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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자(朱子, 1130-1200)/주자

불가(佛家)에 대한 평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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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가는 性을 空으로 여기지만 유가는 性을 實로 여긴다. 불가에 대한 주자의 평론은 주로 이 점에 근거하고 있다. 어록은 말한다.

 

겸지가 물었다. "현재 다들 불교의 설은 無, 노자의 설은 空으로 보는데, 空과 無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空은 有無를 겸한 말이다. 도가는 반은 有이고 반은 無라고 주장하여 '과거는 모두 無이나 현재는 有이다' 말하므로 空이라고 개괄한 것이다. 그러나 불가는 모두 無라고 주장하니 과거도 無요, 현재도 無이며, 色은 空이요 空은 色이다. 크게 만사만물, 작게는 모든 뼈마디와 기관들을 모조리 다 無에 귀결시켰다. 그리하여 온종일 밥을 먹으면서도 쌀 한 톨 씹은 적이 없다고 말하고, 옷을 입고서도 실 한오라기도 걸친 적이 없다고 말한다."

 

불가는 만물을 허깨비로 여긴다. 즉 "色은 空이다" 화엄종에서 말한 理와 事는 원융무애(圓融無碍)하고 그 事는 구체적인 사물을 지칭한다. 구체적인 사물은 생멸하고 무상하다. 그 사물이 있다는 점에서 보면 진여(眞如)는 空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으나 사물이 무상하다는 점에서 보면 空이 아닌 그것도 여전히 空이다. 따라서 진여 안에 완연히 존재하는 것도 역시 허깨비다. 반면에 태극안에 구비된 온갖 理의 경우는 뭇 理가 모두 시공을 초월하여 영원히 존재한다. 그 실제적 사례는 생멸하고 변화하지만 뭇 理는 생멸과 변화를 논할 수 없다. 그러므로 태극은 空이 아니다. 주자의 불가 비판은 이 점에 주목하여 인간의 性, 즉 태극의 전체에는 뭇 理가 다 구비되어 있어 理세계는 空일 수 없으므로 性은 空일리 없다고 주장했다. 주자는 말했다.

 

불교의 空이론이 전혀 옳지 않은 것은 아니다. 불교의 空 안에도 모름지기 도리가 있어야 할 것이다. 만약 우리가 空임을 주장하며 실제적 도리의 존재를 모른다면 대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것은 마치 어떤 연못의 물이 너무나 맑고 깨끗하여 보기에 아무 물도 없는 것 같아서 텅 비었다고 말한 경우와 같다. 손으로 그 물의 온도를 느껴보지 않으면 그 안에 물이 있는지 모른다. 불교의 견해가 바로 이와 같다. 요즘 학자들은 격물치지를 중시하는데 바로 그 점부터 철저히 살펴야 한다.

 

理세계는 "정결하고 광할한 세계"로서 "방향과 장소도 없고 형체도 없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것을 空으로 여기거나 無로 여기면 안 된다. 불교의 空이론은 그 근거가 있긴 하므로 "전혀 옳지 않은 것은 아니다." 理는 이미 존재하는 이상 '모든 것이 다 空'이라고 할 수는 없다. 주자는 또 말했다.

 

불교는 마음은 텅 비어 있고 아무 理도 없다고 여기지만 유가는 마음이 비록 텅 비었어도 온갖 理가 구비되어 있다고 여긴다.

 

유자는 理가 생기지도 않도 없어지지도 않는다고 여기나 불교는 영혼이 생기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는다고 여긴다.

 

우리의 性은 태극의 전체로서 그 안에는 온갖 理가 모두 구비되어 있고 생기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는다. 오직 생기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기 때문에 理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도 理에 따라 행하지 않을 수 없다. 주자는 말했다.

 

천하에는 오직 이 도리만 있으니 여하튼 벗어날 수 없다. 불가와 도가는 인륜을 멸하고 있지만 그들 자신도 역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예컨대 부자관계를 무시하면서도 도리어 그들의 스승을 받들고 제자를 아들로 삼으며 연장자는 사형으로, 연하자는 사제로 삼고 있다. 즉 불가는 다만 거짓된 것만을 움켜쥐고 있으나 성현은 참된 것을 보존하고 있다.

