서 니체에게 비극은 삶의 긍정을 위한 결정적 수단을 제공한다. 쇼펜하우어에게서처럼 예술을 통해 삶의 의지가 부정되고 의지활동이 정되는 것이 아니라 삶이 자극되고 긍정되는 것이다. 요컨대 쇼펜하우어가 의지의 부정을 통해 이 세계로부터의 구원과 해탈을 주장하고 있는 반면 니체는 세계를 근원적 일자의 미감적인 가상으로 파악함으로써 이 세계 자체의 구원을 말하고 있다. 니체의 의도는 가상을 통한 고통으로부터의 구원과 그것을 통한 삶에 대한 긍정이라고 할 수 있다 .

 

7. 디오니소스적인 것의 아폴론적인 형상화로서의 비극

 

디오니소스적인 것의 아폴론적 형상화로서의 비극은 디오니소스적이고 아폴론적인 자연의 예술 충동의 모방이다. 원래의 자연적 예술충동은 인간 예술가의 매개 없이도 충족되는 충동이다. 이러한 두 가지 예술충동은 모순과 고통에 가득 찬 동시에 영원한 생명인 근원적 일자의 근원적 충동 즉 디오니소스적 충동과 그러한 일자가 현상세계의 창조를 통해 자신을 첫 번째 고통에서 구원하기 위해 발휘하는 아폴론적 충동이다. 또 현상세계의 붕괴에서 근원적 일자의 고통이자 인간의 고통인 두 번째 고통이 생기며 이러한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한 두 번째 구원이 필요하다. 여기서 등장하는 것이 바로 아폴론적인 충동의 모방자로서 인간 예술가를 매개로 발휘되는 예술창조의 충동이며, 여기서 예술세계가 창조된다. 이런 의미에서 예술은 근원적 일자의 구원행위인 동시에 인간의 구원행위이다. 바로 이러한 예술창조를 통한 구원이 그리스인들의 올림포스 세계의 창조를 통해 나타난 것이다. 그래서 예술이 근원적인 자연적 충동의 모방이라는 점에서 보자면 그리스의 올림포스 세계는 아폴론적 예술충동의 모방으로서 나타난 것이 된다. 그런데 니체가 말하고 있는 비극은 그리스인들의 구원을 위해 아폴론적 예술충동의 모방에 의해 창조한 올림포스 세계의 밑바닥에 깔려 있는 좀 더 근원적 충동인 디오니소스적인 것을 아폴론적인 것을 통해 형상화하여 드러내고 있다는 점에서 단순히 호머적인 올림포스 예술세계의 창조와 구분된다. 그래서 이러한 비극예술이 기존의 아폴론적인 가상의 예술세계와 다른 것은 디오니소스적인 것 역시 거기서 숨겨지지 않고 형상화되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비극에서는 진리와 가상의 중간세계가 드러나며, 아폴론과 디오니소스가 부정된다. 요컨대 기본적으로 아폴론적인 것일 수밖에 없지만, 비극예술이 아폴론적인 가상의 예술과 다른 점은 현실에 대한 단순한 가상이 아니라 진리(디오니소스적인 것)를 형상화하여 보여주는 상징의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비극에서 나타나듯이 디오니소스적인 것의 의미와 관련하여 『비극의 탄생』의 부제가 암시하듯이 음악이 중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그리스 비극에 대해 우리는 무능력자이다. 그것은 비극의 주요 효과가 대개 우리가 상실해버린 요소 즉 음악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니체는 이런 의미에서 조형예술과는 다른 의미를 음악에 부여한 유일한 사상가로 쇼펜하우어를 꼽고 있다. 쇼펜하우어에 의하면 다른 예술들은 현상의 모사인데 비해 음악은 의지 자체의 모사라는 것이다. 니체는 자신의 책에서 쇼펜하우어를 길게 인용하면서 중요한 점으로 다음을 지적하고 있다. 즉 자연(현상세계)과 음악은 동일한 사태에 대한 두 가지 표현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세계는 구체화된 의지이자 구체화된 음악이다. 이러한 음악은 바로 디오니소스적 충동의 모방인 디오니소스적인 예술이다. 그리고 이러한 디오니소스적인 예술로서의 음악이 아폴론적인 형상으로 즉 상징적으로 표현되는 곳이 비극이다. 이런 의미로 비극적인 것은 일상에서 가상에서 비롯되는 아름다움을 통해서는 이해될 수 없다. "비극적인 것은 다시 말해 개체적인 것의 절멸에서 느끼는 기쁨은 음악정신으로부터만 이해될 수 있다... 비극적인 것에서 느끼는 기쁨은 본능적이고 무의식적인 디오니소스적 지혜를 형상의 언어로 번역한 것이다." 즉 음악이 디오니소스적인 것의 모사라면, 그러한 형이상학적(초물리적) 진리를 형상으로 비유하고 표현하는 것이 바로 비극적 신화의 역할이다. 이것은 음악과 드라마의 조화이다. 그러나 이러한 조화의 관계에서도 역시 우위를 차지하는 것은 음악이다. "음악(물자체)은 세계의 본래적 이념이고, 드라마(현상)는 이러한 이념의 자취일 뿐이다." 이 말은 비극의 효과에서 볼 때 디오니소스적인 것이 우위를 점한다는 사실을 함축한다. 비극 안에서 아폴론적인 것은 디오니소스적인 것의 가면일뿐이다.

