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클리 일병의 실재론 구하기
로크의 표상적 실재론은 상식과도 부합하는 세련된 이론인 듯하면서도 실상은 회의론으로 가는 지름길이다. 그 이론에서는 외부 세계가 존재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회의론의 난관에서 실재론을 구하겠다고 나선 철학자가 바로 버클리다. 그는 로크의 이론이 회의론에 빠지는 것을 보니 그의 이론 어딘가에 잘못된 구석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그 난관의 근원이 표상 너머에 물질이 있다고 가정하는 데 있다고 생각한다. 표상 또는 관념과 구분되는 물질이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필연적으로 회의론과 무신론에 빠질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실재론과 유신론을 구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감각 경험 너머에 물질이 있다는 생각을 포기해야만 한다.
버클리의 전략은 골치 아픈 ‘물질’을 존재 세계에서 없애버리는 것이다. 그의 <세 가지 대화>에 등장하는 하일러스는 물질의 존재를 믿는 사람이다. 사실 우리 대부분이 하일러스 같은 사람 아니겠는가? 그러나 하일러스는 버클리의 대변인 격인 필로누스에게 설득 당한다. 세상에 존재하는 것은 정신뿐이라고, 버클리의 주장은 다음과 같이 정리해볼 수 있다.
① 우리는 외부 세계의 대상들을 지각한다. ② 우리는 관념만을 지각한다. 따라서 ③ 외부 세계의 대상들은 관념이다.
첫째 전제는 별로 문제가 없어 보인다. 문제는 둘째 전제다. 로크 같은 표상적 실재론자들도 우리가 관념(표상)을 지각한다는 것을 부인하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그들은 관념을 지각함으로써 그것으로부터 외부 세계의 대상들을 추론해낸다. 그러나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그 추론은 어떻게 해도 정당화되지 않는다. 따라서 우리는 관념들만을 지각할 수 있을 뿐이다.
버클리에서는 로크의 1차 성질과 2차 성질의 구분이 없어진다. 로크의 1차 성질은 대상이 객관적으로 있는 것이고 우리의 감각 기관들이 그것을 정확히 복사해서 표상한다. 그러나 버클리가 보기에는 1차 성질마저도 우리 마음이 만들어낸 것이다.
로크에서 1차 성질과 달리 2차 성질을 주관이 만들어냈다고 보는 까닭은 2차 성질은 관찰자마다 다르게 느껴지기 때문이었다. 버클리의 대변인인 필로누스는 1차 성질에 관해서도 똑같이 말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한 대상이 이 눈에는 작고 매끄럽고 둥글게 보이지만 저 눈에는 울퉁불퉁하고 모나게 나타나기 때문에 그 대상 속에는 그 어떤 연장이나 형태도 들어 있지 않다고 결론을 내리는 것은 그것과 완전히 동일한 추론 방식이 아닌가?
동전의 모양을 예로 들어보자. 동전의 동그란 모양은 누구에게나 똑같이 보이므로 우리는 그것이 1차 성질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동전도 보는 위치와 방향에 따라 완전한 원으로도 보이고 타원으로도 보인다. 크기도 마찬가지다. 가까이서 보느냐 멀리서 보느냐에 따라 달라 보인다. 그리고 맨눈으로 보면 매끄럽고 둥글게 보이겠지만 현미경으로 보면 울퉁불퉁하고 모나게 보인다. 따라서 대상의 고유한 성질이라는 것은 없고 모든 성질들은 우리 마음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지각되는 것은 관념밖에 없다. 버클리에게는 색깔이나 냄새뿐만 아니라 크기나 모양도 모두 관념일 뿐이다. 우리는 상식적으로 외부 세계의 대상들을 지각한다고 알고 있다. 그런데 철학적으로 반성해본 결과 관념만을 지각한다. 버클리는 <인간 지식의 원리론 Treatise Concerning the Principles of Human Knowledge, 1710>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집, 산, 강 그리고 한마디로 모든 감각 기능한 대상들은 이해력에 의해 지각되는 것과 독립적으로, 자연스럽게 또는 실제로 존재한다는 생각이 이상하게도 사람들 사이에 널리 퍼져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이 어떤 대단한 확신과 묵인으로 이 원리를 품고 있다고 하더라도, 마음속에서 그것을 의심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만약 나에게 잘못이 없다면, 누구나 다 거기에 분명한 모순이 있다는 것을 지각할 것이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앞에서 말한 대상들은 우리가 감각으로 지각하는 것 말고 무엇이겠는가? 그리고 우리는 우리 자신의 관념과 감각 말고 무엇을 지각하겠는가? 그리고 이들 관념 가운데 어느 것 하나라도 또는 그것들을 복합한 것 중 어느 것 하나라도 지각되지 않고 존재한다는 것은 명백히 앞뒤가 안 맞는 말이 아니겠는가?
