객관적 理 가운데는 도덕적 원리가 존재한다. 우리의 性이 바로 객관적 理의 총화이므로 우리의 性 안에는 그 자체 도덕적 원리가 있다. 즉 仁, 義, 禮, 智가 그것이다. 주자는 말했다.
仁, 義, 禮, 智는 性이다. 性은 만질 수 있는 모습이나 그림자가 없고 오직 그 理가 있을 뿐이다. 오직 情만 직접 발견할 수 있는데 측은, 수오, 사양, 시비가 바로 그 情이다.
마음이 온갖 일을 할 수 있는 까닭은 온갖 도리를 구비했기 때문이다. .....어떻게 저 네 가지를 발견할 수 있는가? 측은지심에 근거하여 仁이 있음을 알고, 수오지심에 근거하여 義가 있음을 안다.
理는 형이상의 존재로서 추상적인 것이니 흔적과 모습을 찾을 수 없다. 그러나 우리에게 측은의 情이 있기 때문에 우리의 性에는 측은의 理인 이른바 仁이 있음을 미루어 알 수 있고, 우리에게 수오의 情이 있기 때문에 우리의 性에는 수오의 理인 이른바 義가 있음을 미루어 알 수 있고, 우리에게 사양의 情이 있기 때문에 우리의 性에는 사양의 理인 이른바 禮가 있음을 미루어 알 수 있고 우리에게 시비의 情이 있기 때문에 우리의 性에는 시비의 理인 이른바 智가 있음을 미루어 알 수 있다. 모든 사물마다 반드시 그것의 理가 있으니 理가 없다면 그 사물은 존재할 수 없다.
우리의 性 속에는 仁, 義, 禮, 智 뿐만 아니라 또 태극의 전체가 있다. 그러나 기품에 의해서 치우치기 때문에 온전히 드러날 수 없다. 이른바 성인은 이 기품의 치우침을 제거하여 태극의 전체를 완전히 드러낸 사람이다. 주자는 말한다.
이 理가 있은 후에 그 氣가 있고, 氣가 있으면 반드시 그 理가 있다. 그런데 맑은 氣를 타고난 사람이 성현인데, 이는 마치 보석이 맑고 깨끗한 물 속에 있는 경우와 같다. 탁한 氣를 타고난 사람이 우매한 사람인데 이는 마치 보석이 탁한 물 속에 있는 경우와 같다. 이른바 明明德이란 마치 탁한 물 속에 나아가 저 보석을 닦는 것과 같다. 또 사물에 있는 理는 마치 보석이 지극히 더럽고 탁한 곳에 떨어진 경우와 같다.
공자는 "사심을 극복하고 예로 돌아가라"고 했고 『중용 』은 "중화를 이룩하고 덕성을 높이고 학문을 추구하라"고 했고 『대학』은 "밝은 덕을 밝히라"고 했고 『서(書)』는 "인심은 위태롭고 도심은 미미하니 오직 정진하고 전일하여 진실로 중도를 견지하라"고 했거니와 성인의 천만마디는 다만 사람들에게 '천리를 보존하고 인욕을 소멸할 것'을 가르치려는 것이다. ....
인성은 본래 청명하나 마치 보석이 물 속에 있어 흐려져 그 빛이 보이지 않는 것과 같으니, 흐린 물을 제거하면 보석은 예전처럼 저절로 밝아진다. 자기 스스로 인욕에 의해서 가려졌음을 깨달을 수 있으면 곧 개명되므로, 오직 이 점을 중심으로 모든 노력을 경주해야 한다. 그리하여 격물을 추구하여 "오늘 하나의 사물을 궁구하고 내일 또 하나의 사물을 궁구하기"를 마치 유격대가 포위 공격하여 성을 공략하듯이 하면 인욕은 저절로 녹아 없어질 것이다. 따라서 정자께서 敬을 강조한 까닭은 내 자신에게 하나의 밝은 것이 이미 존재하니 '敬'이라는 글자를 견지하고 외적을 물리쳐 항상 늘 敬을 내면에 보존하면 인욕은 자연히 생기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공자께서도 "'仁'의 실행은 내 자신에게 달려 있지 남에게 달려 있겠는가?"라고 했거니와 긴요한 점은 바로 거기에 있다.
