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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자(朱子, 1130-1200)/주자

주자 - 인(人), 물(物)의 성(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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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자는 말했다.

 

사람이 생기는 것은 理와 氣가 결합하기 때문이다. 천리는 본디 넓고 넓어 다함이 없으나, 氣가 없으면 理는 있어도 붙을 대상이 없게 된다. 즉 음양의 두 氣가 교감하여 응결되어 있어야 理가 붙을 수 있다. 사람이 말하고 움직이고 활동하는 모든 것들은 다 氣이고 理는 그 안에 존재한다.

 

 

理와 氣가 합하여 구체적인 개인이 되는데 그 氣 속의 理가 이른바 性이다. 사람만 性이 있는 것이 아니라 사물에도 性이 있다. 담연은 "무정의 사물에도 性이 있다"고 주장했는데, 주자도 그 영향을 받았는지 모른다. 주자는 말했다.

 

천하에 性이 없는 사물은 없다. 한 사물이 있으면 그 性이 있고 그 사물이 없으면 그 性도 없다.

 

한 사물의 性이 그 사물의 理이다. 어록은 말한다.

 

"마른 사물에도 그 性이 있다고 함은 무슨 뜻입니까?"

"그것 자체에 본래 그 理가 있다는 뜻이다."

 

 

"전에 「답여방숙서」에서 마른 사물에도 理가 있다고 하셨는데, 마른 기와나 섬들 따위에 무슨 리가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예컨대 대황(어혈 약재)이나 부자(약재) 따위도 마른 것이다. 그런데 대황은 부자일 수 없고 부자는 대황일 수 없다. "

 

 

앞에서 각 사물마다 하나의 태극이 있고 각 사물마다 태극의 전체가 있다고 했다. 그런데 사물에는 단지 그것이 그 사물인 까닭으로서의 理만 나타나고 태극의 전체는 나타나지 못하는 까닭은 사물이 타고난 기가 그것을 은폐하고 막고 있기 때문이다. 어록은 말한다.

 

"사람과 사물은 모두 천지의 理를 타고나 性이 되고, 천지의 氣를 받아서 형체자 된다고 하셨지만... 사물의 경우 (태극이 발현되지 못하고) 그렇게 된 것은 타고난 理가 온전하지 못한 때문인지 아니면 타고난 氣에 의해서 어두워지고 은폐되기 때문인지 모르겠습니다."

"받은 氣가 그 정도이기 때문에 그 理도 그 정도만 있다. 예컨대 개와 말은 그 몸의 氣가 그렇기 때문에 단지 그러한 일만 할 수 있는 것이다."

"각 사물마다 하나의 태극을 구비하고 있을진대, 理는 온전하지 못할 까닭이 없지 않습니까?"

"온전하다고 할 수도 있고 치우쳤다고 할 수도 있다. 理의 측면에서 보면 온전하지 못함이 없지만 氣의 측면에서 보면 치우침이 없을 수 없다."

 

 

하나의 氣에서 보면 사람과 사물은 다같이 그 氣를 받아 생긴다. 그러나 그 정조(정수와 조잡한 것)을 논하면 사람은 바르고 통명한 氣를 얻고, 사물은 치우치고 막힌 氣를 얻는다. 사람은 바른 氣를 얻으므로 理가 통명하고 막힘이 없지만 사물은 치우친 氣를 얻으므로 理가 막혀 지각이 없다." ... 사물 가운데 지각이 있는 것이 더러 있지만 겨우 한 방면에 통명한 것에 불과하니, 예컨대 까마귀가 효를 알고 수달이 제사를 아는 따위이다. 그래서 개는 지킬 줄만 알며, 소는 밭을 갈 줄만 안다.

 

 

사물이 받은 理는 본래 "온전하지 못함이 없지만" 다만 사물이 받은 氣가 더욱 치우치고 막혔기 때문에 理가 온전히 드러나지 못하고 치우쳐 보인다. 예컨대 "개와 말은 그 몸의 氣가 그렇기 때문에 단지 그러한 일만 할 수 있다." 즉 그 경우 개나 말인 까닭으로서의 理만 나타나는 것이다. "그 理도 그 정도만 나타날 수 있다'고 말해야 한다. 이 구체적 세계 속의 악은 모두 이러한 원인에서 비롯된다. 어록은 말한다.