버클리는 어떤 것이 지각되지 않고 존재한다는 것은 모순이라고, 말도 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외부 세계의 대상들은 관념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버클리는 자신의 이론을 비물질론(immaterialism)이라고 부르지만 사람들은 보통 관념론(idealism)이라고 부른다. 바로 위와 같은 결론 때문이다. 관념론은 결국 외부 세계란 없고 관념만이 있을 뿐이라는 주장이다. 관념론은 데카르트의 방법적 회의와 경험론의 원칙을 끝까지 밀고 나가면 자연스럽게 도달하는 지점인 것 같다. 그리고 외부 세계의 대상들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주장은 실재론에 반대된다. 이것은 곧 회의론이다.
그런데 왜 <세 가지 대화>의 제목에는 회의론에 반대한다는 말이 붙어 있을까? 상식인인 하일러스가 반대한다는 것일까? 아니다. 버클리는 자신의 관념론이 회의론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이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그에게 외부 세계의 대상들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만 우리와 독립적인 물질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래서 비물질론) 우리의 관념으로서 존재하는 것이다(그래서 관념론). 물질이 존재한다고 가정하기 시작하면 골치 아플 뿐이다.
우리의 감각 경험으로는 물질의 존재가 보장이 안 되는 탓에 회의론으로 빠지기 십상이다. 사과는 우리 마음 밖에 존재하는 물질이 아니다. 그것들은 우리 마음이 직접 지각한 관념들이다. 우리는 지각되는 관념의 존재를 의심할 수 없다. 그 아픔이나 간지러움이 곧 관념이다. 마찬가지로 사과도 관념으로 존재한다면 그것의 존재를 의심할 수 없을 것이다. 이래서 버클리는 회의론에서 벗어나 실재론을 구하는 것이다.
TV 프로그램을 송신하는 신
여기서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만큼 유명한 버클리의 주장이 나온다.
존재하는 것은 지각되는 것이다(esse est percipi).
세상은 지각되는 한도 내에서 존재하는 것이다. 세상은 나의 관념 속에만 있다. 축구장에 직접 가지 못하는 사람들은 월드컵 축구 경기를 집에서 TV 화면으로 본다. 버클리 입장에서 보자면 이 화면이 곧 세상이다. 화면으로 중계되는 실제 축구 경기는 없다. 우리는 오직 화면으로만 볼 수 있다. 그런데 그게 곧 세상이다.
존재는 지각되는 것이라면 세상은 나에게 지각될 때만 존재할 것이다. 사과는 내가 볼 때만 존재한다. 그것도 독립적인 외부 세계에 사과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지각하는 시각 경험, 촉각 경험 등으로만 존재한다. 버클리는 그것을 지각의 다발(bundle)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사과는 내가 지각하고 있지 않은 동안에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이상한 결론이 나온다. 예전 코미디 프로에서 영구가 “영구 없다”라고 말하면서 얼굴을 내밀었다 숨겼다 했던 것처럼 사과는 내가 보고 있으면 존재하고 고개를 돌리면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버클리의 TV 화면은 우리가 안 볼 때는 꺼지고 보자마자 다시 켜진다. 상당히 이상하지만 우리가 아는 것이 거기까지라면 그 결론을 따라야 할 것 같다.
그러나 이상한 결론을 따를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버클리에게 영향을 받았다는 컬럼비아 대학의 총장이었던 새뮤얼 존슨(Samuel Johnson, 1696 - 1772)도 이 결론을 쉽게 받아들일 수 없어서 나름대로 멋있게 반박했다. 어떻게? 길가의 돌멩이를 발로 차면서 “이래도 돌멩이가 없니?”라고 말했다고 한다(이 새뮤얼 존슨을 유명한 사전 편찬자 새뮤얼 존슨(1709-1784)과 헷갈리는 사람이 많다).