사람은 理에서 얻은 다음에 性이 생기고 氣에서 얻은 다음에 몸체가 생긴다. 性은 천리이니 이른바 도심(道心)이다. 사람은 氣로부터 타고난 육신에서 일어나는 情이 있는데 그 情이 "흘러서 범람한 경우"는 다 인욕이고 이른바 "人心"이다. 인욕은 사욕이라고도 한다. 즉 사람이 구체적 사람임으로 말미암아 생긴 情이 흘러서 범람한 경우를 지칭하면 사욕이다. 천리가 인욕에 의해서 가려진 것은 마치 보석이 탁한 물 속에 있는 경우와 같다. 그러나 인욕은 끝내 완전히 천리를 은폐할수 없는데 즉 천리가 인욕에 의해서 가려졌음을 아는 이 앎이 바로 아직 은폐되지 않은 천리의 모습이다. 이 점을 중심으로 "모든 노력을 경주하여" 공부에 힘써야 한다. 공부는 두 측면으로 나누어지는데, 정이천이 말한 용경(用敬)과 치지(致知)가 그것이다. 단지 "내 자신에게 하나의 밝은 것이 존재하니" 마음 속에 이 점을 늘 기억하는 것이 "용경"의 공부이다. 또 "치지"를 해야 하는 까닭을 주자는 이렇게 말했다.
"치지는 격물에 달려 있다"고 함은 내 앎을 온전히 이루려면 사물에 나아가 그 理를 궁구해야 한다는 말이다. 사람의 마음은 영명하여 모든 앎이 구비되어 있고, 천하의 사물에는 다 理가 내재해 있다. 다만 그 理를 제대로 궁구하지 못한 까닭에 내 앎이 온전하지 못한 상태에 있다. 그렇기 때문에 『대학』은 첫 가르침에서 반드시 공부하는 이들로 하여금 천하사물에 나아가 항상 내가 이미 알고 있는 理를 바탕으로 더욱 궁구하여 그 극치까지 도달하려고 노력하도록 가르친다. 그리하여 오랫동안 노력하여 어느 시기에 활연관통(豁然貫通 : 환히 깨달음)하면, 온갖 사물의 표리정조(表裏精粗 : 표면과 심층 및 심오함과 피상적 측면) 등 전부가 파악되고, 내 마음의 전체대용(全體大用 : 온전한 본체와 광대한 작용)도 전부 밝아진다."
격(格)은 '이른다'는 뜻이고 物은 일과 같다. 사물의 理에 끝까지 도달하여 전부 그 극치까지 도달하려는 것을 뜻한다. 이것이 주자의 격물설로서 후대 육왕 학파의 큰 공격을 받았다. 육왕 일파는 그러한 공부는 지리(支離 : 무질서)하다고 여겼다. 그러나 주자의 철학체계 전체에서 보면 이 격물의 수양방법은 자연스럽게 그의 전 체계와 잘 어울린다. 주자에 따르면 천하사물은 모두 그理가 있고 우리 마음 속의 性은 천사하물의 理의 전체이므로 천하사물의 理를 궁구하는 것은 곧 우리 性 속의 理를 궁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 性 속의 한 理를 궁구하고 내일 또 性 속의 한 理를 궁구하여 理를 많이 궁구할수록 우리의 氣 속의 性은 그만큼 더 밝아진다. 궁구한 것이 많으면 환히 깨닫는 때가 있게 된다. 이때에 이르면 만물의 理가 다 내 性 속에 있음을 알게 된다. 그래서 "천하에 性 밖의 사물은 없다"고 말했다. 이 경지에 이르면 "온갖 사물의 안팎과 깊이와 윤곽 등 전부가 파악되고, 내 마음의 온전한 본체와 광대한 작용도 전부 밝아진다." 이 수양방법을 쓰면 과연 그 목적에 도달되는지의 여부는 다른 문제이다. 다만 주자의 철학체계에서 보면 주자는 정녕 이 설을 견지할 만했다.
중국철학사 / 펑우란 / 박성규 옮김 / 주자
눈에비친햇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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