 

비극에서 디오니소스적인 것의 모사인 음악은 구체적으로 합창단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합창단은 구토를 일으키는 현실에 마주해서 근원적 일자와의 일체감을 통해 형이상학적 위안을 주는 역할을 한다. 이러한 합창단의 작용에 의해 디오니소스적인 도취가 관객들에게 전염됨으로써 모든 개체의 절멸 속에서도 모든 존재자들은 하나라는 기쁨이 느껴진다. 니체가 말하는 디오니소스적인 것이 인간과 인간 사이의 경계뿐만 아니라 인간과 자연 사이의 경계 역시 허물어진 상태라고 할 때 환상을 통해 이러한 디오니소스적인 도취상태에 이를 수 있게 하는 수단이 바로 합창단과 음악의 역할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합창단은 "꾸며진 자연존재"이다. 즉 경험적 현실과는 다른 본래의 자연적 인간의 모습의 회복을 상징하는 것이 사튀로스 합창단이다. 또 이런 의미에서 합창단은 디오니소스적인 도취 혹은 그렇게 도취된 군중의 느낌을 아폴론적인 형상을 통해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비극이 디오니소스적인 것의 아폴론적 형상화라고 할 때 가리키는 사태는 바로 합창단의 이러한 역할을 통해 알 수 있다. 요컨대 디오니소스적인 도취의 효과의 일체감을 아폴론적 형상에 의해 생기는 환상을 통해 보여줌으로써 위안을 제공하는 것이 합창단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니체에 의하면 이러한 도취의 형상화(상징화된 도취)와 전염이 가능한 것은 합창단이 현실에 대한 일종의 장벽으로 기능하는 것을 통해서다. 다시 말해 합창단은 고통스런 현실에서 눈을 돌리고 그 이상적인 기반과 시적인 자유를 얻기 위해 비극 주변에 쳐진, 살아 있는 장벽이다. 니체는 이러한 점에서 비극 합창단의 역할에 관한 쉴러의 해석을 따르고 있다. 따라서 이런 합창단은 그 형식상 아폴론적인 것이다. "노래와 춤은 이제 더 이상 본능적인 자연도취가 아니다. 디오니소스적으로 흥분된 합창대는 더 이상 무의식적으로 봄의 충동에 사로잡힌 민중이 아니다. 진리는 이제 상징화된다." 즉 디오니소스적인 진리(근원적 일자, 영원한 생명과 하나라는 것)를 구체적인 모습으로 전달함으로써 위안을 주는 것이 합창단이라고 할 수 있다.

