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모든 인간은 본성적으로 알기를 원한다.” 이렇게 아리스토텔레스(이하 A)는 자신의 『형이상학』을 시작한다. 이 책은 강의모음집으로 매우 어렵다(아랍의 철학자 아비센나는 40번이나 읽었음에도 이해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모든 사람은 알기를 원한다. 그러나 앎에는 등급이 있다. 가령 단순히 경험만을 가진 사람은 X가 아파서 약을 썼을 때, 어떤 약이 잘 들었는지는 알지만 왜 그런지 모를 수 있다. 반면 기예가는 그 이유를 안다. X가 열로 고통을 받았고 그 약은 열을 내리는 속성이 있다는 정도로 말이다. 이때 그는 보편자를 아는 것인데, 왜냐하면 그 약이 그러한 병을 앓는 모든 사람들을 치유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기예는 모종의 지식을 산출하는 것이다. 하지만 A는 지혜가 아니라고 말한다. 최상의 지혜란 어떤 것을 산출하거나 어떤 결과를 보증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것이 아니다(즉 공리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실재의 제1원리들에 대한 이해, 지식 자체를 위한 지식을 목표로 하는 것이다. A는 지식 자체를 위하여 지식을 추구하는 사람을 어떤 실제적 효과를 얻기 위해 어떤 특수한 종류의 지식을 추구하는 사람보다 상위에 위치시킨다. 다른 말로, 단순히 그 결과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 자체를 위해 바람작한 학문이 보다 상위의 학문이다.
그 자체를 위해 바람직한 학문은 제1원리들 또는 제1원인들에 대한 학문이며 경이에서 비롯된다. 사람들은 사물에 대해 경이로움을 느끼기 시작하면 그들이 본 사물에 대한 설명을 알고 싶어 한다. 철학은 이해하려는 욕구에서 비롯되는 것이지 그 지식이 가지고 있을 수 있는 어떤 유용성 때문에 생기는 것이 아니다. A는 형이상학은 실재의 궁극적 원인 및 본성에 대한 지식을 갈구하는 철학자 또는 애지자가 탁월한 지혜라고 말한다. 지혜는 사물들의 제1원리들을 다루며 최고도의 보편적 지식이다. 이것은 그것이 감각들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진 학문이라는 것, 가장 추상적인 학문이라는 것을 의미하며 가장 커다란 사유의 노력을 포함하는 학문들 가운데 가장 어려운 학문이다. “감관 지각은 모두에게 공통적이어서 쉬울 수 있지만 지혜의 지표는 아니다.” 형이상학은 가장 추상적이지만 가장 엄밀하다.
2. 『자연학』에 따르면 철학은 4가지의 원인을 다룬다.
① 사물의 실체 (substance 또는 essence)
② 질료 (matter 또는 subject)
③ 운동의 근원 또는 작용인 (efficient cause)
④ 목적인 (final cause 또는 god)
『형이상학』 1권에서 A는 이전 철학자이 다룬 원인을 검토한다. 탈레스와 초기 철학자들은 그 자체로는 생성되지도 않고 소멸되지 않는 원리, 특수한 대상들이 모두 그것으로부터 발생하고 그것으로 돌아가는, 사물의 가장 궁극적 기체를 발견하려고 노력하는 가운데 질료인에 몰두했다. 그들이 탈레스, 아낙시메네스, 헤라클레이토스, 엠페도클레스다. 그리고 이런 원소들이 하나의 질료인으로 가정되어도 왜 이런 생성이 일어나고 대상들이 생성 소멸하는 운동의 원천은 무엇인가에 대한 고민으로 전화의 원인을 찾으려는 노력이 일어난다. 그들이 엠페도클레스와 아낙사고라스다. 아낙사고라스는 어떤 질료도 사물의 아름다움과 선함을 나타내는 이유가 되리 수 없음을 간파하고 물질세계 안에서 정신이 활동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앞서간 것이 틀림없지만 그럼에도 정신을 단지 기계장치로서의 신처럼 정신을 사용하곤 버린다. 엠페도클레스는 사랑과 투쟁이라는 능동적 원리들을 가정했지만 일관되지 않았다. 그러므로 이 두 철학자는 4원인 중 질료인과 운동의 근원이라는 구별하는 데만 성공했을 뿐이다. 그럼 플라톤은 어떨까? A는 플라톤이 형상(본질의 원인)과 질료인이라는 두 원인만을 사용 했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것은 공정하지 못한 것일 수도 있다. 이원론 때문에 구체적 실체를 만드는 데는 실패하지만 플라톤은 『티마이오스』에서 데미우르고스라는 개념을 도입해 전화의 목적은 선의 실현이라는 목적론을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3
A는 『형이상학』 4권에서 형이상학은 존재 그 자체에 관여하며 존재로서의 존재에 대한 연구라고 선언한다. 개별자의 특수성격이 아니라 존재 그 자체 및 그것의 본질적 속성을 연구한다는 말이다. 어떤 것이 존재한다고 말하는 것은 그것이 일(一)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단일성은 존재의 본질적 속성이다. 그러므로 존재 그 자체가 모든 범주에서 발견되듯이 단일성 역시 모든 범주에서 발견된다. 단일성과 선은 모든 범주에 적용될 수 있고 어떤 하나의 범주에 제한되지 않으며 유(類)를 구성하지 않기 때문에 존재의 범주초월적 속성이다.
그러나 용어 ‘존재’가 정확하게 동일한 의미로 존재하는 모든 것들의 속성으로 단정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실체가 존재하는 방식, 즉 존재를 소유하는 방식은 실체의 성질인 질(Quality)이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는 방식과 다르기 때문이다. 형이상학은 실체의 범주에 관계한다. 모든 사물은 실체이거나 실체의 성질이다. 그 가운데에서도 형이상학은 불변적 실체를 다룬다.
그리고 실체의 운동을 따라가면 운동의 원인이면서 그 자체는 부동인 불변의 존재가 적어도 하나는 있어야 한다는 논리에 직면한다. 운동의 현존하는 근원이 무한 소급되기 때문이다. 존재의 전 본성을 포괄하는 이런 부동의 실체는 신의 특성을 지닐 것이다. 수학 역시 실제로 이론적이고 부동의 대상들을 다루지만 질료와 분리되어 존재하는 않는다.
A는 16권에서 실체를 가변적 실체와 불변적 실체로 나눈다. 12권에서는 감각적이고 소멸하는 실체, 감각적이고 영원한 실체, 비감각적이고 영원한 실체로 나눈다.
그리스로마철학사 / 코플스톤 / 김보현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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