 

"理는 선하지 않음이 없지만 氣는 어째서 청탁의 차이가 있습니까?"

"氣를 말하자면 곧 한기도 있고 열기도 있으며, 향기도 있고 악취도 있는 법이다."

 

 

음양오행이 태초에 어찌 바르지 않은 것이 있었겠는가? 다만 이리 왔다 저리 가는 사이에 바르지 않은 것인 생긴다.
理는 완전하고 지극히 선하다. 그러나 理가 氣에 실현될 때는 氣에 얽매여 완전해질 수 없다. 마치 원의 이데아는 본래 완전한 원이지만, 그것이 물질에 구현되어 구체적 원의 사물이 될 때의 원은 절대적 원이 될 수 없는 것과 같다. 실제 세계의 모든 불완전성은 氣에 의해 얽매인 데서 비롯된다. 氣가 이러하기 때문에 사람의 경우도 맑은 氣를 얻는 사람, 탁한 氣를 얻는 사람이 있다. 주자는 말했다.

 

사람이 타고난 바는 어둡고 맑거나 맑고 탁한 차이가 있다.

 

청명한 氣를 타고난 사람이 성인이고 혼탁한 氣를 타고난 사람이 우인이다. 주자는 이 이론이 맹순이래 유가에서 쟁론해온 성선, 성악의 문제를 완전히 해결할 수 있다고 여겼다. 어록은 말한다.

 

"기질지성의 학설은 누구에게서 비롯되었습니까?""횡거와 정자에서 비롯되었다. 그것은 성문(聖門)에 지극히 공을 세웠고 후학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 그것을 읽어보면 횡거와 정자 이전에 그것을 언급한 사람이 없었다는 사실을 깊이 느끼게 된다. 가령 한유의 「원성(原性)」에서의 삼품의 설은 그 내용은 옳지만 기질지성이나 성이 어떻게 삼품으로 되는지 명확히 설명하지 못했다. 또 맹자의 성선의 설은 본원처만 말했고 그 아래의 기질지성은 언급하지 않았기 때문에 온갖 해설만 분분했고 결국 제자백가의 성악 혹은 선악의 혼재의 설을 초래했다. 그러므로 횡거와 정자의 설이 좀더 일찍 나왔더라면 저러한 온갖 설들은 자연히 분쟁의 여지가 없었을 것이다. 즉 횡거와 정자의 설이 수립되자 여타 학자들의 설은 소멸되었다. 그리하여 횡거는 '형체가 생긴 이후 기질지성이 생겼으니, 기질지성을 잘 되돌이키면 천지지성이 보존된다. 그러므로 기질지성은 군자가 성으로 인정하지 않는 바가 있다'고 말했고 명도는 '성을 논하고 氣를 논하지 않으면 부족하고 氣만 논하고 성을 논하지 않으면 밝지 못하니, 이 두 가지를 둘로 여기면 옳지 않다'고 했다. 또한 인의예지가 성이라고 말하지만 세상에는 날 때부터 그러한 모습이 없는 사람이 있는 것은 왜이겠는가? 단지 기품이 그러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만약 그 氣를 논하지 않으면 저 성선설의 도리는 온전하지 못하여 부족한 것이 된다. 또 만약 단지 기품만 논하여 어떤 기품은 선하고 어떤 기품은 악하다고만 말하고, 저 하나의 근원처에는 오직 저 도리가 있음을 논하지 않으면 명백해지지 않는다. 이 성에 대한 논의는 공자, 증자, 자사, 맹자가 이해한 이후 아무도 그 도리를 해설한 자가 없었다."

임광조가 주자에게 물었다.

"천지의 氣가 혼탁하게 혹은 청명하게 뒤섞일 때 그 理 역시 그에 따라 혼탁하거나 청명하게 뒤섞이는 것 아닙니까?"

"理는 항상 그대로 있다. 다만 氣가 스스로 그렇게 될 뿐이다."

 

 

주자는 이곳에서 다만 횡거와 이정의 설을 서술했다고만 밝혔으나 주자의 기질지성 강론은 그 자신의 정연한 철학체계에 입각한 것이므로 횡거나 정자보다 훨씬 더 완비되었다.주자는 말하기를 "사람이 말하고 움직이고 활동하는 모든 것들은 다 氣이다"했다. 어록은 말한다.