 

이에 덧붙여 음악과 드라마의 조화가 비극이고 그 가운데서도 음악이 우위를 차지하듯이 "합창단의 관점으로부터만 무대와 무대의 행위가 설명된다." 합창단은 디오니소스적 군중의 상징이고, 모든 관객은 그러한 합창단과 자신을 동일시하며, 이런 의미에서 합창단은 현실을 떠난 자유로운 이상적 관객이다. 그리고 그러한 관객으로서의 합창단만이 오직 무대라는 가시적 세계를 바라보는 자이며, 그러한 세계를 "본래적으로 산출하는 자"이다. 요컨대 "디오니스소적인 것의 환상이 합창단이고 그러한 합창단의 환상이 무대의 사건이다." 디오니소스적인 일체감이 아폴론적인 환상으로 나타난 것이 합창단이고, 그러한 합창단이 상징하는 구체적 내용 즉 디오니소스 신의 고통과 기쁨, 즉 개별화의 붕괴에서 비롯되는 고통과 동시에 거기서 생겨나는 기쁨을 환상을 통해 구체적으로 나타내는 것이 무대의 드라마이다. 이러한 환상은 개별적인 영웅들이 가면을 통해 자신을 가림으로써 개체를 넘어선 디오니소스 신의 모습을 표현하는 것을 통해 가능하다. 그리고 무대에서 벌어지는 운명의 힘과의 마주침은 개별화의 차원에서는 고통을 주는 것이지만 그러한 차원을 넘어선 근원적 일자의 차원에서는 영원한 생명의 기쁨을 준다. 개별적인 "비극의 주인공은 절멸하지만, 그는 단지 현상일 뿐이고 의지의 영원한 생명은 그러한 절멸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 물론 이러한 무대에서 대면하는 디오니소스적인 것은 아폴론적 형상(대사, 행동, 플롯 등)을 통해 관객들에게 다가감으로써 관객들이 직접 디오니소스적인 것과 대면하는 것을 막아준다. 아폴론적인 것이 디오니소스적인 것의 부담에서 벗어나게 해준다는 것이다. 또 이러한 부담 경감은 합창단이 무대 위의 현실을 관객들이 자신의 현실과 동일시하지 못하게끔 하는 기능을 통해서도 일어난다. 이런 의미에서 합창단은 현실에 대한 장벽일 뿐만 아니라 무대의 현실과 관객 사이에 쳐진 장벽이라는 해석도 가능한 것이다. 

 

8. 맺는 말

 

이제 『비극의 탄생』에서 니체의 가장 중요한 명제라고 여겨지는 것을 고려할 차례이다. 그것은 "세계와 현존은 미감적인 현상으로서만 영원히 정당화된다"는 명제이다. 이 명제는 이 세계의 현상이 디오니소스적인 근원적 의지 자신의 창조적 놀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세계과 현존에 대한 도덕적 정당화나 신학적 정당화의 가능성은 배제된다. 그리고 이 명제를 받아들인다면 고통조차도 긍정할 수 있게 된다. 왜냐하면 그러한 고통 역시 디오니소스적인 근원적 의지의 관점에서 보면 자신의 놀이과정에서 나타나는 우연적 사건일 뿐이기 때문이다. 니체가 보기에 이러한 근원적 의지의 자기 유희를 형상화시켜 드러내 보여줌으로써 삶을 긍정하게 해주는 것이 바로 그리스 비극이다. 비극적 신화에서 나타나는 고통받는 영웅을 통해 현실은 신성화된다. 영웅적 인간의 불가피한 고통은 이 세계가 의지 자신의 유희로서만 정당화될 수 있다는 점을 알려준다. "비극적 신화는 추하고 부조리한 것조차도 의지가 자신과 하는 놀이라는 점을 말해준다." 이런 의미에서 "디오니소스적인 것은 현상 세계 전체를 존재하게 하는 근원적인 예술적 힘으로 나타난다."