 

사회의 조직은 반드시 理에 따른다. 불교도는 사회를 벗어나고자하지만 그들 자신의 단체가 곧 하나의 사회이니 부득불 사회의 理에 따라 조직하지 않을 수 없다. 즉 "천하에는 오직 이 도리만 있으니 여하튼 벗어날 수 없음"을 알 수 있다. 주자는 불가는 이런 性을 도외시하고 오직 영혼이 생기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는다고 여긴다. 즉 불가는 마음을 性으로 오인한 것이다. 어록은 말한다.

 

서자융이 마른 사물에도 性이 있는지의 여부에 대한 논의를 하고 있었다. 주자가 말했다.

"性은 理이다. 사물이 존재하면 곧 理가 있다. 자융의 오류는 마음을 性으로 여긴 점인데, 불교의 경우와 비슷하다. 다만 불가는 저 마음을 아주 정미하게 갈고 닦아 마치 하나의 물건처럼 한 껍집을 벗기고 또 한 껍질을 벗겨서 더 이상 벗길 데가 없는 극한까지 벗겨 저 마음을 번쩍번쩍 빛나게 닦으면 그것이 곧 性이라고 간주한다. 그래서 그런 性이 바로 유가의 성인이 말한 마음에 불과함을 알지 못한다. 따라서 상채는 말 하기를 "불가가 말한 性은 성인이 말한 마음이고 불가가 말한 마음은 성인이 말한 의지"라고했다. 마음은 그저 理를 담고 있는 것일 뿐이다. 불가는 원래 저 理를 전혀 이해하지 않고서 지각운동을 性으로 간주했다.

예컨대 시각, 청각, 언어, 용모의 경우 성인은 시각에는 시각의 理, 청각에는 청각의 理, 언어에는 언어의 理, 동작에는 동작의 理가 있다고 여겼으니 즉 기자가 말한 명철, 총명, 정당, 공손, 슬기가 그것이다. 그러나 불가는 그저 보고 듣고 생각하고 동작할 수 있는 것을 性으로 여긴다. 그러니 시각과 청각이 밝든 말든, 언어가 합당하든 말든, 생각이 슬기롭던 말든, 일체를 전혀 상관하지 않는다. 즉 이런 저런 것 가리지 않고 모두 다 性으로 간주한다. 그들은 저 理에 대한 논의는 무조건 두려워하여 없애버리려고 하니 그야말로 고자가 말한 '생긴 그대로가 性이다'는 주장이다.

 

 

마른 사물은 비록 지각은 없으나 그것이 사물인 이상 반드시 그 理가 있으니, 그 理가 곧 그것의 性이다. 지각은 마음에 속하는데 마른 사물이 지각이 없다고 해서 그것이 性이 없다고 여기면 그것은 마음을 性으로 오인한 것이다. 지각 운동은 다 마음의 활동인데 불가는 지각 운동의 기능을 性으로 인정했으므로 그들이 인정한 것은 사실 마음이었다. 마음은 실제적인 존재이므로 역시 형이하의 존재이다. 그러나 理는 다만 자존하므로 형이상의 존재다. 따라서 주자 철학은 보통 말하는 유심론이 아니고 현대의 신실재론에 가깝다. 애석하게도 중국철학에는 논리가 발달하지 않았던지라 주자도 그 방면에 힘쓰지 않았고 따라서 그 理가 말한 理느 본래는 순전히 논리적인 것이었으나 윤리적인 것과 뒤섞이게 되었다. 예컨대 '시각의 理'가 시각의 형식을 지칭할 때는 논리적인 것이나, 시각이 '명철'해야 함을 지칭할 때는 윤리적인 것이다. 주자는 이 두 측면을 하나로 합하여 한 사물이 그러한 까닭으로서의 理는 동시에 그것의 당위성이기도 하다고 여겼다. 주자의 흥취는 윤리적인 것이었고 논리적인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플라톤도 이러한 경향이 있었으나 다만 주자처럼 심하지 않았을 뿐이다. 중국철학은 대체로 윤리적 측면을 중시했다.

 

중국철학사 / 펑우란 / 박성규 옮김 / 주자

 

눈에비친햇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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