그런데 아쉽게도 존슨은 버클리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다. 존슨이 돌멩이를 찬 것은 맞다. 엄청 아팠을 것이다. 그러나 버클리의 입장에서 보면 존재하는 것은 돌멩이의 시각 경험, 돌멩이와 부딪칠 때의 촉각 경험, 그 후 뒤따르는 통각 경험뿐이다. 그 관념들을 넘어서 외부 세계에 돌멩이가 존재한다는 것을 어떻게 아는가? 버클리도 세상이 우리가 지각할 때만 존재한다는 것을 어떻게든 설명해야 했다. 우리가 보지 않을 때는 사과가 없다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다. 우리가 보지 않을 때는 사과가 존재하지 않는 것일까? 우리가 알기로는 이 세계는 꽤나 규칙적이고 질서가 있다. 어떻게 사과가 있다가 없다가 할까? 여러분이 버클리라면 어떻게 했을까? 사과는 있다가 없다가 한다는 결론을 그냥 받아들였을까, 아니면 다른 방안을 내놓았을까? 책을 덮고 한번 생각해보라(힌트 : 버클리는 주교다).
버클리는 바로 신을 끌어들여 그 문제를 해결한다. 신이 내려 보고 계시니까 세상의 존재에 대해 걱정할 필요가 없다. 세상은 우리가 지각할 뿐만 아니라 신이 항상 지각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지각하지 않는 동안에도 계속해서 존재하는 것이다. 신은 세상이 계속적으로 존재하게 하는 역할을 할 뿐만 아니라 관념이 생기는 원인을 설명해주기도 한다. 나에게 사과의 관념이 생겼다. 표상적 실재론자들 같으면 외부 세계에 사과가 있기 때문에 그 관념(표상)이 생겼다고 말하면 된다. 그런데 우리와 독립된 외부 세계를 인정하지 않는 버클리는 이 관념이 왜 생겼다고 말해야 할까? 그리고 사과에 대한 내 관념과 친구의 관념이 같은 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바로 신이 그 관념들의 원인이라고 말한다. 비유하자면 누가 보든 TV에 똑같은 화면이 나오는 것은 신이 TV 프로그램을 보내주기 때문이다.
미궁에 빠진 버클리
이렇게 해서 버클리는 회의론과 무신론을 동시에 해결하고 있다. 그러나 대상들이 관념으로서 존재한다는 주장을 회의론에서 벗어났다고 인정하기는 힘들다. 버클리는 회의론이 ‘감각할 수 있는 것들의 실재를 부정하거나 전혀 모르겠다고 고백하는’ 입장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다른 철학자들이 생각하는 회의론은 ‘마음과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실재를 부정하거나 전혀 모르겠다고 고백하는’ 입장이다. 이 기준에서 보자면 버클리의 관념론은 분명히 회의론이다. 그리고 현대의 철학자들도 그의 입장을 반실재론으로 분류한다. 버클리의 실재론은 무늬만 실재론인 것이다.
한편 나에게 주어지는 경험만을 믿는 엄격한 경험론자인 버클리가 어떻게 신의 존재를 입증할 수 있을까? 마음과 독립적인 물질의 존재도 받아들이지 않는 그가 신은 어떻게 받아들일까? 많은 사람들이 세상의 존재는 받아들이지만 신의 존재는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 사람들을 설득할 수 있을까? 버클리에게 신이 없었다면 더 철저하고 일관된 철학자로 남았을 것이다.
신을 끌어들였든 그렇지 않았든 버클리가 회의론을 말끔하게 해소한 것 같지는 않다. 그에게서 진짜 관념과 가짜 관념이 구분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가 아무리 존재하는 것은 지각되는 것이라고 말해도 현실에서의 지각과 꿈에서의 지각은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 <세 가지의 대화>의 셋째 대화에서 하일러스는 이것을 알고 필로누스에게 묻는다. 필로누스는 대답한다.
상상력에 의해 형성된 관념들은 희미하고 불분명하네. 게다가 그것들은 의지에 완전히 종속되어 있네, ..... 그리고 그것들이 아무리 우연히 생생하고 자연적인 것으로 드러난다고 할지라도, 우리 삶의 앞의 사건들 및 그 후속의 사건들과 통일적으로 연결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그것들은 실재들과 쉽게 구별될 수 있네.