 

"영명한 기능은 心입니까, 아니면 性입니까?"

"영명한 기능은 心이고 性이 아니며 성은 理일 뿐이다.

 

 

"지각은 마음의 영명함이 본래 그런 것입니까, 아니면 氣의 행위입니까?"

"오직 氣만 아니니 먼저 지각의 理가 있다. 즉 理는 홀로 지각하지 못하니, 氣가 모여 형체를 이룬 다움 理와 氣가 결합해야 지각할 수 있다. 마치 저 등불의 경우처럼 기름을 얻어야 온갖 불꽃이 생기는 경우와 같다."

 

 

일체의 사물은 그 理가 있으므로 지각도 지각의 理가 있다. 그러나 지각의 理는 단지 理일 뿐이고 지각의 구체적 사례는 반드시 "理와 氣가 결합해야" 비로소 생길 수 있다. 모든 구체적 사물은 다 재료와 형상이 결합하여 완성된 것들이다. 理는 반드시 氣와 결합해야 비로소 드러날 수 있으니, 마치 등불이 반드시 기름에 의존하는 것과 같다. 우리의 지각과 사려는 이미 이 구체적 세계 내에 존재하는 것이므로 氣와 理가 결합한 이후의 일이다. 우리의 지각과 사려가 이른바 "영명한 기능"이다. 영명한 기능은 心이고 性이며 性은 理일 뿐이다." 心은 구체적 활동이 있을 수 있으나 理는 그렇게 할 수 없는 것이다. 주자는 또 心, 性, 情의 관계를 이렇게 논했다.

 

性, 情, 心은 맹자와 횡거가 잘 말했다. 仁은 性이고 측은은 情이니 마음에서 생기는 것일 수밖에 없다. 즉 마음은 性과 情을 통괄하는 것이다. 性은 단지 응당 그와 같아야 하는 것으로서 다만 理이니 무슨 일이 있는 것은 아니다. 무슨 일이 생겼으면 이미 선하거나 혹은 악이 있을 수밖에 없으나, 아무 일도 없고 오직 理만 있다면 선하지 않음이 없다.

 

性은 구체적 사물이 아니므로 선하지 않음이 없다. 情은 이 구체적 세계 속의 사물이므로 반드시 마음에서부터 생긴다. 性은 氣속의 理이므로 역시 마음 안에 존재한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마음은 性과 情을 통괄한다"고 했다. 주자는 또 心, 性, 情과 재(才)의 관계를 이렇게 논했다.

 

性은 마음의 理이고 情은 마음의 활동이다. 才는 그 情이 할 수 있는 능력이다. 情과 才는 아주 밀접한 관계에 있다. 다만 情은 사물을 만나 발현되어 물결처럼 진행하는 것이라면 才는 그렇게 할 수 있는 능력이다. 요컨대 천갈래 만갈래의 복잡한 실마리들이 다 마음에서 나온다.

 

才에는 마음의 능력으로서 활동할 수 있는 기력이 있다. 마음은 관장하고 주재하는 것이므로 위대한 것이다. 마음을 물에 비유하면 性은 물의 理이다. 性은 물의 고요함에 해당되고 情은 물의 동요에 해당되고 욕망은 물이 흘러서 범람한 경우다. 才는 물의 기력으로서 흐를 수 있게 하는 힘이다. 그래서 흐름이 급하고 느리게 되는 현상은 才의 차이이다. '性은 하늘에서 타고나고 才는 氣에서 타고난다'는 이천의 말이 바로 이것이다. 오직 性은 일정하나 情과 마음과 才는 합하여 氣가 된다.

 

모든 사람이 타고난 理는 동일하므로 "오직 性은 일정하다" 그러나 氣는 청탁의 차이가 있으므로 이 점에서 각 사람은 서로 차이가 있다. "욕망은 물이 흘러 범람한 경우"로 리학자들은 欲과 理 또는 인욕과 천리를 대립시켰다.

 

 

 

참고 : 중국철학사 / 펑우란 / 박성규 옮김 / 주자

 

눈에비친햇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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