 

위에서 언급되 니체의 명제는 비극에 대한 형이상학적 해석의 근본가정이자 원리로 볼 수 있다. 말을 바꾸면 의지의 자기유희로서만 정당성을 얻게 되는 이 세계와 그런 의미로 해석된 고통과 기쁨을 가장 잘 보여주고 있는 것이 바로 그리스 비극이다. 그리고 그리스 비극에 대한 니체의 이러한 형이상학적 해석의 핵심요소가 바로 아폴론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이다. 이와 같은 두 요소는 근원적 일자로서의 자연이 지닌 예술충동으로서 현상세계와 예술세계를 성립시키는 힘이며, 서로 대조적인 경향을 갖고 있으나 결코 분리될 수 없는 근원적 일자의 동일한 충동의 양 측면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니체의 형이상학적 비극 해석의 중요한 함축은 인간 중심적인 전통 형이상학에 대한 비판이라는 점이다. 니체에 대한 최초의 체계적이고 철학적인 이해를 시도했던 하이데거는 니체를 서구 형이상학의 정점에 위치시킨다. 하이데거에 의하면 니체는 서구 형이상학의 완성자이며, 그러한 형이상학의 핵심 원리가 힘에의 의지이고 힘에의 의지가 주체성의 원리이기 때문에 주체성의 형이상학자이다. 그런데 니체 철학 자체는 니체 스스로 분명하게 밝히고 있듯이 과거의 전통 형이상학과의 대결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따라서 니체 자신은 하이데거의 이러한 해석을 받아들이기 힘들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괴리는 어디에서 연유하는 것일까? 한 편으로 그것은 하이데거의 의도적인 오해에서 비롯되었을 수 있다. 다시 말해 하이데거 자신이 과거 형이상학과 단절하였다는 것을 결정적으로 보여주기 위해서 니체를 전통 형이상학의 완성자이자 종말로 규정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다른 측면에서 본다면 하이데거가 니체를 해석하는 과정에서 니체 철학을 구성하는 전통 형이상학에 대한 비판의 핵심에다가 상대적으로 적은 비중을 두고 있기 때문이라는 가설도 세워봄직 하다. 그러한 핵심이 바로 니체의 디오니소스적인 것 혹은 비극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요컨대 하이데거가 니체를 전통 형이상학의 완성자로 파악한 이유는 니체의 비극적인 것의 의미를 제대로 평가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해석도 가능하다는 것이다. 

 

니체는 하이데거의 해석과는 정반대로 기존의 철학, 즉 전통 형이상학이 니힐리즘에 빠질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오히려 인간을 척도로 삼는 소박성 때문이라고 진단하고 있다. 따라서 니체가 말하는 긍정적 의미의 니힐리즘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그러한 소박성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이러한 소박성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사물과 세계를 인간 주체성을 중심으로 제단하는 사고방식을 버려야 한다. 이러한 사고의 전환과 가치의 전도에서 결정적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그리스 비극 속에서 형상화된 미감적 형이상학이다. 이러한 미감적 형이상학은 이론적 인식의 한계를 보여주고 인간 합리성의 한계를 드러내는 동시에 그러한 한계에 대한 인정을 통해서만 인간이 진정 자유롭고 성숙한 상태에 이를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인간 주체 중심의 형이상학에 대한 비판을 통해 성숙하고 자유로운 인간과 세계의 창조를 목표로 했다는 점에서 형이상학적 비극 해석을 통한 니체의 비극적 세계관은 스피노자의 인간 중심주의 비판과 연결될 수 있을 것이다. 스피노자는 그의 『에티카』1장 부록에서 전통적 의미의 목적론에 대한 비판을 통해 인간의 소박성과 어리석음을 비판하고 있다. 스피노자는 그러한 비판을 통해 인간이 진정한 자유에 이르는 길은 모든 것을 영원의 관점에 아래서 바라보는 것을 통해 가능하다고 한다. 들뢰즈도 이런 의미에서 니체를 스피노자주의자라고 규정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임건태 / 대동철학회 논문집 「大同哲學」28 /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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