버클리가 보기에 진짜 관념은 가짜 관념에 비해 생생하고 우리 의지와 상관없고 다른 관념들과 관련되어 있다는 것이다. 가령 사과로부터 달디 단 냄새를 맡았다면 그 맛도 달아야 한다. 하지만 꿈에서라면 냄새는 단데 맛을 쓸 수도 있다. 그러나 <매트릭스>에서 매트릭스 안에서의 경험이나 <토탈리콜>에서 조작된 기억들을 생각해보라. 그것들은 충분히 생생하고 우리 의지와 전혀 상관없이 일어나며 다른 관념들과 잘 관렴되어 있다. 어떻게 진짜 관념과 가짜 관념을 구분할 수 있다는 말인가?
경험론의 원칙을 철저하게 밀고 나가면 회의론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고 솔직하게 인정한 철학자가 버클리의 뒤를 이은 경험론자 흄이다. 감각 경험 외에는 아무것도 믿을 수 없다고 말하는 그는 완벽한 회의론자의 길을 걷는다.
흄은 우리가 오직 감각 경험에 의해 주어진 것만 알 수 있으므로 감각 경험을 넘어서 외부 세계에 대해 어떤 것도 알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에게 확실한 것은 대상에 대한 감각 경험, 그의 용어로는 감각 인상(impression of sensation)뿐이다. 그런데 인상을 넘어서 그 대상 자체가 존재한다고 믿으려면 대상이 인상의 원인이 된다고 추론해내야 하지만 우리는 감각이 아닌 어떤 것도 경험하지 못한다. 따라서 대상의 존재에 대한 믿음은 정당화되지 못하는 것이다. 흄은 이런 회의적인 시각을 구체적으로 자아, 인과, 귀납, 신에 적용해 이것들에 대한 지식을 완전히 부정한다.
같은 경험론자면서도 로크는 감각 경험이 외부 세계를 표상한다고 생각했고, 버클리는 감각 경험이 곧 실재라고 생각하고 신을 끌어들여 철저한 경험론자가 되지 못했다. 반면에 흄은 감각 경험 외에는 알 수 없다는 신조를 끝까지 지켜 회의론자로 남은 것이다. 재치 있는 말을 많이 남긴 사람으로 유명한 19세기 영국의 성직자 스미스(Sydney Smith, 1771-1845)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버클리 주교는 한 옥타브의 소리로 세계를 파괴했고, 그의 후대에는 마음 외에는 남은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1737년에 흄 선생의 손에 의해 똑같은 운명을 겪게 된다. 이제는 파괴하고 싶어도 파괴할 어떤 것도 남아 있지 않다.
사실 버클리에서 신만 빼면 그게 곧 흄의 철학이 된다. 버클리는 회의론까지 다 간 셈이다. 20세기 초반에 버클리와 흄의 철학을 이어간 철학자들을 현상론자라고 한다. 감각 경험을 현상이라고 하고 우리와 독립적인 대상을 본질이라고 할 때, 이들은 확실한 지식은 현상에 대한 지식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그들에 따르면 물리적 대상이나 과학적 대상에 대한 지식은 현상에 대한 지식으로부터 정의된다. 밀(John S. Mill, 1806-1873)과 에어(Alfred J. Ayer, 1910-1989)가 대표적인 현상론자다.
버클리도 흄도 현상론자도 상식의 견해와는 맞지 않는다. 그러나 철학의 임무가 상식을 보존하는 것은 아니다. 어떤 과학 이론이 상식과 어긋난다고 해서 잘못된 이론이라고 주장하지는 않는다. 마찬가지로 철학 이론의 장점과 결점도 상식과 부합하느냐에 따라 판단할 것이 아니라 다른 확립된 이론과 충돌하지 않는가, 충돌한다면 더 그럴듯하게 설명해낼 수 있는가, 그 이론 내부에 모순은 없는가에 따라 판단해야 할 것이다.
세상에 믿을 놈 하나 없다 / 데카르트 & 버클리 / 최훈 / 김영사 / 2006
'G.Berkeley(1685-1753) > 버클리'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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